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9. 답동성당 해안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by 한국의산천 2016. 1. 4.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아홉번째 이야기 

 

답동성당 해안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답사

 

인천에는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곳이 많다

  지금부터 130년 전 근대 개항기 즉 1883년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건축물, 시설 및 제도 등 근대문물과 문화가 들어오면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조선에서의 각종 이권 사업 교섭을 위한 영사관, 해관, 무역 관계자로부터 선교사, 여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방문했다.  

  

 이때 선교사와 함께 여러 종교도 함께 물 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오늘 답사지 대한 답동성당, 성공회 내동교회 역시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성공회 건물이다   

1890년 8월, 영국 해군 종군 신부이던 고요한 주교(Bishop Corfe)와 ​의사 랜디스(Dr. Eli Barr Landis)가 제물포 항으로 들어왔다. 인천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유지로서 만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포교지였던 것이다.

 

참고 : 인천의 주요교회 설립 연도

1889년 천주교 답동성당 설립 (빌렘 신부)

1891년 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설립 ( 고요한 주교 )

1900년 성공회 강화 관청리 교회 설립 (고요한 주교)

1901년 감리교 내리교회(웨슬리 예배당) 설립(헨리 아펜젤러)

1906년 성공회 강화 온수리교회 설립 ( 조마 주교) 

 

 

 

 

▲ 먹거리와 첨단의 유행을 자랑하는 신포동 시장 건너편 언덕에 답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 2016 한국의산천

 

 

 

▲ 인천 교구청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 성당이 정식명칭이다. 인천시내 102개 본당의 주교좌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 성당

 

 

▲ 답동성당 전경

마치 중세시대에 온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답동성당은 1897년 7월 준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으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한다.

 

답동성당 (사적 제287호)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와 숱한 고통과 난관, 순교를 이겨내고서야 비로소 자리를 잡았는데 그 가운데 성당이 생겨난 순서를 보면 약현성당이 1892년, 인천 답동성당이 1897년, 그리고 명동성당이 1898년이다.

인천 답동 성당이 명동성당보다 1년  먼저 생겼다는데 다시금 큰 관심을 갖게한다.

그래서인지 인천 개항기 근대문화유산중 답동성당이 유일하게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287호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 성당이 정식명칭이다. 인천시내 본당의 주교좌이다.

 

 

▲ 답동 성당 전경

파사드의 3개의 종탑이 건축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3개의 아치형 출입구는 화강암으로 둘러 붉은 벽돌 건물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답동성당은 벽돌로 쌓아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특히 정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이 무사의 투구모양을 한 8각형의 돔(dome)을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건축 당시에는 종탑에 종이 매달려 있지는 않았다

  1900년 주로 항구에 사는 교우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으로부터 종을 주문하여 답동성당에 3개의 종이 들어오게 되었고, 비상시에 울려 시민들의 경계태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여 일제의 승낙을 얻어내어 사용하게 되었다.

 

  1900년 항구에 사는 교우들의 기부금으로 3개의 종을 주문한 답동성당. 일제 탄압이 심했던 시대에 경제적 형편도 넉넉지 않은 교우들의 힘으로 마련한 종이었기에 신자들은 큰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임종국 신부는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질 않았다. 일제는 전쟁을 앞두고 사제들을 탄압했으며 신학교와 성당, 병원의 물자들을 모두 끌어다가 무기로 사용하던 시기였던 것. 특히 성당의 종은 무기를 만드는 데 유용한 물자였기에 근심은 더욱 깊었다.

 

   얼마 후 마침내 답동성당의 종도 헌납받기를 강요받았다. 임종국 신부는 미리 준비한 답변을 꺼내놓았다. 종은 이미 축성된 것이라 떼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설령 떼어 내더라도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 세개의 종탑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낮 12시와 저녁 6시에 종이 울렸지만 지금은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탑의 조형미와 상징성은 여전하다.

 

답동 성당 초창기 연혁


1889년 7월 1일 제물포 본당 창설

1889년 7월 8일 초대 빌렘 신부 본당에서 최초의 미사 집전

1889년 7월 본당(임시성당)정초식 
1890년 11월 1일 제2대 본당 주임 르 비엘 신부 부임

1893년 7월 본당 착공.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본당 분원 설치. 해성보육원 설치. 마리클레망스, 엠마누엘 박 사베리오 수녀 파견. 

1893년 8월 수녀원 완공

1895년 8월 11일  본당 정초식

1896년 8월 15일 해성 보육원 완공

1896년 11월 4일 본당 축성 

 

 

▲ 사적 제 287호를 알리는 표석 ⓒ 2016 한국의산천

 

  답동성당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86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프랑스정부의 지원을 받은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선교활동을 공식화한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 1890~1893)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성대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 중세기 기사의 투구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돔과 종탑 ⓒ 2016 한국의산천

투구모양의 돔을 가려린 여덟기둥이 떠 바치고 있다.  

 

  신축 당시에는 종탑 안에 종은 없었지만 우아하게 뾰족한 작은 탑이 바닷가 제물포 항이나 시내에서 잘 보였다고 한다.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린 것은 신축된지 3년 뒤인 1900년 항구에 사는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3개의 종을 설치해서 인천 하늘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만해도 매일 낮12시와 저녁 6시에 땡그렁 땡그렁 울리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인천의 명물이 되었다.

 

 

 

 

 

 

 

 

▲ 토요일 오후 미사는 진행되지 않고 문은 열려있었다 ⓒ 2016 한국의산천

 

▲ 카메라 셔터 소리의 울림마저 신경이 쓰이는 숨이 멎을것 같은 고요함과 경건함이 가득한 성당 내부 ⓒ 2016 한국의산천 

건축 당시 답동성당의 건물 실내는 의자 없이 마룻바닥에서 미사를 드렸으며 1973년에 와서야 인조대리석 바닥으로 개조한 다름에 의자를 비치했다. 

 

 

 

▲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빛이 실내로 들어 신비스럽게 아름답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2016 한국의산천

 

 

 

 

 

 

▲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신비스럽게 아름답다 ⓒ 2016 한국의산천

 

 

 

 

 

 

 

 

계속해서 자유공원을 지나서  해안천주교회와 제물진두 순교성지로 이동합니다

 

 

 

 

 

 

 

 

해안성당

 

 

 

▲ 해안성당 ⓒ 2016 한국의산천


해안성당 [海岸聖堂 ] : 인천시 중구 선린동 26번지

 

 1950년대 후반 인천 선린동에 거주하는 화교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본당이 건립되었다.

1960년  인천시 북성동에 성당이 마련되었으나 선린동에 모여사는 화교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선린동 성당이라 불렀다.

초대 주임으로 맥코막 신부가 부임하였고 1966년 6월 9일 현재의 성당이 완공되었다.[두산백과 참고]

 

 

해안성당 제물진두 순교자 영성관

해안성당은 1958년 답동성당에 다니던 화교들이 건립했다.

이후 인천교구장의 재가로 한중 합동본당인 해안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 해안천주교회 ⓒ 2016 한국의산천

 

 

제물진두 순교기념경당

순교자 피흘린 터에 '하느님 사랑' 세우다

 

▲  병인박해 천주교인 처형장소에 건축된 제물진두 순교 기념관 
 

  2014년 준공된 인천지역 최대 순교터인 '제물진두(祭物津頭;중구 항동 1가 1의13)' 순교기념경당.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높은천장 예술성 조화 경건함이 절로 베어나오는곳이다.

 

 인천은 천주교의 국내 유입 거점 중 하나이며 한국 천주교회가 겪은 아픔과 역사를 품은 곳이다.
이중 제물진두(祭物津頭·중구 항동 1가 1의 13)는 1866년 병인박해때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등을 치른 후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해 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준다’는 의도에서 대원군 정권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楊花津頭 :·절두산)와 함께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으로 택한 곳이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제물진두에서 순교한 10명의 정신과 신앙을 기념하기 위해 순교기념경당을 건립해 2014년 5월 준공했다.

 

 

한중문화관 바로 옆, 큰 길가의 번잡함과 어우러진 좁은 땅(109.1㎡)에 들어선 기념관

기념관은 누구나 조용히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 양측 벽은 하늘을 향해 피는 꽃을 형상화하고 있다. 동시에 순교자를 감싸 안는 하느님의 두 손모양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예술성이 어우러진 성미술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천장과 높은 벽의 십자가 문양의 작은 창을 통과한 빛은 제대와 경당을 비춘다.

 

▲ 좁은 터에 세워진 기념경당  

순교는 신앙의 꽃이다

기념경당의 내부는 국내 첫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의 후손 등 순교자 10위의 위패(순교자 명패)와 순교의 표상이 설치된 벽과 바닥, 순례자의 이해를 위한 박해시대의 제물진두 교회사가 담긴 유화작품(4m) 등으로 꾸며졌다.

 

 

 

계속해서 청학동 외인묘지

가자 !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인천 아트플랫폼 더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608

 

손자들과 인천 아트플렛폼 차이나타운 둘러보기

인천 둘러보기 설을 잘 지내고 다음날인 오늘 손자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길을 나섰다 인천 아트플렛폼을 둘러보고 차이나 타운에 가서 식사를 하고 월미도 놀이 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태워주며

koreasan.tistory.com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297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7.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답사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서 어제의 일은 역사가 되어가고 오늘은 내일의 역사가되고 그렇게 역사는 차곡 차곡 쌓여가는것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자

koreasan.tistory.com

내리교회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298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8. 내리교회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여덟번째 이야기 115년 역사를 지닌 내리 감리교회와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 제 뒤의 맥아더 장군 동상의 어깨위에는 한마리의 비둘기가 앉아있네요 어쩜 . 마치 조각처럼.

koreasan.tistory.com

답동성당 해안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300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9. 답동성당 해안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아홉번째 이야기 답동성당 해안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답사 인천에는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곳이 많다 지금부터 130년 전 근대 개항기 즉 1883년 제물포 개항

koreasan.tistory.com

홍예문 내동성공회교회 랜디스 청학동외국인묘지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301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10. 홍예문 내동성공회교회 랜디스 청학동외국인묘지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번째 이야기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홍예문, 청학동 외국인묘지 오늘은 남을 위한 삶과 봉사와 배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답사를 했다. 이 세상에 사랑과 봉사와 용

koreasan.tistory.com

인천 개항장 거리 >>> https://koreasan.tistory.com/15607563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 ‘인천 개항장 거리’를 가다

아름답지만 아프기도했던 ... 여긴 '혼종의 바다' 글 사진 김종목 기자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 ‘인천 개항장 거리’를 가다 개항기 이후 군사적 요충지이자 유원지였던 월미도엔 지금 개항 음식

koreasan.tistory.com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