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정안 김옥균 유허 (생가) 답사
조선 후기 혼돈의 시대가 낳은 풍운아 김/ 옥/ 균/
그는 개혁의 선구자인가
시대의 반역자인가?
김옥균
1851(철종 2)-1894(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 개화운동가. 갑신정변을 주도한 한말의 정치가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94)을 두고 흔히 풍운아, 혁명가 또는 진보적 정치가, 개혁파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그의 삶과 행동을 두고 이렇게 다양하게 부르는 것은 그의 활동영역이 그만큼 폭넓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를 논의할 때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은 가장 먼저 떠올리거나 빠뜨릴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추진하였던 ‘갑신정변’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에서 조선사회가 처했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운동의 일환이었다. 협력자 였던 고종의 변심으로 3일 천하를 마감하고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나선다.
잠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
김옥균선생유허 [ 金玉均先生遺墟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의 김옥균 생가지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충남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 1976년 12월 06일
시 대 : 조선
크 기 : 면적 2,473㎡ (생가)
1976년 12월 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와 묘이다.
생가지는 정안면에서 동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지점인데 터는 없어지고 넓은 밭 가운데 감나무만 서 있다.
그 자리에 1989년 2월 22일 공주군 주관으로 대지 2,473㎡에 생가지 터를 다듬고 바로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묘는 아산시에 있으며 묘역에는 석등·석양(石羊)·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비 등이 세워져 있다.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금강 북쪽과 차령(공주에서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로 넘어가는 해발 190미터의 고개) 남쪽에는 기름진 땅이 많고 지금은 밤의 주산지로 알려졌는데, 그 정안면에서 대한제국 말의 개혁사상가 김옥균이 태어났다.
후세 사람들로부터 ‘대한제국 말의 풍운아’, ‘비운의 주인공’, ‘미완성의 영도자’라는 평가를 받는 김옥균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인공이다.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 21)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지만, 성공한 지 3일 만에 막을 내려 ‘3일 천하’라는 말을 회자시키고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사건이다.
이 후 조선의 근대화 수레바퀴를 빠르게 앞으로 당겨놓길 원했던 그의 뜻과는 달리, 갑신정변 시점에 잠시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은 실패와 동시에 오히려 뒤로 후퇴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고종과,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수구파, 온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우리나라 개화 사상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꺼져 가는 조선의 명운을 걱정하며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개화해야 나라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의 지도자로 임오군란 이후 민비를 위시한 지배세력은 청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치욕적이라고 비판했고,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 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자체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재필 등의 개화파는 일본의 후원을 받아 1884년 12월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의 개입으로 개혁은 실패했고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소수의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진행된 개혁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외세에 의존하는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애국심만큼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실학을 계승한 개화파는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정치 세력이다.
▲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과 동지들.
김옥균은 한말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신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근대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노력이 대원군의 수구파와 대립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1894년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김옥균은 생각건대 우리 일본에서 떠돌면서 생활한 지 10년인데, 뜻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중국으로 건너가 크게 일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마침내 메이지 27년 3월 11일에 청나라 공사관의 통역관인 오보인(吳葆仁), 홍종우 및 시종인 기다하라 엔지(北原延次) 등 세 사람과 함께 도쿄를 떠나, 도중에 오사카(大阪)에 들렀다가, 같은 달 27일에 중국 상해(上海)에 안착하여, 일본 여관인 동화양행(東和洋行)에 투숙하였다.
이리하여 홍종우는 이튿날인 28일에 시종이 없는 틈을 엿보았다가 권총으로 김옥균을 격살(擊殺)하였다. 이때가 이 태왕 31년 2월 22일이다. 김옥균이 사망하였을 때 나이는 향년 43세였다. (1894년 3월 28일)
홍종우는 일단 몸을 피해 상해 부근의 민가에 숨었는데, 그날 밤 청나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관헌은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는 태도로 보였는데, 김옥균의 사체를 군함인 위원호(威遠號)에게 싣고 홍종우를 함께 태워 인천항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조선 정부는 김옥균에게 부과한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하고, 머리와 사지를 잘라내어 그것을 매달아 놓았다. 【3월 9일】
이 상세한 보고가 일본에 전해지자, 청나라의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점차 일본과 청나라 양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만세계보(萬世系譜)』·『대동기년(大東紀年)』·『김옥균전(金玉均傳)』 등】
그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의 갑오정권이 수립된 후 반역죄가 사면되었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 동경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이일직(李逸稙)의 계략에 빠져 홍종우와 함께 상해로 건너갔다가 미국 조계(租界)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암살 당한 것이다.
프랑스 유학생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홍종우는 민씨척족정권이 일본에 잠입시킨 자객 이일직에게 포섭된 것이다.
▲ 능지처참 후 효수된 김옥균
김옥균의 시신은 송환 직후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되어 찢겨진 후 목만 따로 효수돼고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쓰여진 천이 붙었다.
일본에서 10년 동안 망명했던 김옥균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온전히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김옥균의 무덤은 세 군데다.
도쿄 아오야마(靑山) 묘지 외국인 묘역과 도쿄 진조지(眞淨寺),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무덤이다. 모두 그의 머리카락과 의복을 모신 무덤이다.
3일간 양화진에 효수되었고 몸통 부분은 한강에 던져졌고 사지(四肢)는 경주, 함흥, 충주, 전주, 황주, 강릉, 공주 등지에 보내져 효시(梟示)되었으며 이 시신은 다시 경기도 죽산의 역적을 버리는 죽산기장(竹山棄場)에 버려졌다.
김옥균은 1851년 지금의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안동이고,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이다.
3세 무렵 그의 가족은 지금의 천안시 광정면 원대리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는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7세 때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 급제, 그 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대단했던지 달을 보고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11세(1861년)에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가 되어 강릉으로 가게 되자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가서 16세 때까지 율곡 이이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문과 알성시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개혁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등을 만나 개혁 사상을 배우게 되고 고종의 매제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때 17만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김옥균은 학문뿐 아니라 문장과 시, 글씨, 그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박영효는 “김옥균의 장처(長處)는 교유(交遊)라고 할 수 있소. 교유가 참 능하오.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 잘 쓰고, 글씨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재다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옥균의 주위에는 일찍부터 당시의 명문 귀족 출신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철종의 사위인 금릉위 박영효와 당시 영의정이던 홍순목의 둘째 아들인 홍영식, 고종의 외척이며 여흥 민씨 가문의 총아인 민영익 그리고 서광범, 서재필 등이 김옥균이 교류하던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김옥균은 1870년대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고, 이들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었다.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갑신정변은 우리 나라 최초로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다.
정치면에서는 청에 대한 사대 외교 관계를 청산하고, 전제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형태를 변화시키려한 정치 개혁 운동이었다.
사회면에서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여 봉건적 신분제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갑신정변은 이후 갑오개혁, 독립 협회 활동,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일본에 의존적 태도를 보인 것과 국방력 강화와 토지 제도 개혁에 소홀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이 가장 큰 한계이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긍정적 평가 :
갑신정변은 민주주의, 민족주의 근대화 운동의 선구로서, 국민 주권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으며,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와 일본과의 결탁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입장이다.
부정적 평가 :
확고한 근대 사상의 정립 없이 정권 탈취의 목적으로 진행된 정변으로, 일본을 끌어들인 잘못과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한계를 지녔으며, 결과적으로 이후 보수 세력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함으로 오히려 개화 운동의 맥을 단절시키고, 외세 지배를 촉진시킨 측면이 크다는 입장이다.
역사의 기록은 명분과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늘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지만
역사의 평가는 후대의 몫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김옥균 선생의 생가터에서 발길을 돌린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다"
공주 정안은 우리나라 최고의 밤 산지이다
온 산에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신선하고 비릿한 밤꽃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1920년대 서울
박윤석 입력2012-05-22 17:51:00
2012년 06월 호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김옥균.
김옥균(金玉均)은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무덤에 비(碑) 하나를 얻었다. 1904년 3월에 세워진 그 비의 후면을 가득 채운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없이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글은 박영효(朴泳孝)가 지었다고 말미에 새겨 있다. 1000자에 가까운 비명(碑銘)의 끝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와 생사를 같이한 정리가 있다 하여 내게 글을 청하였다. 눈물로 먹물을 삼아 후세인들에게 고해 그가 비상한 사람이었음을 알린다.’
글씨는 이준용(李埈鎔)이 썼다고 되어 있다. 박영효의 이름 앞에는 정1품 금릉위(錦陵尉)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 박영효 다음에 새겨진 이준용의 이름에는 종2품이라는 감투가 씌워 있다. 대원군의 장손자인 이준용의 품계에 대비하면 박영효의 지위의 높음이 절로 실감된다.
이준용은 고종의 장조카이지만 박영효는 고종의 선대 임금인 철종의 사위다. 그것도 무남독녀 외동딸과 혼인한 부마도위(駙馬都尉). 13세의 옹주는 비록 3개월도 채 못 지내고 11세의 신랑과 사별했지만 금릉위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눈부신 직함은 평생의 동반으로 박영효의 곁에 살아 있다.
비가 선 곳은 도쿄(東京) 도심의 공원묘지 내 외국인묘역이다. 33세 때부터 나라 밖으로 나가 살던 김옥균은 죽어서도 제 나라에 묻히지 못했다. 죽어 귀국한 몸의 사지는 절단되어 땅바닥에 나뒹굴며 뭇 동포의 구경거리가 되다가 형체도 없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 유해의 일부를 일본인 추종자가 몰래 수습해 일본으로 날라다 무덤을 만들고 절에도 안치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마침내 동족에 의해 비명을 새긴 비석을 갖게 된 것이다.
너비 1m의 비석은 자연석의 거친 질감을 살려 위로 가며 약간 좁아지다 3m가 되는 끝 높이에서 예각을 이루며 마감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하늘을 향해 뻗은 묵직한 칼을 연상한다. 칼날은 부러진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심지어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두께가 얇아서 그렇지 앞뒷면만 보면 가로 세로 길이나 거기 쓰인 글자 수는 반도의 북쪽 광개토대왕비의 절반가량 된다.
흐린 날에 멀리서 보면 야윈 승려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시각도 있다. 그것은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로 알려진 김옥균의 실루엣을 닮았다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그의 사체를 검시한 보고서는 그의 신장을 155㎝로 적고 있다. 비석은 그의 키 두 길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는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불교 대하기를 비 맞은 중 보듯 하는 조선 지배층의 유교 근본주의 풍토에서 보면 김옥균은 이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조선에선 무덤도 불가
광개토왕비가 압록강 너머 간도에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김옥균의 무덤과 비는 왜 바다 건너 도쿄에 있는가. 조선 땅에는 그의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객잔에서 동족의 총을 맞고 청나라 기선에 실려 서해를 건너 월미도에 기착하고, 다시 조선의 배로 옮겨져 인천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만선의 조기 배처럼 환호 받으며 경강으로 들어와 양화진에 부리어 능지처참된 그의 흩어진 몸을 내려다보며 장대 위에 걸린 그의 머리에는 대역적임을 알리는 팻말이 봄날의 강바람에 한참을 흔들렸다.
그의 죽음에 기뻐하는 사람은 많아도 슬퍼하는 사람은 적었다. 슬퍼할 사람은 이미 죽거나 숨거나 도피해 보이지 않았다.
갑신년에 정변을 일으킨 그는 갑오년에 주검으로 귀환했다. 그 사이 10년 세월을 그는 일본에서 살았다. “나는 인천으로 절대 안 간다”는 임금을 달래고 달래다가 나르는 총탄 속에서 마침내 갈라져 서울을 빠져나가 인천에 정박 중인 일본 기선을 타고 배 밑창에서 며칠 밤낮을 뒹굴며 혼미해진 심신으로 일본에 상륙해 시작한 망명 생활은 실의와 낙담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해 상갓집 개 신세라고 하는 것이 어떤 처지인지를 몸소 체험하는 세월이었다.
도쿄에서 장차 그의 무덤이 되는 곳 가까이에 살던 그는 도쿄 남방 1000㎞ 떨어진 최남단 절해고도로 유배돼 태평양의 아열대 원시림 속에 생존하게 된다.
겨울에도 눈 볼 일 없고 1년 내내 습기 속에 류머티즘을 앓으며 돌고래를 길손처럼 보며 지냈다. 오가사와라(小笠原)-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그 섬에는 주민 38명이 살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개항을 하던 1876년에 일본령이 되어 본토민의 이주가 막 시작된 곳이었다.
정변을 일으키기 전해에 김옥균은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가 되어 동해 바다 고래잡이 업무를 관장한 경력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생긴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울릉도에 불법 체류해 벌목을 일삼던 일본인 255명을 철수시키고 본토인의 울릉도 이민을 추진했다. 2차에 걸쳐 16가구의 조선주민 54명이 그때에 이주했다.
동해와 태평양은 완전히 다른 바다였다. 오가사와라 섬에서 그의 상대는 주로 동네 아이들이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의 80수년 전 귀양살이와는 차원이 또 다른 것이었다. 그곳 일본 최남단을 2년 만에 겨우 벗어나자 이제는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로 옮겨져 한없는 눈과 냉기로 류머티즘이 골수에 사무치는 경험을 한다. 그 속에서 북해도의 이민 개척 행정기관인 개척사(開拓使)가 활발히 추진하고 있던 농장일도 난생 처음 경험하게 된다.
그가 회고록에서 자주 쓴 표현대로 “그 숱한 일을 다 적을 수는 없다.” 일본 영해의 광대함과 사방으로 경계를 확장해나가는 일본의 활력을 최일선에서 그처럼 생생히 체험한 조선인은 그 이전에 없었다. 1881년부터 갑신정변 이전까지 사절단에 끼어 도쿄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받았던 충격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북해도 식민 개척의 대본영인 삿포로에는 개척사가 직영하는 맥주 양조장도 가동되고 있었다. 독일에서 맥주 제조법을 배워와 1876년부터 생산을 개시한, 개척사의 상징인 빨간 북극성 마크를 단 삿포로 맥주였다.
10년 만의 귀국
남과 북 양극을 오가면서도 김옥균이 가장 오래 산 곳은 도쿄였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를 위시해 그와 친교를 나누는 후원자들이 다들 거기에 있었고 망명 생활 중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대개 거기서 이루어졌다. - 하략
출처 : 신동아
귀가 후
자전거 타고 동네 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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