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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3. 홍천강 너브내길 남궁억선생 섶다리 배바위 니산구곡

by 한국의산천 2015. 12. 28.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세번째 이야기

 

홍천강 너브내길 [홍천 (洪: 넓을 홍  川: 내천)]

너브내길을 따라서 남궁억 선생 묘역 답사, 섶다리, 니산구곡 배바위

 

오늘 내가 할일은 펜션을 나서며 어제처럼 하루종일 시간의 구애됨이 없이 내가 세운 계획대로 하루종일 달리기만 하면 된다.

너무 푸짐하고 넉넉한 시간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달릴 생각을 하니 너무 너무 좋다.

 

백두대간 라이딩 이후로 또 느껴보는 편안한 자유로운 시간이다.

 

 

▲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속초 245km 를 달릴때 지나치는 화양강 휴게소에서 보이는 화양강(홍천강) 풍경 ⓒ 2015 한국의산천

오래전에는 사진에 보이는 저 다리를 건너서 인제와 설악을 갔는데 지금은 큰 길이 새로나며 저기 아래길은 한가로운... 길이 되었다

 

라이딩의 새로운 면모를 추구한다.

 

새털같이 수많은 날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길고 긴 길을 따라 달렸다.

그간 내 자신이 함께 하는 라이딩이던 또는 내가 앞장을 서서 리딩을 하며 가는 라이딩이던간에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달리기에 주안점을 두고 달렸다.

하지만 많은 아쉬움을 가지는 부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이땅의 의미있고 아름다운 곳을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것에 대한 그것이었다.

 

  얼마전 끝낸 백두대간 1400여km를 달리면서도 구간을 달리기에 바쁘다보니 인문 지리학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을 옆에 두고도 그냥 지나쳐야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가끔은 그룹 라이딩을 쉬면서 1석 2조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의 숨은 명소를 찾아보려 한다.

 

12월 25일 성탄절부터 3가족이 1박2일 홍천강가의 펜션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짬을 내어 그간 생각해왔던 곳을 이틀에 걸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았다

1. 근대 문화유산 지평주조 / 구둔역(폐역)

2. 홍천 제곡리 최승희 생가터 탐방

3. 남궁억 선생 묘소 탐방과 홍천강 너브내길 따라 모곡 니산구곡 배바위 풍경 

 

 

▲ 어제 지평리를 돌아보고 그 다음날 홍천 제곡리 최승희 선생의 고향과 홍천강 너브내길을 따라 모곡까지 달려서 팔봉산 근처의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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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바퀴에 공기를 가득넣고 길을 나선다. 팽팽한 바퀴는 길을 깊이 밀어낸다.

자전거 바퀴가 길을 밀면 길이 바퀴를 밀고, 바퀴를 미는 힘이 허벅지에 감긴다.

몸속의 길과 세상의 길이 이어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두번째 이야기 / 최승희 생가 답사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290 

계속 이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땅, 무궁화의 고장 홍천

 

  강원 영서내륙의 중심. 홍천에서 발원해 홍천에서 끝나는 맑고 깨끗한 홍천강과 백두대간의 원시림이 잘 보존된 청정지대다. 나라꽃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충절의 고장. 청정성과 환경성, '생명·건강산업'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서거정은 <학명루기>에 ‘홍천은 산과 물이 둘러있고, 깊고 궁벽한 곳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졌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 홍천은 더 이상 깊고 궁벽한 곳이 아니다.

 

소송이 적어서 수령 노릇하는 즐거움이 있던 홍천(洪川)

  서거정이 학명루기(鶴鳴樓記)에서 "원주 곁에 있는 고을을 홍천이라고 한다. 홍천은 산과 물이 둘러 있고, 깊고 궁벽한 곳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졌다. 백성들의 풍속은 순박하고 소송은 적어서 수령 노릇 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영서에 유학한 일이 있었다. 원주에서 춘천으로 갈 때 거듭 홍천으로 길을 잡아 지나 갔었다. 그 읍내의 인가들이 그윽하고 깨끗하며,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며, 백성들의 재물이 부요하고 수목이 울창하다"고 평했다. (문헌참고: 신정일 지음 다시쓰는 택리지에서)

 

 

▲ 양덕원천이 홍천강 본류에 합류하는 응아지 나루 ⓒ 2015 한국의산천

 

흘러가는 것이 강물인가 내마음인가. 

 응아지나루는 옛적에 강원 내륙과 한양을 잇는 뱃길로서, 세계적인 춤꾼 최승희가 유학을 가기 위해 고향마을(제곡리)에서 10리 길을 걸어 이곳 응아지나루에서 뗏목을 타고 서울로 갔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 나루터이다.

 지금은 남한강의 팔당댐과 충주댐. 북한강 수계에는 청평댐이 생기면서 수운은 쇠락하고 나루와 뱃길은 사라졌지만 홍천강 물줄기는 유구한 세월의 변화를 잊은 채 흐르고 있다.

이곳은 홍천군의 9경 중 4경에 속하는 ‘수태극’(홍천강 물줄기가 휘몰아 만든 태극 모양의 지형) 경관으로 어느 작가는 “태극으로 굽이 도는 저 물줄기는 최승희의 춤사위인가”라고 극찬하고 있다.

 

 

 

홍천강은 길이는 143㎞이며 한강의 제2지류,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팔봉리·모곡리·마곡리에 걸쳐 흐르는 강으로,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하여 군 중앙부를 동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흘러가면서 홍천의 옛 이름을 따서 벌력천이 되고 북방면을 지나면서는 녹요강이 된다. 서면.남면을 지난 홍천강은 춘천시 남면 관천리에서 북한강 청평호로 흘러든다.

 

홍천강의 옛 이름은 홍천 남천(南川)이며 고구려 때의 홍천 이름을 따서 벌력천(伐力川)·녹요강(綠繞江)·화양강(華陽江)이라고도 한다.

 

 

▲ 홍천강을 끼고 걷는 길 너브내길 안내도 ⓒ 2015 한국의산천

 

 

 

홍천(洪川)은 우리나라 시·군·구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너른 고을로  서울특별시의 3배이다. 경기도의 끝지점인 가평군과 양평군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춘천시와 인제군, 남쪽으로 횡성군과 평창군, 동쪽으로는 점봉산, 계방산과 오대산을 포함한 양양군과 강릉시에 접한다. 면적이 가장 너르기도 하지만 동서의 길이가 가장 길기도 하다.

 

 즉, 서쪽은 북한강의 청평호 물살에 닿아있으니 서울이 멀지 않은데, 동쪽 구룡령과 오대산의 두로봉에선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주민들은 흔히 “홍천의 동서는 300리”라 말한다. 지리상으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고을인 것이다.

 

 홍천군의 가장 큰 젖줄은 북한강의 제1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이다. 한중지맥(한강기맥)의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이 강은 서쪽으로 흐르며 여러 지류를 합류하면서 군 중앙부를 지나 북한강 청평호에 흘러든다.

 

 

▲ 이제 올라가야 할 길...

▼ 아래 이미지는 몇해전 이곳을 라이딩 할때 사진 ⓒ 2015 한국의산천

 

 

▲ 몇해전 응아지 나루가 가는 길 ⓒ 2015 한국의산천  

 

 

 

 

 

 

 

 

▲ 금학산에서 내려다본 노일리 홍천강의 수태극  ⓒ 2015 한국의산천

※ 위 사진의 상단 오른쪽에서 양덕원천이 흘러들며 홍천강과 만나는 지점이 응아지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산능선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된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한반도 지형과 흡사한 곳은 몇군데 되지만 이렇게 흐르는 강물이 완벽한 태극문양을 그리는 수태극형상의 물동이 풍경은 노일리 이곳말고는 없으리라.  

 

아름다운 강마을. 홍천 금확산에서 내려 본 수태극 문양의 홍천강. 산굽이를 돌아 흐르는 홍천강은 수태극을 그리며 흐른다. 금확산 (655m)은 홍천 팔봉산에서 정동쪽으로 약 4.5km떨어져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홍천강변 마을인 노일리 마을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이다. 금학산은 삼면을 홍천강이 굽이 돌며 에워싸고 있다.

 

 

 

 

 

남노일 강변유원지 

남면의 남노일 강변은 아직 깨끗한 자연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예전엔 교통이 불편해 찾기가 까다로웠으나 얼마 전 양덕원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가 포장되면서 접근이 수월해졌다. 강을 건너려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줄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얼마 전 남노일교가 세워지면서 강 건너로 굴지리, 노일리 등으로 접근이 수월해졌다.  남노일교 하류는 강변이 넓고 유속이 완만한 편이라 가족이 노닐기 적당하고, 상류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른 편이다.

 

 

▲ 남노일리 강변 ⓒ 2015 한국의산천

오래 전에는 팔봉산 강가와 이곳 그리고 개야리와 모곡 유원지의 강변은 은모래 지천이었다. 그러니 태풍 루사로 인하여 강이 범람하고 또한 그 많던 은모래는 모두 쓸려내려가고 지금 모든 강변은 자갈밭이 되어있다.

 

 

 

 

▲ 홍천강 남노일리에 있는 섶다리 ⓒ 2015 한국의산천

 

 

 

 

 

 

 

 

 

 

 

  이곳 홍천이 자랑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인 한서(澣西) 남궁억이다.

1863년 서울에서 태어난 남궁억은 서재필.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 9월에는 나수연.유근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중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구속과 석방이 이어졌다. 1905년 3월에는 고종의 간곡한 권유가 있어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그해 11월에 일본의 위협하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자 벼슬을 사임한 뒤 서울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무궁화를 보급한 남궁억

건강이 악화되자 홍천군 서면 모곡리 보리울마을로 돌아온 뒤 1919년에는 모곡(牟:소우는 소리 모. 谷:골짜기 곡)학교를 설립하고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쳤다. 겉으로는 뽕나무를 보급한다고 내세우고 뽕나무 묘목에 무궁화 묘목을 끼워서 퍼뜨렸다. 그 무렵에 나라 안의 국민학교와 교회에 보급도니 무궁화는 거의 이곳에서 가져간 것이었다. 또한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으로 끝나는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모곡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 노래는 널리 퍼져 나라 안 곳곳에서 아이들이 즐겨 불렀다. 이에 일본은 남궁억을 잡아 가두고 모곡학교를 빼앗아 공립 보통학교로 바꾸었으며, 이 학교에서 기르던 7만여 주의 무궁화묘목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무궁화는 한 번에 피고 한번에 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연중 세계절을 피고 질줄을 모르는 그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1만 6천 년을 산다"는 말이 있다.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이 된 것도 남궁억이 경상북도 칠곡에서 부사로 일할 적에 윤치호와 의논하여 나라의 꽃으로 정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문헌참고: 신정일 지음 다시쓰는 택리지에서)

 

 

▲ 남궁 억 선생의 묘소 ⓒ 2015 한국의산천 

 

남궁 억 [ 南宮檍 (호 : 한서 / 독립운동, 교육, 언론 ) :863.12.27 ~ 1939.4.5 ]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 궁내부 별군직(別軍職),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 대한협회장, 관동학회 회장 등을 지내고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미국에서 교포들을 대상으로 발행됐던 신한민보 1938년 2월3일자 최승희 소개 기사에도 ‘최승희는 강원도 홍천군에 살고 있는 최준현씨의 영애’라고 하고 있고,한서 남궁억 선생도 지인들에게 “최승희가 홍천 보리울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고향 자랑을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승희는 일제시대에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으로 불리며 세계 10대무용가로 명성을 날린 전설적인 무용가. 1946년 월북,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1955년 인민배우 칭호까지 받았으나 이후 주체예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67년 숙청돼 1969년 8월8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묘택 앞의 전경이 시원스레 참 좋다 ⓒ 2015 한국의산천  

 

 

 

남궁 억

 

 

  1863년 서울 출생. 본관 함열(咸悅). 자 치만(致萬). 호 한서(翰西)이다. 부친은 중추부도사를 지낸 무관이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3년에는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어학교인 동문학에 1년간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1886년 내아문 부주사가 되어, 조선말 최초의 영어통역관이 되었으며 고종의 통역을 맡았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를 수행하여 유럽으로 파견되었으나 청나라의 반대에 부딪혀 홍콩에 2년간 머물게 되었다. 홍콩에서 돌아와 1889년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893년 칠곡부사(漆谷府使)에 부임되어 동학군을 막아내어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895년 궁내부 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을 축조하였다. 그 후 흥화학교 교사로 영어와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였다.

 

1896년 2월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 중앙위원·서기·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되는 등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羅壽淵)·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인 1900년 7월『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황성신문》 사장이 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다.

1905년 성주목사, 이듬해 양양군수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장이 되었다.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고 관동학회 회장이 되었다. 10년부터 9년간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등 교과서를 지었으며, 1918년 강원 홍천의 보리울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 무궁화 묘포를 조성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35년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별세하였다.

저서로 《동사략(東史略)》 《조선(朝鮮)이야기》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 남궁억 기념관 앞에서 몇해전 촬영한 사진 ⓒ 2015 한국의산천

 

 

▲ 홍천강 줄기를 따라 배바위 가는 길 ⓒ 2015 한국의산천

 

 

▲ 홍천강 모곡 소남이섬의 명물 배바위 ⓒ 2015 한국의산천

 

 

▲ 홍천강의 명물 배바위

군 복무중에는 저기 배 바위 앞 하얀 백사장에서 야영도 몇번 했었는데... 

 

현재 배바위라 불리는 곳의 원래 명칭이 ‘천근암(天根巖)’이었다.

천근암을 처음 명명한 사람은 유인석 선생의 스승인 성재 유중교 선생으로, 유인석 선생은 1895년 당시 대의를 이들 유적에 담아 ‘홍무벽가’와 ‘천근암가’라는 시를 지었고, 천근암은 을미의병 당시의 태동을 가능케 한 화서학파 선생들의 상징물이었다

 

니산구곡
1곡- 입석(북한강)
2곡- 소룡암 (북한강)
3곡- 전위탄
4곡- 요취담
5곡- 부연
6곡- 홍무벽
7곡- 비령담
8곡- 비도암
9곡- 오지소 (3곡부터 홍천강에 위치)

 

 

 

   남노일리를 지나며 수석처럼 아기자기한 암봉이 솟아있는 팔봉산을 포옹하듯 껴안고 돌아가는 홍천강. 그 옆에 펼쳐진 하얀 백사장과 밤벌. 팔봉산을 돌아서면 어유포리 마을 앞을 지나 반곡유원지를 지나며 강은 휘돌아가며 급한 사행천을 이루고. 조금 강안이 넓어지며 완만한 수심을 이루는 개야리 강변에 이르면 하얀 은모래가 백사장을 이루고 방앗간이 있는 고개 넘어 작은 종탑이 솟아있는 개야교회가 있어 평화로움을 더해주는 풍경. 

 

  개야리에서 강물은 오른쪽으로 크게 꺾이며 모곡리 밤벌 유원지를 왼쪽으로는 장락산과 오른편 강안으로는 좌방산을 지나며 낮은 강가에 모래를 퇴적시키고, 모래로 이루어진 작은 섬 그 이름은 소남이섬이라고 부르지. 그 섬을 지나면 바로 옆으로 황골 마곡 유원지. 오래전에는 이곳에 하얀 은빛모래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소남이섬을 지나면서 강폭은 넓어지며 조용히 북한강에 몸을 합친다. 또 다시 한가로운 풍경으로 가득한 그 노을진 강가에 다시 서고 싶다. -한국의산천 -

 

 

 

 

 

 

 

 

 

 

 

 

 

 

 

 

▲ 선현들이 칭송하던 니산구곡을 보며 ⓒ 2015 한국의산천

 국사시간에 열심히 배웠던 그 유명하신 류인석 의병장.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특히 제천에서 대업을 이루신 선생 본향은 강 건너서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다.  

 

 구한말 만주 벌판을 누비던 의병 윤희순 또한 3 · 1 만세 운동의 주역인 류관순 의사와 멀지 않은 혈족이며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은 그 당시 의병의 상징인 류인석 장군의 육촌 형이었고 이들은 모두 개화파와 대립각을 세운 위정척사 사상의 수장 이 항로 선생의 문하생들이었다.  

 

 

 

니산구곡


  우리나라에 ‘구곡(九曲)’이라 불리는 곳이 여럿 있다. 벽계구곡 금계구곡 백운구곡(이상 경기도), 주산구곡(황해도), 옥계구곡 용하구곡 구곡리구곡 명도구곡(이상 충북), 무이구곡 이산구곡(전북), 석계구곡(평남) 그리고 우리 강원도의 니산구곡(尼山九曲)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화서학파의 사림(士林)이 설정해 놓은 열두 곳의 구곡이다.

‘구곡’이란 조선조 말기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년) 선생의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 하는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따르는 기호지역의 사림이 모여 공부하는 장소를 말한다.

 

  중국의 ‘존왕양이(尊王壤夷)’ 운동과 비슷한 ‘위정척사’의 ‘위정’이란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자는 뜻이고, ‘척사’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의미다. 따라서 물밀 듯 들어오는 서양 문화를 배척하고 전통 성리학을 지켜내야 일본 등 열강의 침략에서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림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곳이 ‘구곡’이다.

 

  춘천 출신 의병장 의암 유인석 선생이 홍천강과 북한강 일대의 자연경관에 ‘니산구곡尼山九曲)’이라고 이름 붙인 그곳은 과연 어디인가? 이를 놓고 그동안 다양한 연구가 있었는데, 습재연구소가 최근 유인석 선생의 후손을 비롯한 춘천 가정리 주민들과 함께 홍천강과 북한강을 탐사하여 제1곡부터 제9곡의 위치를 확정했다.

 

  기왕에 알려져 있던 춘천시 남면 가정리 홍천강가의 큰 바위인 ‘홍무벽(洪武壁)’에 전서체로 “기봉강역 홍무의관(箕封疆域洪武衣冠)”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기자가 봉한 강역이요, 홍무 곧 명나라의 문물제도’라는 뜻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성리학을 지켜내야 한다는 당시 사림의 일념을 드러낸 문구다.

 

  홍무벽은 니산구곡의 제6곡이다. 제1곡 ‘입석’을 비롯해 제9곡 ‘오지소’까지 9곡의 자연에 이름을 지어주고 유인석 선생은 곧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화서학파의 학자들이 물길로 오갔던 니산구곡이 지역의 문화유적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니산구곡의 아름다운 풍광도 보면서 항일 의지를 다진 선인들의 구국 정신을 다시금 떠올린다.

 

 

▲ 몇해전(2010년) 정약용 선생 생가와 두물머리를 거쳐서 이항로 선생 생가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가는 길 ⓒ  한국의산천

  

  86번 국지도를 따라 양평의 여느 지류와 같이 맑고 깨끗한 수입천을 거슬러 오르면, 이번엔 대나무처럼 곧고 아주 꼬장꼬장한 한 명의 선비를 만나 뵙게 된다.

바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위정척사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재야지식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선생이다.

 

 

▲  이항노 선생 생가 (유형문화재 제 105호) ⓒ 2015 한국의산천 

  전형적인 사대부의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 선생의 생가는 노문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그리 넓지 않고, 마을 앞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는 맑은 수입천이 휘감아 흐르고, 한강기맥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첩첩으로 펼쳐진다. 화서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여 벽계구곡을 이름 짓고 즐겼다. 

 

벼슬보다 학문을 선택한 이항로 선생 

 

 이 집은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이항로(1792 1868)선생이 살던 곳이다. 선생은 순조8년(1808) 한성시에 합격했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고종3년(1866) 병인양요때는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 화서집, 화동역사합편강목등이 있으며 이 집은 선생의 부친 때 지은 집으로 약 300여년이 되며 선생이 탄생하여 일생을 보낸 곳이다.

 

 이항로(李恒老, 1792년~1868년)는 조선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본관은 벽진이며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팔사략'을 배웠다고 한다. 1840년 헌종 때 경사(經史)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벽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4년 고종 때 좌의정 조두순의 추천으로 장원서 별제·전라도 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저서로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 위의 수제자가 모두 대단한 명성을 떨치신 분들이다 ⓒ 2015 한국의산찬

 

 화서 이항로 선생의 생존 시기는 정조 16년 부터 고종 5년에 이르는 우리 민족 최대의 격변기였다. 사림의 유교입국으로 500년간 지탱하여 온 조선조가 18~19세기로 넘어 오면서 서세의 동점이라 일컬어 지던 군사적 위협과 함께 실학의 대두,동학의 발생, 서학의 전래라는 혼란속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방법론을 두고 개화 세력과 수구세력의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화서 선생은 벼슬을 외면하고 초야에 묻혀 문도들에게 도학적 의리사상을 전수하고 실천케 하였던 것이다. 내적으로 도덕의식이 피폐하고 외적으로 외세의 침략이라는 국가 존망지추의 위기 상황에서 순선을 지향하고 대의를 실천하는 교육에 전념한 화서 선생은 우국충정의 일심으로 직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의리론의 대표자로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불을 지피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학덕은 점차 조정에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눈썹 하나 꿈적이지 않았다.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다른 벼슬도 물리친 채 이곳 벽계에 머물며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매월 한 차례씩 강론하였는데, 늘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의리에 관한 강론은 비유가 풍부하여 마치 용호가 뛰는 듯 통쾌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다.

 

  1864년(고종 1) 장원서별제, 그 후 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모두 완곡히 물리쳤다. 그러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생은 분연히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이 ‘항거 상소’로 화서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으나, 곧바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조세제도의 실정을 비판하고, 만동묘의 재건을 주장하다가 결국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이태 뒤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을 주류로 해서 양명학, 경학, 실학 등이 잇따라 등장하며 펼쳐졌다. 이 가운데 성리학은 크게 퇴계 이황을 잇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계승한 기호학파로 나뉘게 되는데, 19세기에 이르면 중요한 학자를 중심으로 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 당시 유림은 우두머리의 학문적 내용과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기호 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와 영남 계열의 한주학파(寒洲學派) 이렇게 4개 학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화서학파의 태두인 화서는 서양 충격에 의한 서구 열강문화를 미개한 이질문화라고 보고 서구문화 수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다른 학파와 달리 화서학파의 유생들은 개항 전후 현실대응론부터 일제시대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본격적인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국충절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 방법도 모색했다.

 

  그 당시 항일운동에 몸 바친 많은 학자와 애국지사들 중에 화서학파 출신이 많았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을사조약 이후 1906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 붙잡힌 뒤 일본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을 비롯해 조선 13도 의병도총재를 지낸 의암 유인석, 위정척사파 학자인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외세 배척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능지처참 당한 문숙 홍재학, 병인양요 때 강화 삼랑성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양헌수 장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등이 대표적인 제자로 꼽힌다. 

 

 

 

 

▲ 홍천강 모곡 유원지와 황골 마곡 유원지 중간에 자리한 (배바위가 위치한 ) 소남이섬 전경 ⓒ 2015 한국의산천

 

 

▲ 니산구곡(尼山九曲) 중 9곡 오지소(천근암) ⓒ 2015 한국의산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 재 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춘향이 마음>(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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