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도세자묘지문(언해 전문)
기사입력 : 1999-12-03 00:00:00
조선 영조가 뒤주 속에 갇혀있다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들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 250년만에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지난 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거주 이종만씨가 기증해 보관해오고 있던 영조의 「어제 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을 1일 공개했다.
◀ 영조 [英祖]조선후기 제21대(재위:1724~1776) 왕.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어제란 임금,즉 영조가 썼다는 뜻이며 묘지문이란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됐다.
이 묘지문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쓰여있는 것으로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 7월로 기록돼 있다.
조선조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가 지금까지의 통설처럼 임금과 세자 사이의 권력갈등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임금을 만들기 위한 훈육책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왕과 세자`라는 조선시대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사건으로 생각되었다.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비극도 결국 집안일이다.
사도세자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주위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중 하나다. 사도세자 이야기는 조선의 `왕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 결말이 조금 더 비극적일 뿐이다.
다음은 어제 사도세자묘지문 전문(총5장).
① 어제지문 유명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사도세자는 이름이 훤이고 자가 윤관으로 영조 즉위 을묘년(1735) 1월21일 영빈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오호라,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오호라,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②아!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오호라, 아까운 바는 그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하지 못한 소치일진데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오호라,13일의 일을 어찌 내가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③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백성을 속이는 것일지니라.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때는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
오호라,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까지 이어질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오호라,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데 대한 교시로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
④7월23일 양중 중랑포 서쪽 벌판에 매장하노라.오호라, 다른 시혜 말고 빈에게는 호를 하사하여 사빈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그치노라.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오호라.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세자는 임술년(1742)에 학문에 들어가고 계해년(1743)에 관례를 올리고 갑자년(1744)에 가례를 올려 영의정 홍봉한의여식이자 영안위 주원의 오대손인 풍산홍씨를 맞아들였다.빈은 2남2녀를 두었는데,첫째가 외소세손이며 둘째도 곧 세손으로 참판 김시목의 여식이자 부원군의 5대손인청풍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⑤장녀 청연군주, 차녀 청선군주가 있으며 측실로 또한 3남1녀의 자제를 두었다.
승정 기원후 135년 임오(1762,영조 38년) 7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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