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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이장군 묘,홍난파 생가,봉림사

by 한국의산천 2005. 7. 21.

남이장군 묘역 가는 길  [2005.7월21일(목) 한국의산천]

 

 

 

위 치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담당:화성시청 문화관광과 031-229-2716)

조선 세조 때의 무관인 남이장군 묘는 비봉면 사무소가 있는 양로리에서 북서쪽 3km 쯤의 야산에 있으며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는 상석, 왼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에는 석인과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 도로가의 이정표를 따라가다보면 좁은 농로길을 따라 올라간다. 

 

▲ 묘역입구는 마을 끝에 있으며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승용차만 겨우 지나 다닐수있는 좁은 농로길 이곳에서 왼쪽으로 100m정도 오솔길로 올라가면 잘 단장된 묘역이 나온다. 

 

 ▲ 짧지만 숲 터널을 이룬 오솔길이다. 

 

 ▲ 남이장군 묘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군의 섬은 이름하여 '남이섬'이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다. 그러나 남이섬의 묘는 전해내려오는 허묘라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는 남이장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부인과 나란히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1971년에 묘역 정화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는데, 석인상은 장군석이 아니라 문인석으로 마련된점이 특이하다.

 

사실 진짜 묘가 어디에 있던 나에게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단지 다시 한번 남이 장군의 그 기상과 나라사랑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에...  

 

 

 세월이 지나면서 간악한 간신배로 자리매김한 유자광이 비판되면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오로지 유자광 한사람의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고, 드디어 1818년(순조18)에는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직 되었다.

또 서원이 난립하던 때에는 창녕의 구봉서원과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어 충무라는 시호도 받게 된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 젊은 나이에 죽어 훗날 아무리 높은 관작이 주어지고 수십개의 사당에 배향된다 한들 본인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다 부질없는 일 아닐까 싶은 서글픈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곳이다. 
 

 

 비운의 장군 남이 南怡 : 1441 ~ 1468 시호는 충무.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손자로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꺽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北征 (북정)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조 가운데 '나라를 평정 못하면'이라는 말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를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벼슬과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홍난파 생가 가는 길  

 

 ▲ 경로당에서 물어보고 목적지에 다가서 만난 이정표 

우리나라의 유적지를 찾기란 소풍가서 보물찾기보다 더 힘들때가 있다.  정확한 지도도 드물뿐더러(개략도) 이정표 또한 제대로 설치되어있지않기에...  

▲ 집뒤편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 홍영후 (홍난파)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영후(永厚)이다. 1898년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태어났다. 1912년 YMCA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를 마친 뒤 동 전습소 교사가 되었다. 1916년 최초의 곡으로 추정되는 행진곡풍의 야구 응원가인 창가(唱歌) "야구전"을 작곡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귀국, 1920년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 무렵 잡지 "음악계"를 발간했으며, 소설 "처녀혼" "향일초(向日草)" "폭풍우 지난 뒤" 등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로 있다가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京城保育)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 사회교화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였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작품에는 "봉선화" 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 도쿄 유학 직전에 남긴 "통속창가집" "행진곡집" 등 17권의 편저작물이 있다. 이밖에 저서에는 "음악만필(音樂漫筆)"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 생가는 단촐한 "ㄱ"자형 집이고 유품은 전시된것이 없어서 아쉬웠다.  

 

 

 

 

 

 

 

 

▲ 대나무 사립문.

 

무봉산 봉림사  

 

 

▲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북양리 무봉산(舞鳳山)에 있는 사찰.
 
종파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창건시기는 신라때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재위 647∼654) 고구려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해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새가 절 주위 숲에 날아와 춤을 추었으므로 봉림사라 하고, 산 이름도 무봉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1621년(광해군 13)에 법당과 종각·요사를 중수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도 중수한 바 있다.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腹藏)에서 사리가 발굴되었고, 1979년 이 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우면서 봉향각과 종각도 다시 지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봉향각·망양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한다.

 

1978년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금색을 입힐 때 복장에서 불상의 유래를 전하는 기록과 각종 불경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불상은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배 부분에서 의상을 U자형으로 처리하고 옷의 주름을 3줄로 표현한 점 등에서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과 일치한다. 눈을 수정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1984년 4월 10일 보물 제980호로 지정되었다.

 

복장에서 나온 "감지은자화엄경(紺紙銀字華嚴經)" 등 10여 종의 유물은 ‘좌상복장전적’이라는 명칭으로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묘법연화경" 5종 13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용주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편 후불탱화와 지장탱화 및 신중탱화는 1884년(고종 21)에 만든 것이고, 칠성탱화는 1888년(고종 25)에 만든 것이다.   

 

 경기 화성의 봉림사(鳳林寺)가 소장한 목조 아미타불좌상(阿彌陀佛坐像). 높이 91㎝ 등신불인 이 목조불은 1978년 불상에 금칠 하는 개금(改金) 과정에서 확인한 복장(腹藏) 유물을 통해 제작 시기가 고려시대 이전임이 확인됐다.

개금에 관한 내력을 기록한 개금기(改金記)라는 글이 복장유물에 들어 있었는데 이에 의하면 개금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이뤄졌다.

개금이 이 때 이뤄졌으므로, 이 아미타불은 최소한 그 이전에 만들어졌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언제쯤 제작되었을까?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이 진실로 통일신라말기인 883년 제작품이라면 이 아미타불 좌상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불교미술사학자인 강순형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실장은 말한다.

 

강 실장은 "직접 보고 조사를 하기 전에는 해인사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다만, 해인사 불상이 정말로 883년 제작품이라면 봉림사 아미타불상도 제작 시기를 같은 시대로 보아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불상 좌대쪽 옷주름 표현이라든가 왼쪽 무릎에 얹은 오른발 표현이 빼다 박은 듯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옷주름은 수평으로 가지런히 나아가다가 발목 부근에서 급격하게 위쪽으로 오므려지고 있는데 불상 비전문가가 보아도 두 불상은 그 표현방식이 똑같다.

결가부좌한 오른발 또한 하늘로 향한 발바닥은 지면과 정확히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두 불상은 하나가 비로자나불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타불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근본적인 차이점 외에 해인사 불상이 오른쪽 어깨는 맨살을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만 걸친 이른바 우견편단인 데 반해 봉림사 불상은 두 어깨에 모두 가사를 걸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상에 대해 문화재청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하면 "얼굴은 단아(端雅)하고 엄숙하며 체구 역시 단정하면서 건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U형(形)으로 처리된 가슴에 젖가슴을 Ω형으로 표현하고, 통견(通肩)의 불의(佛衣)에는 띠 매듭이 사라지고 3줄의 옷주름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고려(高麗) 후기(後期)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돼 있다.

 

 ▲ 주차장에서 올려보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규모는 작은 아담한 절이다.  

 .  

▲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 980호인 목아미타불 좌상이 있다.  

 

▲ 봉림사 숲에서    

▲ 남이 장군 묘 입구 들판에는 따가운 여름볕이 종횡무진 달리고 있다. 

 

▲ 한가로움을 즐기는 낚시인들...  

 

 

 ▲ 남이장군 묘역 가는 길

 

  ▲ 봉림사,홍난파 선생 생가 가는 길.

 

휴가철입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 만들어 가십시요. 

경기화성 남이장군묘 >>> https://koreasan.tistory.com/14209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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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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