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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4. 강화도 성공회 성당

by 한국의산천 2016. 1. 1.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네번째 이야기 [2016년 1 월 1일 금요일]

 한옥처럼 아름다운 강화도 온수리 성공회 성당과 관청리 성공회 성당  

 

 

▲ 2016년 1월 1일 아침 일출을 만나고 대명항으로 이동 한 후 강화도 답사 라이딩 ⓒ 2016 한국의산천

거잠포구 일출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293 

 

 

 

 

 

 

 

▲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에 기여한 공이 대단하신 분들이 많다. 아펜젤러, 맥아더 장군, 코르페신부, 랜디스 박사 등등... ⓒ 2016 한국의산천  

위 사진의 고요한 주교의 이름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이틀만에(?)간단하게 나왔다  

비숍 칼레 요한 코르페 ---> 뒤에서 부터 읽으면 고르페 요한... 한 글자식 생략하면 고(Co/ 요/ 한(John)  

 

인천에는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곳이 많다

  지금부터 130년전 근대 개항기 즉 1883년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건축물, 시설 및 제도 등 근대문물과 문화가 들어오면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조선에서의 각종 이권 사업 교섭을 위한 영사관, 해관, 무역 관계자로부터 선교사, 여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방문했다.  

  

  이때 선교사와 함께 여러 종교도 함께 물 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오늘 답사지 대한 성공회 내동교회 역시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성공회 건물이다   

1890년 8월, 영국 해군 종군 신부이던 존 코르페(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이름 고요한) 주교와 ​의사 랜디스(Dr. Eli Barr Landis : 한국이름 남시득)가 제물포 항으로 들어왔다. 인천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유지로서 만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포교지였던 것이다.

 

 

▲ 116년 전에 지어진 관청리 성당 (철종의 잠저지 용흥궁 옆에 있다) ⓒ 2016 한국의산천  

절인가? 향교인가? 한옥 스타일로 지어진 성공회 성당  

 

참고 : 인천의 주요교회 최초 설립 연도

1889년 천주교 답동성당 설립 (빌렘 신부)

1891년 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설립 ( 고요한 주교 )

1900년 성공회 강화 관청리 교회 설립 (고요한 주교)

1901년 감리교 내리교회(웨슬리 예배당) 설립(헨리 아펜젤러)

1906년 성공회 강화 온수리 교회 설립 ( 조마 주교) 

 

 

 

 

 

▲ 110년 전에 세워진 온수리 성공회 성당 ⓒ 2016 한국의산천

 

두바퀴의 스치는 바람처럼

 

대명포구에서 초지대교를 넘어서 출발을 합니다

답사 라이딩 순서  

대명리 주차장 출발(초지대교 건너서 ) ~ 온수리 성공회 ~ 이규보 묘 ~ 철종 외가 ~ 관청리 성공회 ~ 철종 용흥궁 답사 ~ 강화성 ~ 고려궁지. 규장각~ 연미정 (생략)~ 강화대교 ~ 대명항 (54km)

 

 

 

 

 

  서울에서 가까운 김포의 대명항은 서해바다에 있는 작은 포구로 강화해협을 사이로 강화도와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김포시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포구이다. 원래는 대명나루 대명포구로 불리웠으나 2000년 2종 어항으로 승격하면서 대명항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가깝고 인근에 함상공원과 역사의 현장인 덕포진과 덕포진교육박물관, 천연 미네랄 라듐천인 약암온천 등이 있어 주말에는 크게 붐비는곳이다.주차 무료

 

 

▲ 이곳 어시장은 선주가 직접잡은 것을 직접 판매하는 방식으로 어시장내의 상호가 곧 선주의 배이름이기도하다 ⓒ 2016 한국의산천

 

 

 

 

 

 

 

  규모는 작지만 어시장과 어판장에서 꽃게·대하·망둑어·주꾸미·농어·숭어를 비롯해 김장용 새우젓·멸치젓 등을 살 수 있고, 즐비한 횟집에서는 횟감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 강화도에는 성공회 성당이 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2016 한국의산천

 

 

▲ 저수지를 지나고 강화 전등사를 지나서 온수리로 갑니다 ⓒ 2016 한국의산천

 

 

 

 

▲ 강화 온수 양조장 ⓒ 2016 한국의산천

전등사 앞을 지나서 온수리 성공회 성당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강화 온수 양조장. 첫눈의 느낌이 오랜 세월을 지켜온 중량감과 근대적인 건물의 느낌이 정겹습니다

홈페이지를 보면 1924년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최초로 인삼 막걸리를 제조 생산하는 양조장이라고 합니다.

한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막걸리를 사서 배낭에 넣고 답사를 다닐 수도 없는일...  

 

 

 

 

 

 

▲ 성당 입구에 있는 폐가와 겨울나무 ⓒ 2016 한국의산천  

 

 

▲ 왼쪽에는 새로 신축한 큰 성전이 있고 입구 정면에는 구건물이 있습니다 ⓒ 2016 한국의산천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번지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종교건축물. 온수리 성공회 성당  

 

인천유형문화재 제52호

지정일 : 2003년 10월 27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온수길38번길 14(길상면 온수리 505-3)

시 대 : 대한제국

종류/분류 : 종교건축물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 그리스도교 교회양식을 적용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이다.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세웠으며 성안드레 성당으로도 불린다. 본당과 종을 달아놓은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장식해놓았으며, 건물 내부는 예배공간인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성당 남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인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2층 누각식 외삼문 형식이다.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게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2003년 10월 27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으며 성공회유지재단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두산백과 참고]

 

 

 

  한국 땅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은 후 개항과 함께 막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때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주 및 여행지역을 법으로 제한하였는데, 서울 중심 100리 안에서만큼은 여행 허가증(호조)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교역과 그와 관련된 목적으로 토지를 사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출처 글 김정신 | 단국대학교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 한옥 느낌이 한가득 온수리성당 외삼문 ⓒ 한국의산천

 

 문루는 성당 남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인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2층 누각식 외삼문 형식이다.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게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온수리 성당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가운데 지붕은 우진각으로 처리하여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고 사방으로 벽을 터서 종 소리가 퍼져나가게 꾸몄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문과 직각 축으로 바로 만나는 온수리 성당은 정면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단층 팔작지붕의 일자형(一字型) 전통 한옥이다.

 

  지붕 용마루 양쪽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다.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출처 : 글 김정신 | 단국대학교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카톨릭 성당건축사], [유럽 현대교회건축], [건축가 알빈신부]가 있다.

 

 

 

 

 

 

 

신도들 스스로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해 건축


  강화도에 지어진 대한 성공회의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나중에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되었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출처 글 김정신 | 단국대학교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 2016 한국의산천

 

강화 온수리 성공회사제관 (江華 溫水里 聖公會司祭館)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지정(등록)일 : 2002.02.04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은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신부가 한국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고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여 기술적인 적용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연와구조로 된 5량 4간의 홑집이다.

한편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다.

 

 

 

 

 

 

▲ 새로 지어진 성공회 성전 ⓒ 2016 한국의산천

 

계속해서 읍내에 위치한 관청리 성공회 성당으로 이동합니다  

 

 

 

 

▲ 용흥궁공원 주차장에서 본 '성공회 강화성당' 모습

 

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공원에서 보면 한옥 모양의 절 느낌이 나는 건물로 대한성공회에서 116년의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며, 현존하는 한옥 교회 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성당외부는 사찰형태지만 내부는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

 

 

▲ 성당의 모습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두기위해 높은 곳에 배 모양의 형상처럼 지었다고 합니다

 

 

 

대한성공회 [ 大韓聖公會 ]


성공회 서울성당

서울 중구 정동의 대성당. 기독교의 한 교파며, 16세기 종교개혁 때 분리된 영국성공회의 한국교구로 1889년 9월 29일 주교 고요한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때 분리된 영국성공회의 한국 교구로, 1889년 9월 29일 주교 고요한(Corfe,C.J.)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예배와 풍습은 가톨릭과 다르나 교리와 관행은 가톨릭적인 교회이다.

  천주교나 정교회와 같이 주교제도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나, 천주교처럼 세계적 중앙기구나 헌장이 없고 주교직과 성사를 상호 인정함으로써 천주교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2년마다 열리는 세계성공회중앙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아시아교회협의회(CCA), 국내적으로는 한국교회협의회(NCC)에 참여하여 기독교 종파일치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천주교와의 일치를 위한 성공회―천주교일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 성공회 강화성당 입구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으로, 현판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쓰여 있다.

 

성공회강화성당 [ 聖公會江華聖堂 ]


건립시기 : 1900년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424호

문화재 지정일 : 2001년 1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 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참고문헌
한국성공회사개관(韓國聖公會史槪觀)(대한성공회출판부, 1980) 

 

 

 

성공회 [ The Anglican Domain , 聖公會 ]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영국의 성공회 및 세계의 성공회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성공회, 잉글랜드교회, 앵글리컨처치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감독제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영국에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59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540∼604)가 어거스틴(?∼604)과 수도사 40명을 영국에 파견한 이후 로마가톨릭은 영국교회는 물론 정치적으로 영국을 지배하였으며, 교회법정에서는 국가의 사법권을 대행하였다.

 

 

천주성전(天主聖殿)이 성당의 건물이다.

성공회는 개신교의 한 파로 영국 교회의 전통과 조직을 같이하는 교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1534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파하였다.

 

   성당 정면부 위쪽 팔작지붕에 현판이 '天主聖殿(천주성전)'이라 씌어 있다. '성당'이 아닌 '성전'으로 이름한 것은 당시 불교의 각 전각건축에 영향받은 때문으로 보인다. 성당 정면 기둥에는 사찰에서 흔히 보이는 주련 같은 5개의 현판을 설치해 놓았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시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복음선파계중민영생지방 : 복음을 널리 전파해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 외형만으로도 주인의 심성과 품격, 그리고 저변에 흐르는 문화의 격과 철학을 조용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성당은 1900년 11월 15일에 완공됐는데, 동서로 10칸, 남북으로 4칸의 총 40칸 규모로 지어졌다. 궁궐이나 사찰처럼 복잡화려한 양식 대신 수수한 형태로 지붕과 처마를 처리해 단촐하면서도 육중한 느낌이다.

 

  전국적으로 오래된 성공회 성당 가운데 한옥성당이 여러 곳 있지만, 강화 성당은 한국문화나 다른 종교와의 조화를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강화 성당을 건립하는 데 들어간 재료도 국경을 넘어 여러 곳에서 조달했다는 것이다. 목재는 백두산의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한 것이다.

 

  유리나 벽돌은 일본, 중국 등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성당의 4개 출입문은 영국에서 가져온 참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화산 화강암은 재단이나 세례대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한옥이면서도 ‘노아의 방주’ 의미를 담은 배 모양의 성당 외관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성당의 건축 자체도 특이한 점은 바실리카 양식 건물을 한옥으로 지은 것이다. 건물을 지을 당시 정확한 설계도서 없이 서양 교회의 그림을 보고 한옥으로 건물을 지었다고 전한다.

 

 

▲ 현재 보수중이기에 돌아보기가 어려웠다 ⓒ 2016 한국의산천

 

 

▲ 위 사진은 지난 봄에 촬영한 이미지 입니다 ⓒ 2016 한국의산천

 

 

 

 

 

 

 

 

성당의 내부 모습

 

입구에 위치한 성수가 담긴 세례대와 실내.

성당 출입문을 들어서면 중간에 돌로 만든 큰 세례대가 있는데, 지성소를 향한 정면에는 '重生之泉'(중생지천·거듭나는 샘물)이라 새겼으며, 그 맞은편에는 '修己(수기) 洗心(세심) 去惡(거악) 作善(작선)'이라 새겨 항상 몸과 마음을 닦아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가르치고 있다.

 

 

 

 

 

 

 

 실내는 육중한 목재로 기둥과 들보가 얽혀 있어 교회로서는 낯설지만, 양측으로 회랑이 길게 나있고 가운데 회중석과 전면부에는 제대를 모신 지성소를 설치한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이다. 지성소와 회중석을 높이도 다르게 하고 칸막이를 설치해 구분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한옥으로 지어진 사제관

 

 

 

 

▲ 이 문의 목재는 건축당시 영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 ⓒ 2016 한국의산천

문 스타일도 영국적인것 같은...

 

 

 

 

▲ 높은 용마루에 서있는 십자가를 보니 소설 '사람의 아들'이 생각났다 ⓒ 2016 한국의산천

 

사람의 아들 (이문열 著)

  고통 받는 민중들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아무런 구원의 손길도 주지 않는다는 회의에 빠진 신앙인이 스스로 몸을 던져 고난을 선택함으로써 행동신앙을 실천하고 또한  구원과 용서의 신 앞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빌기보다는 빈곤과 고통이 넘치는 세상에서 정의의 실현이 더 필요하다는것을 외치는 젊은이 민요섭이 떠오른다. 

 

 

 

 

 

계속해서 고려시대의 문신·문인. 명문장가 이규보 선생의 묘와 철종의 용흥궁으로 이동합니다.

 

강화도 나들길 3코스 >>> https://koreasan.tistory.com/15608006

 

강화도 나들길 3코스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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