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 답사 : 용주사 - 융건릉 - 독산성 2007. 4. 15.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융릉(隆陵),건릉(建陵) 사적 206호 (위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1-1)
▲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 ⓒ 2007. 한국의산천
홍살문 궁전, 관아, 능, 묘, 원,사당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양쪽에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세가지 색깔의 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은 곧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융릉사도세자(장헌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능 장헌세자 ( 思悼世子사도세자)조선 제21대 영조의 제2자로서 이복 兄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을 받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보았다.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소케 하게 하였다.
나경언의 상변 (羅景彦 上變)
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장헌세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
나경언은 액정국별감(掖庭局別監) 나상언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 그는 장헌세자가 그의 빈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다녔고, 북성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형조에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영조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자, 세자에게는 물론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왕에게 고하지 않은 신하들에 대해서까지 격노하고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세자는 석고대죄하고 나경언과의 면질을 요구했으나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세자가 포도청을 통해 나경언의 가족을 심문해 본 결과, 나경언은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 광유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파, 벽파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에 벽파는 세자를 배척하는 파였다. 그러므로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는 벽파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모르는 세자의 비행을 알려준 나경언을 충직한 사람으로 보아 그를 살려주려 했으나, 남태제,홍낙순 등이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했기 때문에 결국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비행 문제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어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게 되는 사건으로 진전되었다.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 생각할 사, 悼: 서러워할 도)의 시호를 내렸고, 1777년(정조1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장헌으로 상시 하였으며, 1899년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특히 정조가 불행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를 기린 효의 여러 행적은 이 시대가 본 받아야 할 교범이다.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정조의 어머니로서 1744년(영조 20)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도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광무3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건릉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능
효의왕후 (孝懿王后
본관 淸風
1753~1821)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1762년(영조 38) 10세 때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정조의 어머니 혜빈(惠嬪)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 14) 수빈(綏嬪)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혜빈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70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휘호는 예경자수(睿敬慈粹)이다.
효(孝)는 부모가 만드는 것인가 자식이 행하는 것인가?
▲ 봄꽃 활짝 핀 융건릉 매표소 ⓒ 2007. 한국의산천 우관동
정조대왕께서는"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늘 가슴이 아팠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속에 놓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어린 왕세손은 울며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붓을 들어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 융건릉 매표소 ⓒ2007 한국의산천
주차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춘객이 입장했다. 입장객은 가족, 학생, 연인 등등 남녀 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장조(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맏아들 진종(효장세자)이 요절하자 영조 12년(1736년)에 두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그는 매우 영특하였으며 글씨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다고 전한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나경언으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을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만첩풀또기 (장미과)ⓒ 2007. 한국의산천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히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심지어 잡으며 송충이구제를 독려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래서 그런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 융릉과 건릉을 합쳐서 융건릉이라 부른다. ⓒ 2007. 한국의산천
융,건릉 정문 매표소를 들어서서 오른쪽 융릉으로는 약 350m, 건릉까지는 약 450m 거리이다. 융릉을 돌아본 뒤 융릉의 바로 왼쪽으로 산책길이 있으며 송림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건릉으로 이어진다.
융릉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장헌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능은 건릉(健陵)이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서 1744년(영조20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장조가 세상을 떠난 뒤 혜빈, 정조 즉위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고, 뒤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에 추존되었다.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閑中錄)을 남겨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건릉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정조는 장조(장헌세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영조35년) 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년) 연로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재를 재정비하기위하여 영조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며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 유적지 답사 나온 어린이들 ⓒ 2007. 한국의산천
정조는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각별하게 하며 송충이를 직접잡고 잡은 송충이를 씹어서(?) 보여줌으로서 송충이 구제작업을 독려하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금도 빽빽한 송림과 상수리 나무,잔디로 덥혀 흙을 볼수없는 이곳의 초록 풍경은 정조의 각별한 정성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어느왕릉보다 아름답고 뛰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다. 26만평의 드넓은 곳이 송림과 황금잔디로 뒤덮혀 별천지를 이루는 곳으로 지금은 산책로도 개설되어있어 가족단위의 고적답사 나들이나 역사 탐방 학습장으로 적극 추천드립니다.
▲ 융릉앞에 있는 금천교ⓒ 2007. 한국의산천
▲ 금천교 ⓒ 2007. 한국의산천
궁궐의 금천교를 모방하여 석축으로 축조한 다리
▲ 금천교 ( 원대황교)ⓒ 2007. 한국의산천
우리의 자부심 원대황교 (元大皇橋)수원의 남쪽 경계인 화성군 태안면 황계리(黃鷄里)에 '大皇橋' 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이 다리의 이름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이 다리는 현재 융능 바로 앞을 흐르는 개울(금천)에 놓여있으며 원대황교(元大皇橋)라 쓰여 있다. 세월의 풍상 속에 망가지고 헐리어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을 1970년 역사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남은 석재 일부를 사용하여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다.
▲ 봄맞이 나온 가족들 ⓒ 2007. 한국의산천
▲ 곤신지 ⓒ 2007. 한국의산천
금천교를 지나 융릉 일주앞 왼편에 조성된 인공 연못 곤신지로 1789년 융릉이 천장되면서 정조가 아버지 사도장헌세자 (추존장조)의 왕이되지 못한 한을 풀어드리고져 풍수 반룡농주형국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인공 연못이다.
▲ 왕릉 앞의 홍살문 ⓒ 2007. 한국의산천
홍살 중앙에 홍살 2개가 꼬인 부분에는 둥그런 태극이 걸려 있다. 태극 문양은 3 태극으로 3태극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 한다.
홍살문(紅살門)은 원래 궁전, 관아, 능 입구에 두 기둥을 세우고 위에 화살을 늘어놓은 것처럼 지붕없이 살을 꽂은 문이다.(9개, 11개, 13개 등등) 여기서부터 신성한 구역이라는 뜻이다.
릉앞의 홍살문은 이 곳부터 왕릉의 영역임을 말하며, 나무 기둥과 살에는 붉은 칠을 하여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림은 물론, 붉은색은 악귀를 내쫒는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하여 지금 대부분이 있는 홍살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디. 중앙에는 홍살 2개가 태극 모양을 지나며 삼지창 모양의 형상을 이루지만 살은 1개로 친다.
▲ 참도와 정자각 ⓒ 2007. 한국의산천
참도홍살문에서 능으로 가는 길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를 잘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고, 오른쪽 단은 한 단을 낮게 만들었다. 이유인즉 신이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을 구분해 놓은 것이다.
정자각
정자각은 왕릉이나 원의 앞에 있는 건물의 형태로 지붕이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정자각 동쪽에는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있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융릉 ⓒ 2007. 한국의산천
건릉 가는 길
정조 24년 6월
시파 벽파로 분열하여 상쟁하게된 정치 상황 속에 6월 14일 초순부터 발병한 부스럼병이 종기로 번져 정조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간 여러 약을 썼지만 효과는 없었다.
6월 16일, 음력 6월의 무더위와 오랜 투병에 지친 정조는 오회연교 후의 숨막힐 것 같은 긴장감 속에 신료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자신의 병은 가슴 속의 해묵은 홧병에서 유래하였으며, 신료들이 임금의 뜻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에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날 이후 병세의 악화로 정조는 정사를 돌볼 겨를 없이 투병에 몰두하게 되고, 신료들과 투약을 논의하는 대화만이 실록에 기록되게 된다. 6월 28일, 조금 나은 듯하던 정조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오전중에 정조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혜경궁과 왕세자가 달려오고 뒤이어 수정전에 거처하던 정순왕후도 다녀갔지만, 정조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오후 유시(酉時, 5~7시) 백관과 온 백성의 애도 속에 서거하고 말았다.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할지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국가의 예법을 어기고 대비 정순왕후 혼자만이 정조의 임종을 지켰다. 그 후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친정과 노론은 다시 살아났고 시중, 특히 영남에는 정조 독살설이 횡행했었다.
▲ 정조대왕의 릉 건릉 ⓒ 2007 한국의산천
정조 사후 정조의 능침은 정조의 유언대로 화성 남쪽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의 동쪽 구릉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곳 능침의 외형은 현륭원과 차이를 드러내었다. 정조가 현륭원에 정성들여 갖추었던 병풍석(屛風石)과 와첨석(瓦詹石)이 이곳에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채택했던 능묘법식은 정조의 신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석물의 세부의장은 화려해졌지만 이전의 힘과 활기를 잃어버렸다.
▲ 건릉 ⓒ2007. 한국의산천
홍살문 오른쪽에 낮은 단은 판위라고 한다.
왕이 가마에서 내려서는 곳. 망료위라고도 한다.
▲ 건릉 ⓒ2007. 한국의산천
▲ 건릉 ⓒ2007. 한국의산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
가운데 중앙석을 기준으로 왼쪽길은 신도로서 혼령이 다니는 길이라 하고 오른쪽은 어도로서 왕이 다니는 길이다.
신도 보다 낮게 만들어져 있다.
▲ 병풍석이 없는 건릉(정조대왕의 릉)ⓒ2007 한국의산천.
정조가 현륭원에 정성들여 갖추었던 병풍석(屛風石)과 와첨석(瓦詹石)이 이곳에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채택했던 능묘법식은 정조의 신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석물의 세부의장은 화려해졌지만 이전의 힘과 활기를 잃어버렸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건릉의 정자각 ⓒ2007. 한국의산천
정자각
정자각은 왕릉이나 원의 앞에 있는 건물의 형태로 지붕이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정자각 동쪽에는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있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화사하게 핀 벚꽃 ⓒ2007. 한국의산천
▲ 융릉 ⓒ2007. 한국의산천
1. 곡장: 능상을 보호하기 위해 동서북 4면을 둘러 쌓은 담
2. 능상: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봉분,산소,분상이라고 한다
3. 병풍석: 능상 하단 주위를 12면으로 빙 두른것으로 사대석 또는 호석이라고 한다.
4. 혼유석: 혼령이 니와서 쉴 수 있도록 능산앞에 설치한 직사각형 형태의 반반한 돌
5. 장명석: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기위해 무덥앞에 세운 석등. 흔히 혼유석 앞에 세운다.
6~7 석호,석양 : 능을 보호하기 위한 동물의 석상 (호랑이, 양) 외부의 침입을 막는 역활이므로 바깥쪽을 바라 보고 서있다.
양은 악귀를 , 호랑이는 맹수를 쫓는 역활을 한다.
8. 망주석: 일반적으로 무덤앞에 설치된 돌기둥으로 멋스러움을 더하며 음양의 조화, 무덤의 위치 표시, 왕릉의 생기 보존을 위한것등등 여러가지 설이 있음.
9. 문인석: 장명등이 있는 공간에 위치한 문관으로 관대를 착용하고 홀(임금을 만날 때 조복에 갗추어 손에 쥐는 물건)을 들고 있다.
10. 무인석: 문인석 아래 위치하는 무관으로 갑옷 투구 등을 갗추고 검을 뽑아 땅에 집고 서있는 모습
11. 석마: 각각의 문,무인석에 배치되어 서있는 말
12. 정자각: 왕과 왕비의 신좌를 모시고 각각 제사를 지네는 정자형태의 건물
13. 예감 : 축문을 태우는곳
14: 산신석: 산릉 제례후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장방형의 판석으로 정자각뒤 북동쪽에 있음
15: 비각: 능에 세우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정자
16: 수복방: 능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 조선 후기에는 수라간으로 사용되었다)
17: 신도 : 혼령이 다니는 길
18: 어도: 왕등이 다니는 길. 신도 보다 낮게 만들어져 있다.
19: 홍살문: 붉은 색이 칠해진 문으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한다.
20: 판위: 왕이 가마에서 내려서는 곳. 망료위라고도 함
21. 금천교 : 궁궐의 금천교를 모방하여 석축으로 축조한 다리
22. 곤신지 : 궁궐의 연못을 모방하여 석축으로 축조한 연못
▲ 융건릉 관리소 ⓒ 2007. 한국의산천
▲ 융건릉 입구에 서있는 멋진 자태의 향나무와 측백나무 ⓒ 2007. 한국의산천
▲ 활짝 핀 만첩풀또기(장미과) ⓒ 2007. 한국의산천
▲ 용주사 ⓒ 2007. 한국의산천
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로 창건 되었다.
병자호란때 소실 되었던 것을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대왕께서 보경스님으로 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이에 감동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세웠다.
낙성식 전날 밤에 정조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여 용주사라고 이름지어졌다.
정조는 능에서 1.5km 떨어진 용주사를 증축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50여 목판과함께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 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 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대왕이 심었다는 대웅전앞 회양목은 수령이 무려 200여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264호였다. 현재는 회양나무가 고사하여 천연기념물에서 제외되었다.
▲ 치료받는 안스럽고 가녀린 회양나무 (2006년도 촬영) ⓒ 2007 한국의산천
정조가 심었다는 대웅전앞 회양목은 긴 시간속에 끝내 생명력을 잃었다.
▲ 천연기념물에서 폐위(?)된 고사한 회양나무 ⓒ 2007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지금 제 가슴에는 책에서 글로만 접해 본 그 때의 아픔이 전해옵니다. 또한 정조대왕의 지극하신 효성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아봅니다.
경기 화성 융건릉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8037065
정조 관련 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의 고백 >>> https://koreasan.tistory.com/13737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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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 융건릉 둘러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127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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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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