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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10. 홍예문 내동성공회교회 랜디스 청학동외국인묘지

by 한국의산천 2016. 1. 7.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번째 이야기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홍예문, 청학동 외국인묘지

 

오늘은

남을 위한 삶과 봉사와 배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답사를 했다.

이 세상에 사랑과 봉사와 용서로 못 넘을 벽은 없다  

 

▲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에 기여한 공이 대단하신 분들이 많다. 아펜젤러, 맥아더 장군, 코르페신부, 랜디스 박사 등등... ⓒ 2016 한국의산천  

 

위 사진의 고요한 주교의 이름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이틀만에(?)간단하게 나왔다  

비숍 칼레 요한 코르페 ---> 뒤에서 부터 읽으면 고르페 요한... 한 글자식 생략하면 고(Co/ 요/ 한(John)  

 

※ 랜디스 박사는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인천에는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곳이 많다

  지금부터 130년전 근대 개항기 즉 1883년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건축물, 시설 및 제도 등 근대문물과 문화가 들어오면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조선에서의 각종 이권 사업 교섭을 위한 영사관, 해관, 무역 관계자로부터 선교사, 여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방문했다.  

  

  이때 선교사와 함께 여러 종교도 함께 물 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오늘 답사지 대한 성공회 내동교회 역시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성공회 건물이다   

1890년 8월, 영국 해군 종군 신부이던 존 코르페(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이름 고요한) 주교와 ​의사 랜디스(Dr. Eli Barr Landis : 한국이름 남시득)가 제물포 항으로 들어왔다. 인천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유지로서 만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포교지였던 것이다.

 

참고 : 인천의 주요교회 최초 설립 연도

1889년 천주교 답동성당 설립 (빌렘 신부)

1891년 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설립 ( 고요한 주교 )

1900년 성공회 강화 관청리 교회 설립 (고요한 주교)

1901년 감리교 내리교회(웨슬리 예배당) 설립(헨리 아펜젤러)

1906년 성공회 강화 온수리 교회 설립 ( 조마 주교) 

 

▲ 지나는 오솔길에 갈꽃이 한창인데 갈꽃잎 사이마다 님의 얼굴 맺혀있네 ⓒ 2016 한국의산천

 

귀향      -  곽 성삼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험한 산 고개넘어 끝없는 나그네길 이제 쉴 곳 찾으리라
서산의 해 뉘엇 뉘엇 갈 길을 재촉하네 저 눈물의 언덕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지나는 오솔길에 갈꽃이 한창인데 갈꽃잎 사이마다 님의 얼굴 맺혀있네
길 읺은 철새처럼 방황의 길목에서 지쳐진 내 영혼 저 하늘 친구삼네

사랑하는 사람들아 나 초저녁 별이되리 내 영혼 쉴때까지 나 소망을 노래하리

 

▲ 날씨가 제법 춥다. 어여가자 ⓒ 2016 한국의산천

 

집으로 가는 길

                                  -   신 경 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 제물진두 순교성지 ⓒ 2016 한국의산천  

 

계속해서 홍예문과 성공회 내동교회 청학동 외국인묘지를 찾아갑니다

 

그들의 활동 영역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아펜젤러, 존스, 랜디스는 종교, 의료 및 교육활동을 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인천항에 입국해 내리교회,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고, 언더우드, 존스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했다. 

 

  인천내리교회의 존스 목사는 1892년 4월 최초의 사립 교육기관인 영화학교(영화는 ‘영생’과 ‘교화’에서 따왔다)를 인천에 개설했고, 최초의 영문 잡지  발간과 편집에도 관여했으며, 하와이 이민사업에도 관계했다. 성공회 의료선교사인 랜디스 역시 중구 내동에 인천 최초의 성누가병원을 건립하고,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약대인'이라 불렸으며, 영어학교와 고아원도 운영했다.

 

  종교 활동 외에, 외교관이자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이나 우리탕 등 영사관이나 해관 등 공공기관에서 활동했던 인물, 타운센드, 데쉴러, 모스, 칼 발트, 존스톤 등 중개무역이나 각종 이권사업, 상업 활동을 했던 사업가, 그리고 사바찐 등 건축이나 기반시설 마련을 위해 와 있던 인물들이 있다. 

 

  특히, 알렌의 경우는 갑신정변때 민영익을 치료했던 계기로 왕실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됐으며, 최초의 근대식병원인 제중원 설립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특히, 데쉴러, 모스, 타운센드 등은 알렌의 후원아래 인천을 무대로 경인철도부설사업, 운산금광채굴사업, 각종 무역사업 등에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 해안성당에서홍예문과, 내동교회가 가는 중간에 있는 청일 조계지 ⓒ 2016 한국의산천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조계와 일본 조계로 30년간 나누어 있다가 나누어있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폐지되었다

 

 

인천의 외국인 마을, 각국 공동조계

 

  인천의 외국인 마을, 즉, 각국 조계는 1884년 체결된 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의해 일본 및 청국조계를 둘러싼 형태로 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총면적 46만2000㎡(14만평)로 구성됐다. 그러나 인천의 외국인 마을에 거주한 서양인은 많지 않았다.

 

  제물포구락부가 신축됐던 1901년을 기준으로 개항장의 인구수를 보면, 전체 1만7507명 중 서구인들은 7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영사관 직원이나 세관 직원, 통역, 선교사, 의사, 그리고 일부 상인이었는데 각국 공동조계의 땅은 모두 이들이 임차하고 있었다. 나라별 분포를 보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9개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 마을인 각국 조계는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紳董公司)가 운영을 담당했다. 신동공사는 인천감리와 조계 내에 땅을 가진 국민이 있는 조약국(미국, 영국, 독일, 청, 일본)의 영사, 선출된 3명의 지주 등 9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여기에서는 조계 내의 사무와 각종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 벌금부과권도 있었는데 벌금은 모두 조계 기금으로 충당됐다.

 

  조계에서는 행정권 뿐 아니라 사법권도 독자적으로 행사됐고, 조계 내외를 막론하고 설정국의 범죄행위는 본국의 법률에 따라 그들 영사에 의해 처리되는 영사재판이 행해졌다. 조계는 강력한 행정권과 함께 영사재판이 행해지던 치외법권적 특수권익지구로서 마치 '나라 안의 나라'처럼 됐던 것이다. [인천일보 참고]

 

 

 

 

 

▲ 홍예문 ⓒ 2016 한국의산천

일본인 거주공간에서 동인천쪽으로 나가기위해 응봉산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는 산릉을 뚫어서 만든 문이다.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일본이 자국의 조계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조성한 축조물이다. 현재 인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인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당시의 일본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자유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웃터골 오포산 기슭을 넘어가려면 「홍예문」을 지나야 한다. 홍예문은 강제개항 이후 일본이 각국 조계와 축현역, 만석동 일대를 이으려고 화강암을 높이 쌓아 통로를 무지개처럼 둥글게 만들고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예문은 한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불렸다. 홍예문(무지개문) 또는 홍여문(무지개 돌문), 홍여문(虹轝門·무지개수레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모두 「무지개처럼 된 돌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일본인들이 이 문을 「아나몽(穴門)」이라 부른 것에 비하면 돌문조차도 아름답게 바라보는 우리 선조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홍예문은 모양새나 쓰임새 면에서 아름답고 실용적이지만 만든 배경엔 서글픈 일제 침략의 역사를 담고 있다. 홍예문은 1905년에 착공해 1908년 준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은 이 일대에 조계를 설정했다. 일본은 자기네 세력을 전동, 신생동, 신포동, 내동 쪽으로 확대하는 한편 해안을 매립해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천 전체를 손에 넣기 위해 만석동 일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인들은 일본조계에서 만석동을 향하는 도로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당시 일본지계나 항구에서 만석동을 갈 때 내동과 용동마루턱을 거쳐 화평동을 우회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해안선 지역을 거쳐 만석동으로 통행하기엔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해안선 도로신설은 너무 큰 공사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공사를 완공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버리고 홍예문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홍예문의 설계·감독은 일본이 맡았고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흙일과 잡일은 기술 없고 돈 없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홍예문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사람들은 멀리 산둥반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 온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꾸리」라고 불린 이들은 홍예문 공사는 물론 개항 후 인천에서 벌어진 서구식 양관공사, 인천항 축조공사 등 큰 공사에 한국 노무자들과 함께 나섰다.

당시 홍예문 공사를 벌이던 일본은 땅속에서 암반이 계속 나오고 흙을 파내면서 주위가 낭떠러지로 변해 파낸 흙을 실어 나르던 50여 명의 인부들이 흙더미와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홍예문 공사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다.

 

  홍예문 공사가 어려움을 겪자 일인들은 불어나는 공사비를 우리나라에 떠넘기기도 했다. 총공사비 3만 2천2백50원중 한국정부가 1만 6천8백원을 부담하고 일본거류민단이 1만 5천원, 일본 영사관의 후신인 인천이사청이 4백50원을 부담해 공사를 마쳤다. [인천시 홈페이지 참고]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만든 홍예문은 인천인들에게도 편리함을 주었다.

홍예문은 내동 내리교회 쪽에서 「약대이집」 고개를 넘어 청관 어귀까지 높은 길을 이어주는 산길의 육교로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다. 해방 후 홍예문을 통과하는 바람이 시원해 무더운 여름철이면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홍예문은 60년대 까지만 해도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 연인들이 곧잘 찾았다'라고 전한다.

 

  40여 년 전만 해도 홍예문의 난간은 쇠무늬로 곱게 꾸며 안전사고 방지기능은 물론 전망대로서도 훌륭한 장소였다고 한다. 

일제 당시 홍예문에서 남북을 바라보면 '남쪽 왜시가지와 북촌 화수동 일대, 초라한 송현 시가지가 대조를 이뤘다'는 이야기와 '식민시대 청년들은 이를 바라보며 나라 잃은 서러움에 젖기도 했다'라고 한다

 

  홍예문 주변 개발은 해방 후 10년 뒤인 195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인천세무서 뒷길을 차량이 다니도록 정비하고 주변엔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자유공원에 우뚝 솟은 독일식 건물인 「인천각」과 홍예문 좌우로 들어선 「세창양행 관사」, 별장 주택 등이 어우러져 병풍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해 영화 무대 배경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했다.

 

  홍예문은 또 일제시대 때부터 홍보용 간판을 붙이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 부윤 나가이(永井)와 이께다(池田)가 여기에 자기 사진과 광고를 붙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엔 국회부의장을 지낸 郭相勳(곽상훈)씨도 선거 때 홍예문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개항 후 한 세기기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홍예문은 예전과 다름 없이 인천인들의 애환과 역사를 지켜보며 묵묵히 서 있다. [인천시 홈페이지 참고]

 

 

 

 

 

대한 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성공회 내동성당과 강화성당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코프(고요한) 주교와 내과의사인 랜디스(남득시)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코프 주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포교에 전념했고, 랜디스는 현재의 성당자리에서 성 누가병원을 개설하고 의료구호사업에 전심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코프(고요한) 주교는 다국적 선교팀을 꾸미면서 한편으로 한국 선교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1893년 7월에는 워너(왕난도) 신부를 강화도에 파송하여 선교를 개시했다. 그러나 성내 출입을 금했기 때문에 갑곶리 진해루 밖에 있던 나루터 근방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기도소와 처소를 정했다.

1900년 강화도에 현재의 한식중층건물을 완공했는데 한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한옥 성당이다.

 

 

한국 최초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중세기풍이가득 느껴지는 성공회 교회 주변을 거닐다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안내문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890년 9월29일이다.

 

 

◀   현재의 성공회 교회 자리에 있던 성누가 병원

 

  E.B 랜디스( Dr. Eli Barr Landis,한국명 남득시)는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랭카스타에서 출생했다. 1883년 밀레스 빌리에 있는 국립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의예과 과정을 졸업했다. 1885년 9월 필라델피아 대학 의학부에 입학 하였으며 필드(Field Charles Niel)신부로 부터 감화를 받고 신명으로 영세 성사를 받았다.

 

  1888년 5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랭카스터 병원의 레지던트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교적 열정이 가득하였으며, 벤슨(R.M.Benson)의 권고로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1890년 캐나다로 이동하여 8월 28일 벤쿠버에서 기선 아비시니아(Abyssinia)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영국 성공회 한국 초대주교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高要翰)와 합류했다. 

 

  두 사람은 9월 14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 고베항에서 스루가마루호를 타고 9월 26일 부산을 경유하여 1890년 9월 29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고요한 주교는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성미가엘교회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에 들어갔으며,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해서 본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인천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치료도 못 받고 병명도 모른 채 그냥 죽어가거나 한방으로 겨우 치료할 뿐이었다.

 

  1883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내에 현대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었으나 일본인들만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랜디스는 가슴 아파하며 송학동 전세 낸 집에 방 한칸을 임시 진료실로 개조하여 1890년 10월 10일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고 10월 11일 첫 환자를 받았다. 한국인, 일본인을 차별두지 않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받고 오후에는 왕진을 다녔다. 첫해에는 의약품도 별로 없고 한국말도 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3개월동안에 11명(외래환자 35명, 투약환자 75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25차례 왕진했다. 

 

  그 후 1891년 4월 20일 송학동 3가 3번지(현 내동교회)에 새 병원 건축을 착수하여 10월 18일 준공했다. 이때 입원실은 온돌을 깔고 응급환자가 생기면 가마를 이용했다.

 

  이때 진료받은 환자들로부터는 다소의 치료비를 받았는데 한국돈 (엽전)은 작은 액수에 비해 많은 양의 동전을 받아야 하기에 많이 불편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계란이나 과일등으로 치료비를 냈다.  

 

  랜디스는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에 힘써 그 당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영어 학교를 개설하여 교육에 힘썼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서민들에게 너무도 고마운 은인으로 존경 받았다.

 

  이후 서울과 강화,진천,청주, 대전, 부산의 대한성공회로 확장되어 갔다. 하지만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1898년 과로와 결국은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은 청학동 외국인 묘지로 이전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인하여 선교본부의 지원금 부족으로 1917년 6월 26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문을 닫았다.

 

  그 당시 고요한 주교는 현재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에 교회를 만들어 선교를 했으나 한국 전쟁때 불타서 없어지는 바람에 1956년 병원이 있던 이곳에 다시 교회를 중건 하게된것이다

 

 

▲규모는 작아도 장중하고 수도원 느낌이 드는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 2016 한국의산천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한국 전쟁때 소실되었고 지금 건물은 성누가병원 부지에 1955년 8월 28일 주춧돌을 놓고 1956년 6월 23일 완공하여 복구한 것이다.

내동교회는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영국전몰장병을 추모하기위해 그 유가족들이 모금해 건축한, 일종의 전쟁기념성당이다. 50년대 말 까지 교회 안뜰에는 대공기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되었고 1904년부터 1956년까지 성공회 신학원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성공회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내동성공회성당 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에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했다. 

 

 

▲ 내리교회 뒤쪽에서 오르며 보이는 내동 성공회교회 ⓒ 2016 한국의산천

 

대한 성공회 내동교회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 (2002년 12월 23일 지정) 
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3 
제작시기  1956년 
소유자  대한성공회 

 

 건물 형태는 지붕의 목조트러스를 제외하고는 외벽과 주요 부재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중세풍의 석조 구조물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인 처마를 적용했으며, 창호와 벽체 부분의 처리가 뛰어나다.

 

건물 현황 편집

 성공회 내동성당에는 감사성찬례와 성사 집전에 이용되는 성공회 성당 2채(대성당, 소성당) 외에도 결식 주민들을 위한 식사 봉사 등에 쓰이는 사회복지관 1채, 사제관 1채, 예수가 손을 든 모습을 묘사한 하얀색의 성상이 있다.

 

 성공회 내동성당 안은 목재로 지어졌으며, 성수를 담은 성천, 성체를 모시는 성막, 스테인드 글라스, 역대 주교들의 초상화, 감사성찬례 집전에 사용되는 제대가 있다.

개화기인 19세기 말에 건립된 성당으로 종교적으로는 물론이고,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물이다.[인천시 홈페이지 참고]

 

 

 

 

▲ 성공회와 구세군, 규모는 작아도 봉사활동은 대단히 많이 하는 종파로 알고있다 ⓒ 2016 한국의산천  

 

성공회 [The Anglican Domain , 聖公會]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성공회, 잉글랜드교회, 앵글리컨처치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감독제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 성당 입구 오른편 정원위에 고요한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 2016 한국의산천

 

  사실 랜디스 박사는 정식 선교사는 아니었다.  선교활동으로 인천을 찾은 코프 주교와 함께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했다. 특히 의료사업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분으로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려 토착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1890년 10월 10일 성공회에서 개원한 성 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으로 당시 제물포 주민들은 이 병원을 약대인 병원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랜디스는 어떤 어려운 병도 신통하게 잘 고쳐 주는 명의로서 당시 주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 본래 이곳은 옛날 영국병원(성 누가 병원)이었으나 근처에 있던 성공회 교회가 불타버려 이곳에 교회가 다시 지어진 것이다 ⓒ 2016 한국의산천


 

 

  랜디스 박사는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랜디스의 통계에 따르면 1892년 모두 3천594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1894년에는 더욱 늘어나 4천464명의 신규 외래 환자와 방문치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천에서 1891년 최초로 영어학교를 만들어 인천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1892년에는 고아를 데려와 보살피면서 최초의 고아원을 창시했다.

 

   랜디스 박사는 40명의 학생을 4개 반으로 나눠 일주일에 6일씩 하루 3시간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이중 6~8명 정도의 중국인도 끼어 있었다. 

 

  그는 또한 당시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길렀다고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 책자는 전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자질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 같다.

 

  성누가를 기념하는 첨례일에 새 병원에 입주한다 하여 성누가병원이라 이름 지은 것을 두고 그는 “성누가병원이라고 하는 이름은 한국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며  뛰어난 한문실력으로 지은 '낙선시의원(樂善施 :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준다)'라는 '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 낙선시

한국이름 남시득으로 살다 간 약대인

 

 사람들은 랜디스를 약대인(藥大人) 이라고 높여 불렀으며, 랜디스가 이곳에 있기에 이곳 응봉산(자유공원이 자리한 산)을 말할때는 약대이산 (藥大人山) )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 중국에서는 위대한 사람을 대인(大人)으로 부른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1898년 과로와 결국은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은 청학동 외국인 묘지로 이전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 성당 본당의 벽면은 붉은 벽돌로 십자가 문양을 넣어 쌓아 올렸다 ⓒ 2016 한국의산천

 

 

▲ 성당 본관 왼쪽에 보이는 건물에 아래와 같은 동판이 붙어있다 ⓒ 2016 한국의산천

 

 그 내용은 이렇다

 

In memorial of the Russian sailors of ....

이곳에서(중략) 러시아 선원들을 떠올린다...

 

" 1904년 이 자리에 진료를 받았던 순양함'바랴그'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러시아 선원들을 추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2004년 2월 11일"

이곳은 ​러.일 전쟁당시 임시 적십자병원이었을 때 러시아 병사와 그외 많은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 빨간 건물 뒤로는 대한성공회 문화재단인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이 서있다 ⓒ 2016 한국의산천

 

 

▲ 중세기 수도원처럼 고풍스럽고 단단한 화강암 외벽의 성공회 성당 ⓒ 2016 한국의산천

 

 

▲ 성당 제일 후면에 자리한 정초석 ⓒ 2016 힌국의산천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한국 전쟁때 소실되었고 지금 건물은 성누가병원 부지에 1955년 8월 28일 주춧돌을 놓고 1956년 6월 23일 완공하여 복구한 것이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되었고 1904년부터 1956년까지 성공회 신학원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성공회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내동성공회성당 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에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했다. 

 

 

▲ 중세기 수도원이나 단단한 옛 성처럼 고풍스럽게 지어진 성공회교회 건물  ⓒ 2016 한국의산천

 

 

 

 

 

 

▲ 대한성공회 내동교회는 1891년 9월 30일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 소속되어 있다.

 

대한 성공회는 선교초기부터 한국문화의 토양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써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살린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있으며, 인근에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있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이역 만리를 지나 한국에 찾아왔던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사업가 등 외국인의 묘지

 

 

 

▲ 송도역과 청학지하차도 중간쯤 주택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단촐한 외국인 묘지 ⓒ 2016 한국의산천   

 

 

▲ 자물통으로 굳게 닫힌 묘역 철문을 보니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 2016 한국의산천

 

 

▲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인천시는 현재 진행 중인 ‘인천가족공원 2단계 조성사업’에 따라 청학동 외국인묘지를 내년 개장 예정인 봉안당에 새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5일 밝혔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 체류하던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 외국인 60여 명이 안장돼 있는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가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전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 66기도 이르면 내년 이곳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묻힌 인물들은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 체류하며 인천을 비롯한 한국 발전을 위해 애쓴 외국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980년 인천에 도착해 인천 최초의 성누가병원을 설립하는 등 의료 선교활동을 펼친 랜디스(Eli Barr Landis)박사 등이 있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이역 만리를 지나 한국에 찾아왔던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사업가 등 외국인의 묘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미국 선교사이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광복 후에 국빈으로 방한했다가 질병으로 사망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비명이다. 

 

  단일민족으로 역사적 전통을 지켜온 한국에서 이러한 외국인 묘는 아주 특별한 관심을 끈다. 헐버트 박사처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 왔다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해 낯선 이역만리 타국에 자신의 주검을 남긴 외국인들은 많다.

 

   연수구 청학동 성호공원을 끼고 물푸레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청량산 기슭에 위치한 묘역이 바로 이곳이다.

대지 5,760평에 묘지면적 3,140평에 달하는 청학동 외국인 묘역에는 영국인 21명, 미국인 20명의 무덤 외에도 독일인 11명, 러시아인 7명, 이탈리아인 3명과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인의 무덤이 각각 2기씩 있다. 

 

 이외에도 캐나다, 인도, 중국인의 무덤을 포함해 모두 71기의 묘가 안장돼 있다. 이들은 1883년 인천의 강제개항 후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으로 와서 나름대로 소임을 다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숨을 거뒀지만, 본국으로 유해를 돌려보내지 못한 사람들이다.   

 

 

 

  원래는 외국인 특정 거류 지역이었던 중구 북성동, 율목동, 남구 도화동에 나라별로 흩어져 있었는데 1914년 각국 대사관의 협조로 북성동 일대에 묘역을 조성한 뒤 무덤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이 효시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에 묘역 일부가 파손된 데다 북성동이 도심으로 개발되면서 1965년 당시 시 외곽이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이 묘역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1890년 성공회 코프 주교와 함께 인천에 도착해 의술을 베풀었던 엘리 바 랜디스 박사의 무덤도 이 묘역에 있다. 랜디스 박사는 인천에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를 세웠으며 훗날 ‘약선시직원(藥善施直院)’으로 이름을 바꾼 성누가병원을 개설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위한 영어 학교를 열었고 한국의 불교문헌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주민들은 랜디스 박사를 ‘약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교황청에서 파견했던 요셉 마라발 카톨릭 신부와 그의 동생 쟌 마라발의 가족묘를 비롯해 찰스 앨버트 허친슨(1948~1950) 미국 영사의 묘 등이 위치해 있다.  

 

 

▲ 묘역 27번에 자리한 켈트(Celtic)십자가의 랜디스 묘비 ⓒ 2016 한국의산천   

 

 

▲ 묘역 27번에 자리한 랜디스 묘 ⓒ 2016 한국의산천   

 

 

▲ 죽어서도 인천을 떠나지 않고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고이 잠든 한국 이름 남시득으로 산 약대인(藥大人) 랜디스의 묘비 ⓒ 2016 한국의산천  

 

 의사 랜디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과로와 결국은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인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약대인 랜디스의 묘 ⓒ 2016 한국의산천

 

 

 

 

 

 

 

 

 

 

 

 

 

 

날씨가 더 추워지네

가야 할곳은 밀려있지만

당분간은 자전거 여행이 어려울것 같다.

날씨가 조금 풀리면 또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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