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서른번째 이야기
교동도 라이딩 1 [2019 6 22 하늘파란 토요일]
교동도에 연도교가 놓이게 되어 민통선이라는 제약은 있지만 그래도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변하였다.
한때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던 교량적 역활을 하던 곳이였고, 또 한때는 조선 삼도수군의 심장부였던 교동은 이제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인하여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다.
시간의 멈춤듯한 공간과 역사의 심판속에 광란의 일생을 마친 연산군의 행적들을 돌아보며 올바르게 산다는것의 정답은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교동대교를 건너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교동도는 아주 옛날 상고시대에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3개의 떨어진 섬이었다.
교동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화개산 자락에서 보이는 교동도는 그래서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교동도는 섬마을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서울에서 지척이고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가 따랐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이다. 하지만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제 이 섬을 이어주는 대교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흐를것이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라이딩 코스 :
인화 검문소 ~ 교동대교 ~ 교동대교 건너서 봉소리에서 시멘트 농로길을 따라서 우회전 ~ 철책길 ~ 고구 저수지 ~ 화개산 연산군 유배지 ~ 대룡시장(식사) ~ 망향단 ~ 철책길 ~ 난정저수지 ~ 수정산 한증막 유적지 ~ 죽산포구 ~ 남산포구 ~ 읍내 읍성~ 황룡우물 ~ 연산군 적거지 우물 ~ 월선포 ~ 교동대교 [50 km라이딩]
일년의 절반인 유월도 하순에 접어 들었다
6월의 달력
- 목 필 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마음의 뿌리
- 천 양 희
나무는 다리가 하나라서 뿌리 내리지만
나는 다리가 둘이라서 떠도는 것이다
떠돈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무서운 건 떠도는 내 마음이다
몸은 하나인데 마음은 여러 갈래
나무만한 생이 흔들린다
바람아 불어라
내가 뿌리처럼 강해지겠다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꿈꾸며 ...
오늘은 일년 중 낮이 가장 긴날이며 24절기 중 열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인 하지이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들판에 부는 바람 또한 시원하였다.
오늘 이후로는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진다니 왠지 조금 아쉽기도하다.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훨씬 가까워진 교동도
민간인 통제선 너머에 있는 교동도가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출입이 쉬워지고 가까운 섬이 되었다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구름에 뜬 섬’이라는 뜻의 대운도(戴雲島)가 원래 이름이었다. ‘하늘에 닿을 새’라는 의미로 달을신(達乙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강화 나들길의 교동코스 중 하나인 ‘다을새길’은 옛 지명 달을신의 소리음인 다을새의 이름을 따서 탄생했다.
▲ 교동대교를 지나오면 봉소리 ⓒ 2019 한국의산천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난 농로길을 따라서 파란 선을 따라 이동하면 된다.
오늘이 내일에는 역사가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역사에는 인물이 있고, 행동이 있고, 배경이 있다.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인물과 비교되고, 어제의 행동이 오늘의 행동과 대비되고, 과거의 배경이 현재의 맥락과 중첩된다. 이처럼 모든 역사는 지금의 현실과 통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인물의 행위에 담긴 의미와 당시의 맥락을 관찰하여 현실에 유용하게 참조하는 일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현실인식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올바른 현실인식에 기대어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역사 인물에 대한 지나친 평가절하나 일방적인 찬양 모두 경계해야 할 일이다
▲ 새로 지어진 초가
▲ 화개산 북사면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 2019 한국의산천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지금 새로 지어진 초가 주변에도 가시가 뾰족한 탱자나무를 심어 놓았다
곤룡포 한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뜻 기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우는가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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