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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동학운동 우금치 전투

by 한국의산천 2020. 6. 20.

동학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이 민란이 처음 시작될 때는 단순하게 농민들의 궐기 운동과 내전 등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을 단독으로 제압할 자신이 없던 조선 조정이 청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여 주둔시켰고, 청군을 핑계로 일본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여 결국에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서 청과 조선의 사대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어, 청의 간섭을 차단하고 한반도 간섭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옛부터 전라도는 곡창 지대였는데(특히 고부는 핵심 지대였다),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이점으로 인하여 전라도민들은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다.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계속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동학은 이러한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 농촌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전라 고부 군수(지금은 정읍시의 일부) 조병갑은 그 중에서도 악랄한 탐관오리였는데, 그는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에 사용료를 부과하였고, 인근 태인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양민들로부터 엄청난 조세와 잡세를 걷고 양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노역을 부여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다.

 

또한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떠밀어 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말 그대로 가렴주구를 일삼아, 조병갑에 대한 전라도 백성들의 증오와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고부군 사람들은 글 깨나 배웠다는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곤장뿐이었다. 이로 인해 전창혁은 반 죽은 상태로 돌아왔고, 보름이 채 안 되어 장독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그의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 당시의 봉기군의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뿐만 아니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까지 매우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발통문으로, 1968년 발견되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전까지의 민란은 백성들이 아무리 분해도 수령은 왕의 대리인이라고 여겨 수령에게 모욕을 가해도 수령을 죽이지는 않는 분풀이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은 첫 봉기에서부터 '수령을 죽이고 전주까지 치고 올라간다'고 하는 등 기존의 농민 봉기와 그 시작부터 크게 달랐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받아 유야무야 되었는데,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의 발령이 취소되어 고부로 돌아왔다.

결국 이틀 만인 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봉기를 일으켜 만석보를 무너뜨렸고, 고부 관아 창고에 있던 곡식과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태를 파악한 조정은 신임 군수 박원명을 내려보냈다. 박원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 성공적으로 봉기군을 해산시켰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냥 흔한 동네 소요에 불과했을 것이다.

 

1894년 10월 동학 농민군은 제2차 봉기에 나섰다. 이 때에는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 지도부도 참여하였다. 농민군은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내정 간섭에 나선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목표로 하였다.

 

농민군은 당시 일본군과 관군의 거점이었으며,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던 공주를 점령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논산에 집결하여 공주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농민군 병력은 4만여 명에 이르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은 3천여 명, 일본군은 약 1천 여 명이었다.

 

우금치에서 벌어진 20여 일에 걸친 격전에서 농민군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에 대패하였고, 동학군의 시체는 산을 덮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사실상 1년여 동안 전국을 뒤흔든 농민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 뒤 전봉준은 전라도 순천 및 황해 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 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군의 한이 서린 곳 우금치

 

우금치(牛禁峙)는 충청남도 공주시 시내에서 이인면을 지나서 부여로 넘어가는 주미산에 걸친 고개이다.

공주시에서는 우금티로 부르며, 아래쪽에는 국도 제40호선이 우금티 터널로 지나고 있다

 

1894년 11월 9일. 역사는 '우금티의 그날'로 이날의 아픔을 전해오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전과정 중 최대의 격전지이고 가장 큰 희생을 치른 통한의 땅.

 

이날의 패배로 반봉건 반제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최대이자 최초의 민중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좌절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이하 우금치 전투 전쟁사를 참고로 기록한다.

 

녹두 장군 전봉준

어린 시절 키가 작아 '녹두'라고 불렸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전봉준을 녹두 장군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에게 저항하다가 죽게 되자, 사회를 개혁 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으며 서른 살이 넘어 동학에 들어간 전봉준은 고부 군수의 횡포에 맞서고 외세를 몰아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요구하며 일어난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대한민국 구석 구석

다 돌아보는 그날까지

 

▲ 농학농민들의 원혼처럼 우금치 일대에 가득 피어난 개망초

[전쟁사]

우금치 전투 (1894)

우금치 전투 [1] 동학농민혁명의 운명을 가른 전투

글 김창원 / 전사연구가, 공격 마케팅 컨설팅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동학농민군이 정부 진압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던 전라도 정읍 황토재에 세워진 기념관 안의 전봉준 동상. 농민군은 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라도 북부 일대를 장악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싸운 공격군의 정확한 통칭은 동학 농민군이다. 비록 봉기는 동학(東學)을 믿는 간부들이 지도했지만 주체는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일어난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약칭하여 동학군으로 부르겠다. 또한 우금치는 현지에서는 우금티로 부르나, 역시 관행대로 우금치로 호칭한다. 전투에 관한 날짜는 모두 양력으로 바꾸어 기술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우금치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양력으로 1894년 12월 5일(음력 11월 9일)이다.

 

 

동학농민 봉기 초기상황


전투의 배경

 

동학 혁명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1894년 4월 25일 고창군의 무장에서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의 주도하에 봉기한 역사적 사건이다.

 

동학군은 5월 11일의 황토현 싸움과 5월 27일의 장성 월평 싸움에서 승리하고 며칠 뒤 전주성을 접수했으나 전주성 싸움 후인 6월 10일 경, 관군 홍계훈과 화의를 맺고 해산했었다.


그러나 청군이 동학군의 토벌 명분으로 조선 출병을 강행하고 일본이 이를 트집 삼아 대규모로 내침했다.

 

일본군은 7월 23일, 조선 궁궐을 침탈하여 실질적인 조선 통치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하여 조선군의 무기들을 모두 회수하고 조선군을 무력화시켰다.

 

이 궁궐 침탈 만행에서 죽은 조선군만 50여 명이 넘는다. 고종은 연금 상태에 놓인다. 이후 일본군은 9월 청 육군을 평양(9월 15~17일)에서, 청의 해군을 황해 해전(9월 17일)에서 격파하고 청군을 만주로 몰아낸다.


전봉준은 청일전쟁이 한창인 10월 삼례에서 2차 거병을 하였다. 2차 거병에는 동학의 호남세력인 남접 세력에, 교주 최시형의 명령으로 충청, 강원, 황해의 북접(北接) 세력이 가세하여 동학 병력은 4만이 되었다.

 

1894년 11월 9일 전봉준은 직계 일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삼례를 출발하여 북상했다. 그는 강경과 논산을 들르며 군수품을 확보하고 모병을 하여 군세를 늘렸다. 북상 기동의 최종 목표는 한양이었다.


북상 길에 공주가 있었다. 11월 20일부터 공주 주변에서 관군과 동학군들의 격돌이 여러 차례 있었다.

 

동학농민군 재봉기 후 진로

 

 

우금치 공격 전야


공주 주변의 전투 후 재정비를 끝낸 동학군은 12월 2일~3일 다시 재진격을 해서 공주 남방을 3면에서 에워싸는 형태로 전개했다.

12월 3일 동학군은 공주 동남방 효포와 능치에서 맹렬한 공격을 해왔다.


관군은 그 기세에 놀라 다소 후퇴했는데 동학군은 오후에 갑자기 공격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이인을 기습 점령해버렸다.

이곳은 성하영의 경리청 부대[한양 북한산 주둔 부대]가 방어선을 치던 곳이었다. 이로서 동학군은 우금치 공격을 향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공주 감영과 우금치에 대한 병력 배치와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관군에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200여명의 일본군 중대 병력이 증원 배치되었다.

 

 

일본군의 전투 개입


일본군의 동학군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신중하면서도 교묘했다.

일본은 먼저 부산에 이지치 고이쓰케(伊集知幸介)소좌를 보내 여기서 동학군 지역으로 스파이들을 침투시켜 치밀한 정보를 수집했다.

 

충분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1차로 미나미 고시로(南 小四郞)소좌를 지휘관으로 한 후비보병 19대대를 동학군 토벌에 동원했는데 대대는 3개 중대로 분할되어 3개 루트로 한반도 남부를 종주 파견했다.


전봉준의 정면에 나타난 부대는 일본군의 모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서로(西路) 파견 2중대였었고 대대장 미나미 소좌가 이 방면으로 같이 동행해서 관군을 포함한 방어군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들이 공주에 도착한 것은 우금치의 대접전이 있기 12일 전이었다.

 

동학농민봉기 발발을 빌미로 조선에 상륙한 일본 군대가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고 있다.

 


관군의 편성


당시 한양에는 조선군의 근위대 성격 부대가 3개 대대가 있었고 지방에 주요 요지에 한 개 대대씩 있었다.

서울 군은 경군(京軍)이라 불렸고 지방군은 영군(營軍)이라 불렀다. 공주 방면에 투입한 동학군 토벌 관군은 신정희가 지휘하는 순무영과 경리청등의 병력 3,500명이었다.

 

이 병력들은 공주 여러 방어 전선에 분산 배치되었고 우금치 방면 투입 병력은 우선봉장 이두황(李斗璜, 1858 ~ 1916), 좌선봉장 이규태(李圭泰)가 지휘하는 두 개 대대의 병력 1,500명이었다.


관군은 이두황 부대와 이규태 부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훈련시킨 이진호(李軫鎬, 1867~1943, 이범호로 표기한 문헌도 있음.)의 최정예 교도중대(敎導中隊) 350명도 우금치에 증강 투입 되었다. 이 부대는 일본군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우금치 전투가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착각하는 일부 의견도 있고 반대로 일본군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 학자들의 억지도 있는데, 정리하자면 전투 주력은 관군이었으며, 일본군이 지휘권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로 우금치에서 활약한 관군 지휘관 중 이규태는 이후 항일 의병장이 되나, 이두황과 이범호는 대표적인 반민족적인 친일파 인사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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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의 지형


우금치 계곡은 좌우에 두 팔을 내밀어 안은 것 같은 양 능선이 감싸고 있고 밑은 다른 능선이 막고 있는 사방이 막힌 계곡이다. 동서로 달리는 능선이 상하에 있고 남북으로 달리는 능선이 좌우에 있어 중간에 형성 된 비스듬한 사각형 모양이 우금치 계곡이라 생각하면 된다.


사각형의 동쪽의 남북 수직 능선은 도로와 같이 병행하다가 우금치에서 만난다. 서쪽 남북 수직 능선은 지세가 더 험해서 높고 낮게 구비치며 올라 가다가 북쪽 동서 능선의 최고봉 견준봉과 만난다. 당시의 도로는 지금과 달리 매우 좁았다.


보병 지휘관들이 우금치 현지에 가본다면 누구나 꼭 같이 판단하겠지만 우금치에서 중요한 전술적 요지(要地)는 네 곳이다. 이곳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우금치 고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일대를 다 조망할 수있는 최고 높이의 견준봉이다. 그리고 계곡을 감싸고 있는 좌우 남북 능선 두 개가 또 다른 요지들이다.

 

 

이지치 고이쓰케(伊集知 幸介, 1854~1917)


우금치의 방어전투 배치


이두황은 우금치의 서쪽(우측)에, 그리고 이규태의 부대가 우금치 동쪽(좌측)에 배치되었고 일본군 200명이 우측의 이두황 부대를 지나 최우측에 서있는 최고봉 견준봉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나중에 이 견준봉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전날 이인 전투에서 패주한 성하영의 경리청 군사를 이두황의 부대와 견준봉의 일본군 사이에 끼어 배치하였다.


이규태의 부대가 우금치 고갯길과 그 계곡을 감싸는 왼팔 격의 능선을 방어하는 부대인데 이 중요한 곳에 소수의 부대만 배치할 리가 없었다. 이범호가 지휘하는 정예 교도 중대 병력 350명이 이규태 부대 쪽에 증강 배치되었다.


방어선의 최우측(서쪽)인 견준봉에서 우금치 좌측(동쪽)까지 방어선의 폭은 약 800m 정도였다. 6.25 전쟁에서 중대장과 대대장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이대용 장군의 견해에 따르면, 우금치 관군이나 일본군의 무기가 비록 구식 단발총 수준이지만 우금치 능선 1 km 정면에 2개 대대가 넘는 부대를 배치했다면 대단한 집중 방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25,000분의 1 지도에서도 지형을 파악하기가 힘든 폭 800미터 길이 1,200 미터의 좁은 계곡이 일만 동학군의 참혹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어군의 지휘권은 19후비 보병대대장 미나미 고지로 소좌가 행사했다. 12월 5일 있었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은 봄에 황토현이나 월평의 대패와는 아주 다른 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는데 이는 현대적인 전술을 터득한 일본군이 전투를 주도했던 것도 이유가 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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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창원 / 전사연구가, 공격 마케팅 컨설팅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주석 후비보병

후비보병은 예비역으로 편성된 부대를 말한다. 병력의 나이도 많고, 무기도 신식 무라다 22년식 5 연발총이 아닌 구식 스나이더 단발총을 사용했다.

 

[전쟁사]

우금치 전투의 전개

우금치 전투 [2] 우금치 계곡에서의 혈전

 

곰나루 건너편의 연비산에서 바라본 공주 전경


1894년 12월 5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학군은 해가 뜬 이른 아침부터 우금치 관군측에 탐색 공격과 교란 공격이 배합된 치고 빠지는, 말하자면 ‘히트 앤드 런’의 공격을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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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시작


공격은 먼저 우금치 고개를 감싸고 있는 좌우 양쪽 능선에 가해졌었다. 좌우 능선을 확보한 뒤 계곡으로 밀려들어가 우금치를 공격할 주력의 양측면 공격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관군들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 양쪽 능선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동학군들은 쉽게 이 능선들을 점령하고 우금치 관군 방어선에 교란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수시로 돌파 할 듯 위장 공격을 하고 함성을 질러대고 깃발을 흔들었으며 사격을 가했다.


관군들이나 일본군은 최대한 사격을 자제하고 사격 군기를 엄수했다. 양 능선을 확보한 동학군은 계곡 속으로 여러 번에 걸쳐 주병력을 투입했다. 우금치 계곡 안의 동학군이 점점 증강하여 정오쯤에는 동학군 주력이 대부분 다 투입되었다.

 

30년 전쟁 당시의 바이센베르크 전투도. 밀집대형을 잘 보여준다.


동학군의 공격 대형


동학군이 이날 사용한 전법은 19세기 중반까지 사용되던 밀집대형에 의한 집중 돌격이었다. 즉 열(列)과 오(伍)를 늘어선 집단이 지휘자의 질타 속에 적진에 쇄도하는 전투 방식으로 나폴레옹 시대에 절정에 달했었다. 멀리서 보면 병사들의 대형들이 장방형의 카드 같은 것을 옆으로 늘어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대형에서 지휘관은 후방에서 전장을 한 눈에 보면서 지휘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기록에 따르면 전봉준은 붉은 덮개를 씌운 사인교(四人轎, 네 사람이 드는 가마)를 타고 우금치 계곡으로 들어 와 공격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는 동학군 주력이 모두 계곡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거병 이래 말을 타고 지휘했는데 이 날은 산의 경사가 급해서였었거나, 여유 혹은 자신감을 보이기 위한 연출의 목적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원거리에서 적에게 확연히 관측이 되는 붉은 가마를 사용하였다. 현대의 전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휘관의 이동 수단이라 할 수 있겠다.

 

스나이더 소총 <출처 (cc) Antique Military Rifles>


동학군의 무장


전봉준의 1차 봉기 때 싸운 전투들에서는 동학군들은 선두 열들은 화승총을 들고 후방 열들은 창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화승총으로 제압하고 창부대가 근접전투로 적을 섬멸하는 전투 방식이다. 황룡강 월평 전투 때 4,000 동학 병력중에 절반인 2,000명만 화승총을 가졌다고 한다. 관군이 대패한 이 전투에서 동학군이 노획한 신식총(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은 겨우 30정에 지나지 않았다.


우금치 공격 병력의 무장 정도도 이보다 결코 낫다고 볼 수가 없다. 넉넉하게 보아도 공격 병력 만 명의 절반 정도만 유효 사거리 100미터의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큰 싸움인 월평 전투에서 노획한 신식총의 노획량 수준으로 보아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신식총은 몇 백 정이 넘지 않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1904년 6월 25일자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의병을 사살하는 일본군대 모사화


관군-일본군의 무장


관군에게는 동학군이 갖지 못한 양식(洋式)총과 독일제 크룹 포(砲)와 개틀링 기관총이 있었다.

관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단발 소총을 주력으로 쓰고 있었으며 중앙 병력 일부는 더 신식인 모젤 총으로도 장비했었다.

일본군도 투입된 것이 후비보병이라 역시 스나이더 소총을 사용하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개틀링 기관총이 몇 정이 동원되었는지는 아쉽게도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 지난 7월 23일 일본군의 궁중 침궐후 강제로 빼앗았던 서울 경군의 무기가 소총 2,000정에 개틀링 기관총이 8문이었으니, 그 중 몇 정이 동원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우금치 골짜기에 동학군 병력이 최대로 몰려들어 공격을 시작할 즈음 드디어 작전 지휘권을 쥔 일본군이 바라던 호기(好氣)가 도래했다. 정오 무렵이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보유 화력을 일시에 집중하는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일제사격의 신호는 일본군의 진지가 있던 견준봉에서 발신되었다.


동학쪽에서 전투에 참가했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갑자기 일본군이 포진한 산(견준봉)의 정상에서 포성 한 발이 터졌다.
이 포성이 일제 사격의 명령 신호였다. 이어서 관군 측의 각종 포와 총이 포문을 열었다.“

 

개틀링 기관총. 오늘날 벌칸포의 원조가 된 기관총이다. <출처 (cc) Matthew Trump>


좁은 우금치 고개 능선 일대는 포성과 총성 그리고 비명과 함성의 소리가 뒤덮었고 관군과 동학 농민군이 발사한 소총과 기관총들이 뱉은 유연화약의 자욱한 하얀 연기가 능선을 흘러 퍼졌다.

 

관군들은 연속으로 능선에 나타나서 총을 발사하고 사라졌다.


관군들은 2열 횡대로 서서 전열이 능선 앞에 나서서 상체를 드러내고 사격을 가하는 동안 후열은 뒤로 물러나 장전하고 전열과 사격 교대를 했다.

 

집중 사격의 불벼락을 받은 동학 농민군은 무수히 쓰러졌다. 동학군은 저돌적으로 돌격했다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패퇴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관군 측 기록은 동학군이 4-50차례의 돌격을 해왔다고 한다.


결국 전봉준이 그처럼 바라던 우금치 돌파는 공세 종말점(攻勢終末點)에 오고 말았다. 더 독전해서 몰아 부칠 수가 없는 상황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수많은 동학군 시체들이 우금치 정상 부근과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즐비하게 쌓이고 피가 내를 이루어 흘러내렸다.


관군의 부대를 지휘했던 이규태는 전투 후 우금치 고개와 골짜기를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표현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는 비참한 장면의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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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측면 공격과 송장배미


이제 동학군과 국가의 운명은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전봉준은 서쪽으로 지는 해가 우금치의 동학군 시체 더미에 긴 그림자를 던질 무렵 마지막 공주 점령의 시도를 하게 된다.


실패를 거듭한 정면 공격의 무모함을 자각하고 우금치 계곡을 크게 우회하여 우금치 측후방 시재 쪽으로 침투하는 측면 공격을 개시했다(이 측면 공격은 우금치 전투 개시와 함께 시도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록들이 있다. 혹은 공격은 일찍 시작했지만 병력을 더 증파했다는 설도 있다). 우금치 고개를 멀리 우회하여 시재를 넘어 측면 공격을 한 동학군은 관군이 지키는 두리봉에 붙어 여러 번의 격투 끝에 두리봉을 점령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동학군은 이 두리봉을 점령한 뒤에 일부 주력이 계속 전진해서 공주로 나갔지만 매복한 관군에게 저지당하고 후퇴했다. 후퇴한 이들은 전봉준 본대와의 합류가 불가능했다. 우금치 배치 관군들이 전투 승리 후 퇴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두리봉으로 몰린 측면 공격 동학군은 며칠간 공격을 받아 내다가 쓰러지고, 흩어지고 말았다.


공주에는 동학군과 관련된 유적지로 송장배미가 있다. 동학군의 시체를 유기한 논이라는 말이다. 18구의 전사체가 유기 되었다. 두리봉에서 빤히 보이는 지점이다.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 <위쪽>은‘서울로 압송되는 장면’ 혹은 ‘형장으로 가는 장면’으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법무부)으로 옮겨지는 장면’일 가능성이 커졌다.

 

아래쪽 사진은 1895년 3월1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에 실린 컷.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 제공>


전봉준의 패주와 처형


전봉준이 핏빛과 땅거미가 뒤섞인 우금치 계곡 밖에서 남은 인원을 점검한 바 1만명의 초기 인원 중 생존자는 단 3,000명이었다.

 

수많은 부하의 주검을 목격한 전봉준은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오 대위는 50명의 관군 특공대를 지휘하여 그 뒤를 10여리(약 4km)나 뒤쫓아 오며 총격을 가했다.

 

적의 재공격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패주 부대 추격은 근대 보병전술의 한 부분인데, 전투 마무리 단계에서까지 일본군이 동학군 소멸에 십분 활용한 (당시로서는) 첨단 전투 기술의 한 단면이 보인다.


전봉준은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지휘해서 논산으로 후퇴했다. 밤사이에 다수의 낙오 및 이탈이 발생했다. 전봉준은 논산에 집결했으나 참담한 형편이었다.

 

동학군은 불과 500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틀 뒤에는 우금치 옆 능치를 방어하던 동학군이 동학군으로 변장한 관군에게 패주했다. 공주 지역 동학군의 완전 제거를 달성한 관군과 일본군은 장거리 추격 작전을 시작했다. 전봉준은 병력을 재편성해서 논산 주변에서 방어를 시도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그는 쫓기며 계속해서 남하했다. 그는 추격하는 일본군과 관군과 김제 원평과 태인에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했지만 여기서도 크게 패했었고 그의 부대는 와해되었다.

 

심복 세 명을 데리고 피신하던 전봉준은 12월 28일, 순창 피노리 주막에서 그 곳 주민이며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배신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구타당하고 잡혀 일본군에게 인계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1895년 4월 23일 교수형을 선고 받고, 얼마후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등과 같이 집단 교수형에 처해졌다.

 

글 김창원 / 전사연구가, 공격 마케팅 컨설팅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전쟁사]

우금치 전투의 분석

우금치 전투 [3] 기개만으로 꺾을 수 없었던 전력차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왜 그렇게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던 대패를 당했을까?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화력이 병력을 압도해버린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먼저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자.

 

개틀링 기관총. 우금치 전투 당시에는 회전포 포로 분류했다.


관군의 자동 화기


우금치 고개에서 동학군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관군이나 일본군이 장비했었던 단발 소총의 개인화기만으로는 절대 우금치 전투에서와 같은 대량 살상자를 발생시킬 수가 없다. 막대한 동학군의 피해의 원인을 풀어보기 위해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에 주목해야 한다.


동학군 주력과 싸웠던 이규태는 동학군 격멸의 중심이 ‘포’였음을 말하고 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 1대가 무너지면 제 2 대 제 3대가 대신하였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차례 반복하면서 농민군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여갔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는 눈을 흥건하게 적시다가 얼어붙었다…“


당시에 개틀링 기관총이 회전포 또는 회선포라는 이름으로서 포(砲)로 분류했었다. 위에서 말하는 대포는 개틀링 포가 틀림없다. 이규태의 글은 포가 쉬지 않고 불을 토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군의 진퇴를 개틀링 기관포 사격이 좌우하고 있슴도 알려주고 있다.


관군의 크룹 포는 숫자도 몇 문 되지 않았었고 유연화약을 사용하는 제약으로 발사 속도가 1분에 한 발 발사하는 속도로서 밀집대형의 동학군에게 개틀링기관총만큼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틀링 기관총은 여섯 개의 총신 다발이 축을 따라 회전하면서 총탄을 연발로 발사하는 기관총인데 요즈음의 기관총같이 방아쇠만 당기면 총탄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총신 후방의 핸들을 돌려야 하는 수동 기관총이다. 발사 속도는 현대 기관총의 삼분의 일인 200발이다. 유연화약으로 발사되었으나 탄속만 느릴 뿐 살상력이나 사거리는 현대의 기관총과 큰 차이가 없다.

 

동학농민군의 화승총(왼쪽)과 농민군을 진압한 일본 보병대대 주력 무기였던 스나이더 소총. 화승총은 최대 사정거리 400m로 스나이더 소총(1800m)의 4분의 1에도 못미쳤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동학군 작전의 실수


첫째, 실패한 공격 방식은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전술의 원칙이다.

동학군은 실패한 밀집대형의 정면 공격을 무리하게 되풀이 했다. 관군 측의 기록은 동학군이 4-50차례의 돌격을 해왔다고 한다. 부대가 넓은 횡대로 산개해서 공격하는 현대전에서 반나절 동안 4~50차례의 공격이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즉, 당시 장방형 밀집대형의 여러 개가 연달아서 돌격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군사용어로 인간 파도 같은 공격을 뜻하는 제파공격(悌波攻擊)이라고 하겠다. 적의 화력 앞에 기세가 꺾인 정면 공격의 반복이 작전의 최대 실수다.


둘째, 현대 보병 전술에서 자동화기를 가진 적군과 붙었을 때의 공격 형태는 산개해서 실시하는 약진과 포복이다.

엎드려야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동학군의 주력 무기인 화승총은 전장총(前裝銃)으로 총구에 화약과 총알을 장전해야 했기 때문에 서서 전투를 해야 했다.

 

포복 전투는 엎드려서 장전할 수 있는 후장총(後裝銃)이 출현한 후에야 등장했었다. 게다가 일단 밀집 대형의 행렬을 지어 앞으로 밀고 나가면 뒤에서 연속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몸을 빼내거나 총탄을 피하는 등의 개인 행동이 어렵다.

자동화기를 상대로 뻣뻣하게 서서 전진하는 밀집된 부대가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셋째, 동학군의 미신도 한 몫 했다.

전투에 나서는 동학군마다 등에 노랑색 바탕에 궁을(弓乙)이라는 붉은 글씨를 쓴 부적을 붙이고 돌격과 동시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을 큰 소리로 합창했다 한다.

전봉준은 이를 절대불사(不死)의 부적과 주문이라 믿도록 했다. 그리하여 동학군들은 사정없이 날아오는 실탄 앞에는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그 영험을 믿어마지 않았다.

 


옴두르만 전투를 그린 그림. 우금치 전투 4년 후인 1898년에 벌어졌다. 5만 2천명의 수단군이 돌격했으나 영국군 기관총의 위력에 순식간에 1만명 이상이 전사, 1만 3천명이 부상당하고 괴멸 당한 전투이다. 영국군 전사자는 47명에 불과했다.


작전 실패의 배경들


그러나, 전봉준이 잘못 판단하게 된, 그래서 결과적으로 참패하게 된 배경이 있었다. 이를 소개해보는 것도 우금치 전투의 연구와 분석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 하나다. 전봉준은 왜 이렇게 현대의 상식 밖의 대병력을 좁은 우금치 골짜기에 집중했을까? 그가 가진 전투력의 핵심은 관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이었다. 전봉준은 이 병력을 사용해서 우금치 방어선을 뚫어보겠다는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관군과 정면 대결로 승리한 장성 황룡강변 월평 전투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월평 전투에서 동학군을 엉성하게 기습한 관군은 약 700명(실제 병력은 300명 수준이고 400병은 노무자 수준의 지방민 지원부대)이었지만 동학군은 4,000명이 넘었었다.

 

관군의 공격은 너무 빨랐고 서툴렀다. 동학군은 재빨리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다. 관군은 크룹포와 개틀링 기관총까지 보유했었으나 열 배가 넘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반격한 동학군은 절대 우위에 있던 병력으로 관군을 격퇴하고 크룹포와 개틀링 기관총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지휘관은 성공한 전술은 자기화(自己化)해서 상용하는 경향이 있다. 전봉준이 여기에서 얻었던 승리의 경험을 통해,'대군으로 공격하면 우수한 장비의 적도 이길 수가 있다.'라는 전술 교리를 얻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황룡강 월평의 승리는 우금치 전투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둘이다. 급조 된 동학군의 지휘통솔의 문제가 그를 실패로 밀어 넣었다. 삼례에서 급조한 동학군 부대가 12월 초의 추운 날씨와 공주 주변 전투에서의 패전의 충격으로 도망병이 늘어나고 있는 내부 사정이 그에게 속전속결을 강요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셋이다. 우금치의 교묘한 지형이 동학군 작전의 실패로 몰아넣었다. 우금치만 넘으면 공주가 바로 아래에 있다. 동학군은 공주 문턱까지 갔던 것이다. 조금만 무리하면 공주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있다는 아주 감질나는 상황이었다.


전봉준이 실패한 정면 공격을 되풀이 하도록 유혹한 우금치의 지형적 요소가 또 있었다.

주력이 공격한 우금치 고개 아래 공격 개시선에서 고개 정상까지 1km가 넘는데, 이 정도 긴 거리에 부대를 장시간 기관총 사격에 노출시키고 공격한다면 부대의 공격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금치 계곡을 감싸고 있는 동쪽 능선에서 계곡을 향하여 수직으로 짧은 가지형 능선들이 두어 개 나와 있어 그 짧은 계곡 사면으로 부대를 대피시키면 화력으로부터 엄폐가 가능하다. 고개에서 불과 300m거리에도 그런 언덕이 있다. 불과 300m 거리니 이곳에 대피하고 있다가 밀집대형을 연속으로 내보내 기세를 올리며 전속력으로 달리면 우금치 고개의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단병접전식 욕심을 부릴만했다.

 

우금치 전투 주요 사건 관련 일자


기개로만은 꺾을 수 없었던 전력차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들을 대표해서 민중 봉기를 유도한 전봉준은 그의 혁명적 기개와 저항 정신은 크게 평가된다. 그러나 너무 근대 전술을 몰랐었고 피아 전력(戰力)의 격차를 몰랐으며 신형 무기의 준비가 안 되었으며 그의 동학군 부대는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의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이유로 어쩔 수없이 결전으로 돌입했지만 우금치의 관군-일본군 혼성군은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부대가 몰려들어 두들겨 봐도 분쇄될 상대가 아니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전적지 기념물라고는 위령탑 밖에 없는 우금치 전투장을 찾아 갈 때마다 항상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전봉준과 수많은 희생자들의 불쌍한 유혼이 언저리에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인 조병갑은 일단 섬으로 유배형에 처해졌었으나 불과 1년만에 복권, 고등재판관으로 승진했고 그의 후손들도 잘 살고 있다. 반면, 전봉준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 났다.


현재는 몇 개의 동학 유적지와 오로지 애절한 가락의 파랑새 민요만이 전봉준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글 김창원 / 전사연구가, 공격 마케팅 컨설팅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 대한민국 구석 구석 다 돌아보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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