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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강화 교동도

by 한국의산천 2014. 9. 7.

강화교동도 라이딩 [ 2014 · 9 · 7 · 하늘 파란 추석전날 일요일 · 한국의산천]

 

 

라이딩 코스

강화 고인돌 유적지 ~ 교동대교 ~ 고구저수지 ~ 연산군 유배지 ~ 화개산 한증막 유적지 ~ 대룡시장 ~ 남산포구 ~ 교동읍성 ~  교동대교 ~ 고인돌유적지 (45km)

 

 

◆ 교동도 둘러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014

 

그대 하루 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에서 ⓒ 2014 한국의산천  

왼쪽부터 따듯한 가슴님 / 흰구름님 / 오리온님 / 맑은샘님 / 한국의산천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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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1일 인천 강화도 본섬과 북한 접경 지역인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정식 개통됐습니다. 길이 3.44km,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연륙교는 총 사업비 890억 원이 투입됐으며, 2008년 19월 25일에 착공하여 6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사장교 형태이며 교량의 길이는 3.44km로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도 심한데다 빠른 물살 때문에 교각 일부가 유실되는 등 공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합니다.

 

  교동도는 민통선 북방지역이기에 해병 군부대에서 검문을 하며 교동 군민은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외지인들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까지만 통행이 가능합니다.

검문소에서 외지인들에게 출입 목적 확인 등 소정의 절차를 확인 후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발부 받아야만 다리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나올 때는 출입증을 제출하고 신분증을 찾아옵니다.

 

※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량이 많이 밀려듭니다.이때 출입증 교환절차로 대기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문화시민들의 힐링여행이므로 차분히 기다리는 여행자의 미덕이 필요할때입니다   

 

 

 

 

▲ 북한땅이 지척에 보이는 교동대교를 건너며 ⓒ 2014 한국의산천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는 결코 멀지 않지만 마음으로 짚어보는 거리는 너무도 멀고먼 교동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교동도의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3km 내외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인다. 도서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으며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다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이다.고림(高林)또는 달을신(達乙新) 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주민들의 주업이 농사일 만큼 넓디넓은 평야를 품고 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더 벌이가 좋은 일을 찾아 하나둘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 교동도는 한적한 섬이 됐다.

 

 

▲ 감탄과 우울이 교차하는 수도권의 변경(邊境)지대 교동에 들어서서 ⓒ 2014 한국의산천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때 나라에 중대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전라도 방면으로 귀향을 보냈지만 왕족이나 또는 왕손에 한하여는 강화도로 보내고 조금 더 중죄를 졌다면 강화도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교동도로 보내어졌다. 그렇다면 왕족은 왜 전라도로 귀향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왕족과 왕손을 가까이서 관찰해야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읍내리의 부근당에는 일반 당집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 등을 갖춰 입은 부부그림이 걸려있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로 추정된다.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굿을 한다고 한다.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달을 지냈다고 한다. 집터와 우물이 남아있다.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융.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연산군 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1494~1506 재위).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31세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 2개월 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죽자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나중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 교동읍성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하 하였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있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白東?)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남문 앞의 해자도 역시 메워 버렸다.32) 규모는 둘레가 4정 26칸 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33)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 좌측 측벽에 '南樓(남루)'와 '三道統門 (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이곳이 남문이며  삼도통문이라 교동에는 3도 즉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는 뜻을 추측케해준다.

 

 

 

 

 

 

 

 

 

 

 

 

 

 

 

 

◆ 교동도 둘러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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