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가는 왕실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皇女 덕혜옹주
홍유릉 뒤편으로 호젓한 영원길을 걸어서 덕혜옹주님를 뵈러 갑니다
[2011 · 12 · 11 · 하늘 파란 일요일 · 한국의산천]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속림(영원)에 안장. (현재 '영원'과 더불어 비공개 문화재 구역으로 입장이 안되기에 담장 밖에서만 볼수 있다)
꿈길이 꽃길이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었다 덕혜의 입가에 생애 처음으로 평안한 미소가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皇女)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 영원길을 따라 덕혜옹주님을 뵈러 갑니다 ⓒ 2011 한국의산천
덕혜옹주 묘로 가기위해서는 홍유릉 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영원을 조금 지나서 바로 산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철망으로 울타리가 쳐있기에 능 가까이 갈수는 없습니다.
조국과 일본이 모두 외면했던 망국의 황녀,
“내 가장 큰 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핏줄로 태어난 것입니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1912년은 마침 고종이 회갑이 되는 해였다.
한국에는 회갑에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를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만 1살때의 사진을 보면 부리부리하고 귀여운 눈동자가 어딘지 어머니 양귀인을 연상 시키기도 하지만,
커가면서 부터는 아버지 고종의 얼굴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알 수있다.
※ 옹주(翁主) : 왕녀의 의미로 어머니가 측실(후궁)인 경우에 사용합니다 (어머니가 정비일때는 공주라고 합니다)
▲ 고종이 예순 가까운 나이에 얻은 자식이라 끔찍이도 귀애(貴愛)했다는 덕혜옹주 (히노데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2011 한국의산천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긴 슬픔이 가시지 않았던 2년 후 어느 봄날 덕수궁에서는 새 생명이 탄생하였다.
환갑을 맞은 고종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1912년 5월25일 고‘고종실록’은 ‘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으니 양씨에게 복녕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고 덕혜옹주(1912∼1989)의 출생을 알리고 있다.
50일 후인 7월13일 고종은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아기를 데려왔다.
‘고종실록’을 보면 아기에 대한 기록이 무척 잦아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만큼 고종의 옹주에 대한 사랑이 컸음을 보여준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특별히 유치원도 마련하였다.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은 황제의 편전이었으나 고종은 이곳을 ‘덕수궁의 꽃’ 옹주의 유치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 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황제의 위상마저 흔들렸던 시절, 옹주의 평안한 미래는 보장할 수 없었다.
특히 고종은 아들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 일본 황족인 마사코(이방자)와 혼인한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고종은 신임하던 시종 김황진에게 덕혜의 배필을 은밀히 부탁했다.
김황진은 자신의 조카 김장한을 천거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본 세력에 의해 김황진은 궁궐에서 쫓겨났고 결혼은 무산되었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고종의 죽음은 여덟 살 어린 옹주에게 큰 슬픔으로 자리를 잡았다.
1921년 옹주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충무로의 일출소학교에 다니며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고종 사망 이후 조선의 상징이 된 옹주에 대해 일제는 철저히 일본의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도쿄 유학의 명이 떨어졌다.
아예 옹주를 조선인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일제의 의도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 옹주를 만난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 여사는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내가 본 옹주와는 영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한 눈초리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보고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고 큰 상처를 입은 어린 옹주의 모습을 증언하기도 했다.
▲ 호젓한 영원길을 걸어서 덕혜옹주님을 뵈러 갑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오래 전부터 덕혜옹주묘 답사 계획을 세웠으나 친구들과 라이딩 계획에 밀려서 미루어지다가 송년 라이딩을 마치고 이제야 찾아 봅니다.
오늘은 왕릉 답사이기에 자전거를 두고 걷기로 했습니다.
▲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 2011 한국의산천
고종은 말년까지의 자녀 수를 통산하면, 정궁과 후궁 합하여 일곱 명의 여인을 통해서 모두 9남 3녀를 낳았건만 대부분 어릴 때 죽었다.
'선원보감'에 수록된 '고종황제 행장(行狀)'에 따르면 12명의 자식 중에 자라서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과 덕혜옹주 4명 뿐이다.
말년까지의 자녀 수를 통산하면, 정궁과 후궁 합하여 일곱 명의 여인을 통해서 모두 9남3녀를 낳았건만 대부분 어릴 때 죽었다(주:고종의 자녀 수에 대해서도 자료에 따라 많은 혼동이 있다. 여기서는 『선원보감』에 수록된 「고종황제 행장(行狀)」에 따른다).
12명의 자식 중에 자라서 성인이 된 자녀는 불과 4명으로 순종과 의친왕과 영친왕과 덕혜옹주다.
영원 (英園 : 사적 제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의 묘.
" 연꽃은 썩은 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매화는 엄동설한 중에 꽃을 피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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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목소라를 낮춰 좀 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너는 어디에 있던지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
" 마음속에 품은 이가 진정 네 벗이라. 함께 있는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호랑지국(虎狼之國 :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 즉 포학한 강대국)속에 있다 하여도 결코 네 중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덕혜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어느날 일본의 황족인 내친왕(內親王)에게 인사를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덕혜옹주는 '나도 대한제국의 황녀인데 왜 내가 절을 해야 하느냐'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태어 난것은 1912년,
그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부왕의 비호아래 그녀는 행복한 유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겨우 만 열두살이 된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도쿄의 여자학습원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도쿄에서 고독한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내성적인 성격의 소녀는 한층 더 말이 없어지고, 열일곱 살 때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공족의 일본인화를 기도하고 있던 일본이 그녀를 대마번주의 후예인 소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시켰습니다.
이 결혼으로 첫 딸 마사에가 태어나지만, 덕혜옹주의 병이 다시 악화되면서 전쟁 후에는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1962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병은 회복되지 않은 채,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1989년 비극적인 생을 마쳤습니다.
◆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1912~89)가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 경성 히노데소학교 시절에 남긴 동시 4편이 발굴됐다. ‘벌’ ‘비’ ‘전단’ ‘쥐’ 등 일본어로 쓴 동시에서 덕혜옹주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노래했다.
일본 NHK 프로듀서 출신인 지한파 작가 다고 기치로는 월간 ‘문학사상’ 8월호에 기고한 ‘비극의 공주가 남긴 혼의 외침-알려지지 않은 천재 동시작가 덕혜옹주’란 글에서 4편의 일본어 동시를 소개했다. ‘벌’과 ‘비’는 근대 일본음악의 선구자인 미야기 미치오(1894~1956)가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한국에 한 달간 머물면서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의뢰를 받아 동요로 만든 작품이다.
‘노란 옷 입은/ 작은 벌은/ 엉덩이에 칼/ 군인 흉내내며/ 뽐내고 있네’(‘벌’)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느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비)
두 작품은 <미야기 미치오 작품전서>에 ‘작사자 창덕궁 덕혜공주’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다고 기치로는 “덕혜옹주가 9세인 1921년 히노데소학교 2학년에 입학했고, 동요가 작곡된 시기는 1923년이므로 2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동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동시 ‘전단’과 ‘쥐’ 역시 조선을 방문했던 작곡가 구로사와 다카토모(1895~1987)가 1924~27년 만든 동요를 모은 그림시집 <귀여운 동요> 9집에 나온다. (2011년 7월 22일 경향닷컴 기사)
▲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
가운데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덕혜옹주.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일본 거류민 학교라서 때로는 일본옷을 입업다고 합니다(1925년 촬영)
▲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배운 소실점. 소실점이 보이는 홍유릉 뒤편으로 이어지는 영원길 ⓒ 2011 한국의산천
홍유릉. 학창시절 이곳에 와보고 반했던 곳이다. 석물들이 무척 커서 놀랐던 홍유릉과 노란 은행잎이 하늘거리는 영원길이 참 좋다.
한적하게 천천히 거닐다보면 마음까지 편해지며 깊은 산속에 들어 온 느낌을 받는곳이다.
▲ 권비영 장편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다산책방)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역사공간) ⓒ 2011 한국의산천
이 두권의 책을 읽으며 덕혜옹주의 묘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에서야 이곳을 답사했다
◀ 고종이 예순 가까운 나이에 얻은 자식이라 끔찍이도 귀애(
貴愛)
했다는 덕혜옹주 ⓒ 2011 한국의산천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에 얻은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덕혜옹주는 부모와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서 덕수궁에 넘치는 기쁨과 활기를 불어 넣는 커다란 꽃송이가 되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월 25일 덕수궁 궁인 양씨 딸을 낳다. 양씨에게 당호를 내렸는데 복녕(福寧)이라 하였다.
1912년 덕수궁에서는 여자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그 소녀는 만 여섯 살 때 고종이 죽을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이 덕수궁에서 보냈다. 그 아이는 후에 덕혜옹주로 불리게 된다.
부왕 고종에게는 순종제를 비롯하여 의친왕, 영친왕의 세 아들이 있었고 막내따님으로 늦게야 덕혜공주를 얻었다.
고종은 손바닥에 쥔 보물처럼 덕혜옹주를 무척 사랑했다. 옹주의 나이 7살이 되자 덕수궁안 준명당에다 유치원을 특설해서 훌륭한 옹주가 되도록 훈육에 애썼다.
고종은 덕혜를 정말 손에 들어 온 보물처럼 귀여워하며 편히 쉬고 있을 때에는 무릎위에 앉혀 놓고 어전의 상궁들에게 " 이 갓난애 좀 보아라, 손을 만져 보아라" 라고 했다고 한다.
상궁들이 주군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어전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 황송하게 어찌 감히 아기씨의 손을 만져 보곘습니까? " 라고 대답하면, 고종은 괜찮다. 머리를 들어 웃고 있는 이 아이의 얼굴을 보아라"라고 했다 한다. 궁중에서 고종을 모셨던 상궁이 전하는 말이다.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
고종황제의 막내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족,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고종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십대 시절을 보낸 그녀는 일본인과의 강제결혼, 7년간의 감금생활, 일방적인 이혼통보 등을 겪으면서 점점 무너진다. 오직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터전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만이 그녀를 붙들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은 일본 패망 후에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 홍유릉의 뒤편 작은 문이 있는 쪽이며 영원과 덕혜옹주의 묘로 가는 입구이다 ⓒ 2011 한국의산천
일본에 온 덕혜옹주는 천황가와 귀족 집안 자제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고종의 독살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인지 늘 보온병을 들고다닐 정도로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29년에는 생모인 귀인 양씨가 사망하였다. 잠시 귀국한 옹주는 검은 양장 차림으로 슬픔에 겨운 몸으로 창덕궁에 들어가 이전 어머니께서 계셨던 관물헌에서 잠깐 기거한 후 서둘러 일본 귀국길에 올랐다.
1931년 5월 덕혜옹주는 도쿄대 출신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옹주의 결혼 소식은 조선 백성들을 더욱 비탄에 빠지게 했다. ‘덕혜옹주는 양장을 입으시고 자동차로 소 백작 집에 이르러 11시25분부터 순일본식으로 혼례를 치르었다’는 짧은 보도가 있었지만, 일부 신문에서는 결혼식 사진에서 남편의 얼굴을 지웠고 이후 조선의 신문 기사에서 덕혜옹주는 사라졌다.
옹주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47년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남편이 백작의 지위를 잃었고, 옹주는 이 무렵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1955년 6월에는 남편과 이혼을 하면서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한국인에게 거의 잊혀졌다.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주를 찾는 데 소극적이었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김장한의 형)이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옹주를 찾아 귀국을 요청했지만 이승만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김을한은 박정희 의장을 찾아갔고 마침내 옹주의 귀국이 허락되었다.
1962년 덕혜옹주는 38년 만에 그렇게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불행하게도 조선 공주의 자격이 아니었다. 의식까지 거의 불명인 안타까운 상태였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7년간의 병원 생활 끝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72년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를 찾아왔지만 옹주는 만남을 거부했다.
1983년에 쓴 옹주의 낙서 한 장은 대한제국 마지막 공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하게 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 여사) 오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1989년 4월 78세로 사망한 옹주는 경기 남양주시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다.
▲ 영원입구 길가에 서있는 문인석 ⓒ 2011 한국의산천
질곡의 세월을 살다간 덕혜옹주 유택으로 가는 길
하늘은 맑고 초겨울 공기마저 약간은 포근한 느낌으로 코끝을 간지렸습니다. 그분의 유택은 현재 '영원'과 더불어 비공개 문화재 공간이기에 멀리에서 바라보고 왔습니다
◀ 학습원 시절의 덕혜옹주 [德惠翁主, 1912.5.25~1989.4.21] ⓒ 2011 한국의산천
그녀는 이국땅에서 철저히 방치되었다가 37년 만에 쓸쓸히 조국으로 돌아온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총기가 돌 때마다 이런 글을 남겼다는 그녀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체념했다. 하지만 한평생 잊지 않았던 것은 나라 잃은 자의 설움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다.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즉조당(卽祚堂)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 영친왕 묘소(영원)로 가는 아름다운 영원길 ⓒ 2011 한국의산천
▲ 고교시절 이곳 홍유릉에 소풍왔었다. 그리고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긴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찾았다 ⓒ 2011 한국의산천
▲ 1931년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소 타케유끼 · 덕혜옹주 부부 ⓒ 2011 한국의산천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설은 외국으로 끌려간 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 결혼을 하게 되자 모든것이 구슬프고 귀찮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어머니의 죽음과 또한 여러가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 환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1962년 1월26일-
35살, 그녀가 사는 곳은... 정신병원
덕혜옹주는 1946년 이래 15년 남짓을 마츠자와 병원에서 지냈다. 이혼 후 부터치자면 6년 7개월이 지났다.
일본이 패전한 후 덕혜옹주는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혀있었다. 그녀가 왜 정신병원에 있는 것일까?
덕혜옹주는 사실 결혼하기 직전 조발성 치매증(정신분열증)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아버지 고종이 독살당한 후 일본으로의 강제유학, 어머니 양귀인, 오라비 순종의 사망. 그리고 정략결혼까지. 덕혜에게는 일본의 강압과 가혹한 운명에 저항할 그 어떤 수단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고통을 삭히는 것 밖에는.
1931년 5월 대마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적인 결혼을 한 후 2년 후 딸 마사에( 한국이름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유일한 혈육인 딸 (마사에 · 한국 이름 정혜) 역시 일본에서 한국인 어머니를 둔 이유로 마음적인 수모를 겪으며 그 역시 어머니 덕혜옹주만큼이나 서러운 삶을 살다가 1956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사에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의 투성이로 바다 투신설과 종가에 의한 살해설이 바로 그것이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7년간의 병원 생활 끝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72년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를 찾아왔지만 옹주는 만남을 거부했다.
영원 (英園 : 사적 제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의 묘.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 이은(李垠,1897~1970)과 부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의 묘로 남양주시 금곡동 141번지에 있다. 홍릉·유릉과 더불어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 영원의 정자각 ⓒ 2011 한국의산천
덕혜옹주 연보(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 만76세)
구왕가의 일족으로 고종이 60세가 되던 해에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이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능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있다. 그의 단촐한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
1912년 5월 25일 이덕혜 덕수궁에서 태어남
1919년 1월 21일 덕혜 부친인 고종사망
1921년 4월 히노데소학교 제 2학년 입학
1931년 5월 이덕혜와 소 타케유끼 결혼식 거행
1932년 8월 14일 외동딸 소 마사에 탄생
1955년 6월 소 타케유끼와 이혼
1956년 8월 26일 소 마사에 행방불명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 퇴진
1961년 5월16일 박정희, 군사혁명으로 국가 최고회의 의장이 됨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 하네다에서 특별기편으로 고국에 돌아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1985년 4월 22일 소 타케유끼 사망 (만77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 낙선재에서 사망 (만76세)
끝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덕혜옹주. 그리고 정신이 맑은 날 썼다는 낙서 한 장...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참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역사공간)
권비영 장편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다산책방)
◀ 1962년 1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창덕궁 낙선재)
'조국에 있는 순간에도 조국이 그리웠다'
열네 살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유학한 뒤 대마도 번주(藩主)의 후예와 정략 결혼한 고종 딸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14세 때 인질로 일본에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됐다.
인질로 끌려갔다가 51세가 돼서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덕혜옹주는 조국의 국적도 잃어버린채로 남의 나라에서 유령처럼 떠돌다가 37년이 지나서야 쓸쓸히 조국 땅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약해진 육신과 정신으로 기억이 온전치 못했던 그녀가, 정신이 들 때마다 표현한 것은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나들이를 하거나, 상궁들과 화투를 치기도 했습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얼마 전에 훙서(薨逝)하신 회은 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전하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가리킵니다)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준비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낮에 다녀갔던 전의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유모의 눈시울이 자꾸 붉어졌다
덕혜는 옛날을 떠올렸다. 어머니, 아바마마, 순종황제, 영친왕과 영비의 얼굴이 차례로 스쳤다.
불쑥 덕혜가 물었다.
" 유모 내 아버지(고종황제)는 어찌 되셨나요?"
" 돌아 가셨습니다"
유모가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덕혜가 슬픈 얼굴로 또 다시 물었다.
" 내 어머니는 어찌 되셨나요?""
" 돌아 가셨나이다. 그리운 이들은 모두 사라졌나이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모든일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모든 것은 사라짐으로써 덧없나니,"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 !
덕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숨이 천천히 잦아 들었다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꿈길이 꽃길이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었다 덕혜의 입가에 생애 처음으로 평안한 미소가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皇女)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中에서]
◀ 이구 (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가족 : 아버지 영친왕, 어머니 이방자
학력 :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건축과 학사
1963년 11월 12일 부모와 함께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렀다.
1965년부터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하였고
1966년부터 1978년까지 건축설계회사 트랜스아시아 부사장을 지냈다.
1996년 11월 25일 영구 귀국하여 종묘대제를 주관하는 등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명예총재로 활동하였다.
2005년 7월 16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사망하였다.
2005년 7월 24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이 열렸으며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 뒤편 영친왕 묘역에 묻혔다.
義親王과 왕비묘 홍유릉에 합장 1996-11-26 (서울=聯合)
고종의 5男 義親王(李堈)의 묘(고양시 서삼릉)와 의친왕비인 사동궁 金씨묘(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가 오는 29일 홍유릉의 덕혜옹주묘 남쪽 1백50m 지점에 합장된다.
이번 합장은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씨(66세)를 비롯한 자손들이 가족장을 추진하면서 이뤄지게 됐다고 문화재관리국은 밝혔다.
의친왕(1877-1955)은 고종 28년(1891)에 의화군에 봉해졌다가 1900년 8월 의친왕으로 승격됐다. 합일합방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하려다 일본인에 의해 발각돼 좌절됐으며 이후 조선총독부의 도일(渡日) 요구에 응하지 않은채 살아가다 타계, 서삼릉의 어머니 귀인장씨 묘소 옆에 안장됐다. 1996-11-26 (서울=聯合통신)
▲ 덕혜옹주의 친필 엽서 ⓒ 2011 한국의산천
정말 대단한 필체입니다. 그렇기에 왕자나 세손, 공주나 옹주, 역시 남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하나 봅니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 사망
일제에 모든 것을 잃은 고종 외동딸
덕혜옹주는 조선 제26대 고종의 외동딸로 1912년 태어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고종은 딸이 4명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외동딸이었다. 환갑의 나이에 궁녀 복녕당 양귀인이 낳은,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를 위해 고종은 즉조당에 유치원까지 만들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덕혜를 일본총독부에 빼앗겨 생이별을 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황실 시종과의 혼인을 추진했지만 1919년 갑자기 승하했다. 어린 덕혜를 지켜줄 울타리는 사라졌다. 10살쯤에 복녕당 아기씨는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얻은 황족이 됐다. 이름을 얻자 자유는 사라졌다.
일본총독부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돼야 한다고 요구했고 어린 덕혜옹주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모와 떨어져 일본의 수도 도쿄로 보내졌다. 그가 탄 기차가 선 역에는 왕세자 이은의 부인이자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내성적인 아이는 말이 없었다.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지만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17살이던 1929년에는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숨졌다.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묘소 곁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듬해 봄, 소녀는 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다. 19살이던 1931년에는 일본 조정의 명령으로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했다. 다음 해에 딸 정혜가 태어났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정신분열증은 쉽사리 낫지 않고 덕혜옹주의 삶에 무거운 족쇄가 됐다.
결국 1946년부터 15년 동안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0년쯤 뒤인 43살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당했다. 딸 정혜도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23살의 나이에 일본 북알프스의 남쪽 산악지대에서 실종됐다. 일각에서는 현해탄에서 투신해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일본에서 모든 것을 잃은 덕혜옹주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봐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방자 여사로부터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의 귀국을 추진했다.
1962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89년 4월21일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 오늘 영원의 덕혜옹주 묘를 찾아 그길을 따라 걸으며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그간 집에서 내가 더 편하려고 하진 않았는지? 이제부터는 내가 힘들어도 가족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진정으로 幸福한 삶이란? ... 현재 조금 모자란듯 지금처럼 사는것!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과 형제 그리고 친구에게 더 잘하고 살아야겠다
▲ 출입금지 문화재 구역으로 철망으로 울타리가 쳐있기에 능 가까이 갈수는 없습니다.ⓒ 2011 한국의산천
아버지 홍릉 뒤켠에 묻힌 덕혜옹주
그래도 아버지(고종황제)와 오빠(영친왕)가 곁에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학창시절 이곳에 와보고 반했던 곳이다. 석물들이 무척 커서 놀랐던 홍유릉과 노란 은행잎이 하늘거리는 영원길이 참 좋다.
한적하게 천천히 거닐다보면 마음까지 편해지며 깊은 산속에 들어 온 느낌을 받는곳이다.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홍유릉 뒷편에 모셔집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의 곁으로...
▲ 묘비에는 ' 대한 덕혜옹주지묘 (大韓 德惠翁主之墓)" 라고 쓰여있다 ⓒ 2011 한국의산천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너무도 단조로운 덕혜옹주지묘 ⓒ 2011 한국의산천
겨울로 접어드는 스산한 날씨탓인가? 주변의 울창한 숲에 고즈넉하게 둘러싸인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안식처는 너무도 단조로와 오히려 쓸쓸하게 느껴진다.
"모든일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모든 것은 사라짐으로써 덧없나니,"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 !
덕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숨이 천천히 잦아 들었다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꿈길이 꽃길이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었다 덕혜의 입가에 생애 처음으로 평안한 미소가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皇女)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에서]
마지막 황녀이신 덕혜옹주님은 영면하셨다. 하지만 죽어도 잊으실까 " 망국의 한"을...
▲ 나는 다시 영원길을 돌아 나갑니다. 많은 이들이 이길을 걸으며 산책과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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