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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11. 조해루 월곶돈대 연미정

by 한국의산천 2016. 1. 9.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한번째 이야기

 

조해루 월곳돈대 연미정 돌아보기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 철종외가와 잠저지 용흥궁, 강화산성 규장각 둘러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296

  

▲ 월곶돈대 ⓒ 2016 한국의산천

연미정은 월곶진(조해루)에서 관할하던 월곶돈대 안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강화도에는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이후 대부분 무너지고 헐렸지만 지금은 대부분 복원된 상태다.

둥그렇게 성곽을 쌓아놓은 월곶돈대 안에는 연미정(燕尾亭)이라 불리는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연미정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월곶돈대에 들어서니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와 염하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가는 모습이 바로 코앞에 아름답게 바라보인다. 그 너머로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연미정(燕尾亭) : 인천유형문화재 제24호,

지정연도: 1995. 3. 1,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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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미정을 둘러싸고 있는 월곶돈대의 남쪽 문이 바로 조해루이다 ⓒ 2016 한국의산천


  2003년 사적 제452호로 지정된 강화외성은 1233년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쌓은 성으로 둘레는 23km에 이른다.

강화외성 내 문루(門樓)인 조해루는 최근에 다시 축성하였으며 조선 숙종 시절인 1679년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강화외성에는 조해루와 복파루 진해루 참경루 공조루 안해루 등 모두 6곳의 문루가 있었다.  

 

 

 

 

 

 

▲ 연미정에서 보이는 유도 ⓒ 2016 한국의산천

가운데 섬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이는곳은 북한땅이며 오른쪽에 보이는 땅은 남한땅 김포이다

 

옛날에는 세곡(稅穀)을 실은 조운선은 이 앞을 지나 마포로 향해야 했다. 한양으로 들어갈 선박들이 이 앞에서 모여 쉬었다가 만조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진 물줄기는 연미정 앞 유도(留島)에서 한줄기는 남쪽으로 갑곶나루로 흘러가고 또 한줄기는 서쪽으로는 승천포로 흘러가는 중심에 연미정(燕尾亭)이 자리 잡고 있다. 물줄기가 나뉘어 흐르는 형세가 제비꼬리를 연상하기에 연미정이라 지칭했다.

 

  물줄기의 중심에 위치하여 사방이 훤히 트였기에 "빗장처럼 한양을 보호하고 적을 막아내는 형세가 이 연미정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며 강화 유수 김로진이 기문(記文)을 남기기도 했다

 

 이곳은 강화로 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항몽 시기부터 군사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이곳에서 북한 개풍 땅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인다. 또한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당시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역사 현장이다.

 

▲ 강화8경에 속한 연미정 ⓒ 2016 한국의산천

강화8경 : 갑곶돈대 / 광성보 / 초지진 / 마니산 / 보문사 / 연미정 / 적석사 /  전등사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최초 건립연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시련을 겪고 파손된 것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팔각지붕의 겹처마로 돌기둥 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건축한 민도리집이다. 임진강과 염하강의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하여 연미정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파주, 김포시와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연미정은 군사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나 2008년 2월 12일 민간인 통제선이 뒤로 조금 물러나며 언제던지 출입이 가능한 지녁이 되었다.

 

▲ 월곶 돈대 내에 자리한 연미정 ⓒ 2016 한국의산천

  

  연미정은 그 위에 올라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언제 처음 연미정을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미정 주변에는 500년된 노거수 느티나무가 당당하게 둘러 서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황형(黃衡, 1459~1520)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 한다. 

 

겨울나무

 

           - 이 수 인  
 

나무도 생각을 한다

벗어버린 허전함에 눈물이 난다

빈가지 세워  올려다 본 회색빛 바다

구름 몇 점 잔잔한   파도를 타고

 

아직 남겨진 몇 개의 사연들은 

미련 없이 저 자유의 바다로 보내리라

 

나무는 제 몸에서 뻗어나간

많은 가지와  그 가지에서 피어나는

꽃과 이파리 열매를  위하여

그 깊고 차가운 어둠 속을 향해 치열하게 

뿌리를 내려가며  고독의 길을 끝없이 간다

 

인생 그 누구라도 겨울나무처럼   

홀로된 외로움 벗어버린 부끄러움에

울어보지 않았으리

수없이 많은 사연의 가지를 지니고

여러 갈래의 뿌리를 두르고도 

단 하나의 심장으로만 살아가지 않는가 

      

빈 가지마다  눈꽃  피어났던 자리에

봉긋 봉긋 솟아나는 봄의 푸르름도     

겨울가면 반드시  온다는 진리이기 보다

시련 뒤에  찾아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겨울나무는  벌써 알고 있다

 

▲ 북한땅이 눈앞에 보인다 ⓒ 2016 한국의산천

 

정묘호란과 강화조약

 

호란 (오랑케 호: 胡  / 난리 난 亂)

 

1627년 1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청나라의 전신)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계속해서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1616년 만주에서 세워진 후금은 명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명나라와의 무역이 중단되며 생필품 조달에 극심한 어려움과 가뭄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동안 광해군의 명과의 중립 외교 덕분에 조선은 한동안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반정(1623년)이 일어나 광해군이 임금에서 폐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와 가까워지려는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나라를 지원하며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과 군사들을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배금 정책은 결국 후금을 자극하였고, 조선이 이괄의 난으로 국방이 허술해지자 후금은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해 왔다. 

 

  정묘호란은 바로 이런 이유와 후금의 경제적 위기를 타계하고 경제적 원조를 조선으로 부터 강제적으로 얻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된 공격이였다. 후금의 원래 의도는 조선의 정벌이 아니라 화친을 통한 경제적 이득의 강제 징수에 있었고 복속이나 신종관계도 아닌 "명과의 관계를 끊고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으라" 는 형식적인 주문을 하며 경제적인 요구를 원하였던 것이다. 

 

  황주까지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조선은 매년 목면 1만 5천필 , 면주 2백필 , 백저포 250필을 받치는 선에서 3월 3일 강화조약(정묘조약)을 맺고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삼전도 치욕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선과 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을 포함하여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0만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등으로 말미암아 곧이어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항복의 역사를 남기고 만다.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명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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