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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 최승희 생가 답사

by 한국의산천 2015. 12. 27.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처럼. 두번째 이야기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 최승희 생가터 답사  

 

"행복을 얻고 싶다면  길을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여행을 떠나야 한다"
 

어쪄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 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 안거나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 하는 곳은 외로운 휴게소 인지도 모른다.  

 
"나는 집에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나의 삶을 보내야 할 곳 가운데 지구상에서 집보다 나쁜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 알랭 드 보통 著 "여행의 기술"에서-

 

 

▲ 제곡리에서 용수리 응아지 나루를 향해 달려라 ⓒ 2015 한국의산천 

 

격동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간 세계적인 춤꾼 최승희 생가 탐방

[ 2015 12 26 포근한 토요일 한국의산천]

 

라이딩의 새로운 면모를 추구한다.

 새털같이 수많은 날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길고 긴 길을 따라 달렸다.

그간 내 자신이 함께 하는 라이딩이던 또는 내가 앞장을 서서 리딩을 하며 가는 라이딩이던간에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달리기에 주안점을 두고 달렸다.

하지만 많은 아쉬움을 가지는 부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이땅의 의미있고 아름다운 곳을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것에 대한 그것이었다.

 

  얼마전 끝낸 백두대간 1400여km를 달리면서도 구간을 달리기에 바쁘다보니 인문 지리학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을 옆에 두고도 그냥 지나쳐야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가끔은 그룹 라이딩을 쉬면서 1석 2조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의 숨은 명소를 찾아보려 한다.

 

12월 25일 성탄절부터 3가족이 1박2일 홍천강가의 펜션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짬을 내어 그간 생각해왔던 곳을 이틀에 걸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았다

1. 근대 문화유산 지평주조 / 구둔역(폐역)

2. 홍천 제곡리 최승희 생가터 탐방

3. 남궁억 선생 묘소 탐방과 홍천강 너브내길 따라 모곡 배바위 촬영  

 

 

 

홍천 그리고 11사단 (화랑사단 / 상륙사단)

 그 당시 11사단은 전투사단이 아닌 정말 힘든 교육사단이었다. 1년 365일 취침시간(대략 6시간) 빼고는 거칠고 강한 훈련과 반복되는 지겨운 교육이었다.

젊은 시절 양덕원에서 양덕원천변을 따라 최승희 생가터를 지나서 용수리까지 무던히도 걸었다. 홍천강 응아지 나루 강변에서 야영도하고 굴지리유격장에서 훈련도 받으며 홍천강을 바라보며 군생활 3년을 마쳤다  거의 40년전의 일이다.

 

 그 당시 양덕원에서 더 들어간 시동 골짜기에는 9연대가 있었고, 강재구 소령이 산화한 재구공원 근처에는 13연대 재구대대가 있었다.

나는 홍천읍내와 가까운 사단사령부 정문 앞쪽 병참대 옆에 사단 직할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그 당시 함께한 힘든 훈련으로 악명 높았던 원주 하사관 학교 동기들과 수색대에 함께 근무했던 내무반 동료들이 이제 며칠후(2016년)에는 환갑을 맞다니 

세월이란 활 시위를 벗어난 나르는 화살보다 더 빠름을 새삼 느낀다.

 

 

 

1977년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입영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원주 제1하사관 학교~11사단으로 갔다

신원조회 후 사단 직할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매일 매일 하루 일과는 구보10km와 사격과 적전술 (북한군 총검술인 창격술) 그리고 주특기 교육인 폭파교육

 

 그 당시 우리 수색대는 매일 사격훈련으로 인하여 오른쪽 꼿구멍 옆의 볼태기가 항상 멍들고 찢어져 있었다. 사격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총알이 모자라서 옆의 직할대에 가서 총알을 바꿔왔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우리와 급이 같은 사단 직할대... 병참대와 통신대 그리고 공병대에가서 우리의 탄피를 주고 총알을 바꿔서 받아오는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바쁜 일과중에 사격을 하러 가지 않아도 되고 우리는 충분한 총알이 있기에 열심히 사격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스무살때 홍천에서 군생활을 3년을무사히 마친곳이다. 이곳 가까이에 있는 장항리 굴지리 유격장에 수시로 가며 때로는 그 당시 다리가 없었기에 굴지리에서 얕은 강을 건너서 이곳 용수리를 지나서 제곡리를 지나고 양덕원 그리고 침투 대항군으로 시동 골짜구니까지 걸어서 행군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 홍천 11사단에서 폭파하사로 3년 복무하였다 ⓒ 2015 한국의산천

홍천 화랑사단 11사단 수색대는 사격과 구보, 행군. 태권도, 적전술,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항시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홍천의 이 산 저 계곡 발길이 안닿은 곳이 없으니...  

홍천강의 모든 다리의 교각을 목측하고 또는 실제로 줄자로 재고 폭파장약과 반동장약 수치를 뽑고 지발식 폭파 등등 ...   

홍천강은 자주 접하는 상시 훈련장, 춘천댐 폭파훈련, 오대산 강릉해변까지 천리행군과 상륙훈련(우리가 왜 화랑의 상륙사단인지 이해는 안가지만)

 

 홍천(洪川)은 우리나라 시·군·구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너른 고을이다. 시(市)중에 가장 넓다는 안동시의 면적(1,519.18㎢)에 또 강화도 면적과 맞먹는 300㎢를 더해야 홍천의 면적인 1,818.9㎢와 비슷해진다. 면적이 가장 너르기도 하지만 동서의 길이가 가장 길기도 하다.

 

 즉, 서쪽은 북한강의 청평호 물살에 닿아있으니 서울이 멀지 않은데, 동쪽 구룡령과 오대산의 두로봉에선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주민들은 흔히 “홍천의 동서는 300리”라 말한다. 지리상으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고을인 것이다.

 

 홍천군의 가장 큰 젖줄은 북한강의 제1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이다. 한중지맥(한강기맥)의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이 강은 서쪽으로 흐르며 여러 지류를 합류하면서 군 중앙부를 지나 북한강 청평호에 흘러든다.

 

 

▲ 참 오래된 병역 수첩

군입대 1977년 7월11일

군제대 1980년 4월 3일 (33개월 만기제대)

 

매일 사격장에 가기위해 건너던 홍천강

유격장에 가기 위해 건너던 홍천강

유격장의 조교로 근무하며 매일 쳐다보던 홍천강.

 

이곳 11사단, 사단 수색대에 배치되고서 얼마 후 선임들이 줄줄이 전역하였기에 비교적 빨리 내부반장이 되었지만 내무반장이란 너무 힘들고 정신적인 고통이 많이 따랐다. 하지만 강이라고는 학창시절 서울의 한강만 건너다니다가 이곳 홍천강을 접하며 강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지금까지 홍천강을 잊지못하고 자주 찾는곳이 되었다.   

 

 

▲ 이념과 과거를 넘어서 예술가 최승희 생가터 찾아가기 ⓒ 2015 한국의산천

 

세계적 무용수 최승희 

1980년대 월북인사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풀리면서 최승희는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뮤지컬, 연극, 소설 심지어 드라마로까지 제작됐다.

현대무용을 낯설어하는 일반 대중도 최승희는 알고 있었다. 이념과 과거를 넘어서 예술가 최승희의 업적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최승희는 누구인가? [위키백과 참고]  

 

 

▲ 1936년 세종로 명월관에서 열린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축하잔치에서 최승희와 손기정

 

최승희(崔承喜, 1911년 11월 24일 ~ 1969년 8월 8일)는 한국의 무용가이다. 남편은 좌파 문학평론가 안막이다.

출생 : 1911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 또는 경성부
사망 : 1969년 8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야 : 무용
사조 : 신무용

 

 

 

생애

강원도 홍천, 또는 경성부 태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서울에서 자라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진학하여 음악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낙방한 뒤,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로의 입신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시아 바쿠는 최승희의 입단을 청하는 오빠 최승일의 청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최승희는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서 사사 받았다.

무용활동 두차례 일본 유학 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반도의 무희》(1936)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년대 후반에는 수년 동안 칠레 등에서의 해외 순회 공연을 벌이면서 세계적인 명성도 얻었다.

 

북한에서의 예술활동광복 후 남편인 안막을 따라 월북해서 최승희무용연구소(평양특별시)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 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되었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그러나 한설야와 함께 사후 복권된 상태라는 것이 2003년에 확인되었고,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어 있다.

 
무용계의 영향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한국 무용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작품으로는 〈영산춤〉, 〈에헤라 노아라〉, 〈달밤의 곡〉, 〈반야월성곡〉, 〈우조춤〉, 〈칼춤〉, 〈보살춤〉, 〈초립동〉, 〈고구려 무희〉, 〈광상곡〉, 〈가면의 춤〉, 〈승무〉, 〈인도인의 비애〉,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방랑인의 설움〉, 〈봉산탈춤〉, 〈유격대의 아들〉 등이 있고, 북조선에서 쓴 저서로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이 있다.

 

 

 

▲ 최승희(앞줄 오른쪽)와 남편 안막( 본명 안필승), 딸 안승자.

최승희에게 현대무용을 가르킨 이시이 바쿠(石井 漠, 석정 막, 1887년 12월 25일 ~ 1962년 1월 7일)는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무용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평론가 안필승(安弼承)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이라 개명하였다.

딸 안성희

안막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안성희도 소련에서 발레 유학을 하고 돌아와 북조선에서 무용가 및 안무가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 위문 공연에 참여하고 여러 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어 친일 논란이 계속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최승희의 국방헌금 헌납은 강요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이나, 설혹 친일행위가 사실이더라도 이로 인해 그의 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등 일제 강점기의 행적에 문제가 없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최승희는 비록 친일파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서도 자신은 한국인임을 떳떳이 밝히고 한국 전통 춤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홍천군에서 최승희의 춤 선양사업 등을 한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등 단체와 여론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숙명여자고등학교 동문
수상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끝나지 않은 친일·친북 논란   

 

무용계에서 이 모든 논란 자체가 한 예술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적절치 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최승희란 인물은 ‘이념을 넘어 예술’로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최초 ‘춤 자료관 연낙재’ 관장인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승희는 좁게는 한국 신무용의 창시자, 넓게는 세계무대로 진출한 한국 무용수”라고 평가했다.

 

최승희의 스승인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는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사도라 던컨의 제자다.

즉 최승희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예술로서의 현대무용을 배운 조선 최초의 여인이다.
  
   또한 최승희는 서구 현대무용의 답습을 넘어서 조선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을 접목시키며 세계에 진출했다.

최승희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미국 10회, 프랑스 23회를 비롯해 미주·유럽·중남미에 이르기까지 150여회의 공연을 가졌다.

 파리 국립극장 공연 때는 피카소, 마티즈, 로망 롤랑 등 세기의 예술가들이 최승희 공연을 관람하고 격찬하기도 했다.
  
   최승희가 현대무용의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조선 전통의 매력 때문이다.

최승희는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을 비롯해 무명의 기생, 광대들로부터 다양한 전통무용을 배웠다.

덕분에 ‘검무’ ‘승무’ ‘초립춤’ ‘보살춤’과 같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독자적인 무용이 탄생했다.

 

 -죽어서도 고달픈 천재무용가 / 이은규 기자

 

 

친일, 월북... 춤만 출 수 없었던 불운한 천재 춤꾼

 

 

 

◀ 1939년 프랑스 파리에서 선 보인 '보살춤'

 

  최승희는 성공에 도취되기 전에 고난이 시작되었다. 스무 살에 결혼한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이 골수 사회주의자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활동을 하다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최승희까지 사찰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국내의 생활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일본인 스승 이시이 문하로 다시 들어가 활동하던 중 배를 타고 미국과 유럽 순회공연에 나선다. 그리고 앞서 기술한 대로 공전의 히트를 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와중에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논란이 도마에 오른다.

 

  LA공연 때는 일본 언론들이 주최 측에 반일 배지를 팔고 있다며 ‘최승희가 실질적으로 항일운동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 반면, 뉴욕 공연에서는 친일 시비로 곤욕을 치룬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이 일장기를 단채 시상대에 오를 수박에 없었던 것처럼, 홍보 포스터에 ‘재패니즈 댄서’라고 소개된 것이 발단이었다.

 

 1940년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강요에 의한 것이든, 무용가로서의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든 전례 없는 친일 언동과 행각을 보임으로써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일본궁 참배 시 언론 인터뷰에서 “내 조국은 일본”이라고 하는가 하면, 금전에서는 인색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현재의 가치로 수십억원에 달하는 7만 5,000원의 거금을 국방기금으로 일제에 헌납한 것이다.

 

  또한 곧이어 발발한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일본군 위문공연단에 차출되어 만주와 중국 일대를 돌다가 해방을 맞는다.

 
  베이징에서 해방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던 중 1946년 인천으로 가는 배에 오르지만 한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친일에 대한 단죄의 움직임뿐이었다.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인사로 몰리자 ‘자의든 타의든 친일한 것을 변명하지는 않겠다.(부산일보)’ 며 의연함을 보이지만 여론은 그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때마침 사회주의자인 남편 안막이 북에서 잠입해 채근하자 결국 가족과 함께 북으로 향한다. 입북 직후 만난 김일성의 “살려 왔느냐, 다니러 왔느냐?”는 질문에 살러 왔다고 답한 후 대동강 변에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동독, 러시아 공연 등으로 활동을 재개한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유엔군이 평양을 공격하자 중국으로 피신하는데, 이는 그녀의 열혈 팬인 저우언라이(주은래) 수상의 배려였다고 한다. [홍인희 著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에서 발췌 ]

 

 

▲ 힘차게 도약하는 최승희

 

 1930년대 한반도에는 그 이름이 희망 자체인 사람들이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코리안 댄서로 해외에 그 명성을 드높인 최승희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 최승희는 해외에 나가 한국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한국의 춤을 당당히 공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37년 구미 각국 순회 공연부터 시작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다. 그 중에는 피카소와 장 콕토 등도 있었다. 
  최승희는 해외공연 시 자신을 언제나 코리안 댄서라고 명시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댄서로 오해받기 싫다는 강한 의지였다. 식민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최승희의 당당함과 용기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깊이 영향을 받고, 또 그 환경을 벗어나 높이 도약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녀는 일찍이 ‘선녀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조선의 무희’라는 일본 언론의 평가에서 시작해, 세계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오늘날 최승희는 그녀를 예찬하는 많은 글에서 ‘모던댄스의 어머니’로 불리는 전설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곤 한다.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이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최승희도 무대 밖 세상에서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북이 분단되는 비극적 시대 상황에 휘말려 허덕이다가 1969년 56세의 나이로 비운과 질곡의 삶을 마감한다.

 

 

 

 

 

 

 

선녀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조선의 무희

 

 

 

▲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최승희

앞줄의 가장 왼쪽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는 최승희의 손아래 동서이기도 한 무용가 김백봉입니다.

김백봉은 1946년 월북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한 한국 무용계의 원로입니다.
  

  무용계 일각에서는 최승희를 둘러싼 친일 논란에 앞서 그가 식민시기 조선의 민족성을 세계에 알린 업적부터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편다.

최승희는 특히 해외공연에서 ‘재패니즈 댄서’보다 ‘코리안 댄서’라는 표현을, 일본 이름 ‘사이 쇼오키(Sai Shoki)’보다 한자 ‘崔承喜(최승희)’를 더욱 선호했다.

그는 조선 국악기도 사용했고 한량의 풍류를 표현한 ‘에헤라 노아라’ 공연 때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하얀 갓과 하얀 도포를 즐겨 입었다. 

 

 

 

유명한 김영랑 시인과의 교류도 있었으니...

 

영랑은 열네살 어린 소년의 몸으로 첫 결혼을 한지 1년만에 상처를 하고

그 후 8년 후 스무살 개성 처녀 안귀련(원산 루씨여중고 교사)를 맞아 재혼을 하게 된다

 

주례는 여운영(1866~1974 독립운동가) 이 맡았다.

이 결혼식에는 훗날 세계적인 무용수가 된 최승희가 참석했다.

 

얼마전까지는 열열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무용가 지망생은 장손의 며느리가 될수없다" 는 완고한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여고생의 몸으로 친오빠 최승일 시인(영랑의 친구)과 함께 옛 애인의 결혼을 축하하러 왔다.

이 소녀의 가슴속에서 ' 첫 사랑 영랑'의 이미지가 깨끗이 지워졌을까

<아버지 그립고야 '김현철 지음 발췌>     


 

 

 피카소도 찬미한 원조 한류 스타 최승희 - 홍인희 (교수 작가)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시 10선'에 들어가는 명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오늘날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명시는 자칫 세상에서 나오지 못할 뻔했다.

1930년대 어느 봄날, 영랑의 생가에서 장안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이 모여 각자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영랑도 앞마당의 모란꽃을 보며 빠른 속도로 시 한수를 지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춘원 이광수가 “왜 그래, 이리줘 봐.” 하며 낚아 채 읽어보고는 직접 암송했다. 그러자 참석자들의 감탄과 찬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시에는 또 하나의 사연이 얽혀있다. 7년 전 부인과 사별한 김영랑은 21세 되던 해, 문우 최승일의 여동생으로 숙명여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최승희에 반해 1년여 동안 불꽃같은 사랑을 키운다.

 

  당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2학년생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가 열세 살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최승희가 나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영특한 데다 뒷날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더구나 조혼의 풍습이 여전한 시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양가의 완고한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자, 영랑은 극심한 비관에 시달리다가 고향집 동백나무에 목을 매었다. 다행히 조카가 발견하여 겨우 살아남는데, 이런 처연한 실연의 아픔이 시문 곳곳에 배어있다.


  과연 최승희는 누구인가?

당시 춤과 음악이라면 궁중 예술의 영역도 있지만 주로 술자리의 기녀나 무당 또는 하층 백성들에 의해 펼쳐지는 천한 놀이 마당정도로 치부되던 1920~1940년대에 조선의 혼과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무대를 종횡무진하던 불세출의 무용가였던 것이다.

 

   일찍이 한반도와 일본, 중국 등 동양권 무대를 섭렵한 후 미국, 유럽을 거쳐 중남미지역까지 진출해 무려 150여 차례 순회공연을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베를린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과 함께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이고 암울한 조국의 장래에 한줄기 서광을 비춰주던 조선의 딸이기도 했다.

 

  그 시절 최승희가 몰고 온 국제적 열풍이란 요즈음의 오빠부대, 아줌마 부대 붐과는 사뭇 차원이 달랐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 유력 정치인까지 그녀의 뛰어난 춤과 매력에 빠져 경이로운 일화를 남겼다.

 

 

 

◀ 최승희의 학춤  

 

 1차 파리 공연에서는 초립동 춤이 큰 반향을 일으켜 그곳 여인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조선식 초립동 모자가 유행했다.

 

  파리의 샤이요 국립극장에서 진행된 2차 공연에서는 20세기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저명한 영화감독 장 콕도,

노벨상 작가 로맹 롤랑도 객석에 자리한 가운데, 반라의 차림에다 상체와 손동작으로만 연출하는 보살 춤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편 미국 뉴욕에서는 조선의 고전무용 형식을 취한 승무, 무녀, 낙랑벽화, 신라궁녀 춤 등을 주로 공연한 가운데,

작가 헤밍웨이와 존 스타인벡, 전설적인 배우 찰리 채플린과 로버트 테일러등 국제적 유명 인사들이 다수 관람했다.

 

이중 로버트 테일러는 그녀의 춤추는 자태에 반해 연모의 정이 담긴 편지를 전달하면서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의 했다고 한다.

 

 선녀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조선의 무희

 

  오늘날 최승희는 그녀를 예찬하는 많은 글에서 ‘모던댄스의 어머니’로 불리는 전설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곤 한다.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녀는 일찍이 ‘선녀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조선의 무희’라는 일본 언론의 평가에서 시작해, 세계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미국 순회공연 시에도 <뉴욕 타임즈>등 유수의 현지 언론 매체들이 ‘신비와 환상의 춤’ 또는 ‘그녀에게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는 등 찬사를 쏟아냈으며,

특히 프랑스의 <르 피가로>는 ‘동양 최고의 무희, 파리에 오다‘는 기사로 그녀를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가장 한국적인 예술로서 세계를 주름잡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최승희도 무대 밖 세상에서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북이 분단되는 비극적 시대 상황에 휘말려 비운과 질곡의 삶에 허덕인다. <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두번째 이야기'(홍인희 著)에서 발췌>

 

 

 

▲ 상기 내용 참고 문헌 : 홍인희著 우리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 김현철著 아버지 그립고야 ⓒ 2015 한국의산천

 

 

▲ 최승희에게 현대무용을 가르킨 이시이 바쿠

 

이시이 바쿠 (石井漠)

1887년 출생, 1962년 사망. 일본 출신의 무용가이다. 어린 시절에 발레를 배워 무용가와 무용교사로 일한 뒤, 35살의 나이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4년간 서양 무용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을 비롯해 무용과 음악의 새로운 관계에 눈을 떴고, 일본으로 돌아와 근대무용을 전파했다.

또한, 1926년 우리나라 경성에서도 공연을 개최했는데, 그것이 조선의 신무용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최승희(崔承喜)와 조택원(趙澤元) 등을 연구생으로 받아들여 한국 근대무용 탄생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이 바쿠 [石井漠] (한국무용사전, 2011. 10. 24., 메디컬코리아)

 

 

 

 

▲ 우물이라고 하기에는 물 한줄기도 흐르지 않는 너무도 빈약한... 그녀의 상반된 평가를 보듯 심란하기만 한 우물(?) ⓒ 2015 한국의산천   

 

 

  

최승희의 생사가 알려진 것은 2003년이다. 북한의 국영중앙통신의 방송을 전하는 일본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서였다. “조국의 광복과 부강과 번영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온몸을 바친 22명 열사의 유해를 애국열사 능에 새롭게 안치했다. 그중 마지막에 최승희의 이름이 있었다.”

 

마이니치신문은 최승희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김정일의 처 고영희의 조언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고영희는 일본의 간사이에서 태어나 청춘기에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의 만수대 가무단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최승희의 제자일 가능성도 있다.

 

 

 

  최승희는 무용가 최초의 인민 배우로 승승장구하는 듯 했지만 최승희의 든든한 가림막이던 남편 안막도 문화계 권력다툼에서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1958년 숙청당했다.

최승희의 세력도 점점 사그라졌다. 1960년대 북한에서는 ‘부채춤’을 비롯한 최승희의 무용은 부르주아적 미학관을 지녔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애초에 최승희는 당성, 인민성, 노동계급성 등의 이념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해 갈등을 일으켰다. 1960년대 후반 최승희도 당의 요구에 따라가지 못하고 체제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숙청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북한의 발표로는 1969년 사망했다고 하니 향년 56세였다.

 

 사망의 원인에 대해서도 억측이 분분하지만  북한 체제의 특성상 정확한 내막은 일 길 없으나, 온전히 제명을 다 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춤 하나로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등 일찍이 한류의 전형을 보여준 국보급 천재 예술가의 마지막 모습치고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일제로부터는 ‘반일 성향의 요주의 인물’로,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친일 인사’로, 북에서는 ‘반동적 부르주아 예술인’으로 정치적 낙인에 시달리다 갔으니, 그 죽음이 애처롭기만 하다.

     
   최승희는 ‘동양의 진주’ ‘반도의 무희’ ‘세계적 무희’라는 수많은 수식어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불거진 ‘친일·친북’ 논란과 ‘지역축제 난맥상’ 등이 섞이며 최승희 평가는 더욱 복잡해졌다. 무용계에서도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는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쉬운일은 아니다. 

 

 

 

▲ 시동 골짜기에 있는 9연대에서 쌀을 씻으면 그 쌀듯물이 이곳 제곡리 앞 개울을 지나서 홍천강 까지 흘러갔다는...

▲ 달려라!  용수리 응아지나루와 남노일리를 지나서 팔봉산 유원지 그리고 모곡 배바위까지 달려야 한다 ⓒ 2015 한국의산천

날씨가 포근한 탓인지 낮에 이슬비가 조금 내렸다. 겨울이라 낮시간이 짧다. 어여 달리자  

 

▲ 굽이치며 내려온 양덕원川이 홍천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에 응아지 나루터가 있었다 ⓒ 2015 한국의산천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스무살때 홍천에서 군생활을 3년을무사히 마친곳이다. 이곳 가까이에 있는 장항리 굴지리 유격장에 수시로 가며 때로는 그 당시 다리가 없었기에 굴지리에서 얕은 강을 건너서 이곳 용수리를 지나서 제곡리를 지나고 양덕원 그리고 침투 대항군으로 시동 골짜구니까지 걸어서 행군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흘러가는 것이 강물인가 내마음인가. 

 응아지나루는 옛적에 강원 내륙과 한양을 잇는 뱃길로서, 세계적인 춤꾼 최승희가 유학을 가기 위해 고향마을(제곡리)에서 10리 길을 걸어 이곳 응아지나루에서 뗏목을 타고 서울로 갔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 나루터이다.

 지금은 남한강의 팔당댐과 충주댐. 북한강 수계에는 청평댐이 생기면서 수운은 쇠락하고 나루와 뱃길은 사라졌지만 홍천강 물줄기는 유구한 세월의 변화를 잊은 채 흐르고 있다.

이곳은 홍천군의 9경 중 4경에 속하는 ‘수태극’(홍천강 물줄기가 휘몰아 만든 태극 모양의 지형) 경관으로 어느 작가는 “태극으로 굽이 도는 저 물줄기는 최승희의 춤사위인가”라고 극찬하고 있다.

 

※ 나루 

  강을 건너는 방법 중 가장 편한 것은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옛날의 토목 기술로는 한강의 본류와 같이 큰 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가에 삶의 터전을 일구거나 어로활동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경우마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기가 가장 수월한 곳을 택하여 배를 띄웠을 것이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루가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한강을 건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배를 이용하여 물살이 약한 부분을 건너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편리한 지점에 배를 대고 출발 시킬 수 있는 특별한 시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장소가 바로 나루였다.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에 이르면서 한강은 세곡을 실어 나르는 내륙수운의 중심지가 되고, 또한 전국에 주요 간선 도로가 형성되면서 도로가 통과하는 한강에는 대규모의 나루가 발달하였다. 옛 문헌에 보이는 이러한 나루는 광나루, 삼밭나루,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삼개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등이었다. 이들 나루와 나루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주는 나룻배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공공 편의시설이었다.

 

 

▲ 금학산에서 내려다본 노일리 홍천강의 수태극  ⓒ 2015 한국의산천

 

※ 위 사진의 상단 오른쪽에서 양덕원천이 흘러들며 홍천강과 만나는 지점이 응아지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산능선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된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한반도 지형과 흡사한 곳은 몇군데 되지만 이렇게 흐르는 강물이 완벽한 태극문양을 그리는 수태극형상의 물동이 풍경은 노일리 이곳말고는 없으리라.  

 

아름다운 강마을. 홍천 금확산에서 내려 본 수태극 문양의 홍천강. 산굽이를 돌아 흐르는 홍천강은 수태극을 그리며 흐른다. 금확산 (655m)은 홍천 팔봉산에서 정동쪽으로 약 4.5km떨어져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홍천강변 마을인 노일리 마을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이다. 금학산은 삼면을 홍천강이 굽이 돌며 에워싸고 있다.

날씨는 추워도 주말 연휴가 기다려지는 요즘.

계속해서 내일은 모곡의 남궁억 선생 묘소 탐방과 홍천강 너브내길 따라 모곡 배바위 풍경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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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