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고인돌 축제 2005.9.20
강화도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등 세 강이 만나는 하구에 자리한 강화도(江華島)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부침을 같이하며 영욕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섬이다.
때문에 아름다운 해안 풍경 외에도 섬 자체가 '역사의 보고'라 불릴 정도로 유서 깊은 유적과 유물이 즐비하다.
또 육지를 잇는 연륙교가 두 개나 놓여 있어 수도권에서 손쉽게 바다 풍경을 만나고 역사의 숨결도 느낄 수 있다.
아픈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는 돈대
강화를 강화답게 해주는 것은 많지만, 강화 해안에 즐비하게 서있는 돈대(墩臺)만큼 강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는 없다. 돈대는 성곽이나 변방에 세우는 방위시설인데, 1679년에 강화도 해안 둘레에 53개소의 돈대를 설치했다.
이곳에 오르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조들의 함성도 들을 수 있다.해안 풍광을 볼 수 있는 전망은 덤이다. 강화 53돈대 중 하나인 갑곶돈대는 신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나는 돈대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줄기찬 대몽항쟁을 벌일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극동함대 600여 병력이 이곳에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들은 강화에 35일 동안 체류하면서 사람과 가축을 살상하고 각종 재물과 도서 등을 약탈하다가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장군에게 패주하였다.
그들은 성안에 있던 강화 동종을 가져가려 하였다가 무거워 실패했지만, 외규장각 도서 등 귀중한 보물을 수많이 약탈해 갔다. 갑곶돈대와 가까운 강화읍내에 있는 고려궁지(사적 제133호)는 고려시대 몽골에 항전하던 궁궐터다.
당시 이곳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은 강화성 대장경 판당(板堂)에 수장하였는데, 나중에 합천 해인사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최근엔 고려 왕비의 무덤에서 최상급의 고려청자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이 또한 고려 후기 대몽골 항쟁의 흔적들이다.
고려궁지 아래의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리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농사지으며 살던 집이다.
강화도 고려산(436m) 둘레에는 또 120여 기의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강화를 ‘고인돌의 섬’이라고 부른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몇 년 전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세계인의 보물로 등극했다. 이 중 고려궁지에서 4km쯤 떨어진 부근리 고인돌의 '인물'이 으뜸이다.
남한에서 가장 큰 북방식 고인돌로서 뚜껑돌(蓋石)의 길이가 710cm, 너비는 550cm나 되는 거석이다.
갯벌 풍광이 아름다운 남부해안도로
강화도 북부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마리산(469m)이 솟아 있는 남부는 정수사와 전등사 등 천년고찰을 돌아보며 멋진 해안 풍광도 즐길 수 있는 재미가 있다.
강화도 북부에서 남부로 접근하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강화읍내에서 84번 도로를 타고 남진하는 것이다. 선원~불은~길상면을 지나면 20여 분만에 전등사에 들어설 수 있다. 또 갑곶돈대에서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가며 남부로 이동하는 코스도 괜찮다.
석모도를 다녀오는 여행객들은 서쪽의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게 낫다.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전등사(傳燈寺)는 대웅전 처마 밑의 귀퉁이에서 옷을 벗은 채로 쭈그리고 앉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녀상(裸女像)으로 잘 알려진 절집. 이는 전등사 아랫마을에서 주막을 하던 주모가 전등사를 짓던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돈을 챙겨 달아나자, 도편수가 벌을 받는 주모의 형상을 조각해 복수한 것이란 전설이 있다.
전등사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정수사(淨水寺)는 대웅전(보물 제161호)의 문창살이 볼거리. 모란과 장미가 활짝 핀 모습의 문창살은 청ㆍ황ㆍ홍ㆍ녹 4색의 색상이 화려하여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창살로 손꼽힌다.
강화도 드라이브의 백미는 정수사 남쪽의 분오리돈대에서 동막해수욕장과 여차리를 거쳐 장화리로 이어지는 남단의 해안도로라 할 수 있다. 해질녘 이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디서나 붉고 아름다운 강화도 낙조를 만날 수 있다. 해안도로 곳곳이 낙조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화리의 해양환경수련원 근처 바닷가 풍광이 좋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서남쪽 해안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장곶돈대는 일반인들이 낙조 감상하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로 꼽힌다.
강화도를 당일로 다녀오려면 오전 중에 섬 북부를 둘러보고, 오후엔 남부를 둘러볼 수 있게끔 일정을 짜는 게 좋다. 이렇게 하면 해질 무렵에 동막리~여차리~장곶돈대를 잇는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 고인돌과 지석묘 고인돌은 지석묘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석붕, 영어로는 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과 지석묘는 같은 의미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석묘라는 용어는 그 한자의 뜻에서 추론되는 바와 같이 고임돌이 있는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서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m, 너비 5.5m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장정수는 최소한 500명.. 그렇다면 당시 장정 한 사람이 거느린 가족을 5명으로 잡아도 이 무덤의 주인은 2,500명 이상을 거느린 족장 쯤으로 추정해 볼수 있다.
축조방법을 알아보자면 뚜껑돌은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큰 바위에서 일부를 떼낸 것으로 실지로 그러한 채석장이 서북지방에서 여러 군데 발견되고 있다.
돌을 떼내는 방법으로 바위틈이나 인공적인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로 불리어 떼내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운반은 지렛대와 밧줄을 이용하거나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뚜껑돌을 들어올릴 때에는 받침돌을 세우고 그것과 같은 높이의 봉토를 쌓아 경사면을 이용, 끌어 올린다음 봉토를 제거하는 방법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강화 내가 저수지.
성지란 성스러운 땅,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배경이 된 장소등을 말한다.
갑곶성지는 서울에서 한시간여 거리에 떨어져 바다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강화도는 많은 이들의 나들이 코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좋은 자연환경과 많은 문화유적, 그리고 호국의 얼이 숨쉬는 곳이기에 강화도를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강화도의 갑곶성지의 유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인 1795년,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철종(哲宗)의 조모(祖母)인 송(宋)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申)씨를 각각 마리아로 영세를 준 것이 조정에서 알려지게 되어 왕족인 고부(姑婦)가 함께 1801년(辛酉迫害)에 순교하게 되자, 이러한 연유로 1786년(정조 10년)부터 자식 상계군(常溪君)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恩彦君 , 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에 배소되어 처형되었고,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자요 백서(帛書)를 쓴 황사영(黃嗣永)의 탄생지가 이곳 대묘동에 있어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갖고 있다.
1845년 5월 14일 김대건신부는 페레올 고(高)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국시키는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甲串)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에 잡히게 되었다.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가 되었고, 1856년 베르뇌 장(長)주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權)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이기도 하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丙寅)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鎭撫營)으로 호송되어 효수(梟首)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갑곶나루터에서의 순교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辛未)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이때에 이승훈의 증손인 이연구(李蓮龜)와 균규(筠龜)가 제물포에서 잡혀 군문효수되고,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李在謙)의 처 정(鄭)씨와 그의 손 이명현(李明玄)과 백용석(白用石) 등도 이와 관련하여 순교하였다.
미국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高宗)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 때에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 갑곶돈대와 강화역사관
강화역사관은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갑곶돈대 옆에 있는 건물로 강화의 역사를 주제로 한 전시관이다. 이 곳에는 석기시대부터 이어진 선조들의 생활흔적, 팔만대장경 제작 모습 등의 문화 전시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운요호 사건에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대, 현대에 이르는 강화의 역사가 망라되어 있다.
역사관이 문을 연 것은 지난 1988년 9월 14일의 일이다. 1984년 계획을 세운 이래 5년여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관은 강화를 포함한 인천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해 꾸며놓았다.
이 곳에는 전쟁과 관련된 유물도 상당수 있어 우리조상의 국난극복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강화역사관은 모두 4개의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는데 1전시실은 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의 생활상 2전시실은 고려 수도 천도 후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 3전시실은 항몽의 역사 4전시실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강화역사관은 강화군 관리로 면적은 6,318평(보호구역 면적)이며 사적 제 3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관 바로 옆에는 갑곶돈대가 있는데 이는 강화도가 도읍이었던 고려시대(1232년~1270년) 39년동안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강화역사관과 갑곶돈대 사이에는 탱자나무가 있는데, 서해안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 강화의 성문을 여닫을때 알리는 동종이다.
보물 제11-8호. 높이 176cm, 지름 145cm, 두께 21cm. 꼭대기에 머리를 좌우에 두고 얽힌 용이 있고, 그 몸 밑에 공간을 두어 종을 매달게 되어 있다.
몸통은 중앙에 굵게 튀어나온 횡대(橫帶)를 둘러 상하로 구분된다. 어깨부분에 비스듬히 나온 턱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동종에서 혼히 발견되는 입화형(立花形)의 퇴화형식으로 보인다.
윗부분에 4곳에 유곽(乳廓)과 꽃무늬로 장식된 넓은 유곽대가 있고, 그 안에는 연꽃으로 표현된 9유(九乳)가 있다. 밑부분 종구(鐘口)에는 1가닥의 꽃무늬로 장식된 횡대가 있으며, 종명(鐘銘)이 길게 양주(陽鑄)되어 있어, 이 명문(銘文)에 의하여 1711년(숙종 37)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 형태에서 벗어나 횡대를 두른 이례적 형식을 취하였고, 어깨부분의 입화장식이 퇴화된 점, 유곽이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점, 용뉴(龍鈕)에 음관(音管)이 없는 점 등으로 조선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갑곶돈대의 천연기념물 탱자나무 역사관 바로 옆에는 갑곶돈대가 있다.
강화도가 도읍이었던 고려시대(1232년 ~1270년) 39년 동안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강화역사관과 갑곶 돈대 사이에는 탱자나무가 있다.
탱자나무의 북방 한계선으로 원래 이곳에서는 자랄수 없는 나무이나 돈대보호와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심은것으로 추정된다. 탱자나무로서는 서해안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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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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