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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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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미완의 꿈이 어린 수원 화성

by 한국의산천 2024. 1. 6.

정조의 못 다 이룬 꿈이 어려있는 未完의 수원 화성 [ 2014 · 4 · 19 · 봄바람 세게부는 토요일]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

 

수원 화성(華城)의 유래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대왕이 '화규삼축(華封三祝)' 고사를 인용해 "선왕의 능침인 '화산(化山)'의 '化(화)'자와 '華(화)'자는 뜻과 음이 통하여 화성으로 한다"고 하며 "효를 통해 덕을 펼치는 도시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 정조.

아버지에 대한 효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왕위에 올라 노론과 소론의 나라가 아닌 진정한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라고 선정을 베풀고자 고뇌하며 건설했던 정조의 못 다 이룬 꿈이 어린 수원 화성

 

  성벽을 따라 걸으며 국가의 개혁과 인간적 고뇌사이에서 갈등한 비운의 군주 정조대왕을 다시금 생각한다.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였지만 결국 하고자 했던 개혁,치국(治國)에는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정조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신 스스로가 무명옷을 즐겨입고 헤진 옷을 기워 입으며 궁녀의 수를 줄이고 거듭되는 역모속에 일궈낸 탕평, 초계문신, 장용영, 화성건설도 서학과 북학의 유입이 가져온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기득권 세력의 방해로 무력해질뿐이었다. 결국 이들은 조선 말기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으며 끝내 나라가 유리되는 현실을 빚었다.

   

   개항기 국력이 기울어졌다. 국력의 소진은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이 갈등을 빚어 내부의 분열이 가중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빛나는 개혁정치는 퇴색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간의 몸소 행하신 노력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 정조께서는 화성을 농업혁명과 상업이 공존하며 함께 발전하고 꿈과 노동과 휴식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신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 2014 한국의산천 

 

정조께서 수원 화성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염두에 둔 정치적 결정이었다.

 

  영남 유생들이 '무신창의록'을 정조에게 올린 다음 해인 정조 13년(1789) 7월. 정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장헌세자(한 여름날 뒤주속에 갇혀 비운에 떠난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 하기로 한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이는 정조 자신이 할아버지인 영조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 임금임을 분병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조선이 노론의 국가가 아니며 뱃성들의 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픈 심정이었을것이다. 조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개국 초 태조가 수도 서울을 개경에서 현재의 한양으로 옮긴 까닭은 개경이 신흥 사대부의 정적인 권문세족들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듯이.  

 

  정조는 노론의 서울이 아닌 백성의 서울, 사도세자의 서울, 국왕의 서울을 만들려고 노력하였기에 규장각 설치와 장용영 강화와 새로운 신도시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지로 손 꼽은 곳이 수원면 용복면에 있는 '지극히 길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 화산(花山) 이었다.

 

  정조가 수원 화성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사도세자 묘소인 현륭원의 배후도시란 사실 자체가 정치적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노론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화성에 대해 자신들이 장악한 한양에 맞서는 신체제의 중심도시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정조의 친위부대인 막강한 장용외영이 이미 화성에 버티고 있었다.

 

  정조는 화성을 정치적 논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를 갖는 신도시로 설계했다. 정조는 먼저 농업혁명을 추동하는 전진기지로 설계했다. 정조는 화성을 농업 선도도시뿐만 아니라 상업 선도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도시의 성패는 인구 집중에 달려 있는데 이를 잘 아는 정조는 재위 14년(1790) 채제공에게 화성 인구 증가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다.

 

  채제공은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廛房: 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라며 상업도시를 만드는 자체가 인구 증가책이라고 보고했다. 정조와 채제공은 농업의 잉여생산물이 상업을 통해 소비되어야 사회 전체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대부분의 성읍은 북쪽 관청을 중심으로 정(丁)자형 길을 조성하는 식으로 도로를 만들었으나 화성은 인위적으로 '십자로(十字路)'를 조성했다. 도로 양편에 상가를 조성해 상업도시로 만들려는 뜻이었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따르면 이때 1만5000냥을 수원 상인들에게 대여해 미곡전(米穀廛: 곡식상),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 옷감상), 유철전(鍮鐵廛: 놋과 철), 관곽전(棺槨廛: 관과 곽 등 장의상), 지혜전(紙鞋廛: 종이·신발상) 등의 시전을 개설했는데, 종로의 육의전처럼 수많은 사람이 흥성거리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화성은 꿈과 노동과 휴식이 함께하는 이상적인 계획도시였다. 정조는 사회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를 부인하는 관념적 세계관과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정조는 화성을 이런 변화를 흡수하고 선도하는 도시로 건설했다. 이렇게 화성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미래가 되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중에서

▲ 팔달산 아래 자리한 화성행궁 ⓒ 2014 한국의산천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 축성

 

  수원 화성은 정조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 : 지금의 융·건릉)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시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도호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10일 준공되었다.

 

   정조는 곧 화성 축성에 들어갔다. 남인의 영수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참모였던 번암 채제공이 성역의 총 지휘를 맡고,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했다.

성안에 행궁을 설치하는 등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부르는 신도시 건설이 무르익어갔다.

 

  이에 정조는 일찍이 유성룡이 제시했던 설과 유형원· 강항· 조중봉 그리고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이 주창한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조선, 중국, 일본의 축성법중에서 장점을 택하였으며 거중기, 녹로와 유형거 및 각종 수레등 각종 과학기기를 사용함으로서 공사기간이 이전에 비해 5분의1이 단축되었다. 실학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대역사(役事)였다. 아울러 화성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화성성역의괘"라는 공사보고서를 통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  조선의 성은 임진왜란(1592)을 맞아 무참히 허물어져버렸다. 이에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냈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전쟁이 끝나자 "징비록"을 작성하여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져야 함"을 거듭 역설했다. 이 말은 훗날 화성을 쌓는데 크게 반영되었다.

▲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 수원화성과 행궁 답사 : 총거리 10km ( 성곽 약 6km 수원역 ~ 팔달산 ~ 시내도보이동 약 4km) ⓒ 2014 한국의산천

 새는 날아야 하고 동물은 달려야 하고 사람은 걸어야 한다.

 

바람이 분다. 약간 세찬 봄바람이다.

오늘 행복한 걷기 겸 답사코스는 수원에 자리한 팔달산으로 정하고 전철을 타고 떠났습니다.

수원역에서 내려 병무청 앞을 지나서 팔달산에 오른 후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 남수문을 지나서 화성행궁에 닿았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수원역에서 출발하여 팔달산에 올라 화성을 한바퀴 돌고 화성행궁을 답사 후 다시 수원역으로 왔습니다. 수원역에서 팔달산까지는 약 2.5km. 성벽 길이는 6km. 빠르게 걸으면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천천히 성 안팎을 돌아보고 기록하고 촬영하며 걷는다면 반나절은 잡아야 합니다.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 ⓒ 2014 한국의산천

화성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왕권을 쇄신하고 강화할 의도로 축조한 성이다 

 

정조(正祖,이산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 셰계문화유산 등록 협약서 ⓒ 2014 한국의산천

   수원 화성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 앞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시미돈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비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화성의 규모는 둘레가 5.52km 성벽 높이는 약 5m. 화성 성역은 정조의 사도세자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조를 정점으로 관료, 학자, 기술자, 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며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거중기, 녹로와 유형거 및 각종 수레등 각종 과학기기를 사용한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화성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화성성역의괘라는 공사보고서를 통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 화성장대와 노대 ⓒ 2014 한국의산천

서장대와 노대
팔달산 정상에 자리한 서장대(화성장대)는 성안에서 가장 높고 조망이 넓은 지휘소이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2층 누각의 독특한 외양으로 공격 지휘소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예술적 건축물로 보이는 곳이다. 뒤에는 노대, 옆에는 군무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누각만 남아 있다.

▲ 서장대(화성장대)와 노대 ⓒ 2014 한국의산천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서장대와 노대.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것으로서, 화성의 노대는 서노대와 동북노대의 2기가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8각형 평면의 기와 벽돌로 쌓았다.

▲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 수원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 2014 한국의산천

 

 

▲ 아름답게 지어진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2014 한국의산천

  화성에는 4대문이 있다. 북쪽에 장안문(長安門),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동쪽에 창룡문(蒼龍門), 서쪽에 화서문(華西門)이 있다.

▲ 6·25 당시의 화서문 일대 (출처 : 경기신문) ⓒ 2014 한국의산천

▲ 왼쪽의 서북공심돈과 오른쪽의 화서문 ⓒ 2014 한국의산천

▲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의 야경  ⓒ 2013 한국의산천 

 

▲ 화서문과 장안문 중간쯤 자리한 장안공원에는 지금 봄으로 가득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북서포루 ⓒ 2014 한국의산천

▲ 학생들이 소풍을 와서 잔디밭에서 식사를 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장안공원에 세워진 화성기적비(화성에 축성에 대한 내용을 알 수있다)  ⓒ 한국의산천

 

화성기적비
  화성성역이 끝난 후 1797년(정조 21)에는 왕명에 따라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화성성역이 완료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중신 김종수가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왕의 재가가 난 후에도 담당 관리들이 계속 바뀌는 터에 비석으로 세워지지는 못하고 의궤에만 남아있었다. 현재 장안문 서편의 장안공원에는 화성기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1991년 12월에 수원시장 명의로 건립한 것이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상(上)의 13년 기유년(1789)에 우리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 읍치(邑治)를 유천(柳川)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 경술년(1790)에 원자(元子)가 탄생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계축년(1793)에 상께서 수원에 거동하시어 수원부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킬 것을 명령하여 체모(體貌)를 높였고 행궁(行宮)을 두어 우러러 의지할 뜻을 나타내었다. 또 수원부에 성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으니, 그것은 원침(園寢)은 강(江)의 남쪽에 있고, 영부(營府)는 원(園)의 북쪽에 있어서 그것을 막아 지키는 방법으로 이 사업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규모(規模)와 제작(制作)은 모두 상의 뜻에서 나왔고, 계획(計劃)과 기율(紀律)도 모두 상의 결단을 따랐으니, 유사(有司)는 명령을 받들어 가르침을 따른데 불과할 뿐이었다.

 

  상의 교서(敎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사업은 수원부가 기호(畿湖)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000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어주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가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일은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성을 쌓는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공사를 감독하는데 중요한 것은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옛 사람의 인중기(引重機)와 거중기(起重機)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재물 모으는 방법은 그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故相)의 논한 것을 취하라.”

  위대하도다! 왕의 말이여.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다.

 

  갑인년(1794)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병진년(1796) 가을에 이르러서 공사를 끝마쳤으니, 그 기간이 모두 34개월이었지만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지 공사에 소용된 기간은 겨우 28개월밖에 안 되었다. 아아, 3년 동안 공사하는 사이에 두루 수많은 화살을 막아낼 성곽을 쌓는데 성공하였으니 신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 같으며, 이에 우리 성상(聖上)의 성의 둘레는 무릇 4600 보(步)이니, 도합 12리요,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무르녹은 봄의 버들잎 형상 같으니, 그것은 유천(柳川)이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한 것은 원묘(園墓)가 화산(花山)에 있으므로 화(花)자와 화(華)자가 서로 통하는 데서 취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화봉(華封)사람의 축성(祝聖)한 듯도 포함한 것이니, 모두 성교(聖敎)를 받들어서 시행한 것이다.

 

  성의 문은 4개가 있으니, 북쪽은 장안문(長安門)이요, 남쪽은 팔달문(八達門)이며, 동쪽은 창룡문(蒼龍門)이요, 서쪽은 화서문(華西門)인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바로 우리 성상이 해마다 선침에 배알(拜謁)하기 위해 지나는 길로 한양성과의 거리가 70리이다.

 

  산이 둥그스름하게 높이 솟아서 성의 진산(鎭山)이 된 것은 팔달산이다. 팔달산 정상에 장대(將臺)가 있는데, 그 위에 올라 보면 멀고 가까이에 산봉우리들이 둘러 있는 것이 마치 뭇 별들이 북극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산으로부터 내려와 창룡문을 지나서 다시 산에 올라 서쪽으로 가면 또 장대가 있고, 그 나머지로는 공심돈(空心墩)? 각건대(角巾臺)? 화양루(華陽樓)? 포루(鋪樓)? 각루(角樓)? 암문(暗門)? 용도(甬道)? 옹성(甕城)? 벽성(?城)? 노대(弩臺) 등이 있는데, 모두 그 지형의 형세를 따라 쌓은 것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옛날에 이른바 용두(龍頭)의 위에 있는데, 용연(龍淵)이 그 북쪽에 있다. 이것이 성부(城府))의 대략이다.

 

  재물이 80여 만금이나 들었고, 인부가 70여 만 명이나 들었는데, 이것은 모두 왕실의 사재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계획한 것이요, 돈으로 군정(軍丁)을 사서 성역에 나가게 하여 번거롭게 조발(調發)하지 않았다. 또 무거운 것을 드는 기계와 유형거(遊衡車)를 사용한 것은 운반하기에 편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며,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농사짓고 호(壕)를 파서 지키게 한 것은 먼 날을 염려한 꾀였다. 겨울에는 옷을 주고 여름에는 약을 나누어 준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함이요, 혹시 흉년을 만나면 부역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령한 것은 깊이 백성을 걱정하신 것이다.

 

  아아, 성왕(聖王)의 정치는 쓰기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릇 시행할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국고(國庫)를 바탕으로 하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부역에 임하면 국가의 경비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이래로 밝고 의로운 임금들이 이미 행하여 왔던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다.

 

  오직 우리 전하는 지혜가 하늘과 같아서 비용은 쌓아 두었던 재물로 경영하였고, 인부는 모두 임금을 주고서 부리어, 국용은 한 오라기 터럭만큼도 허비됨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3일의 부역도 면하였다. 때에 알맞게 절제하였고, 멀리서 가져오고 가까이에서 도모하여 열리지 않은 지리(地利)를 일으켰으며, 함락되지 않을 금탕(金湯)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진실로 삼대(三代)의 융성할 적에도 없었던 일이요, 오늘날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사업에 있어서 한 명령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뜻에 거스름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일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힘을 해침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은 진실로 과거에 우리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연로(輦路)의 곡식 싹도 밟지 않으신 뜻을 본받은 것이다.

 

  비록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미련하기가 마치 벌레와 같은 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무궁하신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뭇 장정들이 힘을 합하고 여러 공장(工匠)들이 앞서서 일하여 이 길고 넓은 우뚝한 성을 쌓아, 길이 억만년에 천지가 다하도록 선침(仙寢)을 호위하고 행궁(行宮)을 보호하며 서울의 날개가 되어 엄연히 기보(畿輔)의 큰 진(鎭)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한꺼번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아, 엄숙한 행궁(行宮)에 형상이 매우 가까이 보일 듯한지라, 어진(御眞)을 받들어 사모함을 나타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큰 성인의 무궁한 효도가 실로 국물만 보아도 모습이 보일 듯한 데서 나온 것이다. 상상컨대 백세(百世)의 뒤에도 전하의 효도에 감동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시종(始終) 알아주심을 받은 늙고 천한 신(臣)처럼 그에 대한 감동이 아아, 하늘처럼 끝없는 자임에랴!

 

  상의 21년 정사년(1797) 정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大匡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原任 奎章閣提學 致仕 奉朝賀) 신 김종수(金種秀)는 교서를 받들어 지음.

▲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문인 장안문. 성문앞에 반원형태의 옹성을 지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 2014 한국의산천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중 북쪽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울에 자리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 바깥에는 반원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마치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의 위용을 자랑하는 웅장한 장안문 ⓒ 2014 한국의산천

 

장안문
장안문은 수원성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하고, 수원의 관문이면서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수원시의 상징이다. 팔달문과 함께 수원성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홍예문의 높이는 3.8m, 너비 3.6m, 두께 7.9m이다. 2층으로 된 누각은 위풍이 당당하며 문루는 매우 크고 우람한 편이다.

  

  화성에는 팔달문,창룡문,장안문,화서문 등 4대문이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이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이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 규모면에서는 남대문보다 훨씬 큰 장안문 ⓒ 2014 한국의산천 

  수원 화성 성문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 장안문과 팔달문인데, 그 중에서도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 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화성의궤"를 들여보는 여행객 ⓒ 2014 한국의산천 

▲ 많은 답사객들이 성벽을 따라 돌고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유순한 작은 언덕위에 세워진 동북포루(왼쪽)과 동북각루(방화수류정) ⓒ 2014 한국의산천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華虹門) ⓒ 2014 한국의산천

화홍문(華虹門)

화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화홍문은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을 넘쳐나는 경치가 장관이라 화홍관창이라 하며 수원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 수원천 위에 지어진 북수문 화홍문의 야경 ⓒ 2014 한국의산천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칠간수문마다 오색의 전등을 설치하여 불빛이 아름답다.

청계천의 수문이 다섯 간(五間水門)이었던 반면, 수원천은 그보다 폭이 넓어 칠간수문(七間水門)을 만들었다. 화홍문은 그 칠간수문 위에 자리 잡은 누각이다. 수원천을 따라 인근에 사는 시민들이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을 즐긴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 동북각루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 2014 한국의산천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옆 작은 언덕에 세워진 정자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정조께서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방문한 뒤 찾아와 활을 쏘고 직접 시를 지어 읊었다고 전해진다. 워낙 풍광이 뛰어나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아래쪽의 작은 연못인 용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용연은 용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가운데에 버드나무가 심어진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 인근의 길은 성벽 안쪽도 바깥쪽도 호젓하고 한가롭다. 

 

아름다운 풍경이 내 마음이고

아름다운 꽃 또한 내 마음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내 마음과 같다.

 

▲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 ⓒ 2014 한국의산천 

  "지구는 둥글다. 그러므로 그 지구를 태연한 마음으로 한 바퀴 돌고나면 우리는 어느 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걷기예찬 중에서-

 

방화수류정 (동북각루)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를 맘껏 자랑하는 정교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정자이다.

동북각루라고도 불리는 이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이며 시인인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근오천 방화수류과전천"(雲淡風輕近午天 訪花隨柳過前川 : 구름 개어 맑은 바람 부는 한낮 꽃 찾아 나선 길/ 버드나무 따라 앞 개울가를 지나네)에서 딴 것이라 전한다.

정자에는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이 쓴 정자 이름 현판이 걸려 있다.

 

내 인생 바람에 실어 - 장미화

빈 몸으로 살던 이 슬픈 인생 길따라 헤메이다가 길 닿는대로 가다가 보면 발마다 돌이 걸리지

걸리는 돌뿌리 발은 아파도 걸음을 멈출 순 없어 그래서 인생이 우리의 인생은 기나긴 여행이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내인생 바람에 실어 허공을 날자 마음껏 날자 늦은 저녘이면 어떠냐

▲ 초소인지 정자인지 구분이 어려운 아름다운 방화수류정(동북각루)과 연못 ⓒ 2014 한국의산천

 

  성모퉁이 언덕위에는 높고 경사진 지형을 재주껏 이용해 방화수류정을 지어서 공중에 떠 있는 듯 아련하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데다가 앙증맞다 할 만큼 작지만 그 자태가 단아하면서도 활달하다. 

  정자 아래로는 둥그런 용연지를 꾸몄다. 거기에 용머리바위가 있어 용연지라 불렀다고 전하는데, 현재 용머리 형상은 없다. 용연지 한가운데로는 자그마한 녹색지대의 섬을 만들고 연지 주변에는 푸른 잔디, 휘늘어진 능수버들, 잔향나무 등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싱그럽거니와, 연지에 비친 방화수류정과 숲그림자가 매우 고와 운치를 더하고 왼쪽의 화홍문과도 어울려 절묘한 승경을 이룬다.

 

▲ 방화수류정의 야경 ⓒ 2013 한국의산천

▲ 단단하게 그리고 지형을 따라서 단단하게 잘 짜여진 성벽 ⓒ 2013 한국의산천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쓰임새는 드러남 속에 숨어있고 드러남은 쓰임새속에 숨어있다. 쓰임새와 드러남이 서로 숨고 또 숨겨서 함께 드러나는것은 아름다움의 강력함과 강력함의 아름다움이다.

  수원 화성에서는 아름다움은 강력함으로 발현되고 강력함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아름다움과 강력함이 다르지 않고 삶과 꿈이 다르지 않다. 수원 화성은 땅위의 성곽이고, 마음속의 왕도이다. 

▲ 봉돈 ⓒ 2014 한국의산천    

  봉돈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길로 인근 지역에 위험을 알리는 긴급 통신수단이다. 화성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화강석으로 기초를 쌓았고, 윗부분은 벽돌로 성벽보다 높게 축조하는 등 예술 작품처럼 정교하게 축성됐다. 내면은 3층으로 만들고 신호를 알릴 수 있는 5개의 화두(火頭)를 곡선 형태로 쌓았으며 적군의 공격에도 대비해  포혈과 총안을 갖췄다.

 

▲ 봉돈의 야경 ⓒ 2014 한국의산천

 

봉돈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길을 밝혀 성 주변의 상황을 알리는 봉화의 신호는 다음과 같다. 봉돈 하나에 불길이 오르면 성 주변에 이상이 없고, 불길 두 개가 오르면 적의 출현, 불길 세 개가 오르면 적이 접근중이며 불길 네 개는 적의 상륙, 불길 다섯 개는 적과의 접전중임을 의미한다.

▲ 90년만에 복원된 남수문(南水門) ⓒ 2014 한국의산천

   수원 지동시장 옆에 자리한 남수문은 수원천이 북수문인 화옹문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화성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교량과 수원천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수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사시에는 방어용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돌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1794년 수원 화성 축성 때 공사에 들어가 1796년(정조 20년) 화성과 함께 준공된 남수문은 1846년 6월 홍수로 건물이 유실됐다가 1848년 6월 1차 복원됐으나 1922년 홍수로 2차 유실됐다. 일제는 1927년 화성 팔달문 일대 도심을 확대한다는 이유로 남아있던 홍예문마저 철거하면서 남수문은 아예 사라졌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2010년 9월 본격적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해 이번에 완공되어 1922년 홍수로 유실된 90년만의 복원이 이루워진것이다.

▲ 남수문 ⓒ 2014 한국의산천

수원 남수동이라는 지명 또한 오래전 이곳에 남수문이 있었던 곳이기에 그 후에 남수동이라는 지명이 생긴것이다.

▲ 1906년 당시 남수문. 1922년 대홍수로 무너져버렸다 ⓒ 2014 한국의산천

▲ 남수문 ⓒ 2014 한국의산천

남수문에서 성벽이 끊어지며 주택과 상가로 형성된 도심으로 접어들어서 팔달문으로 이어집니다.

▲ 팔달문 ⓒ 2014 한국의산천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이어지던 성벽이 끊긴 채 큰길 삼거리 가운데에 독립되어 서있는데 장안문과 더불어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 일대가 빽빽히 들어선 건물로 인하여 성벽을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성을 완공한 후 펴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 중앙의 출입문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고 나온다. 본래 사거리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 팔달문의 야경 ⓒ 2014 한국의산천

봉돈 그리고 남수문과 팔달문을 지나서 계속해서 화성행궁으로 이어집니다

▲ 화성행궁 입장권(1500원)을 구입후 행궁을 둘러봤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행궁(行宮)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을 말한다.

▲ 어른 아이 외국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관광객으로 붑비는 화성행궁입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2014 한국의산천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행궁의 기능은 보통 셋으로 분류한다. 전란을 피하기 위해 머무는 경우와, 지방의 능에 참배하러 갈 때, 잠시 휴양삼아 지방으로 나들이할 경우 왕이 머무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거동하는 일이 잦았고, 마침내 수원화성을 축조케 되었으니 행궁을 짓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곳에서 효율적으로 국사를 돌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화성행궁은 1790년에 340칸이 완성되고 1796년 화성성역이 완성되면서 576칸으로 조성되었다. 현류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께서 1804년 양의 후 장차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조는 화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시고 말았다.

 

 

▲ 화성을 돌아보고 나올 무렵 운좋게 조선시대의 실전 무예가 펼쳐지는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활기차고 패기있는 그리고 정확한 ..탄성을 자아내게하는 멋진 장면들이었습니다. 

 

신풍루 앞에서는 매일 오전11시,오후3시 (연중진행,월요일제외)에는 실전 무예를 볼 수 있습니다.

무예24기는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 이덕무,박제가, 무예가 백동수가 조선 전통 무예와 중국,일본의 무예를 수용하여 만든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로 조선 최정예부대인 장용영 외영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 실전 무예라고 합니다.

▲ 수많은 관광객의 인기만점인 조선시대의 실전무예 ⓒ 2014 한국의산천

▲ 행궁을 나와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공방거리와 맛촌거리, 로데오거리로 이어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행궁을 나와서 공방거리와 맛촌거리, 로데오거리를 지나서 팔달문을 둘러보고 수원역으로 와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볼거리가 많은 공방거리의 담장 ⓒ 2014 한국의산천

 

노론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불행과 불운의 학자 군주 정조

정조의 죽음은 실로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다. 그는 전환기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의 방황은 조선의 방황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었다. 그것은 쇠락의 길이었고 國亡의 길이었다. 조선의 혼이었던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꼭 100년이었다.

 

참고

정조 제위기간 1776년~1800 / 을사조약 1905년.   

 

-을사조약 (乙巳條約 : 한일협상조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조약(일한병합조약) 경술국치는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맺어진 조약으로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 융·건릉내에 있는 융릉 ⓒ 2014 한국의산천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정조께서는 많은 비행을 저지르다가 비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극정성으로 자주 참배하였다. 결국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 사도세자곁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융건릉 옅에 자리한 용주사 ⓒ 2014 한국의산천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호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하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렸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최근에 지어진 효행박물관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하여 보물 1095호 봉림사 아마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이 있다. 효성전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만년 위패를 모셨다.

▲ 본문의 내용 일부는 안내팜플렛과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참고 또는 인용하였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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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