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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5. 이규보의 생애와 업적

by 한국의산천 2016. 1. 1.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자랑스러운 그 역사의 인물을 찾아 떠나봅니다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다섯번째 이야기 이규보 묘 답사 [2016 · 1 · 1 · 금요일 · 맑음 · 한국의산천]

 

가족과 함께 일출을 보고 강화도로 답사 라이딩을 떠났다

2016년 올해는 내가 61세 회갑 (回甲)을 맞는... 참 좋은 새해를 열다.

 

답사 라이딩 순서  

대명리 주차장 출발(초지대교 건너서 ) ~ 온수리 성공회 ~ 이규보 묘 ~ 철종 외가 ~ 관청리 성공회 ~ 철종 용흥궁 답사 ~ 강화성 ~ 고려궁지. 규장각~ 연미정(눈길로 인하여 생략)~ 강화대교 ~ 대명항 (54km)

 

고려후기 무인집정기, 격동의 삶 살다간 문신 문장가 이규보 선생

 

※ 이곳은 소소한 제 일상의 기록과 답사를 통하여 제가 공부하는 블로그입니다   

이규보 선생에 대하여 글은 저의 짧은 필설로 표현하기에는 가당치도 않기에 출처를 밝힌 전문가의 기고문과 논문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 성공회 성 안드레아 성당에서 강화읍 방면으로 약 5km 정도를 가면 이규보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그리로 이동하겠습니다

▲ 성공회에서 다시 온수사거리로 나와서 강화읍 방면으로 이동합니다

 

 이규보 선생의 고향은 개성(개경)

 

    이규보 선생의 고향은 개성(개경)이다. 그런 그가 강화도에 정착한 시기는 65세 때이다. 1232년 고려왕조가 강화천도를 단행하며 강화도로 와 하음현(현 하점면)에 거주, '산관'으로 재직하며 몽골에 보내는 국서 작성 등을 담당한다. 70세(1237) 때 정2품인 '문하시랑평장사'로 관직에서 물러난 백운은 74세(1241)에 별세, 지금의 길상면 진강산 동쪽 언덕에서 잠이 든다.

 

  이규보 부친의 고향 여주에는 이씨 일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호장, 교위(校尉) 등의 향직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배경으로 그의 부친은 개성에서 관리노릇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친은 개성의 서교(西郊)에 초당과, 전장(田莊)을 겸한 조그만 별업을 소유했는데 훗날 부친의 사후에 그것은 이규보에게 상속되었다. 게다가 집에는 7, 8명의 가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의 집안은 일정한 토지와 노예를 소유한 지방의 신흥 중소지주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나 22세때 과거시험(사마시)에 합격한 후에도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지 못해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에 관직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은 불우한 젊은 시절은 그가 문학수업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 되기도 한 것 같다. 그는 개성의 천마산에 거처하면서 '백운거사어록'과 '백운거사전'을 지었다.

 

  32세의 이규보는 최충헌이 초청한 시회에서 발탁돼 전주의 사록겸장서기로 부임한다. 이후 직한림원, 우정언, 우사간 등의 관직을 맡다가 52세 때 계양도호부 부사를 맡았으며 이듬해 최우가 집권하면서 약 10년 간 예부 등의 관청에서 안정된 관직생활을 하며 많은 작품을 쓴다. 

 

  노년엔 시와 거문고, 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도 불린 이규보의 역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그가 눈을 감은 1241년 아들 '함'이 53권 13책으로 발행한 시문집이다. 이 책은 1251년 손자 '익배'가 교정, 증보해 개간했으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영조시대에 복간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이상국집>은 그가 강화에 들어와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한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자신을 '시마'(詩魔)라고 표현할만큼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가 <동국이상국집>과 같은 책을 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백운거사' 이규보는 65세때인 1232년 강화도에 들어와 1241년 눈을 감을 때까지 술과 시, 거문고를 벗하며 명문을 남겼다

 

  특히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에 수록된 '동명왕편'은 장편의 민족서사시로 이규보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동명왕편은 고구려의 건국역사를 서사시로 빚어낸 작품이다.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는 과정으로부터 주몽의 탄생과 관련한 신화를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시련을 이기고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과 함께 임금들이 어진 마음과 예의로 나라를 다스려줄 것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역사를 장구한 서사시로 풀어낸 것은 고려의 민족적 자존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민족의 영웅인 동명왕의 발자취와 생애를 드러냄으로써 고려의 수준 높은 문화와 역사적 정통성, 민족적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와 일연의 <삼국유사>(1281)의 중간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동국이상국집>의 서문은 <구삼국사>(舊三國史·고려 초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내기 이전에 삼국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란 우리나라 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시 속에서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전집 권20에 수록된 <국선생전>(麴先生傳)은 술을 의인화해 술과 인간과의 미묘한 관계를 재밌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이다. 거북을 의인화한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에선 어른도 간혹 실수가 있음을 지적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삼가할 것을 메시지로 전한다. 이들 '가전체문학작품'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설화와 소설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글· 경인일보 김진국 기자]

 

이규보의 저서 및 작품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 〈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에 〈모정기(茅亭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 이규보 선생 묘 ⓒ 2016 한국의산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번지 이규보의 묘는 석물과 더불어 전형적인 고려시대 무덤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시대에 다시 이런 분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나무가 담장을 이루듯 도열하고 남향을 향해 자리한 편안하고 포근하게 보이는 자리입니다

고려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묘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위치해 있으며 인천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돼었다

 

▲ 중국의 두보보다 더 한수위의 이규보 선생 묘를 찾아서 ⓒ 2016 한국의산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번지 이규보의 묘. 그의 묘는 농로가 끝나는 지점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격동의 삶, 이규보의 생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 후기 무인집정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문장가였다. 문벌귀족의 폐단이 극에 달해 무신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168년(의종 22)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룻밤사이 엎어지고 일어서는 무인들의 권력 다툼,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과 전염병, 전국 각 지역에서의 민란, 몽고의 침입과 강화로의 천도 등 평생을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중후반까지 우리 근현대의 전철과 닮아있다. 격동의 삶이었다. 어려서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으나, 세 번의 실패 후인 22살 때 네 번째 과거에서 겨우 급제했다. 관직에 나가기 위해 급제 후 10년을 기다려야 했고, 관직에 나가서도 파면과 좌천, 유배, 복직 등을 거듭하며 60대 후반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봉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끼니를 굶는 지경에도 그는 국정 전반을 책임지며 한 시대의 모든 책무를 어깨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런 이규보는 고려 전기에 편찬된 역사서인 ‘구삼국사’를 토대로 고구려 동명왕의 신이(神異)하고 영웅적인 사실을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서사한 ‘동명왕편’을 저술한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인저(仁氐)였다. 사마시를 앞두고 있던 22세 때인 1189년(명종 19) 네 번째의 응시를 앞두고 꿈에 장원할 것을 알려준 규성(奎星)의 예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규보(奎報)로 고쳤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며, 본관은 황려(黃驪, 여주)였다. 아버지 이윤수(李允綏, 후에 벼슬은 호부낭중)와 울진현위를 지낸 김시정(金施政)의 딸인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본관을 여주에 두고 있었지만, 서울에서 살던 경관자제(京官子弟)였다.

 

  그렇다고 본관을 지방에 두고 개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문벌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이화(李和)는 무반직인 교위를 지냈고, 증조부 이은백(李殷伯)이 황려현의 향리(鄕吏)을 지냈다. 처가는 대부경(大府卿)을 지낸 진승(晉昇)이었다. 그의 집안은 조부 때 개경으로 이주한 지방 향리 출신의 중소지주였다.

이것은 이규보가 무인집권기에 출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원인이기도 했다. [출처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 이규보의 초상을 모신 유영각 전경 ⓒ 2016 한국의산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신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아호가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다. 시와 거문고, 술 이 세 가지를 몹시 좋아한다는 뜻이다.

시와 산문에 두루 능했지만 특히 산문이 여유가 있고 익살스러워 즐겨 읽을 만하다.

 

 

▲ 앞의 전망이 평화롭고 아늑한 곳에 모셔진 이규보 선생 묘역 ⓒ 2016 한국의산천  

 

2005년 08월의 문화인물 : 이규보 
 
  생애 및 업적 
 
 고려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이었던 무신 집정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간 신흥 사대부이자 문인으로, 자신의 문학역량으로 나라를 빛내고자한 ‘이문화국(以文華國)’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인 이규보(李奎報)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전개한다. 

 

  이규보(고려 의종 22년, 1168 ~ 고종 28년, 1241)는 고려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이었던 무신 집정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간 신흥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유교적인 현실관을 견지하면서도 민속신앙과 선도사상(仙道思想)에도 깊은 관심을 지녔으며, 마침내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처럼 그는 폭넓은 사상과 신앙의 층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인정받았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국가적 요청에 부응하여 나라를 빛내는 ‘이문화국(以文華國)’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동방의 시호(詩豪)라고 불리는데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훌륭한 천품을 바탕으로 국문학사상 고려 당대까지로는 가장 방대한 규모의 개인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남기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방대한 시문은 한국한문학의 사적 전개에 있어 그 양식의 선택에 있어서나 내용상의 다양성에 있어서나, 작가의식의 확고함에 있어서나, 특히 논리성을 중시하는 서사적 성격, 그리고 시학(詩學)에 새로운 입장을 수립한 점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또 그는 당대 고려 문풍의 추세를 수용하면서도 개성적인 어의창신론(語意創新論)을 주장하였고, 중국문학의 수용, 변개와 더불어 당대 우리 문학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지향해야 할 방향은 어느 쪽인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문학사상을 세워 나갔다. 특히 이규보는 ‘시마(詩魔)에 붙들려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고백처럼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수많은 실제 창작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학사상을 펼쳐보였기에 그의 문학사상이 가지는 의의는 더욱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 안에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폭 넓은 관심과 사랑이 담겨 있고, 이를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시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동명왕의 이야기를 <동명왕편>이라는 장편 서사시로 이루어낸 것은 이규보의 민족의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또한 이규보의 관심사는 당대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비참한 실정에 까지 이르렀다. 특히 그는 당대 무신 집정기가 내포하고 있었던, 대내 · 외적인 온갖 시련과 난제들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를 문학과 정치를 통하여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실천의지를 보였던 중세 지식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를 좋아했다는 삼혹호 선생 백운거사 이규보 묘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니 참 평온한 마음이 드는 그런곳이다 ⓒ 2016 한국의산천  

 

 

▲ 이규보 선생의 문학비 ⓒ 2016 한국의산천

 

[사색의 향기] 이규보 '색유(色喩)'의 메시지
 일가를 이루어 행세하던 사람들이 정욕 때문에 인생을 그르친 일이 많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다스리기 힘든 것이 정욕이다.

 

 

 

◀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색계의 문제에서 영웅과 열사가 없다(色戒上 無英雄烈士)”는 옛말이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사람이라면 남녀의 욕정이 없을 수 없기에 마음을 수양하는 학자들은 여색(女色)을 멀리하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색유(色喩)’라는 글을 지어 “검은 머리와 흰 피부를 예쁘게 꾸미고서 마음과 눈짓으로 유혹하여 한 번 웃으면 나라가 휘청거린다. 보고 만나는 사람은 다 어찔해지고 다 혹하게 되니 형제나 친척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그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라 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을 망치고 사회와 국가까지 멍들게 한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규보는 “아리따운 눈동자는 칼날이요 둥그런 눈썹은 도끼며 도톰한 볼은 독약이고 매끈한 살갗은 좀벌레다”라고 했다. 도끼로 찍고 칼날로 베고 좀벌레가 파먹고 독약으로 괴롭히면 사람이 살아날 수 없으므로 여색을 사람 죽이는 도적과 같이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강도처럼 보이겠으며 자신을 죽일 것이라 여기겠는가? 이규보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천하에서 가장 못 생긴 여인의 얼굴을 수천 개, 수만 개 만들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덮어씌우고, 잘 생긴 여자를 유혹하는 인간은 눈알을 도려낸 다음 바르고 곧은 눈으로 바꾸며, 음란한 자는 철석간장(鐵石肝腸)을 만들어 그 뱃속에다 집어넣을 것이라 했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아름답게 꾸민 여인이라 하더라도 똥과 흙을 덮어쓴 것처럼 여길 것이라 했다.

 

  이규보는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하여 거문고와 시와 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고도 여색에 빠지지 않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과격하게 여색을 멀리하는 법을 말한 것이리라. 이규보는 ‘우레 치는 날의 생각(雷說)’이라는 글에서 우렛소리를 듣고서 가슴이 철렁하여 잘못한 일이 없는지 거듭 반성했다면서 이런 일을 소개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다가 화보(華父)라는 자가 아름다운 여인과 마주쳤을 때 눈길을 떼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화보가 참으로 잘못이라 탄식했다. 그래서 이규보는 평소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달려갔지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달려가더라도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반성했다. 그렇게 조심하던 이규보였지만 74세 노령에 어떤 미인과 몸을 비비고 노는 꿈을 꾸었다. 방사(房事)를 끊은 지 오래되었건만 어찌 이리 해괴한 꿈을 꾸었을까 고민하는 시를 남긴 바 있다.

 

  여색을 멀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당나라 여암(呂巖)은 번뇌와 탐욕과 정욕을 끊기 위해 세 자루 칼을 늘 차고 다녔다고 한다. 또 효종은 ‘자경편(自警編)’이라는 책에 욕정을 참지 못한 사람이 늘 부모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서 그 밑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 일화를 들고 의미 있다고 했다. 칼을 차고 다니든가 부모님의 사진을 가까이 두고 있으면 도움될 것인가? 좀 더 솔깃한 방법이 있다.

 

  18세기 학자 성대중은 나이가 예순인데도 피부가 팽팽하고 윤기가 흘렀다. 훤한 얼굴과 하얀 머리카락이 사람들의 눈을 시원하게 하였다. 노인의 기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평생 약이라곤 입에 넣어본 적도 없었다. “사람마다 몸에 제각기 약이 있지만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人人身上 自各有藥 但人不知耳)”라면서 자신의 비결은 약이 아니라 자제력에 있다고 했다. “어릴 적에 병약하여 열대여섯이 되도록 음란한 일을 알지 못했다. 17세에 가정을 꾸렸지만 남녀의 일을 잘하지 못해 1년에 겨우 몇 번만 관계를 가졌다. 쉰이 넘은 뒤로는 아내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게 돼 평생 병이 없어졌으며 아내도 병이 적어지고 밥도 많이 먹게 되고 피부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마침내 부부가 해로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일생 동안 한 번도 처방을 받아 약을 먹은 적이 없지만 아침마다 약을 복용해도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고 하고는 ‘내 약을 내가 먹은 것(吾藥吾服)’에 불과하다고 했다. 남들이 파는 약을 먹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제력이 노화를 막는 비결이라 했다.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자제력이라는 제 몸에 있는 약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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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고종6년(1219). 이규보는 지금의 계양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부임한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이규보는 본래 중앙관직인 '좌시간'이었으나 지방관의 죄를 묵인했다는 이유로 '계양도호부 부사'란 직책으로 좌천되며 계양으로 오게 된다.

 

  그는 이후 13개월 간 계양에 머무르며 '계양 망해지', '만일사' 등 부평지역의 풍광과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45편의 한시로 남긴다. 이규보가 당시 머물렀던 계산동 산 57의 2 관사 자리인 '자오당지'는 계양구 양궁선수단이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 중이기도 하다.

 

부평구 십정동 국철1호선 '백운역'은 '백운거사'였던 이규보의 호를 따 지었을 만큼 계양, 부평은 이규보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규보의 생애·사상·문학

 

김진영(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시마(詩魔)에 붙들린 삶, 이규보의 생애

1) 죽음의 문턱에 섰던 신동(神童)

 

  어린 시절 이규보는 온몸에 돋아나는 종기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 이윤수는 송악사우(松嶽祠宇)로 들어가 산가지를 던져 생사를 점 쳤는데, ‘산다’라는 점괘를 얻었다. 이후 어떠한 약도 쓰지 않고 규보를 그대로 두자, 온몸이 헐고 터져서 얼굴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유모는 아이를 안기 위해 어깨에 흰 가루를 뿌려야 할 정도였다. 어느 날 유모가 아이를 안고 문밖으로 나갔더니 어떤 노인이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천금같이 귀한 아이인데 왜 이렇게 내버려 두느냐’ 하므로 유모가 이를 집안에 알렸으나 그 노인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신인의 예언대로 세상에 나와 문명을 떨친 귀한 아이가 있었으니 이 귀한 아이가 바로 이규보이다.

  『동국이상국집』의 연보에 보면 그는 고려 의종 22년(1168) 12월 16일에 호부낭중 이윤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인저(仁氐)였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아이는 신인의 예언대로 놀라운 재주를 보이기 시작했다. 11세 때는 이미 글쓰기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렸고 그의 놀라운 재능을 살필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해 숙부가 친지에게 자랑하기를 ‘나의 조카는 나이 아직 어리지만 글을 잘 지으니 불러들여 시험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라고 하니 모든 낭관(郎官)이 기쁘게 불러, 연구(聯句)를 짓도록 했다. ‘지(紙)’자를 넣어 짓도록 한 연구에 어린 이인저는


   紙路長行毛學士       종이 길에는 모학사(붓의 별칭)가 줄곧 지나가고

   盃心常在鞠先生       술잔 속에는 국선생(술의 별칭)이 늘 들어 있네


라고 읊어, 주변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이렇듯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던 그는 14세 때, 당시 사학(私學) 12공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최충의 성명재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명재 안에서도 거듭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 문학소년으로서 자질을 과시하였다. 이규보가 공부한 최충의 문헌공도는 당시 12사학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이며, 당대의 뛰어난 수재들의 집합처였다. 그곳에서의 공부를 생각해 본다면, 이규보는 이때부터 경서와 시문을 본격적으로, 또한 학문적으로 익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걸출한 그의 문학적 기상은 유학의 수신적(修身的) 수련에만 얽매이기보다 오히려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이념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문사적 기질 쪽으로 치우쳤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이규보는 16세가 되어 응시한 사마시에 낙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18세, 20세 때에도 거듭 낙방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연보에는 계속해서 낙방한 까닭이 규보가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믿고, 평소에 과거지문을 익히지 않고 풍월만 일삼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규성(奎星)의 예언과 장원급제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역량을 가지고 있던 이규보는 계속되는 과거 낙방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의 문학적 기개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과거에 두 번이나 떨어진 19세 무렵 30여년의 나이를 잊고 사귐을 가졌던 오세재의 소개로 죽고칠현(竹高七賢 : 오세재 · 임춘 · 조통 · 황보항 · 함순 · 이담지 · 이인로)의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다. 오세재가 경주에 간 후 이규보가 죽고칠현의 모임에 참석했을 때, 이담지가 ‘그대의 친구 덕전(오세재)이 동쪽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데, 그대가 대신할 수 있을까?’ 하고 죽고칠현의 일원이 되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규보는 ‘칠현이 조정의 관작이 아닌데 어찌 그 빈자리를 채운단 말인가?’ 하고 반문하며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리고 술만 잔뜩 마시고 그들과 헤어졌다. 당시 죽고칠현의 구성원들은 모두 시단에서 높이 숭앙받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이규보의 지향은 그들과 쉽게 일체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20세까지 지속되었던 과거 낙방의 불운에도 불구하고 규보는 청운의 뜻을 버리지 않고 22세에 다시 사마시에 응시하였다. 이 당시 이규보는 이인저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규보(李奎報)로 개명하게 된다. 규성의 도움으로, 규성의 예언으로 사마시에 장원급제 하였기에 스스로 이러한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는 과장이 열리기 전 꿈을 꾸었다. 촌백성인 듯한 노인들이 마루 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규보에게 이들은 28수(宿)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규보는 그들에게 절하고 공손히 자신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어떤 이가 ‘저 규성이 알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규성은 대답하지 않았고,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잠들었을 때 규성이 다시 나타나 장원 급제할 것을 일러주었다 한다.

  이름을 바꾸고 장원급제한 이규보는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된다. 그의 나이 23세 6월에는 예부시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다. 자신의 천품과 문학 역량에 자신이 컸던 그가 이렇게 낮은 등급으로 급제하게 되자 규보는 하등급의 급제를 혐오하여 사퇴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데다가 부친의 엄한 질책에 그만두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급제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대취하여 하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급제한 과거는 낮으나 어찌 서너 번쯤 과거의 고열관이 되어 문하생을 배출하지 못하랴”라고 하여, 좌객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대처하는 그의 천품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24세 8월에 부친상을 당하자 천마산에 우거하며 자칭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자호하였다. 의지할 곳 없이 세상을 잠시 버리고 떠나온 이때에 <천마산시> 등 많은 시를 지었고, 25세 때는 <백운거사어록>과 <백운거사전>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가 백운을 취하고, 거사를 택하여 자호한 까닭은 백운처럼 거리낌이 없이 물외에 자적하고 거사처럼 도를 닦고자 한 때문이었다.

 

3) 민족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과 이규보의 민족의식


  일부 논객 중에는 이규보를 무신 정권에 영합한 어용시인으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이다. 벼슬에 오르기 위해 남겨 놓은 구관시(求官詩)나, 최씨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총애를 받았던 그의 출사 이후의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런 오해가 생김직도 하다. 하지만 이규보는 결코 쉽게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규보의 나이 26세 때, 그는 『구삼국사』를 얻어 보게 된다. 그는 구전되어 온 동명왕의 사적을 기이하게만 생각해 오던 것에서, 마침내 동명왕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성한 사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결국 그는 <동명왕편>이란 고체시의 대장편 서사시를 지어, 사라지고 있던 우리의 민족혼을 다시 되살리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창작한 배경에는 그가 민중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전하는 동명왕 이야기를 유교적 합리주의 관점에서 괴력난신으로만 취급하는 자세를 떨쳐 버리고, 동명왕과 같은 건국시조에 대한 민중의 신앙을 당대 지식층 ․ 지배층에까지 널리 알림으로써, 당시 고려의 상하계층 모두에게 일체감을 심어 주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몇몇 학자들은 민중적, 민족적 세계관 본연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동명왕편>을 무신 정권에 충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창작한 시기는 최씨 정권 수립 3년 전이며, <동명왕편>의 창작을 통해 우리나라가 성인이 창시한 나라임을 세상에 알리고, 동시에 내우외환에 시달려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던져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4)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이규보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에서는 그의 놀라운 시적 재능을 아끼고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실제로 조정에서 그를 불러 쓰려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무신 정권이 교체되면서, 최충헌의 등장으로 기나긴 최씨 정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규보의 나이 30세에, 당시의 상국 조영인을 비롯한 임유, 최선, 최당 등이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함께 조정에 천거하여 왕의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를 시샘하는 무리가 있기 마련. 이규보의 재능을 시기하고 언젠가부터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있던 누군가가 중간에서 막아 결국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급제한 지 8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결국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토로하였다.


  昔見銀盃嘗羽化        옛날에 은배가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말을 들었더니

  今聞箚子忽登仙        오늘날 차자도 갑자기 신선이 되어 갔구나


  특별한 이유 없이 조정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이렇게 풍자적으로 읊고, 또 <上趙太尉書(상조태위서)>를 써서 그 사유를 호소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이규보의 20대는 급제 후 8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보직을 받을 수 없었던 불우한 시기였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이러한 불행이 오히려 놀라운 창작력의 배경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가 부족하면 다른 방향으로 그 부족함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규보는 천성이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문학적, 문사적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관직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 시기에는 정열적인 시문 창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스스로가 지적한 것처럼 ‘시마(詩魔)’에 얽혀 있는 듯, 평생 시문 창작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살아 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이 시기만큼 정열적인 시문 창작이 가능했던 적이 없었다. 또한 이 시기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웅대한 배경의 장편시가 쏟아져 나왔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젊은 신흥 사대부로서의 원대한 포부와 야망, 열정에서부터, 한편으로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 형세와 이 와중에서 등용되지 못한 불운, 그리고 부친의 사망으로 인한 현실에 대한 괴리감과 허무가 교차되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20대의 젊은 시절은 희망에 가득 찬 시기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높은 벽을 실감하는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규보에게도 이러한 점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규보는 20대의 시련을 그냥 방황으로만 보내지는 않았다. 그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부단히 자기의 포부와 역량 그리고 높은 국가 · 민족적 의식과 사회적 의식을 시문으로 표출하면서 자기를 받아 주지 않는 현실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접근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5)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없네

 

  이규보의 문명(文名)은 갈수록 높아 갔지만, 그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쉽게 실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시마(詩魔)와 함께한 규보에게는 무관의 아쉬움도 시로 달랠 수 있는 행복이 있었다. 관직을 얻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규보의 모습은 그의 시 <무관탄(無官嘆)>에 잘 나타나 있다.

 

常無官常無官         벼슬없어라, 언제나

四方餬口非所歡      떠돌며 밥 비는 것 내 마음 아니요

圖免居閑日遣難      한가한 날 보내기 지루함을 면코자 함이라

噫噫一生            아아 인생이여

一也賦命何酸寒      한번 받은 운명 어찌 이리도 괴로운가


  이규보의 나이 32세 무렵, 당시 절대 권력을 행사한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에 천엽유화가 만개하니, 당대의 명사와 일류시인들을 청하여 이를 완상케 하고 시로 읊게 하였다. 이 자리에 이규보도 부름을 받아 선배 문사인 이인로, 함순, 이담지 등과 더불어 시를 짓게 되었다. 당시의 최고 실권자인 최씨 집정 하에서 이 자리는 이규보에게 있어서 조정에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길이었다. 기실 그간 여러 문신들의 천거도 있고, 들어온 규보의 명성을 생각하며 그를 발탁할 의사가 있었으므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자 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에, 규보의 나이 32세에 이르러 드디어 이규보는 관직에 나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해 6월에 비로소 전주목사록(全州牧司錄)에 보임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첫 관직 생활도 길게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규보가 처음 전주를 다스릴 때 통판낭장인 어떤 이가 탐하고 방자하였다. 규보는 잘못된 점을 그냥 눈감고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10년 만에 오른 자리이더라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공적인 일을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공적인 일로 인해 규보는 여러 번 노여움을 터뜨렸고, 통판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제 마음대로 하려고 들면서 없는 말을 꾸며 규보를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규보는


  偶霑微祿宦江南        우연히 하찮은 녹을 바라 강남까지 갔었구나


라는 시구를 남기고, 12월 관직을 내놓고 돌아와 버린다.

  이제 규보에게 남은 생활은 시작 활동뿐이었다. 결국 그의 생활과 시는 더욱 밀착하여 나누어 볼 수 없는 정도가 되었고, 이때에는 어느 해보다 많은 작품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35세, 여름 5월에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당한다. 또 이해 12월에는 동경[경주]의 운문산 적당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니 그 세력이 대단히 커서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케 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군막에서는 산관, 급제 등을 수제원으로 충당시키려 했으나 워낙 정세가 불리하여 모두들 종군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이때 규보는  “나는 비록 겁이 많으나 국민인데, 국란을 피하고서야 어찌 대장부라고 하랴.” 하고 스스로 종군하여 병마녹사겸수제로서 출정했다. 출정 중에도 그의 시문 창작은 계속되었다. 이때의 작품을 검토해 보면, 출정과 무관한 내용의 시와 반란군 토벌을 읊은 작품의 두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비록 전란 중이었으나 자연과 사물에서 느끼는 정감을 노래한 작품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사회적으로 기틀이 흔들리는 문제로까지 비화된 내란을 하루 속히 진압해서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심정에서 자진 종군하기까지 한 자신의 심회를 피력한 작품도 있다.

  이규보의 나이 37세,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전쟁에 참여하여 개선하였지만, 공교롭게도 논공하는 자리에서 다수의 군사가 포상을 받았으나 이규보는 홀로 빠지게 된다. 이에 규보는,


   獵罷論功誰第一       이번 싸움에 세운 공이 누가 제일인가

   至今不記指縱人       지금도 기여한 사람을 기억조차 않는다네


  라고 읊어 잘못된 논공행상을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공을 제대로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결국 규보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였지만, 돌아와서 아무런 대가를 받을 수 없었다. 단지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또한 지식인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만약 규보가 사사로운 감정이나 구관을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다면, 뒤이은 논공행상에서 빠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구태여 전쟁에까지 나아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의 직분과 책임을 다하려 했던 이규보의 도저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신흥 사대부들이나 문인들이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절실했다. 훌륭한 문명과 뛰어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그러한 재능과 능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 같은 고통스런 삶의 극한점에 이르자 그는 당시의 고관, 재상들에게 구관(求官)의 소청을 글로 올렸다. 그의 나이 38세 무렵이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역량뿐이었기 때문에, 그 글에서 이규보는 오직 자기의 능력을 한번 시험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다음의 글에는 그의 남다른 자부와 버려진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실망하지 않고 지닌 바 큰 포부가 잘 표백(表白)되어 있다.


나는 아홉 살에 처음 책 읽기를 알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시서육경(詩書六經) 제자백가사필지문(諸子百家史筆之文)에서부터 유경(幽經)․벽전(僻典)․범서(梵書)․도가지설(道家之說)에 이르기까지 비록 근원을 파고 들어가 심오한 데까지 탐구하여 깊이 숨겨져 있는 이치를 찾아내지는 못했으나 두루 섭렵해서 정화를 모아 글 쓰는데 응용하도록 마련했고, 또 복희(伏羲) 이래 삼대(三代)․양한(兩漢)․진(秦)․진(晋)․수(隋)․당(唐)․오대(五代)에 걸친 군신의 득실과 국가의 치란(治亂)과 충신 의사 및 간웅대도(奸雄大盜)의 성패, 선악의 자취를 비록 모조리 포괄해서 하나도 빠지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으나 역시 번잡한 것을 잘라버리고 중요한 것을 모아서 거울삼아 보고 외어 읽어서 적절한 때 응용하려고 마련해 두었습니다.

 

  어쩌다 지필을 들고 풍월을 짓게 되면 백운(百韻)에 달하는 장편 거제(巨製)라 할지라도 줄달음 치듯 내달려서 붓이 멈추지 않았고, 비록 금수(錦繡)를 가지런히 늘어놓거나 주옥(珠玉)을 엮어 내 놓은 것 같을 수는 없었기는 하나 그래도 시인의 체재(體裁)는 잃지 않았습니다. 본래 자부함이 이러했으나 종당에는 초목이나 진배없이 썩어버릴 것이 가석합니다. 한번 다섯 치 붓대를 들고 금문(金門)을 지나 옥당(玉堂)에 올라가 임금의 말씀과 의견을 대신하여 비칙(批勅)․훈령(訓令)․황모(皇謨)․제고(帝誥)를 기초(起草)하여 사방에 폈으면 평생의 소원이 풀릴 것이여 마음이 가라앉겠습니다.

 

  어찌 째째하게 몇 두승(斗升)의 녹(祿)을 얻어 처자나 살리려 드는 부류이겠습니까! 아아, 포부는 큰데 재주는 시원찮고 타고난 팔자는 궁박(窮薄)하여 삼십이 되어도 여전히 한 고을의 자리조차 얻지 못하고 외롭고 고생스러운 꼴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이 점은 머리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유학자로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료가 되어야 했고, 남다른 자부심으로 가득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은 괴로울 뿐이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과거에 이미 급제한 처지에서 등용이 되기를 추구한 구관의 노력을 다만 관직을 탐한 허장성세라고 볼 수는 없다.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이 살아온 규보의 30대 행적을 살펴보면, 급제 후 10년 만에 비로소 얻은 관직도 그의 굽히지 않는 천성으로 말미암아 2년도 채 되지 못하여 버렸고, 자진 출정해서 개선했지만 논공에서 누락되는 등 이규보의 출사 길은 거의 막히다시피 하였다. 이에 그는 세상과 자신을 아울러 풍자했던 것이며, 곤궁하여 절망의 극한에 이른 생활상을 누차 당시의 고관 실력자들에게 글로 지어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왕성한 창작활동은 이렇게 불행한 시대에 처했던 자신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며 보람이었다. 실로 과거에 급제한 후 근 20년을 이렇다 할 관직을 얻지 못한 그였으므로, 문학의 명성만으로 자신의 실의를 달래기는 어려웠고 이제는 상당히 초조하기까지 하였으며 생활도 빈궁함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그는 여러 고관들에게 구관의 글을 올려 거의 버려지다시피 된 자신을 애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구관은 결코 아첨이나 비굴한 행동이 아니었고, 재능을 스스로 자부하면서 장부로서의 기개와 포부를 담은 씩씩한 것이었다. 즉, 작은 이익을 탐하여서가 아니라 글로써 국가를 빛내고자 하는 위대한 정신을 토로한 것이었다.

 

6) 끝없는 노력 끝에 찾아온 기회

 

  뛰어난 능력에 비해 쓰임이 없이 묻혀 지내던 이규보의 기다림의 끝에는 찬란한 희망과 행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과 행운은 단순히 운에 의해 이규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일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 꿋꿋이 자신의 재능을 가꾸는데 노력했던 자에게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문단에서는 독보적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겸허하면서도 당당하여 당대의 실력자들에게도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그가 문단에서 존숭되자 절대의 권력자이며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나갔던 무신 최충헌도 다시금 그에게 출사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하였다.

 

  이규보의 나이 38세 때 상국 최선에게 구관의 글을 지어 올렸으나 등용되지 못하자, 그는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매년 그를 첫째로 천거하였다. 마침내 이규보가 40세 되던 해, 진강후 최충헌이 집에 모정(茅亭)을 짓고 당시 일류문사들인 이인로, 이원로, 이윤보 등과 함께 이규보에게 기문을 짓게 하고 유관재상 금의(琴義)로 하여금 우열을 가리게 하였다. 결국 이규보의 기문이 첫째 뽑히게 되고, 드디어 과거에 급제한 지 18년 만에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제수되었다.

 

  이 같은 불우기의 시련과 갈등을 잘 극복하고 오히려 시문의 세계를 통해서 자기를 찾고 생의 긍정적 철리(哲理)를 터득하였던 그는 끝내 버려지지는 않았다. 이후 최충헌과 최우 부자가 그를 중시하여 중용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최상의 후원자를 얻은 이규보로서는 이제 더 이상 관직과 승진에 초조해 할 필요가 없었다. 순탄한 영달의 길을 걸으면서 치국의 경륜을 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씨 집정(崔氏執政)에 대하여 남다른 인식을 가지고 충성스런 협력을 하였다. 즉 그 자신의 생성뿐 아니라, 문약(文弱)하여 무력했던 당시 국가 · 민족에 소생의 길을 열어주는 집정자로 신봉하였던 것이니 다음의 예에서도 그 형편을 알 수 있다.


현후(賢侯)께서 나라를 정제한 초기에 이르러서야 다스리기 어려운 읍에 장서기(掌書記)로 임명하셨습니다. …중략… 천지가 나를 낳았으나 나의 몸을 빛나게 하지는 못하였고, 부모가 나를 길러주셨지만 날개를 붙여주진 못하였습니다. 무릇 나의 살아가는 것은 한결같이 다 공께서 생성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출사 이후 치사(致仕), 임종에 이르도록 최씨 정권이 안고 있었던 당시의 국내외적인 시련과 난제를 극복하는데 있어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렇게 이규보가 관직에 오른 것은 그의 구관 노력이나 처세술에 비롯한 것은 아니다. 알아주는 이 없이도 꾸준히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은 끊임없는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볼 때, 자신의 능력으로 출사의 길에 오른 이규보는 기존의 문신 귀족과는 다른 신흥 사대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7)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꿈을 현실로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관직, 글로써 나라를 빛내는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얻은 규보는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겸허히 자신의 직분에 맞는 행동으로 자신의 꿈을 조금씩 실현시켜 나갔다.

  46세에 당시 실권자인 상국 최우가 연회를 크게 열고 모든 고관들을 초청한 자리에 이규보는 팔품(八品)의 한미한 직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름을 받았다.


  최우는 이규보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대가 문장을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그 실상을 접해 보지는 못했다. 오늘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이인로를 시켜 운을 부르도록 했다. 촛불을 시제로 40여 운에 이르는 시가 완성되자 상국 최우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다음날 상국은 이 시를 들고 진강공[최충헌]에게 찾아가 이규보를 시험해 볼 것을 권했다. 규보가 진강공의 집에 닿자 상국 최우는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답니다.”

하고 집에 사람을 보내 술을 가져오게 하였으나, 술이 미처 이르기 전에 진강후는 벌써 술상을 차려 놓고 함께 마시고 있었다. 상국은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취한 다음이라야 시를 짓습니다.”

하고 술잔을 번갈아 가면서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에 이끌고 진강후 앞으로 나아갔다. 뜰에서 놀고 있던 공작을 시제로 이규보는 상국 금의가 부르는 운에 따라 40여 운에 이르는 시를 지어내자, 진강후 최충헌은 감동하여 어떠한 벼슬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이에 이규보는,

  “제가 지금 8품에 있으니 7품만 제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자, 상국은 계속 높은 벼슬을 이야기하도록 눈짓했다. 이에 돌아와 상국이 높은 벼슬을 원하지 않은 까닭을 묻자 규보는,

  “저의 뜻이 그럴 뿐입니다.”

고 대답했다.

 

  일단 관직에 오른 이상 이규보는 초조할 이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스스로도 믿고 있는 자신의 능력이 있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이문화국’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이 순간, 작은 관직에 대한 욕심으로 높은 꿈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의 뜻이 그럴 뿐입니다.’라는 규보의 말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높은 이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현명한 처세를 통해 이해 12월에는 칠품을 뛰어넘어 사재승에 제수되었다.

  이규보의 나이 48세에 공이 시를 지어 참직(參職)의 품계를 구하자 진강후 최충헌이 그 시를 가지고 송순에게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뜻이 고상한 자라서 품계 올려 주기를 희망하지 않을 텐데 임시로 자신을 굽혀 말한 듯하다. 만약 임금께 주달하여 바로 참관을 제수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니, 송순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그도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고, 여러 사람도 그것을 바랄 것입니다.”

 

  결국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제수된 규보는 자신의 문학역량을 나라를 위해 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규보가 자신의 위치에 안주하고, 부귀와 영달에 빠져 있던 것은 아니다. 48세 가을 공사(公事)가 정체되었다는 것을 참지 못한 규보는 당당하게 당대의 실권자인 최충헌에게 <상진강후서>를 올리게 된다.

  조심스레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가던 이규보에게도 작은 시련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규보는 외방 수령들이 팔관하표(八關賀表)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지만, 오히려 이를 빌미로 탄핵당하여 외직으로 몰리게 된다.

 

  계양에서 일하던 무렵의 이규보는 또다시 찾아온 시련을 감내하며, 역시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기게 된다. 특히 『동국이상국집』 권 15의 고율시는 거의 계양에서의 저작인 것을 보면, 역시 개인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시로써 풀어내는 시마(詩魔)에 잡혀 있는 시인 그 자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계양에서의 외직은 오래지 않았다. 그는 1년여 만에 돌아오게 된다. 

 

  다시 이규보의 벼슬은 날로 올랐다. 그러나 벼슬이 오를 때마다 양사표(讓謝表)를 지어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임금에게 청했다. 하지만 그의 붓을,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끼는 임금은 그를 쉽게 벼슬에서 놓아 주지 않았다. 57세에는 사마시를 주관하여 인재를 발탁하는 직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규보의 순탄하던 벼슬살이는 계양에서 돌아온 지 10년 만에 다시 시련을 맞게 된다. 그해 팔관회 잔치를 열 때, 옛날 규례에 어긋난 일이 있었는데 이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규보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위도로 유배당한다.

 

 위도로 귀양 가던 때, 규보는 배에 오르기 전 친우들이 베풀어 주는 주연에 술이 잔뜩 취해 자신은 배에 오른 줄도 모르고, 곯아 떨어져 실려 갔다. 이때 높은 파도가 크게 일어 배가 아수라장이 되자, 규보는 놀라 일어나 술을 떠 놓고 하늘에 빌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거센 바람이 그치고 물결 또한 잔잔해졌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규보가 하늘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64세에 그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던 도중에 죽주(竹州) 만선사(萬善寺)에 들렀다가 그가 일찍이 신유년(그의 나이 34세)에 지어 놓은 시구를 다시 보게 된다.


  好在靑山色    푸른 산색 좋이 있으니

  休官欲重尋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찾아올 거야


  이규보는 천품이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관직에의 뜻이 높았다. 그런 와중에 이곳에 다시 돌아오리라 예언한 듯한 자신의 시를 보게 되니, 이는 정말 자신의 미래를 시로써 예언한 것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이규보의 재능은 그를 고향 땅에만 묶어 두지 않았다. 그해 7월에 다시 조정에 부름을 받았고, 9월에는 호병에 대비하고자 백의로써 보정문을 지켰다. 이때 그는 특별한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몽고에게 통하는 서표와 문첩은 모두 다 그에게 위촉되었다. 즉, 규보의 높은 문학적 재능은 언제 어디서나 국가의 쓰임을 받았으며, 이는 규보 본인 스스로 원하는 이문화국의 뜻을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나이 65세 이후에는 계속되는 몽고의 침입으로 결국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고, 몽고와의 외교관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부각되던 시점이었다. 규보의 벼슬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도 계속 올라 조정의 중요 직책을 맡게 된다.

 

 규보의 나이 69세 5월, 춘장(春場 : 봄에 실시되는 과거)의 지공거[시험관]로 선임되어, 인재들을 발탁하였다. 

  그해 12월에 임금에게 간곡한 걸퇴표(乞退表)를 올렸으나 고종이 보류시키고, 내시 김영초를 보내어 복귀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공은 병이 위독함을 칭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진양후[최우] 역시 그의 호적의 나이를 줄이며 만류하매 부득이 11월에 일어나 다시금 조정에 나아갔으나, 누차 시를 지어 사퇴할 뜻을 보였다. 규보는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수 없는 자신의 심정을 늘 이렇게 읊었다고 한다.

 

  有面不敢擡    얼굴이 있어도 감히 바로 들 수 없으니

  慚愧已不少    부끄러운 일이 벌써부터 적지 않구나


  70세에 이르러 칙명을 받들어 <동궁비주시애책>을 지었고, 다시 간절한 걸퇴표를 올렸다. 드디어 12월에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란 직책으로 치사(致仕)하게 된다. 하지만 높은 그의 문명과 재능은 그를 늙어 은퇴한 재상으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국가의 중요한 문서제작은 모두 그의 몫이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이해에도 그는 칙명을 받들어 대장경각판에 대한 군신기고문을 지었다.

 

 그 이듬해에도 국가의 모든 공식 문서는 규보의 몫이었다. <상몽고황제표장>, <송진경당고관인서>를 지었고, 72세 때는 <상몽고황제표장>등을 짓는 등 몽고와의 왕래 서 · 표를 전담하였다. 국가의 존망이 목전에 있는 중요한 시기에 규보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통해 나라를 빛내고 또한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74세(고려 고종 28년) 7월, 국가의 원로인 그가 병으로 눕게 되니 진양공 최우는 이를 듣고 명의를 보내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진양공은 이규보가 평생에 지은 시문을 거두어 문집 간행을 서둘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9월 2일 운명하였다. 평생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갈고 닦아 꽃피운 인생이었다.

 

 이규보는 40세 이후 조정에 올라 비교적 순탄한 길을 밟아 올라가며, 자신의 뜻을 펼쳤다. 또한 그는 무려 네 번이나 시관이 되어 수많은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정말 빛나게 된 것은 이규보가 조정에서 정사를 위해 이루어지는 모든 서 · 표를 도맡았고, 그야말로 ‘관각문학’의 중추적 존재로서 이문화국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특히 몽고와의 항쟁으로 국권의 운명이 흔들리던 시절, 몽고와의 통화서표문은 거의 모두 그의 손에서 지어졌다. 그가 젊어서부터 꿈꾸던 ‘이문화국’의 이상을 국가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이 시기에 구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의 수차에 걸친 내침은 미증유의 국난이었고, 고려는 포악하기 그지없는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당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고려는 끝까지 몽고에 항쟁하였고, 마침내는 육지를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하기까지 하면서 계속 대항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인 고려왕조로서는 항쟁하는 한편, 일면 외교적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위협당하는 입장에서 몽고와의 외교관계를 전담하다시피 한 이규보의 고민이 얼마나 컸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시기의 그의 생애는 관운이 탁 트여 영달이 절정에 달하였으나, 만년에 갈수록 북방민족과의 투쟁으로 국가 형편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관직이 높아질수록 그만큼 그가 걸머져야 할 책임과 시련도 막중하고 가혹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몽고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규보는 고려를 대변하는 입이었다. 또한 그의 문장은 표한한 몽고족의 심금까지 울리는 바가 있어서 고려의 국체를 존속시킨 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규보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이문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꽃피웠다. 붓의 힘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사용한 것이다. 평생을 시마에 붙들리고, 시와 거문고, 술에 빠져 산다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이름 붙인 천생 시인이었지만, 결코 자신만을 위하는 시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운거사는 그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노래한, 세월을 넘어 울림이 큰 대시인이라 하겠다.

2. 글을 쓰는 이유, 이규보의 문학사상

 

  1) 연정이발(緣情而發), 사물에 대한 감흥의 발로


이규보는 평생 시를 놓지 않았다. 높은 관직에 올라서도 혹은 귀양을 가거나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도 결코 시를 멀리 두지 않았다. 이규보는 이런 자신이 시마에 붙들려 있다며 자신의 천품을 인정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과 문학사상을 드러냈다.

이규보는 글쓰기의 근원, 즉 창작의 근원이 정(情)에 있고 이러한 마음의 격동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 글이란 감정에 연유하여 발로되는 것이므로, 마음 속에 격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서 가히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는 시문을 짓는 것이 인위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했다. 사물에서 일상에서 느끼는 감흥 때문에 쓰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고 했다.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되는 것이 시가 아니고 일단 ‘시마(詩魔)’에 매이면 병중에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그의 시세계였던 것이다.


나는 본래 시를 좋아한다. 전생의 빚이라고는 하지만 병중에는 더욱 혹애(酷愛)하여 보통 때보다 배가(倍加)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그래서 이것 역시 병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시벽(詩癖)>편을 써서 뜻을 나타낸 일이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스스로 슬퍼한 내용이다. 또 매번 식사는 몇 숟갈에 불과하고 오직 술만 마실 따름이다. 이를 항상 근심으로 여겼는데 『백낙천후집(白樂天後集)』의 노경작(老境作)을 보니 그 대부분이 병중작이었고 음주 역시 그러했다.


<차운화백낙천병중십오수 병서(次韻和百樂天病中十五首 幷序)>에서 밝힌 위의 고백을 보면, 백낙천이나 이규보 모두 천성적 시인으로 감흥이 일어날 때마다 시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는 단순한 감흥의 발산일 수 없고, 시문학으로서의 오묘한 자족적 세계가 있고 또 그렇게 되도록 형상화해야만 하기 때문에 천고에 남을 시경(詩境)을 개척하고 창조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심간을 깎으며 여위는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 것이다.

쓰기 시작하면 괴롭지만,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고, 한 순간도 시를 잊으면 살 수 없는 이규보의 이같은 시벽(詩癖)은 마침내 시마(詩魔)에 대한 관심과 대결로 이어진다.


詩不飛從天上降  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아니련만

勞神搜得竟如何  애태우며 찾아냄은 무슨 뜻에선가

好風明月初相諭  좋은 바람 밝은 달 처음엔 서로 즐기지만

着久成淫卽詩魔  오래되면 흘러나니, 이게 바로 시마라네

 

시마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를 궁구한 다음, 마침내 자신의 심간을 다 깎게 하는 이 시마를 물리칠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시마의 죄를 조목조목 듣고 이를 쫓아내려는 글을 쓰기까지 하였다. <구시마문효퇴지송궁문(驅詩魔文効退之送窮文)>이 그것인데, 열거된 시마의 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둘째, 시는 조화 · 신명의 영묘함을 누설한다.

셋째, 시는 거침없이 취하고 읊어 끝이 없이 자부심을 갖게 한다.

넷째, 시는 상벌을 멋대로 한다.

다섯째, 시는 영육을 다 여위게 하고 상심시킨다.


 이렇게 5가지 죄목을 들어 저주하고 쫓아버리고자 했다. 물(物)에서 감흥을 느끼니 들뜨지 않을 수 없고, 물(物)의 본질을 캐고자 하니 자연히 숨은 비밀을 누설하게 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자부하게 되고 물(物)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함을 알 게 되니 자연 시비를 가려 상벌을 내리게 될 뿐더러, 이 같은 시의 창조가 결코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영육이 야위고 상심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꿈속에서 시마의 항변을 듣게 된다. 즉 이규보가 ‘이규보’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 아니냐는 항변이다. 따라서 시문의 공효를 입은 것이 사실이고, 여타의 그의 실수야 시의 잘못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규보는 이 같은 시마의 주장과 항변에 승복하고 오히려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결국 시문을 통하여 드러난 이규보의 문학사상의 일면은 시의 본질이 감흥[흥취]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물의 본원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는 곧 연정이발(緣情而發)의 문학관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2) 증언으로서의 문학


한편 이규보는 문학이 증언이기도 해야 한다는 문학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가 한창 젊은 시절인 26세 때에 국가 · 민족의식의 바탕에서 지은 영웅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는 병서(幷序)가 붙어 있다. 거기에서 그는 동명왕 사적이 잊혀져서는 안될 신성한 사실이고, 따라서 우리나라는 실로 성인이 창시한 나라임을 증언하려는 사명감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가 얘기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이었는지 모른다. 지난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환(鬼幻)으로만 생각했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공부식(金公富軾)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 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닐까. 당현종본기(唐玄宗本紀)와 양귀비전(楊貴妃傳)에는 방사(方士)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갔다는 일이 없는데, 오직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그 일이 인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 기록했다. 저것은 실로 황당하고 음란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인데도 오히려 읊어서 후세에 보였거든,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규보에게 동명왕 이야기는 더 이상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명왕 이야기는 역사가에게는 단순한 사실의 기록일 수 있고, 일부 유학자(儒學者)에게는 신이하고 괴이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드러낸 이야기이겠지만, 규보에게는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는, 믿음의 해석을 통한 증언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현실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여 증언한다면, 문학인은 현실적인 사실의 기록 이상의 재해석된 기록을 남기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현실적 사적까지도 시인은 사실 이상의 진실로 증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학의 서술이 역사기술과는 엄연히 다른 점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듯 하면서도 사실 그 이상의 것이 되게 하는 작가의 관념적 맥락의 작용에 있다는 점은 결국, 문학의 독특하고도 본질적인 성격이 된다.

한편 이규보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당대 고려사회의 어지러운 사회상과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 농촌의 비참한 실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대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虎狼雖虐不傷雛        호랑이, 이리 사나워도 제 새끼 상치 않는데

何嫗將兒棄道途        어느 아낙이 아이를 길에다 버렸을까

今歲稍穰非乞食        금년에는 조금 풍년이라 궁핍하지 않은데

也應新嫁媚於夫        어느 개가 여인이 남편에게 잘 보이려 함인가


若曰今年稍歉肌        금년에 흉년들어 굶주린다 한들

提孩能喫幾多匙        어린 자식이 먹으면 몇 술이나 먹으랴

母兒一旦成讐敵        하루 아침에 모자가 원수가 되었으니

世薄民漓已可知        각박한 인심 알 만하네

 

위의 두 작품은 <노상기아(路上棄兒)>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고려 후기 비참한 농민들의 실상은 사나운 호랑이, 이리보다 못한 존재로 비유된다. 냉혹한 맹수들도 자신의 새끼들은 거두어 먹이는데,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은 길에다 아이를 버릴 정도이다. 이규보는 이러한 비참한 실상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호랑이, 이리와 같은 동물의 처지에 비유하고는 있지만, 동물보다 못한 백성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노상기아(路上棄兒)>가 이렇게 다분히 비판적 언사의 직설적 표현으로 비정한 모정과 비참한 민중의 사회상을 고발한다면, 다음의 <망남가음(望南家吟)>같은 작품에서는 사치가 극에 달한 지배층의 삶과, 피폐가 극에 달한 민중의 삶의 양극화 현상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南家富東家貧        남가는 부자요, 동가는 가난한데

南家歌舞東家哭      남가에선 가무 흐드러지고 동가에선 곡성 구슬퍼라

歌舞何最樂          가무는 어찌 저리도 즐거운가

賓客盈堂酒萬斛      손님이 마루를 메우고 술은 만곡을 넘네

哭聲何最悲          곡성은 어찌 저리도 구슬픈가

寒廚七日無烟綠      냉냉한 부엌에서는 이레토록 연기 한번 안오르네

東家之子望南家      동가의 가난한 사람, 남가를 바라보면서

大嚼一聲如裂竹      대를 쪼개듯 한 큰소리 내지르네

君不見石將軍        너희는 알지 못하는가, 석숭의 일을

日擁紅粧醉金谷      날마다 미희를 끼고 금곡에서 취해 지냈지만

不若首山餓夫        백이숙제의 맑은 이름이

淸名天古獨          千古에 빛남과 같지 못한 것을

 

이처럼 이규보는 문학이 사실과 그 이상의 역사상의 교훈, 황폐한 삶의 실상까지 두루 증언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문학사상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감흥에서 시의 본원과 본질을 추구하였다면, 증언을 통해서는 시인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를 실증하였다고 하겠다.

 

3) 어의창신론(語意創新論) ; 시를 쓰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시어


이규보의 문학사상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그의 작시론(作詩論)이다. 이규보 시문 창작론의 핵심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과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글은 홍만종이 엮은 ?시화총림(詩話叢林)?의 첫 머리에 실려 있는 ?백운소설(白雲小說)?에도 시화로 재편성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 이규보 작시론의 핵심을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 시이의위주(詩以意爲主), 시의 여러 체격(體格), 시의 탁마(琢磨)로 나누어 살펴보고, 끝에서는 이규보의 어의창신론(語意創新論)을 신의(新意)와 신어(新語)로 나누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①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

 


시에는 아홉 가지 좋지 못한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한 편 안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귀신을 수레에 가득 실은 체’이다. 옛 사람의 의경을 따라 쓰는 것은 잘 훔쳐 쓴다 해도 나쁜데, 훔쳐 쓴 것도 잘 되지 않은 것은 ‘선도둑이 쉽사리 잡히는 체’이다. 근거없이 강운(强韻)을 쓰는 것은 ‘센 화살을 당겨내지 못하는 체’이며, 자기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 압운이 지나치게 어긋난 것은 ‘술을 지나치게 마신 체’이다. 험자(險字)를 써서 사람을 곧잘 미혹시키기 좋아하는 것은 ‘함정을 만들어 소경을 이끄는 체’이고, 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하는 것은 ‘남을 무리하게 자기에게 따르게 하는 체’이다. 상말을 많이 쓰는 것은 ‘시골 사람이 모여서 떠드는 체’요, 구가(丘軻:공자와 맹자)를 범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존귀한 분을 범하는 체’이며, 수사가 거칠어도 깎아 버리지 않는 것은 ‘잡초가 밭에 그득한 체’이다. 이러한 좋지 못한 체들을 면할 수 있는 연후에야 함께 시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제시한 ‘구불의체’ 즉 ‘잘못된 시의 아홉 가지 체격’은 이규보 자신이 시를 창작해가는 가운데 체험으로 깨닫고 또 깊이 사색하여 체득한 바로서, 시의 여러 가지 병폐를 들어 이를 모두 극복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이규보는 평생에 걸쳐 시마(詩魔)와 함께 살아왔기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시작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그의 문학사상은 사물에 대한 감흥의 발로라는 연정이발(緣情而發)로 설명되고, 시인은 그 어느 사람보다 타고난 천품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규보는 누구보다도 많았던 시작의 경험을 통해 좋은 시와 나쁜 시를 분별하고, 좋은 시를 쓰는 방법을 터득해 낸 셈이다.

또한 이규보의 작시법은 오늘날의 비평과는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비평가가 창작을 겸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비평작업만을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비평가도 있는데, 당시에는 비평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가 오늘날처럼 존재하지는 않았으므로, 비평활동 역시 시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것은 문학에 대한 시인의 안목과 창작시의 고뇌를 술회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② 시이의위주(詩以意爲主)


시는 의경(意境)이 주가 되므로 의경을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경은 또 기(氣)가 주가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경의 심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고 의경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 심후(深厚)한 의경이 함축되어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볼만하나 다시 씹어 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그렇기는 하지만 먼저 압운을 해봐서 의경을 나타내는 데에 방해가 되면 고치는 것이 좋다. 남의 시에 화작(和作)하는 데에 있어서만은 험운(險韻)이 있으면 먼저 운을 달 자리를 생각한 후에 의경을 배치한다. 구에 대구를 만들기 어려운 게 있어서 한참 침음해도 쉽사리 얻어지지 않으면 곧 버려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구상하는데 있어 생각이 깊고 편벽하면 거기에 빠지게 되고, 빠져 버리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미혹하게 되고, 미혹하게 되면 고집불통한 폐단이 생긴다. 출입왕래 하는데 있어 변화가 자재해야만 원숙의 경지에 도달한다. 때로는 뒤 구로 앞 구의 폐단을 구하는 수도 있고, 한 글자로 한 구의 안정을 돕는 수도 있으니 이 점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규보가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가장 앞세우고 있는 문제로서 한편의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이 ‘설의(設意)’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의(意)란 기(氣)를 위주로 하는데, 그것은 타고난 천분(天分)이요 성정(性情) · 기질(氣質)이기 때문에 결국 천품(天稟)에 딸린 것이어서 인위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시인의 천부적 재질을 중시하였고, 결국 하늘이 준 재기를 타고 나야만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자신의 작시법에서 새로운 생각(新意)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규보는 신의를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각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구상할 것과 함께, 단순히 새로운 생각에만 집착하지 말고 변화 자재하여 원숙의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주장하였다.

 

③ 시의 여러 체격(體格)


순전히 청초(淸楚)하고 고삽(苦澁)한 것만을 쓴 체(體)는 산인(山人)의 격조이다. 전적으로 연려(姸麗)한 것만으로 전편을 꾸미는 것은 궁정(宮廷)의 격조이다. 오직 청경(淸警) · 웅호(雄豪) · 연려(姸麗) · 평담(平淡)한 것을 섞어 쓸 수 있게 된 연후라야 체(體)와 격(格)이 갖추어져서 남이 한 가지 체(體)를 가지고 이름 짓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대시인의 경지를 말한 것인데, 청경(淸警) · 웅호(雄豪) · 연려(姸麗) · 평담(平淡)한 체격(體格)이 경우에 따라 두루 적절하게 구사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천부(天賦)의 재질에 바탕한 기상의 높은 경지와, 후천적 공력에 따른 세련된 격조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뛰어난 시가 산출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④ 시의 조탁(琢磨)


남이 자기 시의 결점을 말하면, 기쁜 것 문제될 만한 것이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마음에 따를 뿐이다. 하필 임금이 간언을 막고 끝내 자기 과오를 모르는 것과 같이 남의 소리를 싫어할 것이 있는가. 대체로 시가 이루어지면 되풀이해서 보고 또 전연 자기가 지은 것으로는 보지 않고 다른 사람 및 평생에 제일 미워하는 사람의 시를 보고 그 흠을 잘 찾아내듯이 해서 여전히 결점이 있음을 모르게 될 때 비로소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이것은 한 편의 시를 지은 뒤 발표하기까지에 시인의 자세와 태도를 말한 것이다. 우선 나의 생각을 바탕에 두고, 타인의 비평과 질정(叱正)을 받아들이며 또 철저한 퇴고를 거쳐서 객관화한 뒤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만큼 작품마다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넣는 정성, 곧 시적 형상화의 높은 성취를 위한 각고의 노력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시인은 진정으로 시를 아끼는 태도로 시작에 임해야 함을 설파한 것이다.


⑤ 신의론(新意論)


이규보는 그의 시론 전개의 핵심인 창작론에서 먼저 ‘설의(設意)’를 중시하였다. 그러면 ‘설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먼저 시는 의(意 : 뜻)로 주를 삼는다고 하였다. 설의(設意 : 뜻을 베풂, 풀어냄)는 우난(尤難)하다고 하고서 다시 의(意)는 기(氣)로 주를 삼고 기(氣)는 하늘(天)에 근본을 둔다고 했다.

이규보가 내세운 ‘설의(設意)’의 의(意)는 시가 가지고 있는 독창성, 즉 새로운 생각을 의미한다. 이규보는 평소 “옛 사람의 뜻을 훔치는 것은 잘 훔치더라도 오히려 불가하다.”는 입장에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자세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설의우난(設意尤難 : 뜻을 베풀기가 더욱 어렵다)’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설의우난(設意尤難)’이란 시가 가지고 있는 독창성과 새로운 생각을 중시한 것이다. 

또한 ‘의(意)’는 때로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의 골격, 구조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규보의 신의(新意)란 ‘개성적 · 독창적 기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이규보의 시 창작론을 생각하다보면, 그는 시라는 것이 결국 하늘이 내려준 재능으로 쓸 수밖에 없는 어려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규보가 의기(意氣)를 시 창작론의 첫 단계로 내세웠다 하더라도 이러한 의기(意氣)는 오직 천부적인 것만이 될 수는 없다. 창작론이란 본래 방법론적인 것에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후천적인 수련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연기본호천 불가학득(然氣本乎天 不可學得)’이라고 언급한 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단순히 수사상의 기술처럼 연마만 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고 새로운 것을 표현하려는 신의(新意)라는 보다 근본적인 시인의 자세를 논한 것이다.

 

⑥ 신어론(新語論)


대체로 옛 사람의 시체(詩體)를 본받는 데는 반드시 먼저 그 시를 익숙하게 읽은 연후에 본받아야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표절하기도 어려우니, 이것을 도적에 비유해 본다면, 먼저 부자집을 살펴보고 그 집 문이며 담을 익숙하게 한 연후라야 그 집에 잘 들어가서 남이 가진 바를 자기 것으로 하고도 남이 모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주머니를 찾아 보고 상자를 열어 보고 하는 식으로 하면 반드시 잡히고 말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함부로 굴고 찬찬치 않아서 책 본 것이 그리 정밀하지 못했습니다. 육경(六經) · 제자(諸子) · 사서(史書)의 글이라 하더라도 섭렵했을 따름이지 그 본원을 탐구해 내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하물며 제가(諸家)의 장구(章句)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글에 익숙하지 못하니 어떻게 그 체를 본받고 그 말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어(新語)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와 달라, 옛 성현의 말에 익숙지 못하고 또 옛 시인의 체를 모방하기를 부끄러워하여, 만일 부득이하거나 창졸간에 부영하게 될 적에 생각해 봐도 가져다가 쓸 말이 없으면 반드시 신어를 특별히 만들기 때문에 어구가 생삽한 것이 많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옛 시인들은 뜻을 창조하였지 어구를 창조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어의(語意)를 아울러 창조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세상의 시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배격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그대만이 이같이 근근하게 과찬합니까.」

 

  이것은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의 일부이다. 이규보 자신의 시어와 시에 대하여 당대 문사들이 온고미(溫故美)가 부족하다는 논평에 대한 해명이요, 자기 옹호다. 고인의 시를 읽어 그 체(體)를 본받기의 어려움이 자칫 표절을 야기하는데, 그것을 시의 가장 큰 병통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이규보는 그 자신이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고인의 전적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본뜨기보다 오히려 독창적인 신어를 지어내는 쪽을 택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때 고전의 본원을 탐구해 내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자신의 높은 자긍심의 겸허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결국 이규보는 고인의 작품은 섭렵하는 배움의 수련단계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더 나아가 독창적인 자기 시의 세계를 수립함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이문화국(以文華國)’으로서의 문학

 

이규보는 신흥 사대부 계층이다. 신흥 사대부는 유학을 자신들의 기본 사상으로 삼아 고려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뒤이은 조선 건국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계층이다. 그러면 신흥 사대부로서 이규보의 문학관은 어떠했을까? 그는 유교적 현실관을 견지했으므로 관직에 올라서 치국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현실적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천부적인 재능에다 후천적인 수련으로 문학적 명성을 떨치고자 하였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였고, 시대는 문인의 수난기가 새로운 고비로 접어든 때였다. 이규보가 세상에 들고 나설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문학적 역량이었다.

이규보의 현실적 삶의 목표는 유교적인 통치의 구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상최상국선서(上崔相國詵書)>에도 이러한 그의 관계진출관(官界進出觀)이 피력되어 있다.

 

또 선비로 처음 벼슬하는 자는 구차하게 스스로 자기 한 몸의 영화로운 벼슬을 경영하고자 할 따름이 아니고 대개 마음에 배운 바를 장차 정치에 베풀며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방책을 떨치고 힘을 왕실에 베풀어 이름을 백세까지 날려서 길이 남기를 기약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자적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이상이 문학의 힘에 크게 의존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이문화국(以文華國)’의 문학관이 제시된다. 그의 <상조태위서(上趙太尉書)>에서도 문장의 치국 상 공효를 말하고 있고 또 <정유년걸퇴표(丁酉年乞退表)>에서도 유신(儒臣)의 소임이 바로 ‘이문화국(以文華國)’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신분은 정승의 지위를 맡았사오나 도를 의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옵고, 명색은 유신(儒臣)이라 칭하면서 가장 부족한 바는 문으로써 국가를 빛나게 하지 못한 것이옵니다. 공연히 봉록만 허비하여 처자를 육식으로 기르니, 제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 상하지만 세상을 보익함에는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다시 <이도걸퇴표(二度乞退表)>에서도 다음과 같이 문장의 효능을 언급하고 있다.

 

장구(章句)의 부허(浮虛)한 기술로서 조정의 기요(機要)한 직에 거하오니 …중략… 바야흐로 국가는 오랑캐에 염증난 즈음이옵고 묘당은 적을 요리할 시기이온데, 격서를 지어도 무지한 되놈을 깨우칠 만한 것이 못되옵고 지략은 승리를 거둘만한 계책을 짜내지 못하오며 헛되이 한차의 붓대를 올리니 무엇이 앞일에 유익하겠습니까.


이규보가 산 시대는 정권의 주체가 종래의 귀족층으로부터 새로이 대두된 신흥 사대부 계층으로 옮겨지는 일대 전환기로 관료층의 성격이 크게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국면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이규보다. 이들 신흥 사대부들의 특성은 향리 출신으로 학문적인 교양과 문학적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시험을 거쳐 중앙의 정치 무대로 진출한 학자적 관료군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문보다도 기능적 자질의 우수성에 의존하여 입신한 사람들인데, 기능적 자질이란 바로 문학적 역량이 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규보는 그 자신의 이러한 출신성분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서, 출사(出仕)하여 상국(相國)의 지위에 오른 뒤에도 항상 그의 문장으로 이바지하여 국가를 빛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굳게 간직하였고 또 실제로 그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3. 이규보의 작품세계

 

이렇게 문학이 ‘연정이발(綠情而發)’과 증언하려는 의식에서 씌어진다는 점과 치국에 있어서 문장의 공적인 효과를 깊이 인식하여 ‘이문화국(以文華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이규보의 시문에 표백되어 있는 작가의식은 무엇인가? 문학이 작가의식의 소산이요, 작가란 결국 그들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역사적 운명과 그 현실에 일상인들보다 더욱 민감하고 심각하게 반응하며 미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갖는 지성이라고 본다면, 어떠한 작가든 그들 의 정신, 의식 속에는 당대의 역사와 현실, 세계와 자아가 한데 녹아 있을 것이다.

이규보는 우선 출신계보 면으로 볼 때, 명문거족의 후예는 아니었다. 이른바 전시대의 명문거족의 상당수가 무신의 난으로 몰락한 상황에서 새로이 신흥 사대부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그는 바로 이 출신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의 기상이나 사고방식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실력으로 입신한 사람답게 다난한 시대, 역사의 시련의 연속 속에서도 결코 도피․은둔하지 않고 제일선에 나와 참여하였다.

현실참여나 문학 활동, 교우관계에서 드러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긍정적 ․ 의지적이면서도 또한 광달(曠達)한 본성에 충실하고자 하였고, 당류(黨類)에 구애됨이 없이 광범한 교유를 하였으며, 자기의 실력에 대한 자부 못지않게 겸양과 상대방의 존중 ․ 추양(推揚)을 할 줄 아는 위인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였고, 민간신앙 ․ 선도사상(仙道思想) ․ 불교를 두루 숭신(崇信)하였다. 즉 현세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의 파악 및 일상적․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의 인식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집착하기보다는 두루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결국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높은 인격체를 구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작가의식의 기반이었다.

 

1) 국가 ․ 민족에 대한 의식


이규보가 국가, 민족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의식은 그의 행적이나 시문을 통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는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의 병서(幷序)를 보면, 그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동명왕 본기에 소략히 전하는 동명왕에 대하여 그 신이적 사실을 ?구삼국사(舊三國史)?의 기록대로 온전히 전하려고 한 것이 근본적 동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는 그의 나이 26세, 한창 젊고 호방하며 애국정열에 불타고 있었을 때,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접해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시 민중 사이에 파다하게 유포, 전승되고 있던 동명왕 사적의 보다 완벽한 사실(事實)로서의 기술을 보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이한 내용을 믿지 못하다가 재삼 탐독(耽讀)하여 점차 그 근원을 살펴본 뒤에 그것이 허망한 기록이 아니라 신성한 사실임을 확신케 되었다. 이에 감격과 신앙으로 그는 그 신이한 사적을 <동명왕편>이란 영웅서사시로 창작하였는데 이 시는 무려 5언 282구〔1410자〕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으며 거기에 상세한 주가 붙어 있는 장편이다.

이규보가 스스로 쓴 <동명왕편>의 창작 동기에서 밝혀 두었듯이, <동명왕편>은 단순한 설화적 관심과 흥미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기원이 유구하고 또한 우월한 민족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민족적 자부심과 그에 대한 욕구에서 출발하여 이러한 민족서사시를 썼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이규보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통하여, 다시금 단합되어 힘 있는 우리 민족의 재창조를 추구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때 이규보의 확신은 신앙의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동명왕이 온갖 역경을 이기고 창업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사적을 믿는 고려인에게도 똑같이  당대의 국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문학화함에 있어서 상상력과 영감의 세계를 충실히 확충함으로써, 단순한 사실로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이른바 ‘지식의 문학’으로부터 ‘힘의 문학’, 즉 문학 본연의 감동적 장치의 세계로 가치를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기본적으로 유사(儒士)로서 입신하고자 하였던 그에게 있어 정치 참여는 하나의 근본 명제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원이 곧 시문의 역량이었으므로 시문을 통하여 치국의 경륜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가 당대 상황의 위기를 깊이 인식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지성의 입장에 섰을 때, 국가 ․ 민족에 대한 예찬과 자부의 시문, 왕자(王者)들에게 들려주는 풍간(諷諫)의 시문을 창작하였던 것이다.

 

2) 사회 ․ 민중에 대한 의식


이규보는 문학사상의 전개에서 증언과 풍자의 의의를 중요시한 바 있었다. 그가 남긴 상당수의 시문에는 국내의 사회적인 문제를 날카로운 시각으로 의식하고 발언한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규보는 유자(儒者)로서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올바로 다스려야만 한다는 사명감에서 특히 민중들의 삶의 현실과 조건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 앞에서 지적한 몇 가지 작품에서처럼 이미 이규보는 어지러운 사회 형편과 기아, 수탈 현상을 직시하였다. 이제 좀 더 그의 시편들 중에서 민중들의 삶의 관련된 작품을 통해 그의 사회의식을 살펴보도록 한다.


一粒一粒安可輕      한알 한알을 어찌 가벼이 여길 건가

係人生死與富貧      생사, 빈부가 여기에 달렸는데

我敬農夫與敬佛      나는 부처처럼 농부를 공경하노니

佛猶難活已飢人      부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 농부만은 살리네

可喜白首翁          기쁘다! 늙은 이내 몸

又見今年稻穀新      또 다시 금년 햅쌀 보게 되니

雖死無所歉          죽더라도 부족할 것 없네

農作餘膏此身        농사에서 오는 혜택 내게까지 미침에랴


위의 시 <신곡행(新穀行)>에서는 인간의 생사 빈부가 모두 농민이 생산하는 곡식 한 알 한 알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농부를 부처같이 공경한다고 토로한다. 부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곡식을 찬미하면서, 다시금 노년에 신곡을 보게 됨을 기뻐하고 있다.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에게까지 먹을 것이 돌아오는 현실 앞에 이규보는 그냥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작은 시 한편을 통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감사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감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몽고군의 내침과 그 잔악한 만행으로 피폐해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당시의 관원 중에는 농민, 농촌을 더욱더 피폐하게 할 정도의 수탈을 일삼는 자가 있었으니, 이규보의 시가 이러한 모습을 놓치고 지나갈 리 없었다.


歲儉民幾死          흉년으로 백성은 거의 죽게 되어

唯殘骨與皮          오직 뼈와 가죽만 남았는데

身中餘幾肉          몸에 남은 살 몇 점까지도

屠割欲無遺          남김없이 베어 가려는구나

君看飮河鼴          그대는 보는가. 두더지가 하수를 마신들

不過滿其腹          제 배만 채우면 그뿐인데

問汝將幾口          묻노니 네놈은 입이 몇이나 되길래

貪喫蒼生肉          백성의 살점을 모두 먹으려 드는가


위의 시에서 이규보는 수탈하는 관리(贓吏)의 포악상과 그로 말미암아 다 죽게 된 민생을 개탄하면서 장피죄(贓被罪)로 잡힌 군수를 증오하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민생에 이 같은 탐관오리들이 횡행하여, 사회의 불안이 고조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의 극에 이르게 됨을 한탄하면서, 탐관오리들의 인간성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 즉 두더지는 더러운 물을 마신들 배만 차면 그만 두는데, 탐관오리들의 탐학상은 끝이 없음을 슬퍼하며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長安豪俠家          장안의 부호한 집에는

珠貝堆如阜          구슬과 패물이 언덕같이 쌓였고

舂粒瑩如珠          절구로 찧어낸 구슬같은 쌀밥을

或飼馬與狗          말이나 개에게도 먹이기도 하네

碧醪湛若油          기름처럼 맑은 청주를

霑洽童僕咮          종들도 마음껏 마시네

是皆出於農          이 모두 농부에게서 나온 것

非乃本所受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네

假他手上勞          남들의 손 힘을 빌고는

妄謂能自富          망령되이 스스로 부자가 되었노라고 하네

力穡奉君子          힘껏 농사지어 군자를 봉양하니

是之謂田父          그들을 일컬어 농부라 하네

赤身掩短褐          알몸을 단갈로 가리고는

一日耕幾畝          매일같이 얼마만큼 땅을 갈았던가

才及稻芽靑          벼 싹이 겨우 파릇파릇 돋아나면

辛苦鋤稂莠          고생스럽게 호미로 김을 매네

假饒得千鍾          풍년들어 千鍾의 곡식을 거둔다 해도

徒爲官家守          한갓 관청 것밖에 되지 않는다오

<중략>

粲粲白玉飯          희디 흰 쌀밥이나

澄澄綠波酒          맑디 맑은 녹파주는

是汝力所生          모두가 이들의 힘으로 생산한 것이니

天亦不之咎          하늘도 이들이 먹고 마심을 허물치 않으리

爲報勤農使          권농사에게 말하노니

國令容或謬          나라의 법령도 잘못 될 수 있는 법

可矣卿與相          높은 벼슬아치들은

酒食厭腐朽          주식을 물려 썩히고

野人亦有之          농촌에 또한 사는 사람 있어

每飮必醇酎          그들은 매양 청주를 마셔왔네

游手尙如此          일없이 노는 사람들도 안 마실 수 없는데

農餉安可後          농부들은 어찌 못 먹게 한단 말인가

 

  몽고군의 잔악한 침략과, 큰 한발로 민생이 완전히 도탄에 빠졌던 고종 19년, 고려는 궁여지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기에 이르렀고, 백성들의 의식이나 기구까지도 사치하지 못하게 국령으로 금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장안의 지배층들은 호협한 호사와 방종을 일삼아 반민중적인 생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애써 농사를 지어봐도 수중에 남는 것 없이 모두 수탈 당하여 굶주리는 형편이었다. 위의 시 <개국령금농향청주백반(開國令禁農餉淸酒白飯)>은 이 같은 농부에 대한 부당한 가렴주구에다, 심지어는 농부들의 정당한 먹고 마실 권리까지도 국령으로 금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의 부당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권농사에게 당부해서라도 잘못된 국령을 철폐하려고 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고도 그의 울분이 풀리지 않아 <후수일유작(後數日有作)>이란 작품을 또 썼던 것이다.


昔人有登山              옛 사람이 산에 올라

嗔猿耗秋果              가을 열매 따먹는 원숭이를 꾸짖었네

處山食山實              산에 사니 산열매를 먹음은

於理不甚左              이치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나

翻思果之成              돌이켜 생각하면 열매가 열리는 것은

本非猿力借              본래 원숭이가 노력한 것이 아니니

嗔之與不嗔              꾸짖거나 꾸짖지 않는 것이나

意在可不可              뜻대로 생각하기에 달렸지만

穀則異於是              곡식은 이와 달라

農夫所自化              농부들이 이루어내는 것으로

㧾係力慢勤              모두가 이들의 힘씀에 달려 있으니

不勤無可奈              힘쓰지 않는다면 어쩔 방법이 없네

淸醪與白飯              청주를 마시고 쌀밥을 먹는 것이

所以勤其稼              농사를 권장하는 바탕이니

口腹任爾爲              이들의 입이나 배에 맡길 것이지

國禁何由下              무엇 때문에 국금을 내리는가

義雖出朝廷              의논이 비록 조정에서 나왔다 해도

聖恩宜可赦              망극하신 성은 마땅히 용서하시리

反覆思其理              반복해서 사리를 생각해보니

萬倍坐食者              놀고먹는 자보다 만 배나 먹어야 하네

 

 산 열매를, 수고한 바도 없는 원숭이가 따먹어도 그것은 산에 있어 산 열매 따먹는 것이니 어긋날 일이 아닌데, 하물며 애써 지어놓은 자기 곡식으로 먹는 것이, 그것도 애써 농사짓기 위하여 잘 먹어야 하는 것까지 국령으로 금할 근거가 없다는 이규보의 주장이다. 사리로 따진다면 ‘놀고먹는 자보다 만 배나 먹어도 좋다’는 그의 생각은, 그가 민중들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남다른 시각을 가졌던 결과였으며, 민생이 안정되어야만 국력도 생기는 법인데 민생을 억압하는 당대의 여러 조치들이 오히려 민중들의 삶을 소홀히 여겨 이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갖가지 부조리를 통렬히 지적하고 증언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규보는 고위 관직에 오르고 노년이 되어 백성들을 보살피는 기본적인 소임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고, 누구보다도 민중과 민생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당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야우작(是夜又作)>에서는 구렁에 빠질 처지에 있는 하늘이 낸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如我合爲飢死鬼      나 같은 사람은 굶어죽은 귀신 되어도 마땅하리

無功食祿幾多年      공도 없이 몇 해나 나라의 녹을 먹었던가

蒼生盡是天之物      저 백성 모두가 하늘이 내셨거늘

何忍綜合溝壑塡      차마 그들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랴


결국 이규보는 유자적인 관점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사회와 민중을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시문에는 이러한 이규보의 작가의식이 온전히 녹아 있다. 이규보의 천품은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시인의 기질이 다분하였지만, 그는 하늘이 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것만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재능을 ‘나’를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타인’을 위해 쓸 수 있기를 바랐고, 더 나아가 ‘사회’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민족문화추진회, 1980~1981.

김진영 · 차충환 역주, 『백운거사 이규보 시집』, 민속원, 1997.

 


강석근, 『이규보의 불교시』, 이회, 2002.

김경수, 『이규보 시문학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6.

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4.

박성규, 『이규보연구』, 계명대 출판부, 1982.

신용호, 『이규보의 의식세계와 문학론 연구』, 국학자료원, 1990.

이동철, 『이규보시의 주제연구』, 국학자료원, 1990

하강진, 『이규보의 문학이론과 작품세계』, 세종출판사, 2001.

연보


▪ 1168(무자) · 1세

· 12월 16일 계묘에 탄생, 이름은 규보, 자는 춘경이다.

· 어린시절 악종을 심하게 앓아 고생하였으나, 신인의 예언대로 아무런 치료 없이 완쾌되었다.

▪ 1178(무술) · 11세

· 숙부가 여러 친지들을 모아 공의 재능을 시험하였다. 숙부가 준 지(紙)자 연구(聯句)에 훌륭히 대답하여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 1181(신축) · 14세

· 최충의 문헌공도인 성명재에 들어가 학업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 해마다 시를 짓는 시험에서 일등으로 뽑혀 주위의 선망을 받았다.

▪ 1183(계묘) · 16세

· 아버지가 수주(水州)의 원으로 나갔지만, 개경에 머무르며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가을에 수주로 가 아버지를 모셨다.

▪ 1185(을사) · 18세

·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가을에는 다시 수주로 돌아갔다.

▪ 1187(정미) · 20세

· 다시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 4~5년 동안 시 짓기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은 것이 낙방의 이유이다.

▪ 1189(기유) · 22세

· 봄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 1190(경술) · 23세

· 6월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에 뽑혔는데, 낮은 등급으로 뽑힌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낙심하였다.

▪ 1191(신해) · 24세

· 8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라 자칭하고, 잠시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였다.

▪ 1192(임자) · 25세

· 백운거사 어록과 백운거사 전을 저술하여, 자신의 행적을 스스로 풀어내었다.

▪ 1193(계축) · 26세

· 구삼국사를 얻어보고 동명왕의 사실에 감동하여, <동명왕편>을 지었다.

▪ 1197(정사) · 30세

·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출사(出仕)의 길이 열렸지만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1199(기미) · 32세

· 이해 6월 전주목사록(全州牧司錄)으로 보임하여 첫 관직생활을 경험하였다.

▪ 1200(경신) · 33세

· 전주를 다스릴 때, 방자한 관리와의 다툼으로 그해 12월 파직을 당하였다.

▪ 1202(임술) · 35세

·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나아가 종군하였다.

▪ 1204(갑자) · 37세

· 3월에 군사들이 개선할 때, 함께 돌아왔으나 논공행상에서 탈락되었다.

▪ 1207(정묘) · 40세

· 당시 실권자 최충헌의 눈에 들어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제수되고,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 1213(계유) · 46세

· 최우와 최충헌 앞에서 시 솜씨를 뽐내고, 승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한 단계의 승급을 바라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 더 높은 직책을 얻게 되었다.

▪ 1219(기묘) · 52세

· 봄에 탄핵을 당하여 잠시 면직되었다가, 계양의 외직으로 발령되었다. 이해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 1220(경진) · 53세

· 6월 다시 중앙으로 발령이 났다.

▪ 1230(경인) · 63세

· 팔관회 잔치에서 오해를 받아 11월 먼 위도로 귀양을 갔다.

▪ 1236(병신) · 69세

· 5월에 지공거(知貢擧)로서 인재를 등용하고, 걸퇴표(乞退表)를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실권자 최우가 호적에서 나이를 줄였다고 하면서 머물러 있도록 요청하였고, 이규보는 이를 임금에게 아뢰고 거듭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237(정유) · 70세

· 12월에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로 치사(致仕)하였다. 이해에 또 칙명을 받고 <대장경각판 군신기고문>을 지었다.

▪ 1241(신축) · 74세

· 7월 병이 심해지자, 최우는 이름난 의원을 보내 문병하고, 선생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의 출간을 서둘렀지만, 9월 이규보는 자신의 문집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 

 

이규보의 생애·사상·문학  

김진영(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이규보 시비 / 계양산 장미공원에서 ⓒ 2016 한국의산천

'나라가 잘 되고 못됨 민력에 달렸고/ 만민의 살고 죽음 벼 싹에 매였네/ 가을날 옥같은 곡식 일천 창고에 쌓이리니/ 땀흘리는 농민들 오늘의 공을 기록하게나'(비 속에서 농사짓는 사람을 보고 서기에게 써주다) 

 

인천시 계양구 계양산산림욕장 입구. 거대한 돌비석 하나라 우람하게 솟아 있다. '문순공백운이규보선생시비'. 돌비석 받침대에 새겨진 글씨가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1168~1241)를 기리는 시비임을 알려준다. 이규보의 시비가 계양구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규보는 고려 고종6년인 1219년 52세때 지금의 계양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부임한 뒤 13개월간 계양지역에 머물며 계양, 부평 지역과 관련한 글 45편을 남겼다.

 

 

[인천일보 연중기획] 이규보 '아무일 한거 없다'지만 계양 주민들, 귀경 행렬 붙잡아

(39)계양을 떠나는 이규보와 그것을 막아서는 사람들 /2015년 05월 22일 금요일  

 

 이규보에게 계양 생활 13개월은 선정(善政)을 펴기에 짧은 기간이었다. 선정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등장하지 않지만, 관료로서 계양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제시하는 시문 <태수가 부로에게 보이다(太守示父老)>와 <우연히 읊어 관료에게 보이다(偶吟示官寮)>가 전할 뿐이다. 그리고 3편의 기우제문에 애민(愛民)으로 읽어낼 수 있는 구절들도 있다.

 

  하지만 기거주(起居注)의 직함으로 부름을 받고, 서울로 향할 때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시문을 통해 이규보와 계양 사람들 간의 정리(情理)를 짐작할 수 있다.

 

◀  '고을을 떠나면서 시를 지어 전송객에게 보이다(發州有作 示餞客)'

 

  太守初來時(태수초래시) 태수가 처음 올 때
 父老夾道邊(부로협도변) 부로들이 도로를 메웠고
 其間婦與女(기간부여녀) 그들 사이로 부녀자들도
 騈首窺蘺偏(병수규리편) 머리 나란히 하여 울타리에서 엿보았네
 非欲苟觀貌(비욕구관모) 내 모습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庶幾沐恩憐(서기목은련) 은혜를 얻고자 원함이었지
 到郡若酷暴(도군약혹폭) 이 고을 와서 만약 혹독히 했다면
 其眼願洗湔(기안원세전) 그 눈을 씻고자 했을 텐데
 我今理無狀(아금리무상) 내 생각건대 아무 일도 한 것 없어
 欲去畏懷甎(욕거외회전) 떠나려 하니 벽돌을 품었다[瓦全]는 생각에 두렵기만 하네
 胡爲尙遮擁(호위상차옹) 어찌하여 길을 가로 막아서나
 似欲臥轍前(사욕와철전) 가는 수레 앞에 누우려는 듯하네
 好去莫遠來(호거막원래) 잘 갈 테니 멀리 따라오지 마라
 我行疾奔川(아행질분천) 내 행차는 내닫는 냇물처럼 빠르네
 爾邑誠困我(이읍성곤아) 너의 고을이 나를 괴롭게 하여
 二年如百年(이년여백년) 두 해가 백 년 같기만 하네

 
위의 시문을 통해 이규보가 계양으로 부임할 때의 모습과 그곳을 떠날 때의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서울에서 태수가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계양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가에 서 있는 노인들과 울타리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부녀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부임하는 태수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부임 행렬은 흔한 광경이 아니었기에 계양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낯선 광경을 보려는 목적이 아니라 선정을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냈다. 

 

  다행히도 작자는 부임 행렬에서 느꼈던 계양 사람들의 기대감 어린 시선을 떠나는 행렬에도 여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계양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했다면, 계양 사람들이 과거에 보냈던 눈빛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진술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작자는 계양 생활 13개월을 회고하며 '아무 일도 한 것 없(我今理無狀)'다고 한다. 작자는 '벽돌을 품은 일[懷甎]' 혹은 '기와를 온전히 품은 일(瓦全)'에 대해 두렵다고 한다. 선정을 베풀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고 그에 따른 시행착오도 겪으며 그것을 바로 잡아가는 게 태수의 책무일 텐데, 자신은 '아무 일도 한 것 없'기에 벽돌이나 기와를 품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양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수례 앞에 누우려는 듯[臥轍, 와철] 서울을 향하는 이규보의 행렬을 막아섰다. 와철(臥轍)은 와철반거(臥轍攀車)의 준말이다. 와철반거(臥轍攀車)는 《후한서(後漢書)》의 후패열전(侯霸列傳)에 전하는데,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 관원이 다른 곳에 가지 못하도록 그 지방의 주민들이 수레를 붙잡기도 하고 수레바퀴 앞에 누워서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계양 사람들을 다독였지만 그들은 멀리까지 따라올 태세였다. 계양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정리(情理)를 생각해 보니 그들의 행동도 크게 나무랄 수 없었다. 작자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너의 고을이 나를 괴롭게 하여, 두 해가 백 년 같기만 하다'가 그것이다. 13개월을 100년으로 여길 정도로 계양 생활이 괴로웠다는 것인데, 이는 계양 생활에 대한 이규보의 반어적(反語的) 표현이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 강화도 답사길의 나의 애마 ⓒ 2016 한국의산천

음지는 눈과 얼음으로 얼어있어 미끄럽고 햇볕이 드는곳은 녹아서 질척거리고 진흙이 달라 붙는다. 그래도 달려야해~

▲ 계속해서 철종외가와 읍내에 있는 철종의 잠저지로 이동 ⓒ 201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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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따라 가는 답사 여행 참고 서적 :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정리 2007. 4. 25. 한국의산천] 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산맥은 우뚝한 봉우리로만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다. 정상에 가린 작은 봉우리 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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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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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호흡 몰아쉬며 바람저편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자유 발의자유 정신의자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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