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세번째 이야기
교동도 연산군의 유배지를 찾아서 [2016 · 1 · 16 · 눈이 내릴것 같은, 흐리면서 포근한 토요일 / 한국의산천]
토요일 아침 흐린 날씨에 봄날 꽃가루 날리듯 잠시 눈이 날린다. 날씨는 포근하기에 강화도와 교동도를 향해 출발했다
곤룡포 한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뜻 기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우는가
▲ 교동대교를 지나오면 봉소리 ⓒ 2016 한국의산천
이곳 봉소리에 차를 주차시키고 교동도 주요 답사지를 자전거로 돌기 시작했다. 우선 월선포를 향하여 농로길을 타고 고고씽 ~
민간인 통제선 너머에 있는 교동도가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출입이 쉬워지고 가까운 섬이 되었다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구름에 뜬 섬’이라는 뜻의 대운도(戴雲島)가 원래 이름이었다. ‘하늘에 닿을 새’라는 의미로 달을신(達乙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강화 나들길의 교동코스 중 하나인 ‘다을새길’은 옛 지명 달을신의 소리음인 다을새의 이름을 따서 탄생했다.
▲ 일제의 탄압으로 이곳으로 옮겨온 옛 교동교회 ⓒ 2016 한국의산천
1899년 설립된 교동교회는 1933년 상용리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옮겼으며 현재까지 당시 교회 간판과 종탑은 개척 당시의 것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상룡리 예배당 앞에 세워져 있는 종탑과 이 종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들이 전쟁에 쓰려고 배에 싣고 가져가다가 크게 파도가 이는 바람에 도로 걸어놓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종이다.
▲ 기독교 문화유적 반열에 오른 지금의 ‘상룡리 옛 교동교회 예배당'. 남녀가 유별하도록 들어가는 문이 다른 예배당이다 ⓒ 2016 한국의산천
교동교회는 1899년 설립되었고, 처음에는 사랑방 형태의 교회였다.
▲ 월선포 선착장 앞에 새로 지어진 교동교회 ⓒ 2016 한국의산천
떠나라
그대 하루 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 교동읍성 ⓒ 2016 한국의산천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하 하였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있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쌓았다. 이 성은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 본진 주둔지였을 만큼 성세가 대단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성은 폐사지처럼 변했다. 유일하게 남았던 유량루마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버린다. 홍예는 1975년 복원했다.
▲ 비석 받침대 같은데 ... 비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2016 한국의산천
▲ 좌측 측벽에 '南樓(남루)'와 '三道統門 (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이곳이 남문이며 삼도통문이라 교동에는 3도 즉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는 뜻을 추측케해준다.
◀ 교동부 지도(규 10348)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교동도는 지금은 강화군 교동면이지만 조선전기에는 교동현(喬桐縣)이었다. 인조 7년(1629)부터는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로 승격된 곳이다.
강화군에 처음 편입된 것은 고종 32년(1895)이었는데 다음해 다시 교동군(喬桐郡)으로 독립했다가 1914년에 강화군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교동이란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되었고 그 전에는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다.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 달을신(達乙新)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교동 남쪽의 통어영(統禦營)은 경기, 황해, 충청도의 해군을 거느리는 곳이다.
조선후기 지방지도 교동부지도(규10348)를 보면 평야(平野)가 곳곳에 표시되었는데, 지금 교동도를 답사해 보면 넓은 논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지도 가운데에 화개산이 보이고 그 남쪽에 향교가 그려져 있다. 답사가서 볼 수 있는 교동향교가 지도에 등장하는 향교이다.
향교 남쪽에 성곽이 그려졌고 읍성의 북문(北門), 남문(南門), 서문(西門)이 그려졌다. 답사를 가서는 남문 근처에서 옛 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성 안에는 객사 등 관아 건물이 그려졌다. 객사 옆에 영문(營門)이 표시되었는데 군사 기관인 통어영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교동도 남쪽에 그려놓은 송가도(松家島)는 현재 석모도로 불린다.
교동도는 북한과 접한 지역인데 옛 지도에서도 배천(白川), 연안(延安), 풍덕(豊德), 송도(松都, 개성)와 접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계속해서 교동부지로 이동합니다
▲ 교동부(터) ⓒ 2016 한국의산천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남양의 화량진을 옮겨 경기수영이 교동읍내리에 설치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된 것이다.
현 부지에는 돌로 쌓은 계단 20여개가 남아있어 삼도(경기·황해·충청) 수군통어영을 관장하던 본영다운 규모를 엿볼 수 있으며 안해루(현종9년-1667년 부사 구문저가 창건)의 석주가 2개 남아있고, 객사터와 북문과 서문, 동문의 흔적과 성곽의 일부가 제법 남아있다.
당시 교동도호부의 주요 건물(1824년 경기지)
- 근민당 : 부사의 집무실
- 관청 : 도호부의 정무를 살피던 곳
- 이사영 : 중영(中營)
- 운사헌 : 중군(中軍)의 처소
- 열무당 :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
- 순뢰청 : 영기와 감옥을 지키던 군사가 거처하던 곳
- 객사 : 교동부를 찾는 관원들이 기숙하던 곳
▲ 노거수 느티나무 밑둥이 엄청나게 크고 굵은 나무입니다 ⓒ 2015 한국의산천
교동도는 아주 옛날 상고시대에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3개의 떨어진 섬이었다. 교동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화개산 자락에서 보이는 교동도는 그래서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교동도는 섬마을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서울에서 지척이고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가 따랐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이다. 하지만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제 이 섬을 이어주는 대교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흐를것이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이 내일에는 역사가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역사에는 인물이 있고, 행동이 있고, 배경이 있다.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인물과 비교되고, 어제의 행동이 오늘의 행동과 대비되고, 과거의 배경이 현재의 맥락과 중첩된다. 이처럼 모든 역사는 지금의 현실과 통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인물의 행위에 담긴 의미와 당시의 맥락을 관찰하여 현실에 유용하게 참조하는 일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현실인식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올바른 현실인식에 기대어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역사 인물에 대한 지나친 평가절하나 일방적인 찬양 모두 경계해야 할 일이다
▲ 이곳은 본래 1899년 설립된 옛 교동교회터였다고 한다.
우물도 100여년 전 교회가 교인과 학생들을 위해 판 우물이라고 전한다. (한국교회 처음 예배당 저자 구본선 목사)
▲ 우물가에 있는 하트(♡)모양의 돌 ⓒ 2016 한국의산천
장녹수(張綠水, ? ~ 1506년) 조선 연산군의 후궁. 소생으로는 딸 영수(靈壽)가 있다.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첩이었다. 그 때문에 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아야 했으며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결혼해 아들을 낳은 뒤 창기(娼妓)가 되었다.
그리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으나, 가무를 비롯한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하여 그 소문이 자자했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녹수를 입궐시켜 숙원에 봉하고 많은 재물을 집으로 보내주고 노비와 전답, 가옥을 내렸다. 또한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에게 그녀의 청으로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라는 딸까지 낳았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왕이 아무리 노했다가도 녹수만 보면 기뻐서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라는 "실록"의 기록은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으면서 행복해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 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여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그녀의 언니 장복수와 그의 아들을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 놓았으며 형부 김효손에게 함경도 전향 별감 벼슬을 주는 등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였다. 장녹수가 궁 안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
1505년(연산군11) 12월에는 기생인 운평(運平) 옥지화(玉池花)가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 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할 정도였으니 이미 연산군이나 장녹수나 정상이 아니었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연산군이 몰락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연산군이 몰락하자 장녹수는 반정세력에 의해 연산군의 또다른 후궁인 전비, 백견 등과 함께 군기시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시신은 처형된 그자리에 그대로 버려졌고 분노한 군중들이 장녹수와 전비 시신에 돌을 던지면서 "나라의 고혈이 모두 여기로 빨려 들어갔다!"라고 외쳤으며 군중들이 던진 돌에 순식간에 돌무덤이 되어버렸다고 실록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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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를 나와서 대룡시장과 연산군 유배지가 있는 고구리로 이동합니다
▲ 교동에는 개교 100주년이 넘은 초등학교도 있습니다. 깜놀 그 자체입니다 ⓒ 2016 한국의산천
▲ 고구리 연산군 유배지 가는 길 ⓒ 2016 한국의산천
조선왕조 500년 역대 임금들중에서 재위중에 폐위된 2명의 임금이 있으니 제10대 임금 연산군과 제15대 임금 광해군이라 할 수 있다.
두 임금의 공통점은 임금에서 군(君)으로 격하되었다는 점이다.
연산군 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1494~1506 재위).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융.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사망한것은 그 해 11월 6일이었다.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실록에는 '역질로 괴로워하다가 죽었고, 부인 신씨를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연산군이 죽자 장례는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소는 강화도 현지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1512년 12월에 강화도에 홍수가 일어나 묘소가 침식되었고, 왕비였던 신씨는 이 참에 남편의 묘소를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해 줄것을 요청하였고 그 뜻이 받아들여져서 1513년 3월 양주 해촌(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에 연산군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연산군의 비 거창군부인 신씨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의 딸로서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외손녀이기도 한 거창군부인은 연산군 재위시에 왕비로서 정숙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연산군이 폐위당한 이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떠날 때 함께 가기를 원할 정도로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였다.
연산군이 폐위될 당시에 4남 2녀의 자녀가 생존하였는데 10세의 폐세자를 비롯하여 4남은 전부 사사(賜死)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왕자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부왕(父王)인 연산군의 죄로 인하여 그 어린 나이에 전부 죽어야만 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새로지어진 초가와 단장된 길을 따라 연산군 유배지 가기 ⓒ 2016 한국의산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지 않았다면...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연산군일기』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쫓겨난 군주들에 대해 서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료의 편파성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반인 재위 3년(1497) 마치 자신에 대한 후대의 비난을 예언한 듯한 말을 남긴다.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여러 역사책에 써 놓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3년 6월 5일).”
연산군의 흔적 지우기는 그가 쫓겨난 직후 시작됐다. 연산군은 재위 12년(1506) 9월 2일에 쫓겨나는데 여드레 후인 9월 10일 정승 및 김감(金勘)이 중종에게 “연산군이 스스로 지은 시집(自製詩集)과 실록각(實錄閣)에 소장된 ‘경서문(警誓文)’을 다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건의했다. 연산군의 흔적을 지우자는 주청인데, 중종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날로 불태워졌다. 김감이 이런 주청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경서문’이 자신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경서문’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한 달 전인 재위 12년(1506) 7월 29일 바쳐졌다. 경서문은 연산군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영의정 유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올렸지만 ‘경서문’에 백관의 이름이 다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23명의 이름만 올라갔는데, 중종반정 때 23명 중 화를 당한 인물은 단 세 명뿐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그의 동생 형조판서 신수영(愼守英)과 좌참찬 임사홍(任士洪)만 반정 세력에 살해됐다. 나머지 스무 명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스무 명 전원이 중종을 추대한 공으로 정국(靖國) 공신에 책봉된다.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을 제외하면 정변이 일어나리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반정 당일 밤 말을 갈아탄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이 폐출된 지 20여 일 되는 중종 1년(1506) 9월 24일. 빈청(賓廳)으로 대신들이 모였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합동으로 연산군의 아들 문제를 주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하여 연산군의 아들 사형제는 9월 24일 당일로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아래 계속)
연산군 이륭(李륭)처럼 축복 속에 태어난 경우도 찾기 어렵다. 성종 7년(1476) 11월 그가 태어나자 도승지 현석규(玄碩圭) 등은 “개국 이후 문종과 예종은 모두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시어서 오늘 같은 경사는 있지 않았습니다”고 축하했다. 단종을 제외하고 이륭 만이 궐내에서 탄생한 것이다.
성종은 재위 9년(1478) 7월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에게 말 1필을 내려줬는데『성종실록』이 “강희맹의 집에서 자라던 원자가 항상 준마(駿馬) 보기를 좋아하므로 내려준 것이다”고 쓴 것처럼 원자를 위한 것이었다. 강희맹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외손자로서 세종의 조카였다. 세 살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연산군을 성종은 ‘학자(學者) 군주’로 키우고 싶었다. 성종은 재위 23년(1492) 1월 승정원에 직접 전교를 내려 “세자가 지금 17세지만 문리(文理)를 해득하지 못해 내가 심히 근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성종은 세자의 학습 순서를 바꾸었다. 동부승지 조위(曺偉)가 성종 23년 “『사기』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합니다”며 역사서를 먼저 읽게 하자고 제안했고, 성종도 동의했다.(『성종실록』 23년 1월 29일)
그러나 이후에도 연산군의 학문이 진취했다는 기록은 없고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학습은 지지부진했다. 연산군은 시(詩)를 좋아한 반면 경전(經典)을 싫어했는데,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국왕으로는 큰 결점이었다.
연산군은 1494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했으나 왜 유교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왕이 된 이후 학문을 더욱 등한시했다.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서도 읽지 않다 보니 국왕 자리가 지닌 고도의 정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연산군의 무지를 파고든 사건이 재위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에서 ‘유자광은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꺼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추관(秋官)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칭해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은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세 사관(史官)을 대역죄로 능지처사했는데,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자신을 이용해 정적인 사림 세력을 제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사림이 왕권 강화와 훈구 세력의 약화에 도움이 되는 세력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은 크게 강해졌지만 훈구라는 바다에 떠 있는 왕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화된 왕권만을 바라보았다. (아래 계속)
연산군은 국왕과 사대부가 공동 통치한다는 신흥사대부들의 건국이념을 부정했다. 연산군이 사대부 계급의 공동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 대해서도 폭군이었는가? 사관은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고 비판한다. 중종 즉위일 『중종실록』은 민가 철거를 폭정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연산군은 실제로 민가를 철거했다. 그러나 철거 대상은 국법에서 주택 건축을 금하고 있는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즉 30m 이내의 주택들이었다. 게다가 강제 철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궁궐 담 밖의 집 건축은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법을 돌아보지 않고 집을 지었으니 마땅히 법으로 논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금 도리어 빈 땅을 떼어 주었다”라고 대토(代土)까지 마련해 주었다. 게다가 “집을 비운 백성들이 편하게 거주할 곳(安接處)을 마련해 아뢰어라”라고 명해서 병조판서 강귀손(姜龜孫)은 명에 따라 보상책을 보고했다. 일정액의 보상금과 대토,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봄까지 철거를 연기한 것을 폭정(暴政)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래도 대간에서 계속 반대하자 연산군은 속내를 드러냈다. “집을 헐리고 원망하며 근심하는 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조사(朝士:벼슬아치)들도 법을 범하면서 집을 지은 자가 많으니 헌부(憲府:사헌부)에서 당연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도리어 말을 하는 것이냐?(『연산군일기』9년 11월 9일)” 사헌부가 백성들을 빙자하지만 속으론 벼슬아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연산군의 민가 철거는 백성들보다는 벼슬아치들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이궁(離宮:행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동북 4고을, 서남 7고을 등 모두 11고을의 백성을 내쫓은 듯이 비판했지만 그 숫자는 모두 500여 호에 불과했다. 이궁을 설치하려 한 이유에 대해 연산군은 “무신년(성종 29년)에 대비께서 편찮으셔서 부득이 인가로 피어(避御)하셨으니 어찌 국가의 체모에 합당하겠는가?”라면서 “궐내에 온역(瘟疫:전염병)이라도 발생하면 옮겨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하고 또 사대부일지라도 집 몇 채를 가졌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어찌 별궁(別宮)을 만들 수 없겠는가?(『연산군일기』 10년 7월 28일)”라고 말했다. 또한 이때 만들려던 이궁의 규모는 ‘큰 집 50칸(大家五十間)’이었으니 99칸 민간 부호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소박한 궁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50칸짜리 이궁도 짓지 못했지만 11고을 백성들을 다 내몰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근심하고 사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하고 가짜 충성을 경계했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붓을 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희대의 폭군으로 몰린 것이다.
연산군이 재위 11년(1505) “모든 도(道)의 고을들은 모두 운평을 두라”고 말한 것에서 운평은 지방 관아 소속 음악인들임을 알 수 있다. 운평 중 음악 실력이 뛰어나 서울로 뽑혀 올라온 이들이 흥청이었다. 흥청악·운평악·광희악을 통칭 삼악(三樂)이라고 불렀다. 『경국대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선상기는 여기(女妓) 150명, 연화대(蓮花臺:가무극 배우) 10명, 여의(女醫)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뽑힌 선상기 중 뛰어난 음악인이 흥청이다.『연산군일기』는 재위 12년(1506) 3월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했다고 써서 흥청악이 1만 명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11년 4월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라고 묻자 장악원은 ‘정원 300명 중 93명을 채웠고 207인을 못 채웠다’고 답했다. 93명을 겨우 채운 흥청이 11개월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니 이 역시 사관의 창작이다. 삼악(三樂) 모두가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흥청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했다. (아래 계속)
『연산군일기』와『중종실록』은 연산군을 사냥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의 본질은 연산군의 숭무(崇武)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2년(1496) 4월 친시(親試)에서 직접 낸 책문(策問)으로 “우리나라는 남쪽으로 섬 오랑캐와 이웃이고 북쪽으로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접했다”면서 그 대책을 물었다. 연산군 5년(1499) 4, 5월에는 함경도 삼수군(三水郡)과 평안도 벽동진(碧潼鎭) 등 3개 지역을 습격해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우마와 백성을 사로잡아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즉각 대신들과 의논해 정벌을 결정하고 5월 12일 우의정 성준(成俊)과 좌찬성 이극균을 서정장수(西征將帥)로 임명해 2만 병력을 준비시켰다. 그러자 5월 14일 홍문관 부제학 최진(崔璡)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천문(天文:혜성 출현)이 변하는 변괴가 발생한 데다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으니 정벌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혜성과 가뭄은 모두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이므로 근신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은 “서정의 거사는 진실로 농사의 풍흉을 보아야 하지만 죽고 사로잡힌 우리 백성이 너무 많으니 지금 만약 정벌하여 많이 참획(斬獲:목을 베고 사로잡음)하면 저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침략을 중지할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5월 17일)”고 강행 의사를 밝혔다. 연산군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려 “오직 변방 백성이 피살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에 분한(忿恨)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서정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최진 등은 여진족이 습격한 것은 하늘이 연산군에게 경고한 것이므로 근신해야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습격에 대한 응징은 물론 사로잡혀 간 백성의 귀환 대책은 찾을 수 없었다. 변경에 사는 백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투였다. ( 아래 계속)
연산군은 “지금 서정은 오직 백성을 사랑(愛民)하기 때문이다”고 재차 호소했으나 대간에서 극심하게 반대하자 대신들도 점차 주저하게 되면서 서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해 9월 4일 여진족은 다시 평안도 이산(理山)의 산양회진(山羊會鎭)을 공격해 100여 명을 잡아가고, 또 벽동군 아이진(阿耳鎭)을 습격해 갑사(甲士) 김득광(金得光) 등 9인과 말 12필을 약탈해 갔다. 연산군은 통탄했다. 연산군은 “저들이 오늘 몇 사람을 잡아가고 내일도 몇 사람을 잡아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구경하며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내년에 정벌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 전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강무(講武)에 나서기로 했다.
강무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이었다. 그러자 좌참찬 홍귀달(洪貴達)이 “이름을 강무라 하지만 실은 사냥하는 것입니다”면서 “선왕(先王)의 적자(赤子)들이 온통 적에게 살해되고 잡혀갔는데 그 자제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사냥해서 그 제물로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선왕·선후(先后)께서 어찌 안심하고 이를 흠향하겠습니까?(『연산군일기』 5년 9월 16일)”라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재위 7년(1501) 10월 “근래 오랫동안 군사 사열(査閱)을 폐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해이해질까 두려워 사냥(打圍)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연산군에게 사냥은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강무든 사냥이든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오직 임금의 근신만 요구했다.
재위 6년이 되자 서정 반대가 잇따랐다. 대간뿐 아니라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같은 대신들과 도원수 성준까지 반대론에 가세했다. 서정을 하지 않으려면 방어 태세라도 잘 갖추어야 했다. 연산군 7년(1501) 5월 평안도 절도사 김윤제(金允濟)가 “금년 도내가 약간 풍작이 들었으니, 청컨대 먼저 이산에 장성을 쌓아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야 합니다”고 치계(馳啓)했다. 산양회진 등이 있어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이산에 장성을 쌓자는 말이었다. 이때 장성 축성에 찬성하면서 좌의정 성준이 한 말은 대간들이 왜 축성에도 반대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조정 신하들은 남쪽 사람이 많은데, 인부를 뽑아 부역을 시키면 그 폐단을 받을 것을 꺼려 극력 저지하는 것입니다.”(『연산군일기』 7년 5월 25일) 성준의 말에 홍문관에서는 “성준이 ‘조정에는 남도 사람이 많아서 자기 집의 종이 부역에 나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 정지할 것을 청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입니다”고 반박했다. 성준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고 피혐하자 연산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홍문관원을 국문했다. 그 전에도 축성 이야기가 나오면 대간에서는 무조건 반대했는데 연산군은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가 그 과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연산군일기』5년 7월 12일)”고 꾸짖기도 했다. 연산군은 군사를 백안시하는 이런 문풍(文風)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문신들은 병역의 의무 대신 군포(軍布)를 받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실시해 조선의 국방력을 무력화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은 이때 예고된 것이었다. 연산군이 “만약 무사(武事)를 미리 연습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하면 붓을 쥐고 대응하겠는가?(『연산군일기』7년 10월 2일)”라고 말한 것이 90여 년 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아래 계속)
성종은 왕비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시킨 후 재위 10년(1479)에는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13년(1482)에는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게 했다. 연산군은 언제 모친의 비극을 알았을까? 조선 중기 김육(金堉)이 편찬한『기묘록(己卯錄)』은 연산군이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았다는 것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고 나서 복수에 나선 사건이 아니었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 정치구조를 바꾸려는 의도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 3월 엄씨와 정씨를 타살한 것이 시발로 알려져 있었지만 재위 9년 9월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 때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이 내린 회배주(回盃酒)를 반 이상 엎질러 연산군의 옷을 적신 작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이세좌는 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국문 끝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이세좌를 이듬해 3월 석방했으나 그달 11일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이 세자빈 간택을 위한 간택령 때 손녀가 병이 있다면서 “지금 비록 입궐하라는 명이 있어도 입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모는 한편 그해 3월 24일 승정원에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승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병합해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공신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아무도 그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3월 30일 “이세좌는 선왕조 때 큰일을 당했을 때 극력 간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리고 홍귀달도 그해 6월 교수형에 처했다. ‘선왕조 때 큰일’이란 물론 모후에게 사약을 들고 간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세좌는 부친 이극감뿐만 아니라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등의 백·숙부가 모두 봉군(封君)된 거대 공신 가문이었다. 연산군은 나아가 공신들의 세력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아래 계속)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5월 7일 공신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차지했다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개국 이후 여러 공신의 공적을 경중으로 나누어 아뢰라’고 명했다. 사관은 연산군이 연락(宴樂)에 빠져 돈이 부족해지자 ‘여러 공신의 노비·전지를 도로 거두려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연락 때문에 돈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공신들의 물적 기반을 해체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산군은 5월 10일 여러 『공신초록(功臣抄錄)』을 내리면서 “내 생각으로는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은 그 노비와 전토를 회수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공신들의 세습 노비와 토지들을 기한을 정해 환수하겠다는 뜻이었다. 법 제정을 통한 일괄 환수가 불가능해지자 연산군이 선택한 것이 개별적 재산 몰수였다. 연산군은 폐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윤필상·이극균·성준·권주 등 생존 대신들을 사형시키고,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 등 사망한 대신들은 부관참시 했는데, 이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재산 몰수가 뒤따랐다.
이보다 앞선 재위 9년(1503) 6월에는 환관 전균(田畇)이 죽자 그의 노비 109명을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게 하고 20명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에게서 받은 것이었으나 사패(賜牌)에 ‘영원히 상속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관청(公)에 귀속시킨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 처리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재위 10년 5월 9일 “전일 적몰한 노비를 3등분으로 나누어 2분은 내수사에서 가려 차지하고, 1분은 각 관사에 나누어 주라”는 하교가 이를 말해 준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라는 것은 결국 연산군이 그만큼 갖겠다는 뜻이었다. 신하들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옥사를 확대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회나 정창손처럼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부관참시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지사였다.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 우의정 김수동이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인심을 잃은 결정적 이유가 재산 몰수에 있었다. 세조나 예종은 정적(政敵)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연산군은 자신이 차지했다.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공신 집단을 해체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대체세력을 찾아야 했는데 이 경우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0년 9월 느닷없이 무오사화 때 귀양 간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에게는 성리학에 입각해 간쟁하는 사림도 왕권에 항거하는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미리 몸을 피한 정희량(鄭希良)을 제외하고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공신들은 물론 사림까지 적으로 돌렸으니 그를 보호할 세력이 없었다. 연산군이 공신들의 자리에 사림을 배치하고 공신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마저 적으로 삼은 그가 역사상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은 사림이 사필(史筆)을 쥔 이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90호 2008년 11월 30일, 제91호 2008년 12월 7일, 제92호 2008년 12월 14일, 제93호 2008년 12월 21일, 제94호 2008년 12월 28일, 제95호 2009년 1월 4일에서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 화개산 북사면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 2016 한국의산천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지금 새로 지어진 초가 주변에도 가시가 뾰족한 탱자나무를 심어 놓았다
교동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강화도 검문소에 도착하면 해병대 초병에게 '교동지역 임시출입증'을 반납합니다
이제는 교동도에 연륙교가 놓이게 되어서 민통선이라는 제약은 있지만 그래도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한때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던 다리였고, 또 한때는 조선 삼도수군의 심장부였던 교동은 이제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인하여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시간의 멈춤듯한 공간과 역사의 심판속에 광란의 일생을 마친 연산군의 행적들을 돌아보며 산다는것의 정답은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교동대교를 건너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연산군 금표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 ⓒ 2016 한국의산천
연산군시대 금표비는 1995년 금천군 묘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문화재자료 제 88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서울 주변 지역을 왕의 사냥터, 유흥지로 지정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비를 세웠는데, <연산군 일기>에는 기록이 보이나 실제 연산군의 금표비가 발굴된 곳은 고양시 대자동이 유일하다. 따라서 연산군 금표비를 통해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조선 전기의 역동적인 역사 전개 과정과 정치 상황을 생동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연산군 시대에 만들어진 이 비는,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연산군은 1494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왕으로 있으면서 성균관 유생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모아 유흥장을 차리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고, 민간인이 한글로 연산군의 행동을 문제삼는 글을 올리자 이를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 등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로 결국 중종반정으로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후 강화도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하고 있는 연산군시대 금표비 ⓒ 2016 한국의산천
▲ 대명리 포구식당에서 삼식이 매운탕으로 식사 ⓒ 201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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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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