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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7.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답사

by 한국의산천 2016. 1. 2.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서 어제의 일은 역사가 되어가고

오늘은 내일의 역사가되고 그렇게 역사는 차곡 차곡 쌓여가는것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자랑스러운 그 역사의 현장과 인물을 찾아 떠나봅니다.

 

요즘 연휴를 맞아 숨가쁘게 달린다. 그래도 바쁘게 사는것이 좋지 않은가?

 

답사코스

1. 115년의 역사를 지닌 내리교회

2. 119년의 역사를 지닌 답동성당

3.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4. 해안천주교회, 제물진두 순교성지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일곱번째 이야기

 

자유공원과 제물포 구락부 돌아보기  [2016 · 1 · 2 · 흐리고 포근한 토요일 · 한국의산천 ]

 

동북아 경제 허브 인천

허브 (hub) [명사]

1.<기계>자전거 바퀴의 살이 모여 있는 중심축.

2.<컴퓨터> 신호를 여러 개의 다른 선으로 분산시켜 내보낼 수 있는 장치. 3. 중심이 되는 곳. 

 

  인천은 한양의 관문으로서 많은 사연과 기록을 갖고 있으며 개화기의 놀라운 근대문화유산들이 산재해있는곳이다

인천항을 중심으로 백제시대 '‘미추홀'로 불리며 고려와 조선시대 때는 대중국 교역항으로, 구한말에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개항으로, 6·25 한국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장으로, 1960년대 산업화 이후에는 수도 서울의 관문항 역할을 하는곳이다.

그동안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오히려 등안시 한 경향이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며 차근 차근 돌아보기로 했다

 

 '구락부'란 요즘의 홍대 클럽이라고 말하듯 영어의 클럽(club)을 말하는것인데 일본어로 クラブ 로 쓰고 한자로는 俱樂部(구락부)라고 했다.


오늘 답사코스

115년의 역사를 지닌 내리교회 ~ 119년의 역사를 지닌 답동성당 ~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  해안천주교회, 제물진두 순교성지 돌아보기

▲ 명동성당(1898년 건립)보다 먼저 지어진 인천 답동성당(1897년 건립) ⓒ 2016 한국의산천  

 

답동성당

1894년 착공해 1897년 고딕형 단층건물로 지어진 인천 최초의 성당이나 1933년 옛 성당건물을 보존하면서 외벽을 벽돌로 쌓아올려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다

내리교회와 답동성당 답사 후 신포시장과 신포동을 지나서 자유공원으로 갑니다.

▶ 중학교 시절 자주왔던 곳이다 ⓒ 2016 한국의산천

오래전 1980년 산악장비 제조 장인이인 백봉 이영관님이 이 근처에 공방을 가지고 계셨기에 자주와서 수제 프렌드를 사가곤했다   

 

인천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곳이 많은곳이다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은 중구 송학동 응봉산 자락에 위치한 자유공원이다.

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도 중구 답동에서 만날 수 있다.

인천과 노량진을 오가던 경인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먹는 자장면 역시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에 걸쳐 있는 차이나타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인천연안 팔미도에 있는 등대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알려진 곳이다. 이국적인 풍경을 간직한 차이나타운과 제물포 구락부, 일본은행거리 등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국내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시작되는 곳 또한 인천이다

 

▲ 학창시절 자주 올라갔던 자유공원   

 

아주 어렸던 유년시절 어머니와 함께 나는 아버지 등에 엎혀서 이곳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단체로 촬영한 사진도 있다. 그 당시는 만국공원이라고 불렀다.  

 

 

 

 

자유공원 [自由公園]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응봉산(鷹鳳山)에 조성한 공원으로 조성연대는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보다 몇 년 앞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항 개항 뒤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 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仁川府)로 이관되자 그 때부터는 서공원(西公園:일본인들이 이른바 神社를 지어놓은 동공원이 따로 있었음)으로 불렀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이다. 지난날 이곳에는 인천각·청광각(淸光閣) 등의 건조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졌다.

충혼탑을 비롯하여 석정루(石汀樓)·연오정(然吾亭) 등이 있으며, 학익고인돌[鶴翼支石墓]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 시가지와 주위의 연산(連山)·항만·앞바다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장소이며,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린다.

 

자유공원  [인천 투어 참고]

  인천의 자유공원은 1888년으로 탑골공원보다 9년 일찍 응봉산 일대에 조성되었다. 응봉산은 인천이 개항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발 69m의 야트막한 야산으로 공원이 만들어진것은 개항후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조계를 설정한 이후 부터이다.

 

  1883년 청국과 일본이 선린동일대에 조계를 설정하자 영국과 미국,독일도 서둘러 해안지대와 응봉산 자락 14만평을 쪼개 각국조계로 만들었다. 이 조계를 A,B,C,D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D지구로 분할된 곳이 현재의 자유공원으로 부르는 각국공원이다.

 

  각국공원은 일제시대때에는 서공원으로 불렸는데 광복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바뀌었다가 1957년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나라의 힘이 이땅에 미치는가에따라 공원이름도 계속 바뀐것이다.

 

  각국공원이 공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88년 당시 독일인이 경영하던 세창양행이 이곳의 땅을 구입해서 서양식 직원사택을 짓고 사교틀럽인 제물포 구락부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공원을 설계한 사람은 러시아의 측량기사 사바친인데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항구가보이는 언덕공원'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공원조성을 일본식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천 시민의 휴식처가 된 자유공원은 별명이 있는데 오정포산 또는 오포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귀한 때라 시간을 알수없어 생활에 불편을 겪자 인천 기상대에서 1908년 자유공원꼭대기에 설치한 대포를 쏘아 낮12시를 알렸는데 정오를 알린다고 해서 오포(午砲)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1924년에는 시간이 15분늦는 사고가 생기고 오포를 쏘다가 손에 부상을 입는 일이 자주 생기자 오포제도가 폐지되고 홍예문 언덕에 세운 철탑 소방망루에서 사이렌으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인천 투어 참고]

▲ 장군다운 장군 맥아더 장군 ⓒ 2016 한국의산천 

 

작전명 :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여러가지 난관으로 인해 인천 상륙작전 성공 확률 5000分의1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구상을 수립한 것은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였다. 이 구상에 따라 최초로 수립된 상륙작전계획은 블루하트작전(Operation Blue hearts)이었다.

 

맥아더 사령관 인천상륙작전 채택

 미 24사단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7월 22일 미 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지대 내 북한군을 격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출 속도가 예상 외로 빨라지자 미 24사단만으로는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기가 불가능해져 최초 계획을 취소하고 미 1기병사단을 영동지역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하트작전이 취소된 후 맥아더 사령관은 참모진에게 원래의 개념을 발전시켜 보다 큰 규모의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작전기획단은 계획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3개소의 상륙 지점을 검토했다. 서해안의 인천(100-B계획)과 군산(100-C계획), 동해안의 주문진(100-D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하는 100-B계획을 채택하고 미 합참에 보고했다.

 

상륙군 병력 7만여 명 편성

 우여곡절 끝에 맥아더 사령관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상륙작전일을 9월 15일로 확정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상륙부대로 10군단을 창설해 자신의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고 극동군사령부에서 차출한 참모장교들로 군단사령부를 편성했다. 군단예하에 편성된 주요 부대는 미 1해병사단, 미 7보병사단, 국군 1해병연대, 국군 17보병연대였다. 지원부대로는 미 2특수공병여단 등이 포함됐다.

이같이 편성된 상륙군 병력은 총 7만여 명이었다.

상륙 하루 전인 9월 14일 이들 부대들은 덕적도 근해에 집결을 완료했다.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 유엔 해군은 서해안을 봉쇄하는 한편 북한군의 방어선과 교통시설 등에 맹폭을 가했다.

 상륙작전일이 다가오자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할 필요에 따라 9월 4일부터 해병의 자체 항공기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출격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했다. 또 13일부터는 북한군의 반격 능력을 분쇄하기 위한 각종 함포사격이 실시됐다.

 

1단계 월미도 점령-2단계 인천 해두보 확보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됐다. 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2단계는 인천 해두보 확보였다.

 1단계 작전에서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기가 목표를 강타하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함포사격을 집중하는 동안 미 5해병연대 3대대가 월미도에 상륙했다. 그곳의 북한군은 이미 집중적인 포격과 폭격에 의해 제압된 상태였으므로 상륙부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2단계 작전은 당일 오후에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에 끝났다. 미 5해병연대와 미 1해병연대가 투입돼 해두보를 완전히 확보했다.

 곧이어 인천 시가지 작전을 전개했다. 또 해병 항공기가 시내를 폭격하고 해군기는 인천 부근을 중심으로 차단공격을 감행했다.

 

국군 해병대,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 쾌거

 인천 시가지를 장악한 상륙부대들은 시가지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 해병대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전반적으로 공격부대들은 적은 피해로 큰 전과를 거두는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으며 곧이어 서울 탈환작전을 착수했다.

 성공 확률 5000대 1이라 예상됐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9월 18일, 국군·유엔군 서울 진격 시작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미 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 1해병사단(국군1해병연대 배속)은 서울의 서쪽에서 시가지를 향해 공격하도록 하고 미 7보병사단(국군17연대 배속)은 서울의 남쪽에서 북한군의 증원 차단과 함께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낙동강전선을 돌파해 북상하는 미 8군과 연결하도록 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9사단과 18사단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을 전개할 준비를 하면서 연희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서측방과 남측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다.

 

수도 서울, 인천상륙 후 2주일 완전 수복

 미 10군단은 행주와 마포, 신사리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연희고지와 망우리, 구의동 일대의 북한군 저지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27일에는 공격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잔적을 격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어 9월 28일 공격부대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그날로 북한군의 저항은 끝났으며 수도 서울은 인천상륙 후 2주일, 북한군에게 피탈 당한 지 3개월 만에 완전히 수복됐다.

 

9월 29일, 수도 탈환식 거행

 이튿날인 9월 29일 정오 중앙청에서는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됐다. 이 행사를 통해 맥아더 사령관은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계했으며 이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1.26~1964.4.5] 

 
맥아더 장군은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주(州)의 리틀록 출생.

1903년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근무했다.

 

1917 - 1919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장군은 제1차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와 라인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 여단장, 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며 활약했다.

1920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고 1930년 미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육군 대장으로 퇴역하였으나 1941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제2차세계대전시 남서태평양 지역 연합군사령관으로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0년 6·25전쟁 시에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 뒤 1952년 레이턴래드사의 이사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 워싱턴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 

 

내게 이러한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성을,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했을 때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생각할 때 고집하지 않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는 용감하게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내 아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사 참된 위로에서 오는 소박함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 날 아들을 보며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 맥아더 동상 앞에서 ⓒ 2016 한국의산천

 

자유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88년 11월 9일 미국과 영국, 러시아,청,일본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하여 러시아인 토목기사 사마틴이 설계해 건립됐다.

초기에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부르던 것을 1914년 각국지계 제도의 철폐와 함께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불려졌다.

이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될 당시 맥아더 장군이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9월 15일 맥아더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이란 이름이 붙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작전명 :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1950년 6. 25전쟁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상륙작전으로 전쟁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UN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때 맥아더장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내용의 작전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 계획은 맥아더장군이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 구상되었던 작전으로 미지상군을 수원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해 상륙부대는 내정하였던 미 제1기병사단을 전선에 투입하게 되므로써 이 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작전명 :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북한군의 기습으로 발발한 전쟁. 대한민국이 낙동강 전투에서 밀리며 교착 상태에 있던 중 막바지에 기사회생 할 수 있었던것은 인천 상륙작전때문이었다.

서울을 단 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계획」을 승인 하였다. 

 

크로마이트 작전명에 대해서

  모든 군사 작전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가 작전 보안이다. 그래서 작전 계획 수립 단계에서부터 통상 암호명이나 가제목을 사용한다. 북한군은 남침시 ‘폭풍’이라는 암호명을 사용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시 ‘도라 도라 도라’라는 암호명을 썼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오버로드 작전’으로 명명됐다.

 

  한편 작전의 목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명칭을 부여하기도 한다. 6·25전쟁시 유엔군은 반격 작전 중 ‘뚫고 들어간다’는 뜻을 가진 ‘파일 드라이버 작전’, 그리고 ‘몰아낸다’는 ‘라운드업 작전’ 등의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사용한 ‘사막의 폭풍 작전’ 의도를 이해하기가 매우 쉽다.

 

  크로마이트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의 암호명이다. 크로마이트(chromite)란 철강의 한 종류인 크롬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전 보안을 위해 의외로 평범한 암호명을 사용한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은 평범한 암호명을 썼지만 전쟁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 원수가 6·25전쟁 발발 나흘 후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을 때 이미 구상했다. 그는 절망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적의 남침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인천으로 상륙 작전을 실시, 남과 북에서 협공하는 포위 섬멸이 유한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블루 하트’(blue heart) 계획이 수립됐으나 북한군의 남침 속도가 너무 빨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륙 작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미 극동군 사령부 내에 합동전략기획단을 편성해 기획 업무를 맡겼다. 여기에서 인천·군산·주문진을 후보지로 하는 세 개의 안이 수립됐다. 이 중에서 인천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에서도 일제히 반격을 개시한다는 ‘100B안’이 채택됐다. 이에 따라 7월 말부터 크로마이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미 합동참모본부와 각군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적의 배후에 상륙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인천 상륙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러 차례 전문 교신과 회의가 거듭됐다. 결국 9월9일 크로마이트 작전이 최종 승인됐다. 맥아더의 뛰어난 설득력과 현지 지휘관의 의사를 존중하는 미군의 전통이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된다. 닷새 전부터 65회에 걸쳐 맹렬한 공중 폭격이 실시됐다. 지원 함대는 이틀 전부터 강력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상륙 부대는 4개 구역으로 나눠 해안으로 돌격했다. 한국군 해병대는 주력 지역인 레드비치에 상륙, 가장 빠른 속도로 진격해 인천 시가지 소탕전을 펼쳤다.

상륙 다음 날 새벽 최종 목표를 달성, 인천 방호선을 구축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일거에 전세가 역전됐다.

 

매년 노르망디에서는 전승 기념 행사가 열린다. 우리도 매년 9월15일 인천항에서 크로마이트 축제를 벌이면 좋겠다. [안정훈 준장·공군본부 정훈공보실장]

 

 

 

  이후 계속적으로 연구 발전시켜 「계획 100-B(인천)」, 「계획 100-C(군산)」, 「계획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낙동강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100-B(인천)」가 채택되어 9월15일을 예정으로 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상륙예정지인 인천은 서울에서 서쪽으로 32Km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고 ,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 할 수 있는 한편,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함으로 북한군 주력을 압축 섬멸함으로써 소수의 희생으로 다대한 성과를 획득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시행될 인천항은 많은 난점을 안고 있었다. 즉,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은 단일수로로서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고, 적이 기뢰를 매설할 시 많은 피해가 예상되며, 조수간만의 차가 10m내외로 심하고, 지형 등 자연적인 불리한 조건과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 등 작전을 지원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라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고, 대안으로 군산이나 아산만 해안의 포승면 일대로 상륙지점의 변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라고 설명하였고,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중요한 수도 서울을 단 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계획」을 승인 하였다.

▲ 레드비치(적색해안 / 만석동 해변)를 향해 진격하는 미해병 (사진자료출처 : 인천상륙기념관)  ⓒ 2012 한국의산천

 

  이 계획에 의거 편성된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을 창설하여 군단장에는 알몬드 소장을 임명하고, 예하에 미 제1해병대 사단(사단장 스미스 소장)과 미 제7사단(사단장 바 소장), 국군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국군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등 총 병력 75,000여명으로 편성하였고, 이들의 임무는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가능한 한 신속히 진출하여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도하 및 서울 탈환, 미 제8군단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15일까지 계속되었고, 9월13일부터는 4척의 항공모함과, 6척의 구축함, 5척의 순양함이 인천만 어구에 들어서 월미도를 포격하기 시작 하였으며, 9월 12일에는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하였고, 동해안에는 9월14일 ,15일 양일간에 걸쳐 삼척일대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규모는 지역 경비대대를 포함하여 약 2,000여명에 달하였고, 서울-인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병력은 약 10,000여명으로 판단되었다.

9월15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미국225, 영국12, 캐나다3, 호주2, 뉴질랜드2, 네덜란드1, 프랑스1, 한국15)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였고 월미도에 상륙 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수로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해군정보장교 클라크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05:00부터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상륙주정(LCVP)20척에 분승하여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제1파 7척이 예정보다 3분이 늦은 06:33에 녹색해안(Green Beach)인 월미도에 상륙, 연이어 후속파가 도착하였다. 이어 월미도 정상의 105고지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일부는 인천 내륙으로 이어지는 방파제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차단하였다. 06:55에는 105고지 정상을 탈환하였고, 08:00 월미도를 확보한 후 소탕작전으로 들어가 정오쯤 완료하였다. 월미도 상륙 시 미 해병대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이었으며, 적 사살 108명, 포로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 보급품 및 탄약등을 하역하는 옐로우비치 (사진자료출처 : 인천상륙기념관)  ⓒ 2012 한국의산천

 

  이날 오후 만조가 되면서 적색해안(Red Beach),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할 미 해병대 제1연대, 제5연대 전투단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우중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 및 해군 항공기는 인천 및 경인 국도를 연결하는 내륙지역에 대한 도로와 목표물에 대하여 계속하여 차단 공격을 가하였고, 해군 함포지원전대가 맹렬히 포격을 가하는 동안 돌격상륙부대인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 제3대대는 적색해안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을 향해 돌격하였다.

 

  17:33 미 제5해병연대는 적색해안(동구 만석동 부근)에 상륙하였다. 계획된 시간보다 3분이 늦은 시간이었다. 상륙한 병력은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를 올라갔으며 일부는 해군 포격으로 파괴된 방파제 사이로 상륙하였다. 상륙지역 북측으로 상륙한 해병대는 해벽 후면의 적과 교전하여 8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였다.

 

 

 

◀  이 방파제가 바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멀리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지금의 '대한제분'이 있는 위치로서 작전명"래드비치"금일 저녁의 상륙목표인 것입니다

 

 한편, 청색해안(남구 용현5동)의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예정시간 보다 2분이 늦은 17:32분에 상륙을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병력들은 높은 해벽을 기어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청색해안은 적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고, 공격목표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15일 20:00에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날 작전에서 돌격 상륙부대의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이었고,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여명이었다.

 

  인천해안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대 제1사단은 9월16일부터 한강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9월 18일부터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상륙하여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고, 9월27일 한국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은 90일만에 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자료 출처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제물포 구락부

※ '구락부'란 요즘의 홍대 클럽이라고 말하듯 영어의 클럽(club)을 말하는것인데 일본어로 クラブ 로 쓰고 한자로는 俱樂部(구락부)라고 한다

 

▲ 구) 제물포 구락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

 

   1891년 인천에 거주하던 영,미,독,러,일본등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현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담당하였으며 사교실, 당구장, 독서실, 테니스장등의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이후 1931년 정방각(情芳閣), 해방 후 미군 장교클럽, 휴전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이었으며,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사용되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다.

▲ 옛날 본 모습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 2016 한국의산천

 

  구한말 개항부터 해방 직후까지 인천 중구는 서울 못지않은 정치·외교·경제의 중심지였다. 거의 모든 대사관이 인천에 위치해 있었으며 심지어 서울에 있던 러시아 대사관이 인천으로 옮겼을 정도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각국 대사관들이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아래에 외교가를 이루면서 이곳엔 인천의 유지들과 각계 고위층들이 집단 거주하기 시작해 지금 서울의 평창동 같은 고급 주택단지를 형성했다.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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