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6. 용흥궁 철종외가 강화산성 고려궁지 규장각

by 한국의산천 2016. 1. 2.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여섯번째 이야기

철종외가와 잠저지 용흥궁, 강화산성 규장각 둘러보기 

 

답사 라이딩 순서  

대명리 주차장 출발(초지대교 건너서 ) ~ 온수리 성공회 ~ 이규보 묘 ~ 철종 외가 ~ 관청리 성공회 ~ 철종 용흥궁 답사 ~ 강화성 ~ 고려궁지. 규장각~ 연미정~ 강화대교 ~ 대명항 (54km)

 

▲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에서 ⓒ 2016 한국의산천  

이규보 선생의 묘 답사 후 철종외가와 잠저지 용흥궁 강화산성 고려궁지 규장각 둘러보기

 

▲ 2016년 1월1일 날씨가 포근한 관계로 길에 쌓였던 눈이 녹으며 진창이되어 조심스럽게 달렸다 ⓒ 2016 한국의산천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도령이라 불리었던 철종의 잠저(潛邸)를 거쳐서 가는 길이다.

철종이 어떤 인물이었던가, 평민에서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철종이 아니던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신분의 상승이 이처럼 획기적인 사람이 철종 말고 또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한양에서 관리들이 무리로 찾아오자 원범은 또다시 몸서리쳐지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형과 아버지가 역모로 몰려 관원들에게 포승을 받고 잡혀갔을 때의 그 악몽이... 또 무슨 변고가 생겨서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에 숨었는데, 원범을 찾지 못한 현지 관리들은 원범이 사귀던 처녀를 설득해서 내려오도록 했다.

 

  강화유수조차 이원범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다. 새 임금을 모시러 온 영의정 정원용도 철종이 살고 있던 허름한 집에 도착해서 원범의 용모를 알지 못해서 첫 인사를 올리면서 이름자를 한자 한자 끓어서 묻는 것으로 신원을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철종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안동 김씨는 세도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철종을 선택했던 것이다.

 

 29614

 

   철종의 집안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철종이 왕이 되자 신분세탁을 위해 자료들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집안에 관한 문적(文蹟)을 모조리 세초(洗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세초(洗草)란 조선 시대,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훗날 구설을 막기 위하여 그 초고를 흐르는 물에 씻어  없애던 일을 말하는데, 순원왕후는 은언군에 관한 기록들을 없애 버리라고 한 것이다.

 

  역적 집안의 후손이 왕이 되었으니 어찌 정치적으로 뒷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왕대비는 그런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료들을 다 없애버렸다. 그래서 철종의 집안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고 한다.

 

 

 강화읍내로 들어서며 강화읍 관청리 강화경찰서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고려궁지·강화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될 때 순절한 김상용의 순절비각과 비각 건너편에 용흥궁공원이 도로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약 100m쯤 떨어진 주택가에 조선 25대 임금(철종 哲宗: 1831∼1863) 이원범(李元範)이 살았던 집 용흥궁 : 인천시유형문화재 제20호)이 있다.

순절비각 골목에서 왼편에 한국 최초로 한옥기와로 지은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고, 오른쪽이 용흥궁이다.

 

 

신분의 급상승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고 둘째아들 순조가 11세로 임금이 되니,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1804년 친정을 시작한 순조는 막강한 안동 김씨의 세도를 막으려고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효명 세자의 빈으로 삼았다. 하지만,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가 1830년 6월 22세로 죽고, 1834년 12월 순조마저 승하하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이 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런데, 헌종도 1849년 6월 22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으니, 왕실에는 6촌 이내의 왕족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자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축으로 하는 안동 김씨와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익종)비 신정왕후를 축으로 하는 풍양 조씨가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왕족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각축을 벌였다. 궁중에서 가장 어른인 순원왕후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이자 항렬상 헌종의 조카뻘인 이하전(李夏銓)을 후사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하전의 주변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들은 순원왕후를 설득하여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을 적격자로 지목했다.

 

  신하가 임금을 택하는 택군제도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차 시행되었고 항렬상 왕의 동생이나 조카뻘이 왕통을 잇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자파에게 유리하도록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원범을 추대한 것이다. 조선 역사상 이렇게 법도에 어긋나게 왕통이 이어진 것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즉위한 세조와 철종뿐이므로 조정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했음을 의미한다.

 

▲ 주택가 좁은 골먹을 따라 50m 정도 들어가니 용흥궁이 나온다 ⓒ 2016 한국의산천  

 

  철종은 사도세자와 후궁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裀)의 손자다. 사도세자에게는 적자인 정조 이외에 은언군·은신군·은전군 등 서자 셋이 있었으니, 혈통상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그러나 은신군은 영조 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고 은전군도 정조 원년(1775) 3월에 사사되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 벽파는 정조가 즉위하면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고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관련자를 처형하면서도 이복동생 은언군만은 제주도로 유배했다가 강화도로 이배했으나, 정조 사후 순조 즉위 원년(1801)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가 청의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함께 처형당했다(신유박해).

     
  은언군의 자식 중 다섯째인 전계군 이광에게는 아들 셋이 상계군 원경(常溪君 元慶)·경응·원범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헌종이 후사가 없음을 알고 헌종 10년(1844) 중인 출신 민진용이 상계군 원경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 당하고, 상계군과 전계군이 사사되면서 경응·원범 두 형제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원범의 나이 14살이었지만, 원범은 왕족이긴 해도 임금이 될 수 없는 역적의 자손이고, 또 아버지 전계군도 목숨이 위태롭다며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원범 형제는 글을 잘 몰랐다고 전한다.

 

▲ 용흥궁 입구

 철종이 형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던 초가집은 나중에 이곳에 다시 번듯하게 기와집으로 다시 지어진다. 강화유수였던 정기세가 왕이 살았던 집과 왕의 외갓집을 왕의 지위에 어울리게 크게 짓는다. 그것이 오늘의 용흥궁(龍興宮)이다.

정원용과 그의 아들 정기세는 철종과 깊은 연관을 맺었다. 용흥궁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 두 부자의 치적을 담은 비석이 서있다.

 

 

철종[조선 제25대왕]

  

 1831(순조31) ∼ 1863(철종14). 조선 제25대왕. 재위 1849 ∼ 1863.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전계대원군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김조순의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10) 회평군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앙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1849년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음으로 처음에는 (계획대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임금이 된 직후 철종은 강화도에서 사귀던 처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안동 김씨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2년 뒤인 1851년 (철종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되며 허수아비가 된 철종은 이들로부터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으로 낮춰 불릴 정도였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냥을 진대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욕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에 달하는 여주의 민가에 은자와 단목을 내려주어 구휼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양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조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토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일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을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천한전에 봉안되었으며, 왕비와 7명의 후궁 사이에서 5남 6녀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궁인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가 유일한 혈육이었으나, 영해옹주도 금릉위 박영호에게 출가하였으나 혼인한지 3개월 만에 죽었다. 그녀의 남편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이다.

 

 1863년 철종이 재위한지 14년 6개월 만에 33세로 죽자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이다.

그후 후사문제가 대두되어 헌종의 모후인 조대비는 이하응과 결탁하여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임금으로 세우니 그가 곧 고종이다

 

 

  용흥궁은 더벅머리 총각 원범이 임금이 된 4년 후인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원범이 5년 동안 살았던 초가집을 헐고 지금의 기와집을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법통이 아닌 방법으로 임금이 된 사람이 이전에 살았던 집을 잠저(潛邸)라 하고, 대개 왕위에 오른 뒤에 잠저를 새로 짓는 것이 관행이어서 철종의 즉위한 뒤 비좁은 초가집을 헐고 새로 잠저를 지은 것은것이다.

 

 주택가 좁은 골목에 있는 마당도 없는 옹색한 작은 대문위에 '용이 일어난 궁'이라는 '용흥궁' 편액이 무색하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허수아비 임금으로 살았던 철종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데, 용흥궁은 현재 강화군에서 다도(茶道)예절 교육장으로 쓰고 있다.

 

 

  철종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조이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철종의 증조할아버지이다. 그러니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과는 7촌 사이로 가까운 친척이었다. 당시 조정은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때였다.

 

  왕실의 똑똑한 인물들은 역모로 몰려서 다 죽고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24대 왕인 헌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철종을 왕으로 옹립을 한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그야말로 강화도령 철종이 바로 그런 식이었다. 왕족이었지만 또한 역적의 후손이기도 했던 철종은 유배지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일반 평민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이 갑자기 왕이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신분 상승인가

 

 

 

 

철종 외가 가는 길

 

 

 

 

 

 

 

  조선 철종 4년(1853)에 지어진 것으로 철종임금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집이다.

철종외가는 선원면 냉정리 264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전체적으로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일자로 곧장 연결시켜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구획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일반 사대부의 웅장한 집의 규모와는 달리 법도에 맞도록 고졸하게 지은 집이다.

 

 

 

 

 

 

 

이어서 고려궁지와 강화산으로 이동합니다

 

▲ 사적 133호 고려궁지 ⓒ 2016 한국의산천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 그 동쪽에 장녕전, 뒤쪽에 만녕전,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으로 대관전과 신격전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산백과 참고]

 

 

 

 

 

 

 

 

 

 

 

 

 

 

사적 제32호 강화산성.

 

 

강화산성

사적 제32호인 강화산성은 1232년에 축성되어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강화의 도성이다. 당초에 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쌓았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돌로 쌓은 내성뿐이다. 성의 둘레는 약 1.2㎞.


 중성은 둘레가 약 9㎞인 토성이었고, 선인문·선기문 등 8개의 문이 사방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7척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이었으며, 도읍을 옮긴 정부가 육지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중요한 기지였고, 몽골이 강화를 함락시키지 못한 물샐틈없는 요새였다. 하나 1259년 몽골이 화친의 조건으로 내·외성을 모두 헐어야 한다는 단서를 내걸어 강화산성은 헐리고 만다.

 

  조선 초에 다시 축성한 외성은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몇 군데 석축으로 복원한 곳말고는 현재 외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내성 또한 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개축한 것을 지난 1977년까지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동쪽 성은 복원하지 못했다. 성의 남문을 안파루(晏波樓), 서문을 첨화루(瞻華樓), 동문을 망한루(望漢樓), 북문을 진송루(鎭松樓)라 불렀으나 동문은 아예 없어졌다.

현재 서문에는 역사적 현장의 증언으로 옛 연무당터 기념비가 서 있고, 남문에 있던 김상용 선생 순의비는 관청리의 고려궁터 들목으로 옮겨졌다.

 

 


북문 진송루

문루의 이름은 진송(鎭松)처럼 소나무숲에 자리하였다 하여 진송루라고 부르는가?

 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면서 진송루라 이름하였다.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했다.

성벽에 올라서면 저 건너 휴전선 너머 북녘의 개성땅이 지척인 듯 가까이 보인다

 

지 반세기, 그 50년을 헤어져 살고도 분단의 벽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다. 특히 북문에서 망향제를 지내는 실향민을 많이 보는데, 두고 온 부모 형제, 달려가고 싶은 고향이 바로 저 건너 보이는 마을에 있기 때문이리라.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북문은 본디 바로 아래 고려궁터의 든든한 보호막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로써 강화로 천도(1232)한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된 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토성이었던 당시의 성은 개경 환도 때 헐리고 조선 초에 개축하였다. 그 뒤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된 것을 숙종 37년(1711)에 석축으로 완성했다.

이때까지도 문루는 없었다. 정조 7년(1783)에 강화유수 김노진(金魯鎭)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했으며,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했다.

 

 

 

 

 

▲ 이곳 성밖을 나가서 연미정까지 계획하였으나 길이 북사면에 있기에 녹았던 길이 얼고 미끄러워서 이곳에서 답사를 마치고 출발지 대명항으로 이동합니다  (54km)  

 

 

대명리 주차장 출발(초지대교 건너서 ) ~ 온수리 성공회 ~ 이규보 묘 ~ 철종 외가 ~ 관청리 성공회 ~ 철종 용흥궁 답사 ~ 강화성 ~ 고려궁지. 규장각~ 연미정~ 강화대교 ~ 대명항 (54km)

 

내일은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일곱번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