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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강화 교동 대룡시장 교동읍성 남산포 돌아보기

by 한국의산천 2021. 1. 1.

2021년 1월 1일

아내와 느긋하게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강화도 교동 섬안의 또 다른 섬을 찾아가기로 했다

등산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드문 드문 가끔 오는 섬이기에 낯설지 않아서 좋다.

 

오늘현재

화개산 등산로 폐쇄

연산군 적거지 폐쇄

교동 제비집 폐쇄

 

새해 첫날은 기적이다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새해 첫날
   - 반 칠 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교동 남산포.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교동 대룡시장 (교동시장)

 

 

교동읍성

 

언제나 밀리는 길이지만 강화대교 끝단에서 구제역 예방을 위한 차량 소독으로 인하여 더욱 정체가 심하다.

강화대교를 지나면서 논스톱 고고싱

 

오늘 답사 코스 : 강화교동대교 ~ 고구저수지 ~ 연산군유배지 ~ 대룡시장 ~ 남산포구 ~  월선포 선착장 ~ 교동대교 ~귀가 

 

교동대교 연혁

2008년 9월 25일 : 착공
2011년 : 2012년 개통 예정예정이었으나, 갯벌에 설치되어있던 기초말뚝이 2011년 중순 거센 바닷물에 의해 전도되어 공사가 지연됨 (기초 말뚝 인양 후 재시공)
2014년 : 설날연휴에 임시 개통후 폐쇄.
2014년 6월 20일 : 임시 개통 시작
2014년 7월 1일 : 정식 개통되었다

 

교동은 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기에 교동대교 전에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통과 . 여기서도 정체.

교동 주민은 24시간 통행이 가능하지만 외지인은 04시부터 자정까지 통행이 가능합니다

 

바다같은 고구저수지를 지나다보니 강태공들의 얼음낚시가 한창이었다

 

교동도

 

역사의 섬

차타고 가는 섬

시간이 정지한듯한 6~70년대의 시장 풍경

섬 정상 화개산에서의 막힘없이 조망이 좋은곳

 

교동도는 북한쪽 황해남도 연안군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화도 북단 최전선의 섬으로 특별한 명승지나 볼거리는 부족(?)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여행의 무게감을 느끼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입니다.

 

해변의 평지에 자리한 거대한 난정저수지와 강화군 전체에서 가장 넓은 교동평야, 그리고 교동읍성과 철책선의 긴장감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섬으로 얼마전까지만해도 페리호를 타고 건너가던 섬이었지만 지금은 다리를 건너서 갈수있게된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는 섬입니다

 

역사속의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 1천년간 개성과 서울의 관문이자 군사요지였으며, 활발한 무역항이었습니다.

고려 시대에 교동의 위치는 수도 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개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들려야 하는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교동 남산포구에 도착한 중국 사신들을 맞았던 곳이 남산포 대변창입니다. 대변은 손님을 맞는다는 대빈(待賓)이란 말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형된 글자입니다. 남산포구에 내린 사신들은 인근에 있는 절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침 배로 개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교동은 충청도, 황해도, 경기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 통어영이 설치된 곳입니다.

당시 교동의 원님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았던 곳입니다. 무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적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 방어선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개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가 지금도 존재하는 곳이지요. 얼마전까지만해도 강화도와 같은 행정기관이 있었으며, 부자들이 많이 사는 인구가 많은 섬이었습니다.

 

또한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습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그간 교동도가 잘 알려지지 않고 멀게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교통이 불편했고 교동도의 북쪽 해안과 서쪽해안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으로 교동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이기에 입출입이 제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외지인 통제도 많이 완화되었으며 뱃길보다는 다리를 통해 쉽게 왕래할 수 있는곳으로 변했습니다. 아직은 생소할 수 도 있고 개발의 바람을 덜타서 시골스러움이 오히려 외지인들에게 더욱 좋은 매력으로 끌리는 모양입니다.

 

단, 교동은 전체적으로 관광지 개념의 섬이 아니기에 식당과 마트가 거의 없습니다. 저수지쪽에 작은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큰 식당과 마트는 대룡리에 몰려 있으므로 장거리를 트레킹하실분은 물과 간식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최전방 군사보호지역이어서 해안 철책선 가까이 가거나 손을 대면 안 되고,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곳도 절대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화개산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는 공사로 인하여 폐쇄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때 나라에 중대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전라도 방면으로 귀향을 보냈지만 왕족이나 또는 왕손에 한하여는 강화도로 보내고 조금 더 중죄를 졌다면 강화도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교동도로 보내어졌다. 그렇다면 왕족은 왜 전라도로 귀향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왕족과 왕손을 가까이서 관찰해야했기 때문이다.

 

 

<교동 제비집>이 교동 여행의 출발점

교동 제비집 쪽에 넓은 공영 주차장과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이곳에 주차를 하면된다

교동 제비집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 대룡시장이다

과거로 돌아간듯한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대룡시장 규모는 그리 크지 않기에 잠시 둘러보면 된다.

 

대룡시장 둘러보기

어서오시겨 대룡시장(교동시장)

강화 교동도에 대룡시장이 있다. 6·25 이후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고향인 연백시장을 그리며 만들어진 시장이다.

60년대식의 시골스러운 간판이 가득하다. 마치 오래전 골목을 재현해놓은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이 살아있는 시장이다.

 

옛 추억 깨워주는 대룡시장

교동도에서 먼저 찾은 곳은 가장 번화하다는 대룡시장입니다. 막상 대룡시장에 가보니 '번화하다'라는 단어가 쑥스러울 정도로 한가했습니다. 시장은 조용하고 시간이 멈춘듯 6~70년대의 풍경이 그대로 멈춰있는 느낌입니다. 300m 남짓한 골목길은 사진찍는 여행자들의 발길만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룡시장입구에는 교동초등학교가 있으며 광무10년(1906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합니다.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하 하였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홍예만 남아있가 최근에 복구를 했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白東?)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남문 앞의 해자도 역시 메워 버렸다.

규모는 둘레가 4정 26칸 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 좌측 측벽에 '南樓(남루)'와 '三道統門 (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이곳이 남문이며  삼도통문이라 교동에는 3도 즉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는 뜻을 추측케해준다. (위 동영상 참고)

남산포에서

바다는 넓으니까 와이드 앵글로 잡았다 가끔은 이런 왜곡도 좋다.

 

 

교동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강화도 검문소에 도착하면 해병대 초병이 탑승하여 '교동지역 임시출입증'을 반납 하고 나오면 됩니다.

 

이제는 교동도에 연륙교가 놓이게 되어서 민통선이라는 제약은 있지만 그래도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한때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던 다리였고, 또 한때는 조선 삼도수군의 심장부였던 교동은 이제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인하여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2021년 첫날.

시간의 멈춤이 있는 공간과 아름다운 포구 그리고 역사의 심판속에 광란의 일생을 마친 연산군의 행적들을 돌아보며,

산다는것의 정답은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해보며 교동대교를 건너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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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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