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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12. 석주 권필 선생 유허비

by 한국의산천 2016. 1. 16.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두번째 이야기

석주 권필선생 유허비를 찾아서 [2016 · 1 · 16 · 눈이 내릴것 같은, 흐리면서 포근한 토요일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시 한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 권필

 

교동도 가는 길에 찾아 본 석주 권필선생 유허비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유허비와 함께 강화도 고려산 기슭 오류내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하도 저수지 옆에 남아 있다.

그가 초당을 세웠던 곳으로 시인이 원래 세상에 별 뜻이 없어 강화에 은둔해 있을 때, 그의 문명을 듣고 찾아온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초당 터이다.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 권필 유허비 찾아가는 오류내길 ⓒ 2016 한국의산천

 

400년 전인 1612년(광해군 4년) 44세로 세상을 떠난 석주 권필(1569-1612).

그가 살다 간 선조~ 광해군 연간은 임진왜란과 어지러운 정치로 편할 날이 없던 난세지만, 문학사로 보면 조선 한문학의 절정기여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린다.

권필은 이 목릉 문단에서 동악 이안눌과 함께 조선 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시인이다. 당대에 이미 시의 대가를 넘어선 정종(正宗ㆍ으뜸)이라는 평을 들었다

 

▲ 마을 끝에 있는 석주 권필선생 유허비. ⓒ 2016 한국의산천

위치 :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892 오류내길 (향토유적 제 27 호) 

  

한편의 詩로 죽음도 불사한 야인으로 호방하고 강직한 재야 시인의 삶

 

  권필은 일찍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였으나, 반골 기질로 인하여 과거를 통해 관인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그는 시와 술에 빠져 야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세태를 풍자한 궁유시(宮柳詩)는 그의 반골기질에서 나온 비판과 저항정신의 산물이다.

 

  권필 (權韠 1569~1612)
본관 안동. 자 여장. 호 석주  권필의 자(字)는 여장(汝章), 호(號)는 석주(石洲), 시인,  소설가.

권필은 허균과 같은 해인 1569년(선조 2)에 서울 마포에서 서울 마포에서 조선왕조 개국공신인 권근의 6대손 7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권벽(權擘)은 과거에 합격하여 이이(李珥)의 천거로 사관에 기용, 중종실록·인종실록·명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조용히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문장이 탁월했다'고 당시 사람들이 평가했다. 권필은 이런 부친 밑에서 많은 정신적 영향력을 받으며 성장했다. 19살에 진사 초시와 복시에서 계속해서 장원을 하였으나, 거슬리는 글자가 있다는 트집을 잡혀 무효가 되었다. 그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권필은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송강의 풍모를 사모하여, 송강이 평안북도 강계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을 때, 동악(東岳) 이안눌과 같이 정철을 찾아가는 지극한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때 송강이 몹시 반가워하며, "천상에서 내려온 두 신선을 보게 되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신선 같은 풍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아이를 가르치는 그 자리도 "띠를매고 예조에 나가 인사하는것이 상례"라는 말을 듣고 "한두말의 녹을 위해 허리를 굽히는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면서 이를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강화부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모아 가르쳤고, 이정구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 때는 주전론을 주장하였고, 광해군 초에 권신 이이첨이 교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광해군 비 유씨의 아우 유희분 등 척족들의 방종을 궁류시로써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로하여  詩의 출처를 찾던 중, 광해군 4년(1612) 무옥(誣事)에 연루된 조수륜의 집을 수색하다가 이 시를 발견되어 친국 받은 뒤 유배되었다.  

 

▲ 마을 길이 끝나는 끝에 서있는 유허비 ⓒ 2016 한국의산천

  권필이 살던 강화도 오류내 언덕에 권필의 4대손인 강화유수 권적이 세운 비석하나가 쓸쓸히 서있다.

석주 권필선생은 조선 중기의 탁월한 시인으로서 한때 강화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며 시화를 나눈 인연을 갖고 있다.

유허비는 대리석으로 전면에 "석주권선생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궁유시(宮柳詩)〉와 〈충주석(忠州石)〉은 그 대표적인 풍자시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광해군 당시 광해군의 처남이었던 유희분은 이이첨과 함께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임금의 외척이었다. 광해군 3년(1611) 진사 임숙영이 책문시(策問試)에서 정사가 올바로 행해지지 않는다며 당시의 정치를 풍자하고 권세 있는 가문의 전횡(광해의 외척들 특히 왕비 柳씨 집안, 유희분 등)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말썽을 빚었다. 그때 시험관들은 이 사실을 두려워하여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때 광해군이 이 글을 직접 보고 몹시 화를 내며 임숙영을 낙방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 정도의 이유로 과거응시자를 낙방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반대했다. 그해 여름이 다 지나도록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지 못하다가 가을에야 비로소 그대로 발표하도록 허락했다.

  권필은 임숙영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서 빼리라는 소문을 듣고선 분개하여  '더러운 시대엔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던 권필은 침묵하지 않고 아래와 같은 칠언절구시(七言絶句詩) 한 편을 부당함을 풍자하며 퍼뜨렸다. 이것이 바로 권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궁유시'이다.

 

권필의 궁류시(宮柳詩)

 

宮柳靑靑花亂飛  궁안 버들은 푸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고
滿城冠蓋媚春暉  성안 가득한 벼슬아치(冠蓋)들은 봄빛에 아부를 하네.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서는 승평락(昇平樂)을 축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  누가 바르고 위험한 말이 한갓 선비(布衣)에게서 나오게 했나

 

  사람들은 여기서 궁류란 유희분(버들 류씨)을 빗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권력 남용을 질타한 것이다.그러나 유희분은 권필을 모함하려 왕비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광해는 노여워했고, 드디어 광해 4년(1612년, 44세) 권필은 잡혀 들어갔다.

 

  권필은 변명하기를 그것은 오히려 임숙영이 포의(벼슬 없는 사람)로서 위험한 말을 한 것을 읊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권필을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여러 대신과 좌의정이었던 오성 이항복 대감이 평소 권필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강력히 간언했기에 죽음을 면하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몸이 약했던 권필은 들것에 실려 도성문을 나섰다가 사람들이 슬퍼하며 준 술을 마시고는 누웠다가 고문에 의한 장독(杖毒) 때문에 죽고 말았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권필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때 권필의 나이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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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6년 여의 세월이 흐른 1618년 8월26일, 서울의 서쪽 저자거리에서 허균이 처형됐다. 본인이 승복하지 않아 마지막 판결문도 없었지만 역모죄로 다스려진 까닭에 그의 머리는 막대에 매달려 거리에 내걸렸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고, 절친한 벗이었으며,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비극적 최후가 말해 주듯 횡포한 봉건 지배체제로부터 가혹하게 제거됐다는 점도 비슷했다. 행적과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누구보다 체제의 아웃사이더 또는 저항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1623년 인조반정후 인조 1년 (4월 11일)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원을 풀어주었다. 또한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운암사에 배향되었다.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지금까지 전한다. 

 

주생전

1593년(선조 26) 권필(權 億)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한문소설. 1권 1책. 필사본. 작품의 말미에 지은이가 봄에 송도에 갔다가 역관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주생을 만나 필담으로 그의 행적을 듣고 돌아와 서술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필은 병법책을 늘 가까이 했다. 그러나 칼을 들고 나라에 충성 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잘 벼린 칼도 칼집에 있으면 세월이 한탄스러운지도 모른다. 권력 다툼이 싫어 벼슬아치 세계를 멀리 했지만 장부로 태어나 한촌에서 늙어 가는 것이 그로서도 한스러웠을 것이다.

 

독병법유감(讀兵法有感) - 권필 -

 

움추린 채로 영웅은 늙어가고

아까운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네

장부의 한평생 석 자 칼은 잡았지만

임금의 은혜는 어떻게 갚으려나  

 

그의 시를 조선 시의 최고로 치는 사람이 많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도 '우리 시가에서 오직 성당(盛唐, 당나라 시절에 시가 융성했던 시기)의 바른 소리를 얻었다'고 평했다. 

 

 타고난 강골의 평생 야인이신 석주 권필선생의 시 하나 더  

 

忠州石效白樂天  충주석 백낙천을 본떠서  

 

忠州美石如琉璃    충주 땅 오석(烏石)은 유리처럼 고와서 

千人劚出萬牛移     수천명이 찍어내어 수만 바리 실어내네 

爲問移石向何處    어디로 실어가냐 물어봤더니

去作勢家神道碑    실어가서 세도가집 신도비가 된다네

神道之碑誰所銘    신도비의 비문은 누가 새긴 것인가요 

筆力倔强文法奇    필력도 장쾌하고 문장 솜씨도 대단하데요

皆言此公              한결같이 빗돌에 쓰인 말 

在世日                “이 분이 세상에 계실 때엔

天姿學業超等夷    인품과 학문이 워낙 뛰어나서 

事君忠且直           충성과 정직으로 임금을 섬기고 

居家孝且慈           효도와 자애로 가정을 다스렸답니다 

門前絶賄賂           문 앞에는 뇌물바리가 얼씬도 못했고 

庫裏無財貲           곳간에는 한 톨 재물도 없었고 

言能爲世法           말은 능히 세상의 법도가 되었고 

行足爲人師           행동은 족히 사람들의 스승이 되었다오 

平生進退間           벼슬을 하든 물러나 쉬든 한 평생 살아오신 길이 

無一不合宜           어느 하나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답니다

所以垂顯刻           그래서 이렇게 자랑스럽게 빗돌에 새겨서 

永永無磷緇           길이길이 변하지 않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此言信不信           어느 뉘 이 말을 믿든 말든 

他人知不知           남들이야 그것을 알든 말든 

遂令忠州山上石    충줏골 빗돌산은 

日銷月鑠今無遺    날로 깨고 달로 쪼아 인제 바닥이 났구나 

天生頑物幸無口    하늘이 돌의 입을 안만들기 다행이지 

使石有口應有辭    돌에게 입이 있었더라면 할 말이 참 많았으리라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그의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광해는 유배살이를 하다가 후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지막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로 글을 접도록 하자.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
곤륜산(崑崙山) 상상봉(上上峰)에 낙락장송 (落落長松) 되었다가
군산(群山)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곧고 곧은 선비님께서 가신지 400여년이 지난 포근한 겨울에 ... -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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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산성 공원에 서있는 권필선생 시비 ⓒ 201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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