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먼 길을 가는 소
풍요와 여유와 느긋함을 상징하는 소
2021년은 신축년이다.
육십간지 중 38번째로 신(辛)이 백색, 축(丑)가 소를 의미하는 '하얀 소의 해'다.
전통적으로 신성한 기운을 가진 흰 소는 백의민족인 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기존의 문화에 새로운 가치를 더한다면, '100대 민족문화상징'인 한우가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에 진출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길을 나서 먼 곳에 이르는 행위를 가리키는 성어는 부중치원(負重致遠)이다.
이 말의 유래에 직접 등장하는 동물은 소다. 잽싼 짐승에 비해 퍽 느린 걸음, 우둔해 보이지만 결국 먼 길을 걷는 소의 이미지가 생생하다.
물먹는 소에게 할머니는 손을 얹었다… 고맙구나
[2021 신년특집 - 辛丑年, 소를 말하다]
일만 하는 시시한 삶 같았지만 발잔등 부어도 말없이 물만 마셔
노고 끝 함께 적막 견뎌내는 존재
소설가 윤성희 입력 2021.01.01 03:00
/일러스트=이철원
어렸을 때 나는 띠가 열두 개밖에 안 되는 게 불만이었다. 세상에는 동물들이 그리 많은데 겨우 열두 개라니. 공작띠, 홍학띠, 독수리띠…는 왜 안 되는가. 소풍으로 동물원을 가면 나는 띠가 서른 개쯤 되는 세상을 상상해보며 구경을 하곤 했다. 그러면 세상은 더 즐겁고, 더 왁자지껄하고, 더 복작복작해질 것만 같았다. 그중에서 내가 되고 싶은 띠는 기린띠였다. 기린이 걷는 걸 보면 우아하다는 게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기린이 기다란 목을 어떻게 하고 잠이 들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소띠라니. 소라면 궁금한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흔하고 흔해 빠져서 신비로운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소설가 윤성희
나는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쥐띠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때 쥐띠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이거였다. 열두 동물이 달리기를 해서 띠 순서를 정하는데 쥐가 소 등에 앉아서 왔다는 이야기. 그렇게 결승전까지 몰래 소 등에 올라탔다가 결승선 앞에서 폴짝. 그래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들을 쥐띠 친구들은 종종 말하곤 했다.
그 에피소드는 쥐의 영리함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소의 둔함에 관한 이야기로 들렸다. 바보 같은 소. 미련한 소. 등에 누가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달리기만 하다니. 그렇게 1등을 빼앗기고도 우직하다는 칭찬에 속고 있는 소. 어린 시절, 나는 그 에피소드가 먼 미래의 내 운명 같아서 싫었다.
한여름에도 일만 하는 소. 그렇게 일을 하고도 풀만 먹는 소. 단지 띠일 뿐이지만 나는 내가 소인 것처럼 억울했다. 외갓집에는 외양간이 있었다. 마루에서 외양간이 마주 보였는데, 그래서 마루에 누워서 외양간 쪽을 보면 어쩌다 소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나는 소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으이구, 바보 같은 놈. 일하기 싫다고 화를 내란 말이야. 착하게 살지 말란 말이야.
스무 살이 넘어 문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런 시를 읽게 되었다.
묵화(墨畵)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 위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전생에 이런 경험을 한 늙은 노파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풍경이라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았다.
문학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즈음 외갓집은 더 이상 소를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외양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빈 외양간에 서서 이제는 없는 소들을 상상하곤 했다. 소가 없어도 거기에는 소가 있던 풍경이 겹쳐져 있었다. 빈 외양간을 보며 나는 부재의 풍경들을 상상했다. 봄에 여름이 겹쳐지고, 일곱 살의 내가 스무 살인 나와 겹쳐졌다. 부재의 풍경들을 내 안에 포개다 보면 언젠가 내 삶도 풍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빈 외양간을 보며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소띠인 게 좋아졌다.
나는 발잔등이 부어도 말없이 물을 마시는 저 소처럼 늙고 싶다. 그저 눈만 끔뻑끔뻑하면서. 그건 시시한 삶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하루의 노고 끝에 오는 적막을 같이 견뎌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참, 이제 나는 동물들이 띠 순서를 정하기 위해 달리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소가 2등을 할 리가 없다. 범도 있고 말도 있는데 말이다. [글 : 소설가 윤성희]
입춘 전후 세운 土牛… 농사와 풍년의 상징
[2021 신년특집 - 辛丑年, 소를 말하다] 우리 전통문화 속 ‘소’
허윤희 기자 입력 2021.01.01 03:00
소띠 새해를 나흘 앞둔 28일 전남 구례군 양정마을 봉성농장에서 쌍둥이 송아지인 ‘희망이’와 ‘소망이’ 자매가 체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소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가축 중 하나다. 기원전 6000년쯤 서남아시아와 인도에서 인간에 의해 길들여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눌지왕 22년(438년) 백성에게 소로 수레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고, 지증왕 3년(502년) 소를 써서 논밭을 갈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소는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일소’였다.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흰 소의 해다. 흰색에 해당하는 천간 ‘신(辛)’과 소에 해당하는 ‘축(丑)’이 만났다. 느린 걸음과 큰 몸짓, 힘든 일도 묵묵히 해내는 소는 우직함과 편안함, 근면, 자기희생의 상징이 됐다. 목동이 소를 타고 가는 그림에선 세속을 벗어난 여유가 느껴지고, 문학 작품 속 소는 고향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농경 사회에선 논, 밭과 함께 중요한 재산이었다. “소 팔아 자식 대학을 보냈다”는 말처럼 소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 금고의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했는데, 농가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십이지신도’ 중 축신(丑神). 19세기 말~20세기 초. /국립민속박물관
소는 권농과 풍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입춘 전후 흙으로 만든 소 인형인 토우(土牛)나 나무로 만든 목우(木牛)를 세우던 행위에서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조상들의 바람을 볼 수 있다.
정월 초하루 새벽에 소가 울면 그해는 풍년이라 여겼고, 정월대보름에 찰밥·오곡밥·나물 등을 얹은 키를 소에게 내밀었을 때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 점쳤다. 풍수지리에서 소가 편안하게 누운 모양의 땅은 복을 주는 명당으로 여겨졌다.
소는 살아서 온갖 힘든 일을 견디고 죽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줬다. 고기는 음식 재료로, 뿔과 가죽은 공예품과 일상용품의 재료로 아낌없이 내준다. 오죽하면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고 했을까.
강한 힘과 벽사(辟邪)의 상징이기도 했다. 개업이나 이사를 했을 때 문 위에 코뚜레를 거는 풍습은 재물을 코뚜레처럼 꽉 잡아줘 가계가 번창하길 기원한 것이다.
도움말=국립민속박물관 정연학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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