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가는 답사 여행
참고 서적 :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정리 2007. 4. 25. 한국의산천]
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산맥은 우뚝한 봉우리로만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다.
정상에 가린 작은 봉우리 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을 좀더 우뚝하게 만들어 주는 깊은 계곡이야 말로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선 아득한 정상에만 시야를 뺐겨서는 안된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간의 삶이란, 따지고 보면 그의 다채로운 일생 가운데 아주 특징적인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고전문학의 라이벌> 서문에서 -
산이나 여행, 답사를 가기 전에 미리 여행지의 문헌을 찾아 보고 시대적 배경까지 알고 간다면 여행이 한층 즐거울 것입니다. 또한 답사지의 이곳 저것을 빠트리거나 놓치는 것 없이 차근 차근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참고: 고전 문학사의 라이벌.ⓒ 2007. 한국의산천
[한국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이인로 VS 이규보 - 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경계의 시대… 구귀족과 사대부의 '충돌'
대숲 아래 깨진 술판
열 아홉 살의 청년 이규보는 1186년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런 제안을 받았다. “우리 모임의 오세재(吳世才)가 경주에 놀러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메워주겠는가?” 이담지의 초대에 대해 이규보는 “칠현(七賢)이 조정의 벼슬입니까? 어찌 빈자리를 보충한단 말입니까?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뒤에 그들을 계승한 이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비꼬듯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던져진 ‘춘(春)’과 ‘인(人)’ 두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었다.
영광스럽게도 대 아래 모임에 참석하여(榮參竹下會)유쾌하게도 독 안의 봄에 자빠졌네(快倒甕中春)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未識七賢內)누가 오얏씨를 뚫은 분이신지(誰爲鑽核人)
이 시는 동석자들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는 무신란(1170년) 이후 진나라 죽림칠현을 본뜬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이들 문인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짓밟은 것이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이 자기 집 오얏나무 씨를 남이 가져다 심을까 봐 오얏을 먹은 후 늘 송곳으로 씨를 뚫어서 버렸다는 고사를 끌어와 시비를 걸었으니 말이다.
이규보 스스로 작성한 ‘백운소설(白雲小說)’의 현장보고서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인로는 아마도 배알이 뒤틀렸을 것이다. ‘어린놈이 재주만 믿고 까부는군. 우리를 이따위로 비웃다니!’ 그러나 이규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나하게 취해 거만한 태도로’ 나와 버린다.
고려 전기와 후기의 경계에 살던 두 사람, 각각 문벌귀족과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라이벌 이인로와 이규보는 이렇게 만났다. 35세 이인로와 19세 이규보의 만남, 12세기 말 고려 문인지식인 사회의 상징적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술판이 깨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옛 사람의 문장을 갈고닦는 '用事'의 정신을 문학에 구현 현실부정의 보수성향 강해 이인로(李仁老)
1152년에 나서 12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경원(인주) 이씨의 후예이다.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칼날을 피했다. 5년 후 환속하여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명종 10년(1180년)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지만 구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죽림고회를 결성해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했다.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 문집이 여럿 있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아들 세황이 엮은 우리나라 첫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뿐이다.
이인로의 학문적 세계
이인로의 가문은 고려조 전기의 혁혁한 벌족(閥族) 명문(名門)이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18대 의종 6년(1152)이었는데 바로 이 의종조에 발생한 무신란 이전까지만 해도 경원(慶源) 이씨(李氏)는 ‘고려조 전기 3대 가문’의 하나로, 여러 대에 걸친 국혼으로 왕가의 외척으로서의 부동의 문벌을 형성해왔다.
이인로는 바로 자상의 후손인데, 자상의 둘째 아들로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오가 그의 증조가 된다. 이인로는 이렇게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그 자신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가 되었는데 다행히 숙부인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 삼분오전(三墳五典; 유교전적)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천분(天分)을 보여 8,9세 때에는 벌써 시재(詩才)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종 24년(1170)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켜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하며 극단적으로 횡행함에 그는 피신하여 불문(佛門)으로 들어갔다가 환속하여 25세 때엔 태학에 들어가 고예(考藝)에 연첩(連捷)했고, 명종 10년(1180) 그의 나이 29세 때에는 드디어 진사과에 장원 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1182) 최영유(崔永濡)의 금(金)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가 다음 해에 환국해서는 계양(桂陽; 지금의 부천)군 서기(書記)로 나간 것이 그의 첫 환로였다. 그 뒤 얼마 안가서 당시 재상의 반열에 있던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 보임된 이후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재직한 동안에는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마다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으므로 ‘복고(腹藁)’의 칭송을 들었다. 이때부터 임춘·오세재 등과 자주 어울려 시주(詩酒)로 상오(相娛)하니 세칭 죽림고회를 이루었다.
최충헌 집정하의 신종 연간에는 고원에서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천직(遷職)하였고 그 뒤 신종 7년(1204) 그의 나이 53세 때에는 맹성(孟城; 지금의 맹산) 수령으로 나가 있기도 했다. 한편 그는 신종 2년(1199), 희종 3년(1207), 강종 2년(1213) 등에 누차 최충헌의 집에 초대되어 당대의 문사 이규보 등과 더불어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또 최당 형제 중심의 ‘기로회(耆老會)’에 참석하여 시문을 지어서 문명을 드날렸다.
고종 초에는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에 올랐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문장의 성세를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라 시관(詩官)의 명을 받았으나 시석(詩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파한집) 하, 52-2면)’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고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 홍도정제(紅挑井第)에서 작고하였다.
학문적 세계
미수 이인로(李仁老; 의종 6년 1152-고종 7년 1220)는 고려 중기 이른바 무신 집정기의 직접적인 영향권 속에서 살아간 구 문신귀족의 후예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 한시의 시론과 그에 부합된 시창작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문인의 한 사람이다.
이인로의 시론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대단한데 특히 한시론에 있어서 이규보(李奎報)의 신의론(新意論)에 대한 용사론(用事論)을 주창하였다는 점이 우리 한문학사의 기술상에서 일찍부터 주목 받아 왔던 것이다. 현전하는 시론과 시편들을 관견하여 보면 ‘용사’에 대한 그의 강조점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보는 시각이 ‘용사’에만 고착된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틀리지 않는 말이다. 작시론상에서 말과 뜻(생각)이 모두 오묘해야 좋은 작품이 산출된다는 것을 시종 강조한 바 있는데, 이로 보건대 신의와 용사를 변증적으로 통합한 시작품이야말로 제대로 된 것이라는 시론이 이인로의 진정한 사고였다고 해야 옳다.
이인로는 시 창작에도 대가였다. 그의 얼자(蘖子) 이세황(李世黃)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인로 자신이 손수 편찬한 <은대집(銀臺集)>에는 부(賦) 5수와 더불어 고율시(古律詩) 1500여 수가 실려 있었으며, 또 최당을 중심으로 기로회(耆老會)를 결성하여 음주가영(飮酒歌詠)을 일삼던 중에 지은 작품도 소위 <쌍명재집(雙明齋集)>에 다수 들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문집이 전해지지 않아 그 자세한 실상을 알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재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동문선(東文選)>,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의 시선집과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등의 각종 필기류 서책에 다수의 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중복된 것을 빼고 보면 대략 114수 가량이 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 <동문선>에 70제(題) 80수, <파한집>에 7수, <보한집>에 연구(聯句)를 포함하여 23수,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僧東國輿地勝覽)>에 4수 등 도합 114수가 그것이다.
문벌 귀족과 신흥 사대부 대나무 아래로 이규보를 초대한 문인들은 이른바 죽림고회(竹林高會) 멤버들이었다. 오세재, 임춘(林椿), 황보항(黃甫抗), 조통(趙通),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그리고 이인로(李仁老). 나이로는 오세재가 좌장이었지만 문학으로는 이인로가 대변인 혹은 대표였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의 분수령이 된 무신란으로 몰락한 옛 문신귀족의 후예들로 ‘무부(武夫)’들이 지배하는 현실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죽림칠현이 그랬듯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지니지는 못했다.
이들은 애초에 확고한 세계관적 선택에 의해 죽림에 자리 잡은 인물들이 아니라 무인들의 칼날에 밀려 쓴 잔을 마시고 있던, 한때는 ‘잘 먹고 잘 살던’ 세력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죽림(竹林)은 옛 영화를 동경하는 공간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곳은 무신들이 지배하는 개경의 풍림(楓林)을 향한 욕망이 감춰진 모순된 공간이었다. 이들의 냉소는 아마도 개경을 향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종 10년(1180년) 과거를 통해 이미 관직에 나가 있던 이인로는 이들 가운데 풍림을 향한 욕망을 가장 먼저 실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규보의 출신 성분은 문벌귀족이었던 경원 이씨의 후예 이인로와는 전혀 달랐다. 부친 윤수(允綏)가 호부낭중(戶部郎中)이라는 재경 관료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나 고향 황려(여주)에 조상 전래의 가전(家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이규보는 막 개경으로 진출해 조금씩 기반을 형성해 가던 신흥 세력의 일원이었다.
스물 세 살 때 예부시(禮部試)에서 낮은 등수로 뽑힌 것이 못마땅해 사양하려고 했다가 부친에게 크게 꾸중을 당한 일화도 이 같은 집안의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규보에게 문벌귀족에 대한 적대의식, 나아가 강한 현실지향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녔던 이인로와 이규보의 충돌,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 귀족과 신흥사대부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답습넘어 새로운 뜻을 표현 현실지향적 '新意'를 중시 신흥세력의 자신감 보여
이규보(李奎報)
1168년에 나서 1241년에 별세했다. 막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별명이 말하듯 두주불사,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또 침입한 몽골군을 진정표(陳情表)로 물리칠 정도의 문장가였다. 젊어서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명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간 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서 출세길에 오르면서 현실 비판이 약해진다.
백운소설(白雲小說), 동명왕편(東明王篇) 등 그의 작품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모두 정리돼 있다.
용사와 신의 두 시대의 충돌
이들의 라이벌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이 문학창작 방법론이다. 최자(崔滋)는 ‘보한집(補閑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인로는 “나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황정견, 소식 두 사람의 문집을 읽은 뒤에 말이 굳세고 운이 맑은 소리를 내게 되었으며 시 짓는 지혜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규보는 “나는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다르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문으로 들어가 다른 문으로 나왔다는 것이 최자의 생각이었다.
옛사람의 문장과 뜻을 읽고 배우는 것은 같지만 이인로는 옛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자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태를 지향했고, 이규보는 답습을 넘어 생경하더라도 새로운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이 바로 ‘용사(用事)’와 ‘신의(新意)’라는 다른 문이다.
본래 한문학은 정해진 틀이 있는 규범적 문학이기 때문에 용사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다. 하지만 용사만으로 창작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규범적 한시에서나 자유로운 현대시에서나 새로운 뜻의 표현, 새로운 의미의 발견은 시의 당연한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로가 용사만이 아니라 신의를 말했고, 이규보가 신의만이 아니라 용사를 언급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인로가 용사를 강조하고 이규보가 신의를 중시한 차이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들어간 문이 아니라 나온 문이고, 나온 문의 차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위치나 세계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친구 전이지(全履之)에게 보낸 답장에서 “소동파의 시를 읽고 좋아해서 해마다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들이 모두 올해에 또 서른 명의 동파가 나왔다”고 떠든다고 했듯 당대의 주류 시풍은 소동파 따라가기였다. 이인로 역시 ‘보한집’에서 “문을 닫아걸고 깊이 틀어 박혀 황정견ㆍ소동파를 읽은 후에야 말이 힘차고 운이 또랑또랑해져 시를 짓는 삼매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동파 본받기를 일삼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당대의 시풍이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이규보는 시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인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말을 꾸미는 일에만 공을 들인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규보는 용사에 대해 글 도둑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 묶인 이인로, 내달리는 이규보
용사와 신의, 두 창작방법론은 적어도 이들의 시대에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그것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관직을 위해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 귀족 이인로가 보수적 용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면 현실을 긍정하면서 자신 있게 내달리던 신흥 사대부 이규보는 신의라는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라이벌의 대결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는 한 판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구세대가 새로운 현실에 대안을 제출하지 못할 때 패배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두 중세 지식인을 부딪치게 했던 용사와 신의에 대한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대에 있어 우열은 분명했다. 이인로와 그의 시대가 이규보와 그의 시대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이인로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현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강화 길상면의 이규보 사가재 ⓒ2006. 6. 18 한국의산천
이규보(1168~1241)고려시대의 문신, 문인으로 본관은 황려, 호는 백운거사, 지헌, 시호는 문순이다. 주요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 '백운소설'이 있다. 시, 술, 거문고를 좋아한다 하여 삼혹호선생이라고도 하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작품: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 , 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 : '모정기(茅亭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술 없이는 詩 짓지 못한 酒仙, 이규보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시와 거문고와 술을 좋아해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했다. 이규보는 살아 7,000~8,000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2,000편의 시가 전한다.
그가 당대의 실력자 최충헌 앞에서 시를 짓게 되었을 때 최충헌의 아들인 최 우가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우음’(偶吟, 시의 벗)
술이 없으면 시도 지어지지 않고 시가 없으면 술도 마시고 싶지 않아 시와 술을 내 모두 즐기니 서로 어울리고 서로 있어야 하네 손 내키는 대로 한 구절 시를 짓고 입 내키는 대로 한 잔의 술을 마셨지 내 어찌하겠나, 딱한 이 늙은이가 시버릇과 술버릇 함께 배운 것을 술이라고 해야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어서 천백수 짓는 시를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술잔을 마주하면 흥취 절로 일어나니 그 마음만은 끝내 알기 어려워라 그래서 내 병마저 깊어졌으니 죽은 뒤에야 그 버릇 없어지겠지 그러기에 나 혼자 속상한 것이 아니라 남들도 그 때문에 나무란다네 - ‘偶吟’ 전문-
그는 앓아 누워서도 술을 끊지 못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취해 지내다 저세상 가는 것이 도리어 좋을 텐데”라는 말도 전해온다.
▲ 이규보 사당 ⓒ 2007 한국의산천
▲ 사가재 (四可齋)ⓒ2006. 6. 18 한국의산천
사가재(四可齋)는 “밭이 있으니 경작하여 식량을 마련하기에 가(可)하고,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가(可)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가(可)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마련하기가 가(可)하다”라고 하는 네가지 가(可)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규보는 1241년에 몽골족의 침략을 받아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던 시절 강화에서 운명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의 무덤은 현재 강화도 길상면 길직리 백운곡에 있다.
이규보 선생은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문관이었고, 양심적이나 소심하였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즉흥적으로 의식에 떠오르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찾아가는 길 강화도에 새로 놓인 초지대교를 건너 전등사가 있는 길상면 네거리를 지나 84번 지방도를 타고 강화읍쪽으로 3km쯤 올라가면 길 왼편으로 이규보 묘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양호한 1차선 콘크리트 포장길을 약 500m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논 가운데 묘소가 보인다.
고려 文豪 이인로선생 문학비
봄은 갔건만 꽃은 그대로 있고 春 去 花 猶 在
하늘은 맑건만 골짝은 그늘졌네 天 晴 谷 自 陰
한낮인데도 두견이 슬피우니 杜 鵑 啼 白 晝
비로소 사는 곳이 깊음을 알겠네 始 覺 卜 居 深
인천인으로 고려시대 시와 문장이 뛰어난 문신으로 알려진 쌍명재 이인로 선생의 문학비가 연수구 연수2동 584 원인재(인천문화재자료 제5호) 앞뜰에 세워졌다.
선생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회장·이상보 교수)에서 세우는 이 문학비는 지역이 아닌 전국단위의 문학비건립단체 주관으로 추진되어 왔다는 점이 특징.그동안 황진희, 김시습, 김정희, 허난설헌, 김삿갓 등 이번까지 47개의 문학비를 건립해온 이 단체가 인천에 문학비를 세우기는 처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을 발간하여 한국시화의 원조로 알려진 이인로 선생은 본관이 인천으로 고려 의종24년 정중부가 무신의 난을 일으켜 문관을 배척하자 머리를 깎고 난을 피했다가 명종10년 진사과에 급제해 계양관기로 보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후 직사관을 거쳐 14년간 한림원에 있었으며 망년에는 당대의 명문장가 임춘, 오세제 등과 강좌칠현중 한 사람으로 불리웠다.
문학비건립동호회 측은 비문을 통해 “나라의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선조 허겸의 묘원인 원인재 옆에 문학비를 세워 선생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공적을 높이 기리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이번 문학비의 글은 인천대 우쾌재 교수가 지었으며 서예가 정충락씨가 글을 새겼다.〈이원구기자〉
쌍명재 이인로 선생 문학비
이인로李仁老 선생은 인천인仁川人으로 자는 미수요 호는 쌍명재雙明齋이시니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外戚으로 부동의 문벌을 형성했던 경원慶源(현인천)이씨의 시조이신 이허겸李許謙의 7세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오의 증손이요 언림彦林의 손자이시다.
고려高麗 의종 6년(1152)에 아버지 백선伯仙에게서 나시어 고중 7년(1220)까지 사신 시詩와 문장文章이 뛰어난 문신文臣이시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시어 시재詩才에 뛰어나셨으나 무신란 때 불문佛門에 귀의했다가 환속하여 25세 때 태학太學에 들어가셔서 육경을 두루 학습하신 뒤 29세 때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시고 31세 때에 최영유崔永濡의 서장관이 되시어 금金나라에 다녀오신 후 계양현桂陽縣(현부천) 관기官記를 거쳐서 한림원翰林院에 보임 되시어 조칙詔勅을 짓는 일을 맡아 하시면서 여가때마다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으셨으므로 복고腹藁의 칭송을 들으셨으며 당대의 명 문장가였던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등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시어 새로운 문풍을 일으키셨다. 벼슬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비서감秘書監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및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시고 향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과 쌍명재집雙明齋集과 파한집破閑集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詩話集인 파한집만이 전해오며 그 외의 시문들은 각종 문헌에 편편히 전해지고 있어 이를 통하여 선생의 훌륭한 문학적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 때의 무신정권武臣政權하에서 문학적 전통을 살려내신 선생의 공로는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으므로 온 나라의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선조 허겸의 묘원인 원인재源仁齋 옆에 문학비를 세워 선생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공적을 높이 기리고자 한다. 2001년 4월 5일
인천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우 쾌 제 삼가 짓고
서 예 가 정 충 락 삼가 쓰다
원인재 (문화재자료 제5호: 연수구 연수동)
원인재는 인천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이다. 팔작지붕 형식인 이 건물의 건립년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32대손이 쓴 [원인재기]와 33대손이 쓴 원인재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 7년(1807) 또는 고종 4년(1835)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건물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의 본래 위치는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좌측의 신지 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해체되어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사업이 진행중에 있다.
계양산 장미원에 자리한 이규보 선생 시비
이규보 선생의 생애와 업적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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