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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홍천여행 홍천강 르포

by 한국의산천 2024. 2. 9.

홍천강 르포타아쥐 내 사랑 홍천강

[글 정리: 사진: 한국의산천 ]

홍천강을 따라가며 강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홍천(洪川)은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중 면적이 가장 너른 고을이다.

시(市) 중에 가장 넓다는 안동시의 면적(1,519.18㎢)에 강화도 면적과 맞먹는 300㎢를 더해야 홍천의 면적인 1,818.9㎢와 비슷해진다.

 

면적이 가장 너르기도 하지만 동서의 길이가 가장 길기도 하다.

즉, 서쪽은 북한강의 청평호 물살에 닿아있으니 서울이 멀지 않은데, 동쪽 구룡령과 오대산의 두로봉에선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주민들은 흔히 “홍천의 동서는 300리”라 말한다. 지리상으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고을인 것이다.

 

홍천군의 가장 큰 젖줄은 북한강의 제1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이다. 한중지맥(한강기맥)의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이 강은 서쪽으로 흐르며 여러 지류를 합류하면서 군 중앙부를 지나 북한강 청평호에 흘러든다.

 

오늘은 2월의 첫날. 앞으로 두어달 지나면 온 세상 사물이 물 오르며 통통튀는 Spring 4월이다

洪川江 노을지는 그 강가에 다시 서고 싶다. 홍천강 143km 전 구간을 자전거로 달리며.

▲ 홍천강 모곡 밤벌 유원지와 마곡 황골 유원지 사이에 자리잡은 소남이섬 전경 ⓒ 2011 한국의산천

 

홍천군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지맥으로 협곡상태를 이루는 산악지대로서 홍천군의 면적은 1,818.68㎢로 태백산맥의 크고 작은 지맥에 둘러싸인 중산간 지역이며, 홍천읍 시가지를 관통하는 북한강 지류인 홍천강이 태백산맥의 분수령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북한강과 합류하고 있어 그 유역에 작은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으로 인제군과 양양군, 남쪽으로 횡성군과 평창군, 서쪽으로는 경기도 양평군과 북쪽으로 춘천시와 접하고 있다

홍천강은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하여 군 중앙부를 동서쪽으로 흐르다가 굴지리 서면 팔봉리·모곡리·마곡리를 지나서 청평호로 흘러드는 길이 143km의 아름다운 강이다.

 

1935.5.1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분지리를 홍천군 서면 굴업리에 편입하였음.
1945.8.15 해방과 더불어 국토가 분단되면서 38선 이남에 해당되는 인제군 기린면의 진동리와 북리의 일부와 인제면의 원대리,남면의 부평,어론,김부,신월,정자,갑둔,신충 7개리를 편입하여 신남면을 새로 만들고 인제군 내면을 편입하여 11개 면의 행정구역을 이루다가

1954.10.21 법률 제350호 「수복지구 임시조치법」시행에 따라 신남면은 인제군에 환원시키고 내면은 그대로 남아 10개면이 됨

1963.1.1 법률 제1177호로 홍천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남면의 삼마치리가 홍천읍으로 편입 되었고 1읍 9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음

1973.7.1 대통령령 제6542호('73.3.12공포)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춘성군 동산면 북방리와 풍천리가 홍천군 북방면과 화촌면에,양양군 서면 명개리가 홍천군 내면에 편입되는 한편 홍천군 내면 미산리가 인제군에, 남면 상창봉리가 횡성군에 이양되었음.

1983.2.15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남면 상오안리가 홍천읍에 편입되었으며.
1983.10.1 두촌면 천치리를 천현리로 변경하였음.
1995.7.26 북방면 성동리 일부(도심이)가 화촌면 구성포리로 편입되었고
현재 홍천읍,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영귀미면, 남면, 서면, 북방면, 내면의 1읍 9면으로 구성되어 있음.

 

▲ 얼어붙은 江 그리고 소남이섬 ⓒ 2011 한국의산천

 

홍천강 하류에 자리한 소남이섬 강 왼쪽으로 보이는 산은 해발 570m인 좌방산이다. 소남이섬은 모래와 자갈의 퇴적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홍천강, 너는 내 가슴이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잊지 않았음을 알고 있겠지. 푸른 강, 지나간 세월 내 추억의 강이여.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갈 뿐이다.

 

또 홍천강이야?

주변사람들이나 집사람은 말한다

그렇다. 홍천에서 병역의무 3년도 지겨울텐데 그 후로 20여년이 넘게 휴가를 홍천강가에서 보냈고 등산을 가도 홍천강가의 산을 올랐다. MTB를 가지고 임도를 찾아가도 홍천강가에 위치한 홍천강이 잘 보이는 임도를 달렸다. 그렇기에 또 '홍천강이야?.라고 말을 하겠지. 그래 누가 뭐라해도 나는 아직 홍천을 다 모른다는 것이다.

 

전국 시군구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 바로 강원도 홍천군이다(면적: 1817.90 ㎢ ) 그 넓은 홍천군을 400여리에 걸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 지르며 흐르는 강이 있으니 이름하여 홍천강 또는 화양강이라 한다. 400여리 무려 서울에서 대전에 이르는 거리를 흐르는 강이다.

 

홍천강은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강으로 많은 산을 弓弓乙乙 휘감아 돌으면서 수많은 여울과 백사장을 만들어냈으며 어느곳이나 강가에 자리 잡으면 그곳이 최고의 휴가지가 되며 낚시대를 드리우는 곳마다 낚시명소가 되는 곳이다.그래서 강원도의 아름다운 젖줄이자 숨은 보석이라고 말하는 곳이다.

 

홍천강은 서울의 한강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진 강이 아니다. 자연 그대로 오랜 세월동안 물이 흐르는 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강처럼, 강다운, 강스러운 강의 모습을 간직한 강이다. 강가에 서있는 미루나무 그리고 강피라미 잡으며 물장구치던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 어린 시절의 강이다.

홍천강
홍천의 젖줄인 홍천강(洪川江)은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해 홍천시내 중앙을 지나서 수많은 산을 굽이 돌아 청평호로 흘러든다. 총 길이 143㎞로서 한강의 제2지류, 북한강의 제1지류이며 서울에서 대전에 이르는 거리만큼을 흐르는 긴강이다.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강줄기는 내촌천(乃村川)이라고 불리며 흐르다가 두촌면 남쪽에서 장남천(長南川)을 합하고 남서쪽으로 흘러 야시대천(也是垈川)·풍천천(楓川川)·덕치천(德峙川)을 차례로 합류한다. 홍천읍(시내)를 지나서 서서히 강의 흐름을 서쪽으로 바꾸면서 오안천(吾安川)·성동천(城東川)·어룡천(魚龍川)·중방천(中坊川)을 차례로 합친 뒤 서면 마곡리를 지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강원도 춘천시 남면 관천리 경계에서 북한강의 청평호로 흘러든다.

 

다시한번  명칭을 살펴보면,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리편과, 17세기 중엽에 저술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 및 1765년경 8도의 읍지를 수집하여 편찬한 여지도서, 1871년경 편찬된 관동읍지에는 홍천강을 남천(南川)으로 표기하였고, 고구려 때의 홍천 이름을 따서 벌력천(伐力川)·녹요강(綠繞江)·화양강(華陽江)이라고도 한다. 1831년경 강원감영이 관내 군현의 읍지를 모아 편찬한 관동지에는 화양강(華陽江)으로 표기하였다.

 

1861년 김정호가 판각한 대동여지도엔 홍천강(洪川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홍천 주민들은 홍천읍을 중심으로 상류지역은 화양강, 하류지역은 홍천강이라고 불러왔다. 요즘엔 상하류 구분하지 않고 모두 홍천강이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홍천강은 대체적으로  수심이 낮고 수온이 따뜻해 매년 피서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어느곳나 낚싯대만 드리워도 손맛이 짭짤하다. 그중에서도 마곡에서 모곡, 개야리, 팔봉산, 화양강 등이 낚시 포인트다.  모래무지, 쏘가리, 누치 등 1급수에만 사는 물고기가 지천인 까닭에 강태공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곳이며 견지낚시꾼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이다. 또한 홍천강 강줄기를 따라 자연발생 유원지가 줄지어 늘어서 있어 어느곳에나 차를 세우고 피서지를 정해도 후회하지 않는 곳이다. 

 

▲ 견지낚시의 천국 홍천강 ⓒ 2011한국의산천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홍천, 어떤 곳인가

   
강원도 중서부에 자리한 홍천군(洪川郡)은 동쪽은 양양군과 강릉시, 서쪽은 경기도 가평·양평군, 남쪽은 횡성·평창군, 북쪽은 춘천시와 인제군에 각각 접한다. 지세를 보면 동쪽은 오대산(1,539m)의 두로봉(1,422m)∼응복산(1,360m)∼약수산(1,306m)∼구룡령∼갈전곡봉(1.204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분수령으로 이루고, 남쪽은 두로봉에서 한중지맥으로 이어지며 평창군과 경계를 이루는데 역시 1,000m를 넘나드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인제군과 경계를 이루는 북부도 개인산(1,341m)∼소뿔산(1,123m)∼매봉(800m)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 고을이다. 산지는 군 전체의 87%를 차지한다.

 

고구려시대엔 벌력천현(伐力川縣)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녹효현이라 하여 삭주(朔州·지금의 춘천) 아래에 두었고,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홍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143년(인종 21)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 춘천부의 홍천군이 되었으나 다음해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강원도에 속하는 홍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935년 경기도 양평군의 단월면 분지리가 홍천군에 편입되고, 광복 후 38선 이남 인제군의 인제면·내면·남면의 3개 면이 편입되었다가 1954년 인제면·내면이 다시 인제군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 춘성군 동산면 북방리·풍천리와 양양군 서면 명개리가 편입되었으며, 내면 미산리는 인제군으로, 남면 상창봉리는 횡성군으로 이관되었다. 2010년 현재 홍천읍, 화촌·두촌·내촌·서석·동·서·남·내·북방면의 1읍 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천군의 가장 큰 젖줄은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이다. 한중지맥(한강기맥)의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이 강은 서쪽으로 흐르며 여러 지류를 합류하면서 군 중앙부를 지나 북한강 청평호에 흘러든다. 하천 유역엔 홍천 분지와 소규모의 하안단구, 산록완사면이 형성되어 생활의 터전이 되고 있다. 홍천군 가장 동쪽의 내면은 인제 내린천 최상류인 계방천과 한중지맥 운두령에서 발원한 자운천이 젖줄 역할을 한다.

 

▲ 홍천강가에 자리한 비발디 파크의 물 썰매장 ⓒ2011 한국의산천 

 

길이가 무려 300m인 물썰매장. 수평형·대각선형·다이아몬드형 등 변화무쌍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실내 파도풀,17m 높이에서 떨어지는 하이 스피드 슬라이드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위한 10여 종류의 자그마한 슬라이더까지 있어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욱이 수영복을 입고 초록 잔디 위에서 시원한 물보라를 맞으며 질주하는 물보라 썰매는 아주 색다른 맛이다. 이밖에도 찜질방, 헬스장, 노천탕, 사우나 등을 갖춘 전천후 워터파크로 홍천강에서 놀다가 한번쯤 들러 볼만 한 곳이다.

홍천군

홍천군은 내륙 산간지역이라 여름과 겨울의 기온교차가 심하다. 8월 평균기온 26.0℃, 1월 평균기온 -7.3℃, 연평균기온 11.1℃이지만, 동부와 서부의 차이가 심하다. 연평균강수량은 1,141mm. 면적 1,818.04㎢, 인구 74,000명(2003년 현재)이다. 군청소재지는 홍천읍 희망리.

 

총경지면적 17,484ha 중에서 논 6,742㏊, 밭 10,742㏊로 논밭 비율은 4:6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옥수수·약초·잎담배 등이며 최근 인삼재배가 증가하고 있다. 원목 생산이 많고, 잣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늘푸름한우’라는 상표로 잘 알려진 소를 비롯해 돼지, 사슴을 사육한다.

 

교통은 양평∼인제 사이의 44번 국도와 춘천∼원주 사이의 5번 국도가 홍천읍에서 교차하면서 군의 동서남북를 연결한다. 또 춘천∼양양 사이의 56번 국도가 군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인제∼평창 사이의 31번 국도가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므로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홍천 서부
 
“태극으로 굽이도는 저 물줄기는 최승희의 춤사위인가”
홍천강 물줄기로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무궁화 고을

 

“징징지잉….”

징소리다. 산을 뒤덮은 짙은 구름 때문에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가늠은 안 되지만 징소리가 분명하다. 제비꽃 화사하고 취나물 향기로운 산길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가파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제2봉과 제3봉의 안부. 징소리는 제2봉 꼭대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가파른 바위를 넘어 돌아가니 치성 드리는 무당들이 보인다. 간밤에 제법 비가 많이 내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새벽에 그친 덕에 별 어려움이 없이 칠성당과 삼부인당에서 당굿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기자기한 여덟 봉우리 아름다운 홍천 팔봉산(八峰山·302m). 제2봉 정상 바위에 자리잡은 칠성당엔 가파른 길을 이고 지고 날라온 온갖 제물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강신무(降神巫) 조정순씨(73)가 눈을 지긋이 감고 조용조용 징을 두드리고, 신 제자들은 팔봉산 신령님과 칠성님께 절을 올리고 있다.

 

이어 칠성당 바로 곁 바위턱에 자리잡은 삼부인당(三婦人堂)으로 간다. 자그마한 당 안에는 산 아래 팔봉 마을 서낭신인 홍씨, 이씨, 김씨 세 부인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조 보살과 오늘 굿청을 맡아줄 강신무가 신위 앞에 앉아 징을 치면서 삼부인 신을 모신다. 제단 위에 놓인 명태 한 마리를 소중하게 싸들면 산 위의 신당에서 신을 모시는 일은 끝난다.

 

사위는 구름바다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언뜻언뜻 이웃 바위봉우리들이 보이지만, 발 아래 홍천강은 끝내 자신의 몸매를 보여주지 않는다. 강신무들이 잰걸음으로 하산하기 시작한다. 일흔을 넘긴 노인들 발걸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 바위 사잇길로 휑하니 사라져버린다. 하긴 일년 내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없이 찾아온 삼부인당이 아닌가.

홍천강이 아랫도리를 적시고 흐르는 팔봉산은 인근 팔봉 마을의 진산이다. 마을신앙의 상위 신격이 서낭신과 산신으로서 마을의 진산 꼭대기에 모셔져 신성시되어 왔다는 사실은 산에 대한 경외심의 소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허나 팔봉산은 작은 강변 마을의 진산일 뿐만 아니라 1,000m가 훨씬 넘는 높은 산들을 많이 거느린 홍천이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며 자랑하는 산이기도 하다. 300m 겨우 넘는 낮은 높이에도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듯 암벽으로 이루어져 험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산 아래의 홍천강변 널따란 주차장에선 굿청이 시작되었다. 올해엔 굿에 쓰일 돼지가 열 마리나 들어왔으니 예감이 더욱 좋다. 연분홍빛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무당이 동서남북을 향해 징을 울리며 절을 한다. 이어 그녀의 입에선 무가(巫歌)가 흘러나온다. 징소리와 노랫소리는 신의 음성인양 둘러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이 당굿을 보러 마을 사람들은 물론 원주, 춘천, 서울 등지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통 강신무의 축원으로 팔봉산 당굿, 행사 기원굿을 연다. 이어 칠성굿-장군굿-작두굿-대감굿-대신동자굿을 마치면 첫날의 굿은 얼추 끝난다. 다음날은 홍천강에서 넋을 건지는 용신굿을 한다. 큰물로 죽어간 마을사람들의 넋과 물놀이 왔다가 강에 빠져죽은 넋을 건져 해원상생하는 굿이다. 그리고 굿을 이끌어 가는 당주(堂主) 조정순 강신무의 뒷점굿인 한마당굿으로 이틀만의 팔봉산 당굿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곳 팔봉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줄 신당(서낭당, 산신당)을 팔봉산 꼭대기에 두고 그 신당을 삼부인당으로 불렀다. 이(李)씨 성을 가진 시어머니와 홍(洪)씨 성을 가진 딸, 그리고 김(金)씨 성을 가진 며느리, 이 세 분을 모신 당이 삼부인당(三婦人堂)이다. 강신무 조 보살은 이씨 성을 칠성정기로, 김씨 성을 산신정기로, 홍씨 성을 삼해용왕정기로 계시받아 각기 흰 색, 파란 색, 빨간 색으로 삼아 그녀의 굿당에 물색을 걸어 두었다.

 

팔봉 주민들은 삼부인 서낭신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당제의 역사는 400여 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현(縣)에서 주관하다가 어느 때부턴가 무당이 맡아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 흔히 마을굿은 마을 어른들이 유교식으로 주관하게 마련인데, 이 마을의 당굿은 신당에서 삼부인 신을 모셔와 굿을 하는 일 모두를 무당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운무가 걷힌다. 말끔한 팔봉산 얼굴이 드러난다. 아담하지만 볼수록 끌리는 묘한 매력덩어리의 산이다.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국수와 떡으로 허기를 달랜 뒤 팔봉산을 뒤로하고 홍천강 물줄기 따라 흘러간다.

 

홍천은 무려 87%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 고을이다. 화전이 성행하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 산에 불을 놓고 조와 수수와 옥수수 씨를 뿌렸고, 가파른 돌밭을 일궈 감자를 심었다. 수량 적지 않은 이 홍천강이 있었지만 논농사를 지을 만한 큰 평야는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홍천강 물줄기에 기댄 강마을마다 유원지가 형성됐다. 여름만 되면 강변은 울긋불긋 텐트의 물결로 뒤덮였다. 주민들이 물고기 잡고 헤엄치던 그 강물은 이제 외부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도 아주 번잡한 유원지만 벗어나면 주민들도 이른봄의 풋나물처럼 순박함을 잃지 않고 있다. 자연의 힘일 것이다.

 

강을 따르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피서객들 몰려드는 한여름보다는 산괴불주머니, 조팝꽃 같은 온갖 들꽃 흐드러진 요즘이 최고다.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산 사이를 굽이돌며 흐르는 강물을 쉬엄쉬엄 감상하는 맛이란! 조용하고 깨끗한 물에서 지내길 좋아하는 원앙 부부도 몇 쌍 만난다. 암수가 서로 정다울 수밖에 없는 봄날이기 때문일까. 녀석들의 몸짓은 한없이 한가롭고 행복해 보인다.

 

물론 사람들도 있다. 물옷 입고 맑은 강물에 몸 담근 채 시침질에 여념 없는 견지낚시꾼, 호박돌 깔린 깊은 소(沼)에서 스피너 던지는 데 정신 팔린 루어낚시꾼들도 만난다. 맛 좋다는 꺽지나 쏘가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릴대 서너 개 드리우고 한 자리서 며칠을 지낸 듯한 열성 낚시꾼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물 따라 산 따라 그렇게 흘러가다 다다른 곳은 홍천강 하류의 모곡리 보리울. 홍천강변에 널려있는 유원지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흔히 ‘홍천강유원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강변 미루나무 그늘에서 매미소리 자장가 삼아 졸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슬기 잡고, 견지낚시로 피라미와 누치 잡아 매운탕 끓여 먹던 여름날의 추억. 이곳 모곡리 강변의 여름 풍경은 홍천강 전체의 여름 풍경화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모곡에 자리한 한서 남궁 억 선생 기념관 ⓒ  2011 한국의산천

 

  이 홍천강의 여름을 대표하는 모곡리 강변 들어서는 길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꽃인 무궁화를 만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궁화를 민중의 가슴에 심어준 인물을 만난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1863-1939)이 이곳 보리울 마을로 낙향한 것은 1918년. 독립신문에 참여했고, 독립협회 총무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던 한서. 황성신문 초대 사장으로 언론에 종사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한서는 배화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몰래 국사를 가르치고, 한반도 지도에 무궁화를 수놓게 할 정도로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열중하다가 일제의 핍박이 점차 심해지자 고향인 이곳 보리울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한서의 의지는 볼 것이라고는 강줄기밖에 없는 첩첩산중의 오지였던 이곳에서 더 빛을 발했다. 교회와 학교를 짓고 교육에 힘쓰는 한편 무궁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리는 데도 힘썼다. 그러다 1933년 남궁억이 지은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불려지게 되자, 일제는 국사교육 사업과 비밀결사인 십자당사건을 이유로 체포하였다. 한서는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지만 결국 77세인 1939년에 그렇게 바라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게 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한서기념관을 기웃거리다가 한서교회의 현재호 목사님을 만났다.

“기념관이 이곳에 있는 까닭은 한서 선생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이지요. 예배당, 학교, 무궁화 묘포장 등이 모두 요 앞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부친이 한서의 마지막 제자였던 인연을 따라 어떤 영감을 받고 9년 전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교사업을 펼치면서도 한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서의 자료를 찾는 데 주력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여기에 한서기념관이 세워지고, 무궁화동산을 꾸며지고, 초기의 예배당이 복원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남궁억 선생 기념사업은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경제전쟁 아래에서도 큰 가치가 있습니다. 무궁화가 갖고 있는 그 에너지, 그 역동성을 세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운동으로 가꾸어나가야겠지요.”

 

한서교회 앞 무궁화동산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종류인 63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게 그가 임업시험장과 무궁화연구회 등에 편지 보내고 발품도 팔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궁화는 일러야 7월 초순에 피기 시작하니 이 무궁화동산을 빛내는 어여쁜 무궁화꽃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모곡을 벗어나며 무궁화를 생각해본다. 꽃잎 전체가 온통 새하얀 배달, 흰 꽃잎에 붉은 중심부가 들어 있는 백단심, 흰 색 바탕꽃잎 상단에 붉은 무늬가 어리는 아사달…. 스스로도 한 송이의 고결한 무궁화꽃이었던 한서는 한서초등학교 뒤에 우뚝 솟은 유리봉 중턱에 묻혀 오늘도 자신이 사랑하던 이 땅을 굽어보고 있다.

 

홍천은 우리나라에서 면적이 가장 너른 고을이다. 시(市) 중에 가장 넓다는 안동시의 면적(1,519.18㎢)에 강화도 면적과 맞먹는 300㎢를 더해야 홍천의 면적인 1,818.9㎢와 비슷해진다. 면적이 가장 너르기도 하지만 동서의 길이가 가장 길기도 하다. 즉, 서쪽은 북한강의 청평호 물살에 닿아있으니 서울이 멀지 않은데, 동쪽 구룡령과 오대산의 두로봉에선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주민들은 흔히 “홍천의 동서는 300리”라 말한다. 지리상으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고을인 것이다.

 

이 때문에 언어 차이도 있다.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동쪽의 내면은 양양·강릉·속초 등의 영동 방언에 가까워 거센 느낌이 들고, 경기와 붙어있는 서쪽의 서면·남면 등의 말씨는 경기 방언에 가까워 살갑게 들린다.

 

▲ 홍천강 모곡밤벌유원지 입구에 한서 남궁억 선생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일반인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서의 차이는 기후다. 표고를 대충 살펴봐도 서면 소재지가 해발 100m, 내면 소재지가 해발 600m 내외에 이르니 무려 500m의 표고 차이가 있다. 표고 100m에 0.6℃ 차이가 있다고 할 때 3℃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동부엔 800m를 훌쩍 넘기는 높은 고갯마루들이 즐비하다고 보면 적어도 5℃ 이상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녹음이 짙은 여름보다는, 시각적으로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늦은 봄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서쪽의 서면은 복사꽃, 산벚꽃, 돌배꽃 다 스러지고 초여름으로 안내하는 철쭉꽃이 만발한데, 동쪽의 내면은 겨우 이른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5월 초순의 경험으론 내면의 봄이 서면의 봄보다 일주일쯤 늦은 것 같았다. 이는 홍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였다.

 

잠시, 전통 산줄기로 홍천을 살펴보자. 수도권에서 홍천으로 들어설 때는 양평을 지나게 되는데, 양평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강원도를 알리는 반달가슴곰 동상이 반기는 고개가 나온다. 바로 신대치(新大峙)라 불리던 신당고개다. 44번 국도가 확포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당고개엔 큰 서낭당이 있었지만, 고갯마루를 깎아 길을 넓힐 적에 당집도 함께 사라졌다.

이 신당고개는 영동과 서울을 잇는 길목이기도 하면서, 빗물을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즉 한강을 남북으로 가르는 거대한 산줄기인 한중지맥에 속하므로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방울이 남쪽으로 흐르면 남한강으로, 북쪽으로 흐르면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 신당고개를 비롯해 운두령, 삼마치 등이 홍천에 속한 한중지맥 고개 중 두 강의 분수령 역할을 한다.

 

  기왕에 수계(水系)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 짚어보자. 홍천강에 기대고 있는 홍천의 땅덩어리는 거의 북한강 수계에 속한다. 동북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내면만 홍천강이 아닌 내린천의 상류지만, 내린천도 어차피 북한강의 지류이니 홍천의 모든 고을이 북한강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홍천 고을이면서도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 이색 마을이 하나 있으니 바로 동면의 좌운리다.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계천은 원주 섬강의 상류로서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주민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땅속 광맥으로 이 땅을 분류한 일제의 산맥 개념으론 절대로 알 수 없고, 지상의 산줄기로 구분했던 전통 지리 개념으로 보면 삼척동자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 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사랑은 이렇게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지방을 다니다 보면 새롭게 발굴된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수가 적지 않다. 지금은 ‘영암 출신 왕인박사’가 기정 사실화되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월출산 기슭의 왕인박사 이야기는 단지 전설일 뿐이었다. 삼국시대의 불운한 영웅 계백의 묘를 논산 황산벌 근처에서 찾아낸 것도 사학자가 답사하면서 전설과 설화와 지명 등을 조사한 노력의 결과다. 그리고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의 흔적을 좇다가 영월 마대산 기슭에서 시인의 묘와 허물어진 생가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한 향토사학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욕심이 앞서 전문가들의 확실한 고증 없이 아전인수격으로 사실화시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이미 이런 과거사 발굴은 문화에 목마른 이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

‘홍천에 뭐 새로운 게 없을까’, 하고 찾아간 홍천문화원. 거기서 길손은 지난 해 새로 부임한 전상범 사무국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헤어질 때 그는 홍천문화원에서 2003년에 발간한 (벌력문화)를 길손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엔 한 여자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녀는 우리나라가 배출한 세계적인 춤꾼이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에 고통받을 때 그녀는 혼을 빼놓을 듯한 춤사위와 빼어난 미모로 일본과 중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이름을 드날렸다. 세계 사람들은 그녀의 몸짓에 놀라워했고 열광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최승희(崔承喜·1911-?). 서울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던 그녀가 강원도 홍천의 궁벽한 산골 출신이었던 것이다.

 

 

(벌력문화)에서 홍천 출신 언론인인 함광복씨(강원도민일보 논설위원)는 ‘홍천이 낳은 세기의 무희 최승희’라는 제목의 논고를 통해 ‘남북한을 뛰어 넘은 그녀를 고향에서 부활시키자’고 호소하고 있었다.

 

▲ 지난해 여름 이곳에 펜션을 얻어놓고 휴가를 보낸 마곡 황골 유원지 ⓒ 2011 한국의산천

 

이튿날, 모든 일정을 물리치고 44번 국도를 타고 남면 제곡리로 달린다. 양덕원 이후엔 제대로 된 이정표가 단 하나도 없어 물어 물어 제곡리 안말까지 겨우 찾아간다.

함 위원의 지적대로 최승희가 태어나 살던 집은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지만, 최승희가 대여섯 살 때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춤솜씨를 보였다는 옻나무재 샘터는 아직 남아있다. 아쉽게도 옻샘은 말라있었다. 여름 큰비가 온 다음에야 잠깐 흐른다는 게 주민의 말이다. 그런데 주민들 중에 최승희가 살던 집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가 없다. 증언도 서로 엇갈렸다. 100년도 안 되는 세월의 공백이 이렇게 크단 말인가.

 

최근 들어 최승희의 예술은 부활하는데도 고향이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최초 발굴자인 함 위원은 ‘우리 모두가 이데올로기의 서슬 퍼런 공갈에 너무 오랫동안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승희가 월북자였던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최승희를 홍천에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요즘은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묻는다”며 약간은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군청에서도 최승희 고향을 부활시키기 위해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여건은 좋아 보인다. 최승희가 춤추며 노닐었을 마을 앞 냇물은 그 당시처럼 참으로 깨끗해 다슬기가 지천이다. 최승희가 유학 가기 위해 배를 타러가던 홍천강 응아지 나루터까지의 십리 길을 내내 맑은 냇물이 동행하는 데다가 강변의 경치도 빠지지 않는다. 물도 좋고, 산도 좋고, 공기 좋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거기에 제곡리보다 상류의 명동리는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오리농법을 시작한 친환경 마을이라 구경거리도 있다.

 

이렇듯 세계적인 춤꾼 최승희가 고향마을에서 부활하는 데 부끄럽지 않은 환경을 아직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최승희가 제곡리에서 최참봉의 손녀딸로 부활하는 그 날. 그녀가 춤을 추던 옻샘을 다시 찾아와 시원한 샘물을 마시며 목젖을 적시고 싶다. 그때는 떠났던 이 샘물도 다시 돌아와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홍천은 산 깊은 고을임에도 나라의 보물이 제법 많다. 읍내만 해도 읍사무소에 두 점, 홍천강변에 한 점, 이렇게 세 점이 있다. 또 다음달 둘러보게 될 동쪽의 물걸리사지엔 한 자리에 무려 다섯 점의 보물이 있으니, 산악 고을치고는 적지 않은 숫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읍사무소 안에 자리한 두 점의 보물은 ‘제자리의 원칙’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이 보물들은 그곳에서 ‘1천 년 전에 만들어진 정원석’ 이상의 대접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변의 당간지주는 원래의 자리에 있으나 현대식 집 같은 주변 풍경에 묻힌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 모두, 절집이 폐사되면서 남은 유물들이 이리저리 치이게 되면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인 것을.

 

그래서일까. 공작산(887m) 날개에 안긴 수타사(壽陀寺) 가는 길은 마음이 편하다. 하마비(下馬碑) 표석이 있는 수타교에서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용담(龍潭). 나지막한 폭포수 아래의 짙푸른 소는 옛날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또 원래 일월사(日月寺)였던 절 이름이 현재의 위치로 절터를 옮기면서 ‘물 수(水)’ 자를 써서 수타사(水陀寺)라 했는데, 이 용담에 스님들이 빠져죽자 ‘목숨 수(壽)’자로 바꾸었다는 유래도 전한다.

 

홍천서 향내음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이 절집 안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 단아하고, 박물관에 모셔진 탱화도 좋다. 수타사는 사천왕상 복부에서 세조 때 간행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7, 권18의 2권1책 초간본이 발견되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그 책자는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산속에 자리한 절집의 유물들이 도난 당하는 일이 많아지자 본사인 월정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던 것인데, 지난해 소형 박물관을 지었고, 올 가을이면 월인석보를 반환 받는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볼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 화양강인가 홍천강인가 ⓒ 2011 한국의산천

 

  화양강인가, 홍천강인가?’ 홍천강을 지날 때 늘 품었던 의문이다. 홍천 읍내를 휘감고 흐르는 홍천강 물줄기를 건너는 다리가 여럿 있는데, 거기엔 ‘화양교’도 있고, ‘홍천교’도 있다. 그리고 홍천강 앞 표석엔 커다랗게 ‘화양강’이라 새겨놓아 지나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홍천강은 한중지맥(한강기맥)과 가까운 서석면 검산리의 미약골에서 발원해 내촌천으로 서류하다 두촌면 철정에서 장남천을 합류해 덩치를 한껏 키운 뒤 화촌면∼홍천읍∼북방면∼남면∼서면을 거쳐 마곡리를 지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경계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총 143km에 이른다. 물론 홍천 주민들은 대부분 이 물을 마신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리편과, 17세기 중엽에 저술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 등엔 홍천강을 남천(南川)으로 표기하였다. 또 1831년경 관내 군현의 읍지를 모아 편찬한 관동지엔 화양강(華陽江)으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1861년 김정호가 판각한 대동여지도와 1864년경 저술한 지리서인 대동지지에는 홍천강(洪川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결국 홍천강은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남천으로 불리다가 후기에 들어 홍천강과 화양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홍천 주민들은 이 강이 홍천읍을 중심으로 화양강과 홍천강이 나뉜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 상류의 화촌면 주민들은 아직도 화양강이란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짧은 구간을 따로 화양강이라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군청 관계자는 어떤 자료도 없다고 밝힌다.

 

길손은 홍천 지명 자료를 뒤적이다가 문득, 홍천읍에서 화양강 상류로 2km쯤에 있는 검률리의 ‘화냥바위’와는 어떤 연관성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양쪽으로 괴인 돌 위에 얹혀 있는 화냥바위는 그 밑에서 사모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런데 이 바위 때문에 마을이 풍기문란해져서 없애려 했을 정도니 마을에서 바위가 갖는 상징성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화냥바위가 있는 강’이라 해서 ‘화냥강’이라 부르다 화양강으로 변한 게 아닐까.

 

백우산 

백우산 용소골

 

  홍천강, 아니 화양강을 거슬러 오르면 이제 홍천 서부를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좁은 길 때문에 번잡한 화촌면 소재지를 지나면, 곧 ‘강원도 길은 험하니 조심운전하라’는 팻말이 연달아 나오고 이어 고갯길을 오르게 된다. 바로 말고개다.

 

말고개는 지금은 4차선 확포장공사로 어수선하지만, 6·25전쟁 초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면 6·25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밀물처럼 쳐들어오는 인민군의 탱크를 국군이 맨몸으로 막는 장면이 자주 나온 것 같다. 그런데 그 전투가 실재 있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한국전쟁사)엔 같은 시기의 춘천전투와 함께 이곳 말고개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은 1950년 전면 남침을 일으키면서 72시간 이내 서울지구를 남과 북으로 포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인민군 제3·4사단은 의정부 방위선을 돌파해 서울에 진입하고, 제2·7사단은 춘천과 홍천을 통과한 후 이천·수원선에 진입해 국군 주력 퇴로를 차단해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초기 승부를 노린 ‘3일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부전선에선 인민군의 의도대로 승승장구했지만 중부전선은 돌파를 못해 발이 묶이면서 인민군의 선제타격계획이 물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다.

 

6월25일 새벽, 인민군 제7사단은 춘천 총공격과 때를 맞춰 전차를 앞세우고 인제 남면을 거쳐 물밀듯 쳐들어왔다. 홍천을 지키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S자로 굽이도는 말고개에 진을 치고 적을 막고, 후방인 성산에 포진한 제3포대가 철정리로 물밀 듯이 내려오는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두 차례에 걸친 인민군의 말고개 진격은 국군의 저항에 부딪쳐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인민군은 춘천 방어선을 뚫고 남진했으나 홍천을 점거치 못하게 되자 말고개 일대를 융단포격하며 말고개 뚫기 돌격작전을 개시했다. 이때 제6사단 제2연대 소속 장병 19명은 말고개 S자 굽잇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인민군의 탱크에 뛰어 올라 선두 전차 2대를 파괴하였고, 인민군이 다시 후퇴할 무렵 춘천에서 전공을 올린 제19연대가 가세해 인민군을 격퇴한 것으로 《한국전쟁사》에 기록되었다. 이렇게 버틴 게 3일이었다.

 

몇 년 전 말고개를 지나다가 국군 탱크 행렬과 마주쳤을 땐 당시의 전투 상황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도로를 4차선으로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거의 일직선으로 뚫는 바람에, 1950년 당시의 긴장감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국군들이 인민군의 탱크를 맨몸으로 저지했던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수많은 차량은 고갯길을 서둘러 지나고 있다. 말고개를 넘으면 홍천 동부에 바싹 다가섰다고 여겨도 된다.

 

홍천강으로 대표되는 서부 홍천의 자연이, 화장도 할 줄 아는 약간 성숙한 여인이라면 동부 홍천은 아직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는 풋풋한 산골 소녀다. 자연도 그렇고, 자연을 닮아가게 마련인 주민들 품성도 그런 듯하다. 그런 산골이라 동부 홍천이 심심할 것 같다고 여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동부 산골엔 서부 산골 못지 않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널려있다.

인제쪽에서 흘러온 장남천과 서석에서 흘러오는 내촌천이 만나는 철정의 두물머리. 그 두물머리가 가까워지면 도로변 큰 바위에 새겨진 글귀가 눈길을 끈다.

‘여기는 두촌이래유’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홍천 동부
폭포 거슬러 오르는 열목어떼…‘생명의 힘은 놀라워라’
홍천강 물줄기로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무궁화 고을

 

화양강을 거슬러 올라 두촌(斗村) 고을로 들게 되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화양강휴게소다. 홍천강 상류가 화양강으로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이 휴게소는 예전엔 인제, 원통 지나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넘으려는 여행객들이 대부분 쉬어가던 곳이다.

 

▲ 서울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달리며 중간 휴식지인 화양강 휴게소에서 ⓒ 2011 한국의산천

 

44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고 있는 요즘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과 설악․동해의 중간쯤에 자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6번 국도로 양평을 지난 뒤 44번 국도로 바꿔 타고 홍천땅에 들어섰다 해도 이 화양강휴게소나 철정검문소를 지나야 비로소 ‘진짜 강원도’ 땅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일없어도 괜히 버릇처럼 들르게 되는 화양강휴게소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변 조망도 좋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내촌천과 장남천이 만나 화양강이라는 이름을 얻는 합수머리도 한눈에 쏙 들어오고, 그 너머로 펼쳐지는 내촌쪽의 첩첩 산줄기를 감상하기에도 아주 그만이다.

 

▲ 화양강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지는 홍천강 ⓒ 2011 한국의산천

 

합수머리에 있는 마을 이름은 ‘아오라지’. 홍천 지명사전엔, 옛날에 이곳에 기러기가 모여 놀던 호수가 있었다 해서 한자로는 아호동(鵝湖洞)이라고도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두물머리를 뜻하는 것으로, ‘어우러지다’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지명일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선아리랑의 배경지인 ‘아우라지’도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 어우러진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어쨌든 저 아오라지 두물머리와 그 너머로 넘실대는 산 물결을 감상하는 맛은 이 화양강휴게소의 가장 큰 혜택이다.

 

화양강휴게소를 나와 철정검문소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451번 지방도를 타면 곧바로 철정교를 지난다. 이 지방도는 여름휴가 때 며칠을 빼곤 차량 통행이 많지 않다. 보통 땐 아주 한적하지만 강원도에서도 가장 강원도다운 풍광과 정서가 대부분 여기에 숨어있다.

 

 

가파른 암벽과 푸른 물줄기가 멋들어진 조화를 이루는 경관이 이어진다. 경치가 좋지만 한눈 팔 사이가 없다. 굽이굽이 휘도는 고갯길이 아찔하다. 이곳을 지날 때야 강원도 길이 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짙은 숲과 맑고 시원한 계류, 깨끗한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시면 행복이 따로 없다.  온 나라가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도 이 길에서만큼은 창문을 내려도 된다. 그리고 자연의 공기를 맘껏 마시는 것이다. 고도도 높고 숲도 짙으니 공기는 늘 시원하고 깨끗하다.

 

내촌을 지나 서석을 더듬고 내면으로 들어서기까지 이런 길의 연속이다. 요즘 같은 여름엔 옥빛 물살과 푸른 숲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룬다. 가다가 강변이 보이면 멈추고 물가로 내려서면 된다. 고기를 잡든지, 다슬기를 줍든지, 물수제비를 뜨든지 마음내키는 대로다. 이도 저도 아니면 샛노란 원추리, 주홍빛 나리꽃, 푸른 바위취, 아름다운 강변 바위턱에 걸터앉아 멍하니 여름 산천을 바라보면 어떠랴. ‘청산별곡’이 따로 없다.

 

▲ 물걸리사지 찾아 가는 길 ⓒ 2011 한국의산천

 

이렇게 물골유원지 지나 화상대 강변 넘어 찾아간 내촌(乃村)의 물걸리. 이 산골에서 방문객은 세 번 놀라게 된다. 웬만한 외지 운전자는 엄두도 못 내고, 초행자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하는 도로를 타고 온 깊은 산골 안에 제법 널따란 들판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요, 이런 산속에 자리한 폐사지에 무려 다섯 점의 보물이 있다는 것이 두번째다. 세번째는 유명한 산도 없는 궁벽한 산골에 있으면서도 당대 유명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솜씨가 빼어나다는 사실이다.

 

홍천군은 ‘남한에서 최대’라는 넓은 면적에 비하여 알려진 사찰 수는 적은 편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를 보면 홍천의 사찰은 수타사(壽陀寺)를 비롯하여 관음사(觀音寺), 장락사(長樂寺) 등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나말여초의 탑과 불상, 그리고 불대좌가 있는 이 물걸리사지는 조선의 주요 지리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비밀을 안고 있는 곳이다. 다만 문화재청 자료엔 이곳을 통일신라시대의 홍양사(洪陽寺)터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 물걸리에 있는 흥양사 폐사지 ⓒ 2011 한국의산천

 

그런데, 1년 전인 2003년 여름 무렵 비밀의 일부를 벗겨낼 수 있었다. 국립춘천박물관이 60일간의 발굴작업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던 것이다. 당시 춘천박물관측이 발표한 성과다.

 

첫째, 정체를 알 수 없던 물걸리사지에 있는 금당지의 정확한 규모를 확인했다. 금당지는 정면 1,335cm, 측면 925cm의 규모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둘째, 금당지 내부에서 불상 적심 3개소를 확인하여 보호각 내의 비로자나불과 석가여래 및 불대좌의 원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조사 결과 우협시는 철불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이 금당은 본존으로 비로자나불을 배치하고, 그 좌협시로 석가여래, 우협시로는 철불을 배치한 대적광전(大寂光殿)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나말여초엔 철불과 석불을 함께 봉안하기도 하였으며, 삼세불(三世佛)을 함께 봉안했던 사실도 확인되었다.

셋째, 팔각의 하대석 괴임의 일부를 수습했다. 현재 보호각 내에는 4개의 대좌가 있는데, 비로자나불을 제외한 3개의 대좌는 모두 팔각의 하대괴임을 갖추고 있다. 즉 이번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하대괴임의 일부는 현재 석물지에 방치되고 있는 세 조각의 하대괴임의 일부며, 이 괴임은 도상 복원하였을 때 비로자나불의 하대괴임으로 인정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했을 때 그 협시인 석가여래와 높이가 어울리게 된다. 현재 석물지에 방치된 하대괴임과 수습된 것을 조립하여 원래의 위치에 복원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의문투성이로 남아있던 물걸리사지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진 셈이지만, 그 비밀을 다 밝히려면 아직도 길이 멀다. 그런데 이 깊은 산골에 고급문화의 표본인 이런 대찰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이런 고급 문화를 유지 보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록 강원의 다른 산지에 비해서 조금 너른 평야가 있다 해도 농사만 지어 가지고 이런 대찰을 건립, 유지하려면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이 물걸리사지에서 왕실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면서 이곳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영서지역의 중심사찰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물걸리가 수운(水運)의 요지였던 데 주목하고 있다. 내촌천은 지금은 비록 깊지 않아도 예전엔 북한강을 거슬러 오른 배가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물걸리에서 제일 번화한 마을을 사람들은 동창(東倉)이라 부른다. 이는 조세를 보관하던 창고였는데, 인근의 서석과 내촌에서 거둬들인 조세를 이곳서 보관했던 역사적 이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동창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대동여지도에서 보이듯이 이후 창고는 이웃의 서석으로 옮겨가긴 했어도 물걸리 동창은 임진왜란 전까지 꽤 큰 고을이었던 것이다.

 

결국 물걸리는 조선시대에는 역촌(驛村)과 같은 기능을 하는 마을로서 지리적으로는 동해안의 산물이 강원 내륙으로 이동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 경기와 영동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한때 내촌천의 중심으로서 홍천 동부를 이끌었고, 영서지방의 중심사찰도 품었던 고을이라는 자존심은 물걸리사지 근처의 팔렬공원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곳엔 3․1운동의 함성소리가 한반도 각지로 번져가던 1919년 4월 초순의 장날에 1천여 명이 몰려들어 만세를 외치며 동창장터를 뒤흔들었던 기개가 서려 있다. 공원의 주인공은 당시 희생된 8명의 열사를 기리는 동상인데, 사실적이고 웅장하다. 정말 아무 것도 없을 것만 같던 척박한 산골에서 이런 동상을 만나는 외지인들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 동창리에 있는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 동상ⓒ 2011 한국의산천 

 

뿐만 아니다. 경기민요의 김혜란 명창이 이곳 동창마을 계곡으로 들어와 강원민요연구원을 지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명창은 어느 잡지에선가 말했다. 단순한 구성을 가진 강원민요의 구슬프고 처량하면서도 애환이 깃든 듯한 메나리조에 끌려 이곳 동창으로 들어왔다고. 카리스마가 넘친다는 김혜란씨가 연습하는 민요 한 가락 엿들을까 기대했건만 아쉽게도 명창은 출타중이었다.

 

매봉산에야 고사리를 꺾어다
우리 낭군 밥반찬 할래요
물걸리 동창보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시아버지 밥반찬 할래요
매봉산에 올라 임 생각을 하니
풀잎에 찬이슬이 맺혔네
(중략)
간다지 못간다지 얼마나 울었던지
동창 개울물이 늘어만 간다
-민요 ‘홍천아리랑’ 중에서


위의 민요는 ‘홍천아리랑’의 여러 가사 중 일부다. 아마 이곳 물걸리 주변에서 불렸던 노래로 보인다. 가사에 나오는 매봉산은 물걸리 동쪽의 응봉산(1,103m)을 말하는 것이고, 동창보(東倉洑)는 동창 들판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수로(水路)를 일컫는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 기다려야 하는 천수답에 물을 공급해주는 수로는 말 그대로 젖줄이다. 그러나 평야지대라면 몰라도 높고 험한 산이 첩첩 솟아있는 강원도에선 수로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동창보다 더 상류에서 내려오는 수로만 연결시키면 동창의 논은 천수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구간엔 ‘벼락구미’라 불리는 암벽이 있었기 때문에 험한 강변길을 따라 수로를 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이때 김군보(金君甫)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돈을 투자해 험한 구간에 물길을 내는 데 앞장섰다.

 

▲ 동창리 ⓒ 2011 한국의산천

 

내촌천 물길을 따라 서석면 수하리에서 내촌면 물걸리까지 이어지는 동창보 물길의 길이는 1km. 이 보가 완성되면서 동창의 논농사에 일대 혁신을 일으켜 벼 수확량도 획기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의 일이다. 요즘 산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 수로의 원조쯤 되는 셈이다.

 

지금도 벼락구미 바위엔 ‘洑主 金君甫(보주 김군보)’라고 새겨놓은 글귀가 보인다. 저 동창 들녘에 이 양반의 전답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 일로 폭리를 취하진 않았던 것 같다. 수로가 완성된 뒤 수로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김군보의 주도로 하늘에 정성을 올렸는데, 이는 마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마을의 당제 역할을 하는 동창보제(東倉洑祭)로 정착되었다. 그가 수로의 물을 가지고 폭리를 취했더라면 제사가 주민 전체의 정성으로 이어지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홍천에서도 골짜기에 속하는 내촌의 물걸리.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이렇게 볼거리도 많고, 만나는 사람들의 인심도 순박하니 참으로 기분 좋은 마을이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물이 철철 넘치며 동창 들녘의 젖줄이 되고 있는 동창보를 끼고 강줄기를 한 모퉁이 돌면 이내 서석땅이다. 도라지밭에서 잡초 뽑는 할머니들에게 괜히 인사 건네고, 맑은 강물 속에서 노니는 꺽지 새끼들 몸짓을 훔쳐보며 설렁설렁 가다보면 또 다른 산촌 풍광이 반긴다.

 

호밀밭-. 인적도 드문 깊은 산골에서 바람이 더듬는 대로 몸을 뒤척이는 푸른 키다리를 보는 맛은 참 좋다. 파란 하늘과 빨간 지붕의 외딴집도 바람 따라 누웠다 일어서는 호밀과 잘 어울린다. 보리밭이나 밀밭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힘이 있다. 특히 이런 두메산골에서라면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깍쟁이 서울내기라도 이런 풍광을 만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한 번쯤 밀이나 보리를 쓰다듬어 본다. 허나 이젠 밀밭 보기는 하늘에서 별따기가 되었다. 그 흔하던 보리밭도 남녘 땅으로 가야 겨우 구경할 수 있는데, 이 서석 산골서 호밀밭을 만나니 기분이 좋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호밀은 밀보다 훨씬 생육조건이 좋지 않은 땅에서도 자란다. 저렇게 평화스러운 풍경화를 그려냈지만, 거기엔 척박한 땅을 일궈나가는 산골 농부들의 애환이 서려있을 것이다. 집 옆에 널따란 호밀밭을 끼고 사는 농부는 어떤 사람일까. 마침 외양간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소꼴을 먹이던 주인공이 화들짝 놀란다. 젊은 아낙이다.
“저기 밭에 자라는 게 뭐예요?”
“예? 아, 그거요. 호밀이래요.”
산골아낙답게 살갗이 새까맣게 그을었다. 그래도 고운 얼굴엔 순박함이 뚝뚝 묻어난다.
“호밀이요? 아주 보기가 좋네요.”
“…. 지금은 별루래요.”
“예?”
“봄에 새파랗게 피어날 때가 더 예뻐요.”
“아, 그래요.”

 

호밀 이파리에 물기가 마른 여름보다는 푸르게 빛나는 늦봄이 좋다는 뜻이리라. 길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지난봄에 지나가면서 놓치지 않고 구경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봄비가 내린 바로 직후에-.

외양간 소를 둘러보는 아낙을 뒤로하고 얼마를 달리니 서석면 소재지인 풍암리. 들판을 휘돌아 흐르는 개울에서 다슬기 잡는 사람들을 지나친다. 면사무소 뒤쪽의 자작고개에서 동학혁명군들의 외로운 혼을 만나고 내려서면 서석장터. 숙제를 하러 나왔는지 장에서 파는 물건의 품목을 공책에 삐뚤빼뚤 채워가는 코흘리개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허나 비록 오후라 해도 파장 직전처럼 너무 한산하다.

 

 

서석장은 지금은 규모가 작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제법 북적거리던 곳이다.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엔 횡성, 인제, 평창 등 인근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면서 갈수록 장세가 약화되어 깊은 산골의 한적한 장에 불과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홍천까지 4차선 도로가 뚫리고 56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외지인들의 발길이 다시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서석장은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날씨가 나쁘거나 주중에 서는 장은 외지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오늘처럼 한산하기만 하다.

 

허름한 식당에서 옥수수막걸리 한 잔으로 목젖을 적시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대신 옥수수가루로 만든 올챙이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옥수수는 감자와 더불어 강원도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중 옥수수를 가지고 여름마다 축제를 여는 홍천은 전국에서 옥수수 재배 면적이 제일 넓은 고을이다. 홍천에서도 이곳 서석의 옥수수 재배 면적이 제일 너르다. 그래서 옥수수 익어 가는 계절이 되면 이곳 장터엔 ‘진짜 찰옥수수’ 냄새가 가득 번진다. 올챙이국수를 먹으면서도 잘 익은 찰옥수수 생각에 군침이 돌지만, 아직 한두 달 더 기다려야 한다.

 

올챙이국수로 허기를 속이고 56번 국도를 탄다. 두 뼘 정도밖에 자라지 않은 옥수수가 펼쳐진 비탈밭을 휘돌아가며 고도를 높여가다 보면 하뱃재. 이 고개를 넘으면 이젠 내면 땅이다. 여기서부턴 홍천강 수계가 아니라 내린천 수계. ‘한중지맥’에서 갈라져 나와 응봉산(1,103m)을 세운 산줄기가 수계를 나누고 있는데, 동시에 이 산줄기는 홍천의 내면과 서석면의 정확한 경계가 되기도 한다.

 

▲ 몇해전 폭설로 인하여 도로가 끊긴 상태이기에 이승복 기념관에서 운두령까지 길을 따라 걸어 올라 계방산에 섰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홍천의 가장 동쪽에 있으면서 내린천 최상류에 속하는 내면 고을은 정말 오지 중의 오지다. 면 전체가 백두대간과 한중지맥의 1,200~1,500m에 이르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외부로 통하는 고갯길도 백두대간의 구룡령(1,013m)과 한중지맥의 운두령(1,089m) 등으로 1,000m가 넘는 구절양장이다. 또 홍천~내면~구룡령~양양을 연결하는 56번 국도가 포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내촌이나 서석을 거친 다음에야 들어올 수 있던 이곳은 오지 속의 오지였다. 바깥쪽 사람들은 이곳 소식을 몰랐고, 이곳 사람들은 바깥소식을 궁금해했다. 눈이 올 때는 더했다. 얼마나 깊고 깊은 고을이면 ‘안 내(內)’ 자를 썼을까.

 

▲ 홍천군 내면에 위치한 내린천 발원지 표석 ⓒ 2011 한국의산천

 

이런 사정은 국도가 포장이 된 후에도 비슷했다. 31번 국도의 고사리고개와 운두령, 56번 국도의 하뱃재와 구룡령 등 만만한 고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늘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는 운두령(雲頭嶺)에서 흘러내려 오는 자운천, 그리고 용이 몸부림치며 오르며 생긴 고갯길이라는 구룡령(九龍嶺)에서 발원한 계방천이 광원리에서 어우러져 내린천으로 흘러가지만, 이 냇물도 성깔이 만만치 않다.

좌우로 깎아지른 암벽을 치고 받으며 흘러가는 강물은 대부분 발 담그기 어려운 급류다.

그래서, ‘무전여행’을 주도했던 70~80년대의 낭만파 여행매니아들은 내촌에서 서석을 거쳐 내면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아주 좋아했다. 어차피 하루에 한두 번 있는 버스로는 연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니 걷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더불어 내린천 중상류 답사는 여행매니아로서 자신의 내공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코스였다. 당시엔 이곳에 발자국을 찍지 않고 어디서 ‘여행한다’는 소리를 못했다 한다.

 

▲ 아름다운 가을의 전설 아침가리골 라이딩 ⓒ 2011 한국의산천 

 

  이곳에선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적힌 피장처를 일컫는 ‘삼둔사가리’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물과 불과 바람, 이렇게 세 가지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로서 난세에 숨어 살 만한 피난처. ‘둔’은 산 속에 숨어 있는 평평한 둔덕이라는 뜻이고, ‘가리’는 겨우 밭을 갈아먹을 수 있는 좁은 땅이다.

 

이런 마을들로 들어가려면 협곡을 통과하거나 험한 강물을 건너야 한다. 그 3둔은 달둔(達屯) 살둔(生屯) 월둔(月屯)이요, 4가리는 아침가리, 곁가리, 적가리, 연가리를 말한다. 실재로 과거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정감록'을 믿고 ‘삼둔사가리’로 찾아들어 수백 가구가 화전을 일구고 산삼 캐고 약초 심고 살았다고 전한다.

 

▲ 높은 산을 휘돌아 흐르는 내린천 ⓒ 2011 한국의산천 

사가리는 방태산 북쪽 너머의 인제 고을에 있고, 3둔은 모두 내면의 계방천 기슭에 있다. 그중 본류에 바로 붙어있는 살둔의 풍치가 최고다. ‘이곳에 들어가면 산다’는 뜻의 살둔 마을은 조선조 세조의 집권 당시 단종 복위에 가담했던 사람 중 일부가 내린천을 거슬러 숨어 들어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살 만한 곳’이라 하지만 농사지을 수 있는 기간이 겨우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밖에 안 되는 곳이다. 현재 살둔 주민들의 주수입원은, 내면 주민들이 그러하듯이, 고랭지서 재배하는 배추다. 그 외에 감자와 옥수수를 비롯해 당귀, 강활 같은 특용작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 강변에 살둔산장이 있다. 월정사 대목수가 귀틀집과 절집의 형식을 섞어 1985년에 지었다는 독특한 구조의 이 산장은 예전엔 오지 여행객들의 사랑방이었다. 물소리 들려오고 별이 쏟아지는 강변 산장에서의 하룻밤은 분명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21세기 초에 내린천 물줄기를 따라 길이 넓혀지고 포장이 되면서 이곳은 세상에 그 해맑은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게 되었다.

 

▲ 바람을 베게 삼아 잠자는 침풍루가 있는 살둔산장 ⓒ2011 한국의산천

 

월정사를 보수한 대목수의 손으로 1985년에 지어진 이래 오지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인 이 산장은 귀틀집과 사찰의 형식을 섞어 지은 집. 외부는 초기에 자금 때문에 마무리를 못했다 하여 ‘미진각(未盡閣)’이라고도 하고, 산이 반 물이 반이라는 뜻의 ‘산반수반정(山半水半亭)’으로도 불린다.

또 2층 작은 마루는 바람을 베고 눕는다 하여 ‘침풍루(寢風樓)’. 물줄기와 산줄기,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산장이 조화를 이뤄 ‘한국의 살고싶은 100대 집’ 중의 하나로 꼽혔다. 

 

홍천군 내면과 인제군 경계에 있는 살둔산장

내린천 도로가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포장된 2004년 현재의 살둔산장은 어떤 모습일까. 포장도로가 살둔 마을 북쪽을 통과하면서 마을은 치명상을 입고 더 이상 ‘살둔’이기를 포기했지만, 마을 안쪽 물가에 있던 산장은 치명타를 피한 덕에 생채기가 심하진 않았다. 그러나 마을 주변은 더 이상 옛날의 그 분위기가 아니다.

 

현재 살둔 마을의 땅은 거의 외지인들에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주민들은 땅을 팔고 이 ‘불편한 유토피아’를 떠나 이사를 갔거나, 남의 땅을 일시적으로 부치며 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는 따스한 정이 폴폴 넘치던 마을이었건만, 주민들은 차 꼬리에 먼지 풀풀 날리며 찾아드는 예의 없는 외지인들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살둔에서 내린천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산 첩첩 물 첩첩이다. 뻐꾸기 울음소리 들으며 찔래꽃 향내 맡으며 그렇게 홀로 강변 오솔길을 걷던 그 시절이 그리운데, 짙은 숲 사이 암반에서 솟아나는 삼봉약수가 혀끝을 유혹한다. 짙은 숲에서 약수 한 모금 마시고 나서면 내린천 발원지인 을수골 초입. 그곳엔 7개의 소(沼)를 만들어놓고 흐른다 해서 칠소(七沼)라고 불리는 칡소폭포가 있다. 그곳엔 열목어가 산다.

 

 

맑고 차가운 1급수에 사는 열목어는 숲이 울창하여 직사광선에 노출되지 않으며, 한 여름 수온이 20℃ 이하에 수량이 일정한 계곡에서만 살 수 있다. 수온이 올라가면 눈이 터져 버린다고도 한다. 또 성어(成魚)가 숨을 수 있는 큰 돌이나 바위가 있고, 헤엄칠 수 있는 큰 소(沼)가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내린천이다.

 

열목어는 여름이 되면 산간 계곡의 최상류에서 서식하다가 겨울이 되면 하류로 이동하여 규모가 큰 소에서 지내고, 다음해 해빙기가 되면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산란한다. 내린천 상류로서 칡소폭포가 있는 이곳 을수동계곡과 광원리 명개리계곡 등이 녀석들이 산란하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어른 팔뚝만한 열목어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감상하는 일은 언제나 신명이 난다. 높이 2~3m나 되는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는 열목어떼를 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팔뚝보다 큰 녀석이 날아오를 땐 몸을 뒤흔드는 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마치 녀석의 거친 숨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고맙다. 아직 이 땅이 건강함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나 모든 녀석이 매번 성공하는 게 아니다. 장애물 넘기의 연속인 인간의 세상살이처럼 여기서도 갖가지 장면이 연출된다.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멋들어지게 뛰어넘은 녀석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녀석도 작년까지는 제대로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반도 못 올라가고 폭포수에 휩쓸려 떨어진 녀석은 몸을 추스르고 숨을 고른 뒤 다시 시도할 것이다.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작은 녀석들에겐 내후년을 기대해본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폭포수 바위벽에 부닥쳐 떨어지는 녀석들의 안부다. 혀끝을 차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면으로 바위에 부딪친 녀석은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녀석이 그렇게 물속으로 처박힐 때면 ‘혹시 익사(?)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하게 된다.

 

열목어가 튀는 장관을 늘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온 다음날 기온이 올라가면 열목어는 폭포수를 뛰어넘는다. 특히 여름철엔 수온이 올라가는 오후 3~4시 무렵엔 쉽게 구경할 수 있다. 물론 진달래 피는 봄철 산란기엔 이런 광경이 자주 목격된다.

칡소폭포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아쉽다. 폭포를 뛰어오른 열목어가 거슬러 오르는 을수동 계곡을 따른다. 개울이 ‘새 을(乙)’자처럼 굽이돌며 흐른다는 을수동(乙水洞)은 내린천 발원지를 품고 있는 계곡이다. 그런데 열목어가 뛰노는 청정자연의 이 계곡도 개발의 마수에서 벗어나긴 힘든가 보다. 재작년엔 보이지 않던 펜션이 벌써 여러 채 들어섰다. 이런데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분명 자연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오죽하면 외로움만 뚝뚝 묻어나는 이렇게 깊고 깊은 산속에 집을 짓겠는가.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집에서 물가로 쉽게 접근하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열목어에게 그늘 드리워주던 버드나무를 수십 그루나 베어낸 데도 있다. 또 어떤 집에서 흘러나온 오수는 하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직행하기도 한다.

 

▲ 운두령에서 계방산을 향해 오르는 등산객들 ⓒ 2011 한국의산천

 

지난 해, 어느 단체에선가 영서지역의 계곡에 대해 실태조사를 해보니 많은 골짜기가 오염되었더라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때 평창 봉평의 흥정계곡에도 수십 개의 펜션이 들어서고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수질오염과 주변 환경훼손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거기에도 1급수에서만 살 수 있는 열목어가 서식하는 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책도 없이 펜션을 마구 지어댔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열목어가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알려진 내린천 진동계곡의 운명도 몇 년 안에 비슷해질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진동계곡에 펜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곳은 내수면 보호구역이라는데도 2년 전엔 수백 마리의 열목어가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곳 을수동을 비롯한 광원리 명개리 일대는 이웃 고을의 실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이렇게 생태적으로 귀중한 곳은 대규모 시설을 계곡 하류에 집단화하고, 중․상류는 자연환경 보전지역으로 지정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유재산 침해 문제가 있다면 적어도 내수면보호구역에서만큼은 민물고기 잡는 행위를 철저히 막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가구가 ‘하수 종량제’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열목어도 살고 사람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열목어가 떠난 을수동과 칡소폭포는 얼마나 삭막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부디 매년 칡소폭포에서 열목어의 경이로운 몸짓을 감상할 수 있기를 오대산 산신령께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초여름의 녹음 드리워진 구룡령을 오른다. 백두대간 장쾌한 산물결이 이 가난한 길손을 맞이한다. 두 눈에 가득 차오는 산줄기, 백두대간! 푸르름에 눈이 부시다. 이 땅에 저 산줄기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따스한 품으로 보듬어주는 저 백두대간이 오늘 따라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글:민병준 출처:월간산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홍천 서부, 관광명소, 별미

    
한중지맥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뻗은 ‘한중지맥’은 계방산(1,577m)∼태기산(1,261m)∼오음산(930m)∼용문산(1,157m) 같은 큰 산들을 세우고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에서 그 세력을 다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굳센 산줄기임에도 여느 정맥들이 지니고 있는 하구(河口)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산경표》에선 이름을 얻지 못했다. 현재 두로지릉, 한중지맥, 한중정맥, 한강정맥, 계방지맥, 한강기맥, 한강정맥, 용문산맥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희망리 삼층석탑

홍천읍 사무소의 희망리 삼층석탑은 원래 홍천초교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탑은 1층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시멘트로 다져진 높은 바닥돌 위에 널찍한 돌 두 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다. 기단 가운뎃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 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끝부분의 치켜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이 탑은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너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가 맞지 않고, 마치 탑신이 기단부의 첨가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각 부의 조각에 있어서도 약화된 모습이 보여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79호.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인데 현재는 홍천읍 사무소 안 희망리 삼층석탑 옆에 옮겨 세웠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사사자탑(四獅子塔)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 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한 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다.

 

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 원래는 이곳에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 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기단에서 보이는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이 물씬 풍기지만, 각 재료의 구성이 통일신라의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어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540호. 


희망리 당간지주

홍천읍 희망리 강변에 자리한 이 당간지주는 7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돌을 다룬 기법이나 특별한 장식 없이 소박하며, 중간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금 굵어졌고, 밑부분에 이르러는 더욱 굵다.

전체적인 겉모습은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천흥사지 당간지주와 유사하다. 주변의 삼층석탑과 기타 석조물 등과 비교하여 볼 때, 거의 같은 시대의 조법(彫法)을 나타내고 있어 고려 중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본다. 이 당간지주 일대는 현재도 절터였음을 알리는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보물 제80호.


공작산 수타사
월정사의 말사인 수타사(壽陀寺)는 동면 덕치리 공작산(887m)에 있는 절이다. 708년 우적산 기슭에 창건될 당시엔 일월사(日月寺)였으나 1457년 지금의 위치로 건물을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다가 어느 때부턴가 지금의 수타사(壽陀寺)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36년 중건해 지금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 내부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대적광전(大寂光殿·강원유형문화재 제17호)을 비롯하여 삼성각·봉황문·흥회루·심우산방·요사채 등이 있다. 고려 후기의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제11호), 홍우당부도(강원문화재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심우산방 옆에는 귀신이나 잡귀로부터 수타사를 지킨다는 전설이 있는 수령 500년의 주목 한 그루가 있다.

 

한편, 수타사 동종(보물 제11-3호)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 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 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 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편, 사천왕상 뱃속에서 나와 보물 제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 두 권은 2004년 가을에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수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올 예정이다. 수타사 033-436-6611.


홍천향교

홍천읍 희망리 홍천군청 옆에 위치한 홍천향교는 조선시대 홍천의 지방 교육시설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처음엔 두촌면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후 화촌면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홍천읍 희망리 현 호국사 부근에 옮겼고, 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시기에 다시 현재의 위치에 이전 건립하였다. 대성전 앞에 있는 느티나무의 수령이 약 400년이 넘는다는 사실에서 400여 년에 현 위치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6·25전쟁 당시 명륜당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복원했다. 수복 직후 홍천중학교로 사용한 적도 있다.


한서 남궁억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언론인인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1863-1939)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애국지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영어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흥화학교 교사로 영어와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이 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다. 1905년 성주(星州) 목사, 이듬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고 관동학회 회장이 되었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등 교과서를 지었으며, 1918년 강원 홍천의 보리울(牟谷)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하고 무궁화 묘포를 조성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병을 얻어 1935년 석방된 후 1939년 별세하였다. 저서로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현재, 한서 남궁억이 활동하던 서면 모곡리엔 남궁억기념관과 무궁화 묘포장이 있고, 당시의 예배당도 복원해 놓았다. 묘소는 모곡초등학교 뒷산인 유리봉 중턱에 있다.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남궁억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한서문화제가 열린다.

 

강재구공원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강재구(姜在求·1937-1965) 소령은 1965년 10월4일 월남전에 참가하기 위한 마지막 훈련 중 부하가 실수로 중대원이 모여있는 곳에 수류탄을 떨어트리자 자신의 몸을 던져 중대원 100여 명의 생명을 구했다. 육군은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4등 근무공로훈장을 추서했다.

 

1973년 그가 산화한 북방면 화동리에 기념비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1987년엔 기념비 옆에 건평 25평에 기념관을 세워 그의 유품 125점을 전시하고 있다. 매년 10월4일 고인의 유족과 육사 동기생들이 찾아와 고인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도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입장료, 주차료 없다.

 

홍천향토사료관

무궁화공원 안쪽에 자리한 홍천향토사료관은 홍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갖춘 곳이다. 제1전시실은 홍천의 역사, 주민들의 의식주, 관혼상제 등에 관한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한서 남궁억 선생과 무궁화에 대한 사료가 전시된 무궁화역사관이다. 제3전시실은 농경전시관으로 과거 강원 산골에서 쓰던 주루막, 등잔, 함지박을 비롯해 올챙이묵틀, 탈곡기 등 농경문화의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차료, 관람료는 무료. 


팔봉산 당굿
홍천강변인 서면 팔봉리에 솟은 팔봉산(302m)은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마다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연출해 철마다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온다. 팔봉산 제2봉 정상엔 칠성, 산신 그리고 3부인(이씨, 김씨, 홍씨) 신을 모신 당집이 있다. 이 당집에선 팔봉산 주변 주민들이 매년 음력 3월15일과 9월9일에 농사의 풍년과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당굿을 한다. 산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10여 년 전부터 팔봉산 주차장에서 굿놀이를 성대히 열고 있다. 400여 년 전인 1590년대부터 당굿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물통방아놀이

화촌면 구성포리와 동면 노천리 등 수량이 적은 험준한 산간마을에 많이 있던 전통놀이로 전해오는 농요를 중심으로 노동의 즐거움과 풍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놀이 네 과정은 운목, 귀재설치와 물통방아 제작, 물대기와 방아찧기, 한마당놀이 순서로 행해진다.

먼저 물통방아를 만들기 위하여 귀새를 달 통나무를 운반한 후 방아확과 귀새에 물을 대며 곡물을 방아확에 넣고 찧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감사와 기쁨의 표현으로 신명나게 풍년가를 부르고 춤을 추는 한마당놀이가 전개되는 민속놀이다. 전승자는 동면 삼현리에 거주하는 신양식씨다.


연자매놀이

연자매는 직경 1∼2m 정도의 둥근 돌로 된 맷돌(웃돌)을 바닥돌 위에 세워 앉히고 중심줏대(중수리)를 축으로 틀목에 부착시켜 회전할 수 있게 하고, 바닥돌도 오돌오돌하게 쪼아서 곡식이 잘 찧어지도록 한 것으로, 소를 이용하여 방아타령을 부르며 찧게 하였다. 방앗간은 이엉이나 나무껍질로 쌓고 새초지붕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농토는 거의 화전이었던 까닭에 주로 보리와 조 등의 잡곡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곡물을 찧기 위하여 현대식 도정기가 보급되기 훨씬 이전에 마소를 이용해 인력을 절감함은 물론, 대량의 곡식을 찧을 수 있는 연자매를 활용하였다. 놀이과정은 가을걷이 및 타작, 돌 운반 및 매 제작, 방아찧기, 한마당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전승마을은 북방면 성동리다.


장승깎이놀이

북방면 화동리 웃범골 마을은 8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홍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산골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정월 초나흗날이면 마을 전체 사람들이 모여 가정의 행운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는데, 장승과 솟대를 깎아 세우고 지내는 장승제다.

장승을 언제부터 깎아 세웠는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옛날 선역(腺疫)이 심해 많은 소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마을 입구 사방에 장승과 솟대를 세우고 장승제를 지낸 후부터는 소가 병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 길가에 장승과 솟대가 서있고 당집도 있다.

홍천 며느리고개


길에서 만난 별미


화로숯불구이

홍천읍 하오안리 오안초등학교 앞 국도변엔 화로숯불구이촌이 지나는 여행객의 눈길을 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식당이 두어 곳밖에 없었지만 현재는 10여 개의 전문식당이 모여 경쟁하고 있다.

홍천 화로숯불구이가 유명한 까닭은 우선 굽는 도구가 강원도 전통화로다. 여기에 자연 숯불을 넣고 양념한 돼지고기 삼겹살을 얹는다. 홍천돼지만을 이용해 육질이 연한 삼겹살을 고추장, 된장, 파, 마늘, 토종벌꿀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충분히 재어둔 뒤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참숯불에 굽는 거라 톱밥숯불이나 가스불로 구운 것에 비해 맛이 훨씬 뛰어나다. 양념구이가 달게 느껴지면 왕소금구이를 택하면 된다.

양지말화로구이(435-1555), 옛날화로구이(435-8613) 등이 오래 되었다. 1인분에 7,000원. 입가심으로 이용되는 막국수 4,000원.


홍천강 매운탕
홍천의 젖줄인 홍천강은 물이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민물고기의 천국이기도 하다. 개체수가 가장 많은 피라미를 비롯하여 눈치, 끄리, 메자, 모래무지, 메기, 눈불개, 모래무지, 꺽지에서 쏘가리까지 온갖 종류가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강변 유원지마다 민물고기매운탕을 내놓는 식당이 아주 많다. 대부분 빠가사리, 꺽지, 메기, 모래무지, 피라미 등으로 매운탕을 끓여낸다.

 

물놀이를 하면서 견지낚시나 어항 등을 이용해 잡은 물고기로 손수 매운탕을 끓여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잡히는 어종은 피라미, 끄리, 누치 등이지만 가끔 꺽지 등이 걸려들기도 한다. 매운탕 끓이는 데 필요한 야채, 고추장 등의 양념은 미리 준비해 가는 게 좋다. 반나절이면 가장 간편한 견지낚시 하나로 한 가족이 모여 먹을 수 있는 20∼30마리를 잡을 수 있다. 5,000원 내외면 낚시에 필요한 견짓대와 미끼를 모두 구입할 수 있다.

 

 

▲ 홍천강에서 제일 유명한 모곡 밤벌 유원지 ⓒ 2011 한국의산천

 헝천강 하류에 자라한 모곡리 보리울. 홍천강변에 널려있는 유원지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흔히 ‘홍천강 모곡 유원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강변 미루나무 그늘에서 매미소리 자장가 삼아 졸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슬기 잡고, 견지낚시로 피라미와 누치 잡아 매운탕 끓여 먹던 여름날의 추억. 이곳 모곡리 강변의 여름 풍경은 홍천강 전체의 여름 풍경화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홍천강 배바위

 

모곡유원지

홍천강 하류인 서면 모곡리의 밤벌 강변은 흔히 홍천강유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맑은 강물과 넓게 펼쳐진 백사장, 백사장 주변을 둘러싸고 우뚝 서 있는 밤나무와 미루나무 숲이 피서객들의 더위를 식혀준다. 메기, 피라미, 쉬리, 메자 등 어족자원도 풍부해 낚시하기 좋다. 주변에 한서 남궁억기념관과 묘소, 무궁화동산 등이 있다.

강변 식당에서 내놓는 민물고기 매운탕이 유명하다.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가게도 많다.

 

수산유원지

서면 모곡리 수산 마을 앞 강변으로 밤벌 강변에서 2km쯤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역시 깨끗한 물과 백사장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족단위 야영지로 적합하고, 견지낚시 등도 가능하다.

▲모래와 자갈이 많고 넓은 개야강변 ⓒ2011 한국의산천 
개야강변은 모곡 삼거리에서 낡은 시멘트 다리를 건너 1.5㎞정도 강변도로를 타고 달리면 개야 강변 유원지 이정표를 만난다. 강변쪽으로 나 있는 비포장 내리막길에 내려서서 소나무 숲 사이를 통과하면 시원하게 강변이 펼쳐진다.   

넓은 강변에는 바닷가 해변을 연상시킬 정도로 백사장이 넓어서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 좋고 물도 차지 않아 물놀이에도 제격이다. 강변에서 야영을 하거나 발야구, 족구 등 간단한 공놀이를 즐길 수 있어 나들이의 즐거움을 더한다. 민박 최옥현(033-434-8190) 밤벌유원지는 홍천강에서 비교적 많이 알려진 곳으로 강폭이 넓고 물살이 잔잔하며 물이 차갑지 않아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개야유원지

서면 개야리 강변은 넓은 강변에 둥글고 고운 자갈과 넓은 백사장도 펼쳐져 있어 배구, 족구 등을 즐기며 뛰어놀기에 적당하다. 민물고기도 많아 견지낚시도 할 수 있고 다슬기도 잡을 수 있어 가족단위 야영 장소로 적합하다. 자갈밭에선 오토캠핑을 할 수도 있다.강변에는 민박과 펜션 그리고 민물고기 매운탕집과 닭도리탕집이 있습니다

▲ 나는 홍천강을 사랑한다. 이 강가에서 이곳 저곳 구석 구석을 쏘아다니며 군생활 3년의 젊음을 보냈다. ⓒ 2011 한국의산천


밤골 강변유원지

서면 팔봉산 서쪽에 위치한 밤골유원지는 팔봉산 산행과 연계하여 쉴 수 있는 곳. 2km 상류의 팔봉유원지에 사람들이 많을 때 이용하면 된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밤나무숲에서 오토캠핑이 가능하다. 텐트를 까는 바닥도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고 식수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또 화장실도 잘 갖춰져 있어 야영 환경이 좋은 편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간이매점도 하나 있고 식사도 가능하다.

팔봉산 국민관광지
홍천강이 휘감고 도는 팔봉산은 해발 302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여덟 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제법 아름다움을 뽐낸다. 아기자기한 암릉 산행과 여름 물놀이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백사장이 있어 야영하기에 좋으며, 피라미, 메기, 쏘가리 등 민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제1봉∼제8봉 회귀코스가 약 4km로 3시간쯤 걸린다.

국민관광지답게 주차장 주변에 식사할 곳이 많다. 


남노일 강변유원지

남면의 남노일 강변은 아직 깨끗한 자연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예전엔 교통이 불편해 찾기가 까다로웠으나 얼마 전 양덕원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가 포장되면서 접근이 수월해졌다. 강을 건너려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줄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얼마 전 남노일교가 세워지면서 강 건너로 굴지리, 노일리 등으로 접근이 수월해졌다.

넓은 강변엔 야영터가 많지만 화장실 등의 부대시설이 빈약하고 마땅한 가게도 없다. 남노일교 하류는 강변이 넓고 유속이 완만한 편이라 가족이 노닐기 적당하고, 상류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른 편이다.


굴지리 유원지

홍천군 북방면에 있는 里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진 농촌이다. 마을 중앙으로 홍천강이 흐르며 강 근처엔 굴지소유원지가 있다. 굴지리 강변은 바위벼랑이 빚은 경치가 제법 수려한 곳이다. 전반적으로 수심이 깊고 물살도 빠른 편에 속하지만, 강줄기가 휘돌아 가는 지역은 수심이 얕아 가족나들이에 적당하다. 모래사장은 거의 없고 대부분 자갈과 돌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 거문건너, 무랭이, 산꾸네미, 석골, 석밭재가 있다. 거문건너는 굴기 동남쪽 건너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무랭이는 굴지 안에 있는 마을로 물이 흔하여 생긴 이름이다. 산꾸네미는 굴기 동북쪽 산 구렁 안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석골은 굴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석밭재는 굴기 강 건너쪽 재 밑에 있는 마을이다.

굴지리 강변은 예로부터 뛰어난 경관의 유원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치고 교통도 불편하다. 소매곡리와 노일리 중간에 걸쳐있지만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각각 달리 진입해야한다.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붐비는 홍천군의 강줄기 중 인적이 드문 편이라 휴가철에도 한적한 가족낚시터로 좋다. 양안의 험준한 산과 바위가 풍치를 더해준다. 낚시터 주변에 낚시채비와 미끼, 음식을 팔고 민박까지 겸하는 매점이 있어 편리하다. 물 흐름이 잔잔한 깊은 소의 상류 여울을 찾으면 된다. 

 

 

도사곡리’와 ‘굴지리’로 이어지는 비경은  홍천강의 백미

굴지리는 군생활때 유격장이 있던 곳으로 강과 산의 절벽이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하다.

 

서면의 강을 백사장이 아름다운 강이라한다면 도사곡리나 굴지리 장항리는 산과 바위와 강이 어우러진 강이다. 그중에서도 ‘도사곡리’와 ‘굴지리’로 이어지는 비경은 홍천강의 백미다.


굴지리에서는 강을 배경으로 한 비경 여덟 곳을 정하여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굴지천의 철쭉이 강안의 바위를 붉게 물들이며 활짝 피어날 때쯤 ‘괴바우’와 괴바우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백사장과 어우러져 흠뻑 빠져들게 한다.


푸른빛의 강물은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으며 또한 무서움을 주지 않는다. 그 강을 따라 이어지는 강안에는 왜가리와 중대백로가 물고기를 기다리기도 하며, 족대를 들고 돌을 뒤집으며 고기를 잡거나 낚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굴지리’를 돌아들어 ‘장항리’로 이어지는 길은 비포장 도로다.


‘장항리(獐項里)’는 ‘노루목’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도사곡’에서 ‘굴지리’를 거쳐 굽이굽이 흘러온 강물이 장항리에 와서 노루목처럼 길고 넓고 깊게 흐르다가 다시 남노일강에 이르러 굽이치며 흐른다.

 

홍천 금확산 (655m)
홍천강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금확산’은 ‘팔봉산’과 함께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금확산은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제3회 지역자원 경연대회에서 당당히 금상에 선정되었을 만큼 조망이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여호내고개’에서 산행들머리를 잡으면 좌우로 이어지는 홍천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 금확산에서 내려 본 홍천강 수태극 ⓒ 2011 한국의산천

산능선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된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한반도 지형과 흡사한 곳은 몇군데 되지만 이렇게 흐르는 강물이 완벽한 태극문양을 그리는 수태극형상의 풍경은 이곳말고는 없으리라.  

아름다운 강마을. 홍천 금확산에서 내려 본 산태극 수태극 문양의 홍천강. 산굽이를 돌아 흐르는 홍천강은 수태극을 그리며 흐른다. 

금확산 (655m)은 홍천 팔봉산에서 정동쪽으로 약 4.5km떨어져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홍천강변 마을인 노일리 마을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이다. 금확산은 원소리고개 방면만 빼고는 삼면을 홍천강이 굽이 돌며 에워싸고 있다.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 이 하 (李 夏) -

비킬 뿐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낮은 데로 낮추어
소리도 묻어나지 않게
앞은 앉고 뒤는 서고
크면 큰 대로 빛깔을 던다.
언젠가
강이 지나칠 무렵
한 자락씩 거두어 길을 내고는
은밀히 강바닥으로
무릎을 맞대어,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산은
산을 밀어 내지 않는다.
무성한 제 그림자를
강물에 담글 때면
건넛산이 잠길 어귀를
비워둔다.
때로 겹친 어깨가
부딪칠 때도
조금씩 비켜 앉을 뿐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금확산을 금학산으로 표기된 정상석

금확산 산행 >>> https://koreasan.tistory.com/11732204

 

소매곡 강변유원지

홍천읍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북방면의 소매곡리 강변은 소박한 강변 풍광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또 접근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홍천온천이 지척이고 강재구공원도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널따란 강변에서 물놀이와 낚시를 모두 즐길 수 있다. 상류의 수심은 허벅지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견지낚시를 하기에 적당하다. 다슬기도 서식한다. 주변에 매운탕과 토속음식 등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소구니 강변유원지

홍천강 지류인 동면의 덕치천 하류에 자리한 소구니 강변은 천년고찰인 수타사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물살이 부드럽고 수심이 얕은 편이라 아이들과 안전하게 즐기기에 적합하다. 다슬기가 서식하여 가족단위의 가벼운 야유회 장소로 알맞다. 하류쪽의 보를 막아놓은 곳엔 물고기도 많아 낚시하기 좋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고, 숙박업소도 있다

 

수타사계곡

동면 노천리 공작산에서 발원해 노천리, 신봉리 거쳐 덕치리로 이어 흐르는 계곡으로 8km에 이른다. 수타사계곡은 위로 올라갈수록 희고 고운 모래가 널려있고, 넓은 소가 많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높이 20여m에 이르는 선바위, 효성이 지극한 두 형제의 전설이 담긴 효죽암 등이 곳곳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신봉리 근처가 인기 있다. 


대진교 강변유원지

화촌면 외삼포리 56번 국도상의 대진교 주변 강변은 넓은 백사장과 깨끗한 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견지낚시 하기에도 적합하다. 옛다리를 기준으로 상하류 모두 가족과 노닐기 적당하다. 강변에 민박집, 식당, 가게가 많다. 


주음치 강변유원지

홍천강 상류에 자리한 화촌면 주음치 강변은 44번 국도변에 위치하여 접근이 수월하다. 강변과 높은 절벽이 어우러져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데도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수심이 얕은 곳에선 물놀이와 견지낚시 등을 즐길 수 있다. 강변은 축구장이 있을 정도로 넓다.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원도 홍천 동부, 관광명소, 별미

     
내촌천

홍천강의 상류인 내촌천(乃村川)은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해 두촌면 철정리 아오라지에서 장남천과 합류하는 물줄기로, 홍천강의 상류를 형성한다. 내촌천은 서석면과 내촌면의 높은 산악지대를 사행천으로 굽이쳐 흐르는데, 서석면 읍내의 풍암리, 상군두리, 하군두리 일대와 내촌면 물걸리의 동창 일대에 제법 널따란 들녘을 빚기도 했다. 이런 곳에선 벼농사를 짓고 있다. 물걸리 동창엔 조선시대 천수답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산골 농민들의 노력의 결과물인 ‘동창보’라는 수로가 있다.

 

굽이도는 사행천을 따라 아이들의 물놀이터 겸 낚시터가 아주 많다. 또 바위봉우리와 어우러진 경관이 제법 아름다워 견지낚시, 루어낚시, 플라이낚시 매니아들의 발길도 잦다. 홍천강도 맑지만 그 상류인 내촌천은 더욱 맑다. 상류부터 하류까지 중간중간 다슬기가 서식하고 있어 가족과 함께 다슬기를 잡을 수도 있다. 내촌천 주변의 유원지는 어디나 한적한 강변 마을이 펼쳐지고 마을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순박하다.


계방천

백두대간 약수산(1,306.2m)과 응복산(1,359.6m) 사이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줄기와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발원한 명개계곡 물줄기는 명개리에서 합류해 계방천(桂芳川)이란 이름으로 서쪽으로 흐른다. 물줄기 남쪽에 우뚝 솟은 한중지맥의 계방산(1,577m)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어 내린천 발원지인 을수골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합쳐 덩치를 키운 계방천은 서쪽으로 흐르다 운두령에서 흘러온 자운천을 광원리에서 받아들여 몸을 불리는데, 이후로는 내린천으로 불린다.

 

이렇듯 오대산, 계방산, 응복산, 약수산, 갈전곡봉 등 해발 1,200~1,500m가 넘는 고산 사이를 흐르는 계방천은 길이는 비록 길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여울과 소와 폭포가 이어지고 한여름에도 20℃ 이하의 차가운 물이 흘러 북방계 냉수성 어종의 보고로 꼽혀왔다. 실제로 계방천이 흐르는 명개리와 광원리 일대의 냇가엔 북방계 냉수성 어종의 대표격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용소계곡

두촌면 천현리의 용소계곡은 내촌면 광암리에서 발원하여 두촌면 괘석리를 거쳐 천현리에 이르는 10km쯤의 계곡을 말한다. 수량도 많고 곳곳에 소와 바위들이 펼쳐진 경치가 아름다워 사람들의 발길이 잦던 곳이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자연휴식년제를 거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용소계곡은 워낙 계곡의 폭이 좁고, 커다란 바위가 많아 야영하기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용소계곡 끝부분에 10여 동의 텐트를 칠 수 있는 터가 있다. 44번 국도가 지나는 두촌면 소재지의 두촌초등학교 부근에서 우회전해서 계류를 따라 난 농로를 따라가면 된다. 진입하는 길이 좁은 편이라 조심해야 한다.


가리산 자연휴양림
두촌면 천현리의 가리산(加里山․1,051m)은 ‘강원 제1의 전망대’로 불릴 만큼 정상 조망이 뛰어난 산이다. 부드럽게 뻗어내린 능선에 뿔처럼 우뚝 솟은 정상의 암봉에 서면 소양호가 북쪽으로 보이고, 멀리 동쪽으로는 설악산에서 점봉산,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산줄기가 아련하다.

 

가리산 자연휴양림은 예전 화전민들이 가꾸던 농토 자리인 가리산 동쪽의 장구실골 하단에 자리잡고 있다. 중심지역은 해발 550m로서 여름에도 선선해 피서지로 각광 받고 있다. 취사장이 있어 야영지로서 적합하여 통나무집이 있는 작은장구실골은 숲이 적당하게 짙은 편이고, 산막 바로 앞에 간단한 놀이기구 등이 있어 편리한 숲속 생활을 즐길 수 있다. 농구장과 체력단련장 등이 있는 왼쪽의 큰장구실골 분지는 숲이 대체적으로 옅은 편이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조금만 벗어나 계곡이나 산쪽으로 들어가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숲이 반긴다. 휴양림 안에는 구멍바위, 중석굴, 한천자바위, 용수간폭포 등의 볼거리가 있다. 또 휴양림의 큰장구실골에서 가리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있다. 3시간이면 정상에 설 수 있다.

 

사계절 운영하는 산막이 18동 조성되어 있고, 다목적광장, 놀이시설, 체육시설, 물놀이장,맨발로 걷는 건강로, 구내매점 등의 부대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삼봉 자연휴양림
내면 광원리의 삼봉 자연휴양림은 ‘한국의 명수 100선’에 든 삼봉약수터를 중심으로 조성된 휴양림이다. 산막이 조성된 숲은 아름드리 전나무, 주목 등 침엽수와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등 활엽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1급수에만 사는 천연기념물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는 맑은 계류는 한여름에도 5분 이상 발을 담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

또 국립공원인 오대산(1,563m) 북쪽 어귀에 자리하고 있어 휴양림을 베이스캠프 삼아 을수골, 조개동, 약수동 등 오대산 북쪽의 호젓한 계곡을 답사하는 계곡답사 여행을 즐기기에 좋다.

 

가령폭포

내촌면 와야리 백암산(1,099m) 남쪽의 가령골(加靈谷)에서 흐르는 가령폭포는 지방도에서 백암산 산길로 1.5km 정도 들어간 곳에 있어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은 폭포다. 번잡함을 싫어하는 이라면 한 번쯤 들러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어 가역곡(加驛谷)으로 불렸다. 또 마을을 개령동이라 하고 개령폭포라고도 한다.

 

가령폭포의 높이는 50~60m로 꽤 긴 폭포에 속한다. 평소에 수량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짙은 숲 사이에 걸린 암벽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수는 시원하다. 가령폭포가 있는 골짜기 마을은 폭포골로 불린다. 들어가는 계곡에 관음사라는 자그마한 암자도 있고, 폭포 옆 계곡엔 송어횟집도 있다.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계곡 마지막 집까지는 조금 험한 비포장길이다. 마지막 집 공터에 주차비(3,000원)를 지불하고 5~10분쯤 걸어 오르면 폭포가 보인다. 지방도로변 막국수집 건너편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차를 대고 천천히 걸어올라 갔다올 수도 있다. 폭포까지는 산길이 그리 험하지 않아서 어린이들도 삼림욕을 겸하여 걸을 수 있다. 왕복 1시간쯤 걸린다.


명개리계곡

내면 명개리계곡은 내린천의 원류인 계방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물이 차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오대산 북쪽에 자리하여 교통이 다소 불편하기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이 비교적 적어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수량도 아주 풍부하다. 또한 계곡의 골이 깊고 울창한 나무숲이 짙은 그늘을 곳곳에 만들고 있어 한여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최적지라 할 수 있다.


모래소유원지

내면 광원리 내린천 물줄기 중에 최상류에 자리한 모래소유원지는 웅장한 바위가 병풍 같은 자태를 뽐내며 내린천의 맑은 물을 감싸 안고 있는 곳이다. 도로에서 진입하는 입구가 좁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솔밭 사이로 약 50m 정도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솔밭 아래 야영을 할 수 있는 공터가 보인다.

모래소 상하류엔 깨끗하고 매끈한 호박돌이 많이 널려 있다. 솔밭의 야영터가 운치 있고 깨끗하다. 조용히 여름 한 철 지내기에 적당하기 때문인지 소규모 가족단위로 많이 찾는다. 넓은 공터가 있어 주차하는 데 불편은 어려움은 없다. 간이화장실이 한 동 있다.


폭포수계곡유원지

서석면 검산리 내촌천의 지류인 폭포수계곡은 아담한 규모의 절벽이 굽이도는 계곡이다. 넓은 바위를 타고 내리는 맑은 계류와 아이들도 물놀이하기에 좋은 적당한 깊이와 넓이를 갖고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소박한 풍광을 갖춘 곳이다. 계곡 주변엔 소나무가 빼곡하게 자라난 야산도 있어 가벼운 산책도 겸할 수 있다. 군데군데 야영터가 있다. 계곡엔 서봉사도 있어 조용히 들르기에 좋다.

 

▲ 오토 캠핑으로 유명한 모곡 밤벌 유원지 ⓒ2011한국의산천

주말이면 집사람과 나는 밤 늦게 자다가도 차를 몰고 나간다. 한여름에는 이슬막이 헥사 타프만 설치하고 별을 보며 잠을 잤다.

   

밤벌유원지는 주변에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간혹 지명 이름을 따라 모곡유원지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물이 풍부하고 깨끗해 물고기들이 많다. 쉬리, 모래무지 등 깨끗하고 모래가 많은 곳에서 서식하는 민물고기 이외에도 바위 주변에는 메기, 동자개, 꺽지 등이 많아 생태박물관을 연상시킨다. 또한 대략 2㎞ 정도의 넓은 자갈밭과 모래밭을 가지고 있으며 강변에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어 오토 캠핑장으로 그만이다.

물골안유원지

내촌천이 장남천과 합류하는 아오라지 2km 상류에 자리한 물골안유원지는 경치가 좋은 곳이다. 메기골유원지, 청벽산유원지라고도 한다. 물골안의 상류지역은 삼형제바위 바로 밑으로 수온이 낮고 수심이 깊다. 물속엔 커다란 바위가 뒤엉켜 있어, 쏘가리, 꺽지, 메기 등이 많이 낚인다. 중류 지점은 유속이 빠르지만 수심이 얕아 견지낚시하기에 알맞다. 피라미, 끄리, 쉬리 등이 잡힌다. 하류지역은 넓은 모래톱과 수심도 얕아 어린아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적당하다. 낚시도 잘된다.

 

철정검문소 삼거리에서 451번 지방도를 타고 국군철정병원을 지나쳐 작은 언덕을 하나 자마자 오른쪽으로 물골안유원지를 알리는 입간판이 나온다. 여름 피서철엔 유원지 안에 가게와 식당을 운영한다. 유원지 입구 한 켠엔 족구장도 갖추어져 있다. 

 

홍천 물걸리사지

홍천 내촌면 물걸리사지(강원도기념물 제47호)엔 홍천에서 가장 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다섯 점이나 있어 관심을 끈다. 절터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이전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이름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통일신라시대의 홍양사(洪陽寺)가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물걸리 동창마을 둘러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2062279

 

물걸리 (동창 東倉) 둘러보기

한곳에 보물이 5개가 모여있는 홍천 내촌면 물걸리 폐사지와 백우산 경수골 답사 (답사코스: 물걸사지 ~ 백우산 경수골 계곡) 2007년 7월 21~22일 (토,일요일) 홍천 물걸리 (동창 東倉 마을)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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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대좌 양식을 보여주는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은 얼굴의 마멸이 심해 자세히 판별하기 어렵다. 머리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 같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옷은 양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 모양의 매듭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껍고 투박하게 보이고, 상체는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8각형으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8각의 각 면에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지만 턱이 뾰족하여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양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다소 투박하고 무겁게 늘어졌다. 옷주름은 어깨에서 두 팔을 거쳐 무릎에까지 나타나 있으나 평행선으로 되어 약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 모양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 연화대좌로 상․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에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향로 등이 새겨져 있다.


물걸리 불대좌

물걸리 불대좌(보물 제543호)는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와 대좌만 남아 있는데 대좌는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구분이 뚜렷한데, 현재 머리광배 부분은 없어졌으며, 안쪽에는 덩쿨무늬를,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표현하였다.

불대좌 하대엔 향로와 새 모양의 조각이 있는 8각의 받침돌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석이 놓여 있다. 중대엔 8개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기고, 안쪽에 머리광배를 갖춘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상대는 연화좌로 3중의 연꽃이 조각되었는데, 연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홍천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작품으로 불상은 없고 광배와 대좌만 남아 있다. 배(舟) 모양의 광배는 가운데에 연꽃 무늬와 넝쿨 무늬가 새겨지고 가장자리엔 불꽃 모양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윗부분과 좌우 등 9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각기 손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광배를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는 3단으로 구성된 8각 모양이다. 맨 아래엔 아래로 향한 연꽃 무늬가 각 면에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작은 귀꽃이 있다. 중간의 각 면에는 불상과 악귀를 쫓아준다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대좌의 맨 윗부분은 연꽃이 활짝 핀 반원형 모양이고, 연꽃 안에 작은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

물걸리 삼층석탑(보물 제545호)은 통일신라 후기의 탑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세웠다. 위․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2층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모서리선이 뚜렷하여 끄트머리에서의 들림도 날카롭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만 남아있다.


서석시장

서석면 소재지인 풍암리에 자리한 서석장은 매월 4, 9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조선시대 영동과 영서를 오가던 보부상들의 모임장터로 시작되었는데, 당시엔 인근 풍암리 현하 마을에 설치하였다. 일제시대에 상군두리로 이전하였다가 6․25 전쟁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당시만 해도 장의 규모가 제법 커서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까지 열렸고, 인제 평창 횡성 등 인근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전성기를 누렸다. 현재는 장세가 많이 약해져서 장사꾼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홍천까지 4차선 도로가 뚫리고 56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봄철엔 두릅, 더덕, 참나물, 취나물 같은 나물류, 여름철엔 표고버섯과 고랭지채소, 옥수수 등이 나오고, 가을엔 송이버섯도 보인다.


찰옥수수 축제

홍천군의 옥수수 재배면적은 932ha에 이르는데, 그중 서석면의 수확량이 가장 많다. 옥수수가 익어 가는 매년 7~8월 중 3일간 홍천군 체육공원 및 동학혁명위령탑 등에서 열린다. 축제기간 중에는 홍천 전지역에서 찰옥수수를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이때엔 전통 농악놀이 한마당, 옥수수를 이용한 각종 요리 시연과 시식, 옥수수 자료전시, 옥수수 빨리 먹기, 옥수수 전통주 및 홍천산 맥주 시음장 운영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된다.

 

인삼 축제

매년 9~10월 홍천읍 상오안리 강원인삼조합에서 열린다. 2001년 첫 축제를 열었고, 최근엔 여름마다 계속된 집중호우의 피해 여파로 열리지 않았다. 홍천군의 인삼 재배면적은 693가구에 212.2ha로 강원도 재배면적의 30%를 차지한다. 2001년 6년근 생산량은 163톤.

행사 때에는 인삼요리 시식회, 인삼왕 선발대회, 인삼요리사상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진다. 인삼캐기 체험행사를 한 후에는 캔 인삼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강원인삼조합 상설매장에선 6년근 홍삼을 비롯해 백삼, 수삼, 미삼 등을 판매한다.
강원인삼조합 033-435-3434.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

서석면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강원도기념물 제25호)는 조선 후기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웠던 전적지다. 1894년 당시 홍천 지방에서도 농민 운동이 크게 일어나 농민군의 일부가 관아를 공격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장야촌까지 진군하였으나, 관군 총사령관 맹영재와 싸워 동학군 30여 명이 전사하였다.

 

여기에서 패한 동학군은 서석 풍암리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지인 자작고개에서 김숙현을 중심으로 관군과 싸웠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당시 사망자를 8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유해 더미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도 풍암리 주민들 중에는 동학교도로서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제사를 음력 10월20일부터 수일간 사이에 지내는 집이 많다.


내촌 팔렬공원

3.1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지고 있던 1919년 4월 초순의 장날 이제의 폭정에 항거, 자주 독립을 부르짖기 위해 태극기를 품고 동창부락 장터에 1,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동창 부락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이미 정보가 누설돼 장터로 쳐들어온 왜경들에 의해 8명의 열사가 희생되었다.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비석과 동상을 세웠다. 입장료 주차료 무료.


동창보 수로 및 암각명

서석면 수하리 내촌천 물줄기를 따라있는 동창보(東倉洑․강원도기념물 제65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쌓은 둑으로 서석면 수하리에서 내촌면 물걸리까지 약 1km 정도에 이른다. 물길을 끼고 있는 암벽면에는 ‘보주 김군보(洑主 金君甫)’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김군보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직접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이 보는 내촌면 물걸리 지역 일대의 개척과 관련된 농경유적으로, 조선 후기의 수리 및 관개 시설의 형태를 비교적 잘 보여준다.


동창보제 놀이

동창보제(東倉洑祭)는 내촌면 물걸리에 전승되는 마을 제사. 초기엔 동창보를 설치한 김군보의 주도에 의해서 관개시설이 잘 보존되고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기원제로서 올리는 제사로 시작되었다. 그후 주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참여 속에 동창 마을의 당제로서 완전하게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 물걸리에 전승되는 동창보제 놀이는 동창보제의 제의를 재구성하여 민속놀이로 재현한 것이다.


강원민요연구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계곡 상류에 자리한 강원민요연구원은 강원도 민요를 비롯한 우리전통음악의 조사와 연구 등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인 국악인 김혜란씨가 이사장으로 있다.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각종 세미나와 연수를 마련하고 있고, 강원 지역의 민요를 발굴하고 새로운 민요를 창작하는 산실이다.


홍천 열목어 서식지

맑고 차가운 1급수에 사는 열목어(Brachymystax lenok)는 북부 아시아와 우리나라에서만 서식하는 냉수성 어종이다. 열목어는 숲이 울창하여 직사광선에 노출되지 않으며 한 여름에도 수온이 20℃ 이하이며, 수량이 일정한 계곡에서만 살 수 있다. 또 성어(成魚)가 숨을 수 있는 큰 돌이나 바위가 있고, 헤엄칠 수 있는 큰 소(沼)가 있어야 한다.

 

열목어는 여름이 되면 산간 계곡의 최상류에서 서식하다가 겨울이 되면 하류로 이동하여 규모가 큰 소(沼)에서 지내고, 다음해 해빙기가 되면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산란한다. 은백색 바탕의 몸에 크고 작은 자홍색 무늬가 있고, 알을 낳을 때는 온몸이 짙은 홍색으로 변한다.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 부분에는 무지개 빛의 광택을 내어 아름답다. 물속에 사는 작은 곤충이나 어린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홍천 명개리, 광원리의 열목어서식지는 강원도 내에서 열목어 서식환경이 가장 잘 갖추어진 곳으로 수온은 11~13.5℃이며, 암반․크고 작은 돌․자갈․모래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하천의 폭은 2~10m 정도이며,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다. 열목어는 멸종 위기에 있는 물고기로, 홍천 명개리 일대 서식지를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광원리 을수골 초입의 칡소폭포는 열목어가 뛰어오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살둔산장

내면 율전리의 살둔 마을은 내린천이 개인산(1,341m) 지맥을 크게 휘돌아가는 자리에 터를 잡은 오지의 강변 마을이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륜구동차로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살둔마을의 강변에 세워진 살둔산장은 내린천의 명물이다.

 

월정사를 보수한 대목수의 손으로 1985년에 지어진 이래 오지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인 이 산장은 귀틀집과 사찰의 형식을 섞어 지은 집. 외부는 초기에 자금 때문에 마무리를 못했다 하여 ‘미진각(未盡閣)’이라고도 하고, 산이 반 물이 반이라는 뜻의 ‘산반수반정(山半水半亭)’으로도 불린다. 또 2층 작은 마루는 바람을 베고 눕는다 하여 ‘침풍루(寢風樓)’. 물줄기와 산줄기,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산장이 조화를 이뤄 ‘한국의 살고싶은 100대 집’ 중의 하나로 꼽혔다. 


삼봉약수
내면 광원리 삼봉 자연휴양림 내에 있는 삼봉약수는 물맛이 좋아 일찍이 ‘한국의 명수 100선’에 들었다. 백두대간 갈전곡봉(1,204m)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뻗어나온 산줄기인 가칠봉(1,240m), 그리고 응복산(1,156m) 이렇게 세 봉우리의 정기가 모인 곳에서 나오는 약수라는 뜻을 가진 삼봉약수는 오래 전부터 위장병, 신경쇠약, 피부병, 신장병,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약수의 주성분은 제일철, 탄산, 중탄산이온으로 현재도 그 명성은 여전해 약수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약수가 나오는 구멍이 세 개가 있으며 그 맛이 모두 다르다. 그중 맨 아랫것이 가장 강한 맛이 나는데, 처음 먹는 이는 쇳내 때문에 못 먹을 정도다. 처음 발견 당시엔 바위틈에서 졸졸 흘렀지만, 물 받기가 곤란하자 관리하던 사람이 바위틈 아래의 보글거리는 곳에 구멍을 팠는데 바위틈에서 나오던 물이 그쳤다. 그리고 나중에 그 아래에 구멍을 또 하나 파자 위쪽 두 구멍에서 나던 약수의 물맛이 약해졌다고 한다.

삼봉 휴양림 안에 있으므로 산림욕을 겸해 찾으면 좋다. 약수 옆의 14실짜리 산장은 휴양차 온 수객들이 장기 체류하는 곳이다. 휴양림 입구에 대여섯 곳의 민박집이 있다.

길에서 만난 별미


옥수수 찐빵

홍천은 전국에서 옥수수 재배 면적이 제일 넓은 고을이다. 그 중에서도 서석면이 옥수수 재배 면적이 제일이다. 6․25 전쟁 후 서석의 학교에서는 점심을 굶는 학생들에게 옥수수죽을 쑤어 먹게도 하고, 남는 옥수수가루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어 집에서 끼니를 때우게 했는데, 당시 옥수수가루와 분유를 섞어 빵을 쪄먹었다. 서석면 두메식품에선 이런 유래가 있는 옥수수로 옛 맛과 향수를 살려 옥수수찐빵을 만들었다. 구수한 옥수수 맛과 팥맛이 어우러져 먹는 이의 미각을 돋운다 해서 인기 있다.

두메식품에서 소개한 찐빵 맛있게 먹는 요령은 다음과 같다. 우선 찜통에 10~15분 정도 쪄서 먹는 게 좋다.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때는 찐빵에 랩을 씌워 2분 정도 데우면 되는데, 이때 랩에 작은 구멍 1~2개를 뚫어주라고 한다. 보온밥통을 이용할 때는 바닥에 깨끗한 물수건을 깔고 5분 정도 예열한 후 찐빵을 올려놓고 10~15분 정도 쪄서 먹는다. 오래 보관할 때엔 냉동보관을 한다.

 

강원도 홍천 서부, 일정별 길라잡이, 교통, 숙박


일정별 길라잡이

홍천은 면적이 전국의 시군 중에서 가장 넓은 고을이다. 또 동서로 길어서 서쪽 끝 서면에서 동쪽 끝 내면까지 국도와 지방도를 달린다 해도 승용차로 3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런 지형적인 원인 때문에 홍천 고을만을 목적으로 했을 때는 서부와 동부로 나눠서 살피는 것도 좋고, 3∼4일의 시간을 내면 동부와 서부 두루 섭렵할 수 있다.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홍천은 우선 서면·북방면·남면의 서부권, 홍천읍·동면·화촌면의 중부권, 그리고 나머지 두촌면·내촌면·서석면·내면의 동부권 이렇게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홍천강 수계에 속하는 서부권과 중부권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서부권과 동부권 두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큰 분류대로 홍천을 서부권과 동부권으로 나눠서 소개한다.

모곡유원지로 대표되는 홍천강, 낮지만 알찬 산행할 수 있는 팔봉산을 비롯해 강재구공원, 홍천온천, 공작산과 수타사 등의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다. 보통 1박2일 일정이면 그런 대로 아쉽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여름철 나들이라면 하루쯤 일정을 더 잡아 강변에서 다슬기를 잡거나 낚시를 즐기는 것도 좋다.

강원도 홍천 동부, 일정별 길라잡이, 교통, 숙박


일정별 길라잡이

백두대간과 ‘한중지맥’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홍천의 동부는 깊고 깊은 두메산골이다. 두촌면․내촌면․서석면․내면 이렇게 4개 면이 동부권에 든다.

동부권은 두촌면의 장남천 권역, 내촌천 물줄기가 지나는 내촌면과 서석면을 하나로 묶은 내촌천 권역, 내면의 내린천 권역 이렇게 세 개의 소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44번 국도변의 두촌면이 홍천 중부권과 심리적으로 가깝다면, 나머지 3개 면은 나름대로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고을이다.

 

내촌면은 외곽의 물걸리에 볼 만한 것들이 몰려 있다. 보물을 다섯 점이나 간직하고 있는 물걸리사지의 비밀이 놀랍다. 강원민요연구원도 자리하고 있다. 또 내촌천 물가에선 천수답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만든 수로도 구경할 수 있다. 서석면은 자그마한 시골장 풍경이 정겨운 곳이다. 읍내 뒤쪽 언덕엔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외롭다. 옥수수찐빵과 옥수수막국수 같은 별미를 맛볼 수 있다.

 

내린천 수계의 내면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오지. 내린천 최상류인 계방천엔 열목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열목어 뛰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광원리 칡소폭포는 꼭 한 번 들르고 싶은 곳이다. 깨끗함이 넘치는 을수골은 내린천 발원지로 이어지지만 비포장이라 사륜구동이 아니면 조금 어렵다. 또 삼봉 자연휴양림 안에는 ‘한국의 100명수’에 꼽힌 삼봉약수가 샘솟는다.

홍천까지 접근시간을 빼고, 홍천 동부만 드라이브만 한다면 꽉 찬 하루면 가능하다. 그러나 서석장도 구경도 하고, 열목어도 감상하고 하다보면 시간이 빡빡하다. 1박2일 정도면 그런대로 둘러볼 수 있다. 하루쯤 더 머물면 경관 뛰어난 강변에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 홍천강 옆에 자리한 한치령에서 ⓒ 2011 한국의산천

 

  누구나 거쳐온 군생활. 나는 군생활 3년을 洪川 [큰물 홍(洪), 내천(川)]에서 보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면적이 넓다는 그 홍천을 이곳 저곳 다 쏘아다니며 훈련을 했다. 인제, 양구 원통, 양평 여주까지 훈련을 하며 행군하였고 심지어 홍천에서 출발하여 불발령 ~ 운두령 ~ 계방산을 넘어 동해안 연곡까지 왕복하는 천리행군도 했다. 

 

  내가 군생활하던 사단수색대는 사단사령부 옆의 독립 부대로 홍천강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였기에 강가에서 사격과 훈련을 자주하고 늘 강을 바라 보고 지냈다.

한강이외에는 江을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홍천강이야 말로 강처럼 생긴, 강다운 강. 江스러운 江으로 내 마음 자리잡았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춘향이 마음>(1962) -

 

▲ 노을지는 노일리 강변에 다시 서고 싶다.ⓒ 2011 한국의산천

 

한때 내 젊음이 강렬하고 가득했던 그 강에 석양 노을이 진다. 청춘이 이제 서서히 저물듯 그 강에 빠알간 노을이 진다.

사람은 피고 지고 또 대를 이어 피고 지지만 그 긴 강은 자신의 길을 따라 언제나 묵묵히 흘러만 간다.   

 

사랑하다가

               - 李相潤

 

사랑하다가
마음이 아픈 날엔
철없는 아이처럼
토라지는 연습을 한다.

 

사랑하다가
그대가 그리운 날엔
토라질 수도 없어
슬프도록 노래를 부른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진달래 꽃빛보다도 차고
서러운 사랑이여

 

사랑하다가
서러운 날엔
하나뿐인 사랑도
울음이 된다.

 

가을 강을 적시는
눈물이 된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나는 오늘도 강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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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