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궁 함춘원지 (답사·글·사진 2008. 2. 24일 목요일 한국의산천)
위치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 (서울대학병원 內에 있음)
주소만 가지고 찾아가기가 힘든것이 우리나라 주소의 현주소(?)이다.
경모궁지 함춘원(문) 찾아 가는 길 : 서울대학병원 정문으로 들어가서 본관 건물 바로 뒤에 위치한다(간호대학교 앞) 또는 대학로쪽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들어서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첫번째 나오는 간호대학 주차장內에 있다. 주차관리 박스의 아저씨에게 잠시 답사만 하고 나온다고 공손히(?) 말하면 직원주차장 입구 바리케이트를 열어준다.
함춘원은 창경궁 동쪽의 부속 동산이자 후원이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1776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당을 함춘원으로 이전하고 이름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쳤다.
경모궁과 함춘원을 단순히 한자로 직역을 하면 (제가 그냥 풀어본것입니다)
멋진 경치를 사모하는 곳. 경모궁(景慕宮)
봄을 가득 머금은 정원 함춘원 (含春苑) 참 멋진 이름이군요.
▲ 함춘문 ⓒ 2008 한국의산천
함춘원은 창경궁 동쪽의 부속 동산이자 후원이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1776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당을 함춘원으로 이동하고 이름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쳤다.
함춘원은 조선시대의 정원으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위치한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창경궁의 동쪽, 경희궁 개양문의 남쪽 등에 있는 궁궐의 정원 이름이 함춘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함춘원은 성종 15년 (1484)에 창경궁을 짓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그곳에 관계없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성종 24년 (1493) 년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여져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의 백성들의 집을 없애고 확장하였으며,군대를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고 대문을 만들었다. 그 후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점차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사에 나눠주었다. 이후 140여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 태복사(太僕司): 조선시대때 임금의 거마(車馬)와 조마 같은 것을 맡은 관아.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맡기도 했으나 노론의 주청으로 죽음을 맞고, 영조는 그를 불쌍히 여겨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조 40년(1764)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지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이곳을 경모궁으로 불렀으며, 정조 9년(1785)에는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광무 3년 (1899)에 경모궁에 있던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경모궁도 경모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광무 4년 (1900)에는 경모궁 터에 6성조 즉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초상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그 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후 경모궁 일대에 경성 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함춘원은 조선 후기의 세련된 건물 중 하나이며,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함춘문 뿐이다.
▲ 함춘원(含春苑) 터의 함춘문 ⓒ 2008
사적 237호. 시대 정조 즉위년 1776년
이곳은 창경궁의 부속 동산이자 조선 후기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의 옛터이기도 하다. 경모궁이 세워지기 전의 함춘원은 창경궁 동쪽의 후원이었다.정조는 즉위는 1776년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당을 함춘원으로 이동하고 이름을 경모궁으로 고쳤다. 경모궁의 제사는 조선말까지 이어지다가 광무3년 1899년 11월에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신위를 종묘로 모셨다. 일제는 1924년 5월에 함춘원터이자 경모궁 자리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세웠다. 이에 경모궁의 건물이 없어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마져도 6·25 전쟁때 불타 버렸다. 현재는 경모궁의 석단과 계단 함춘문만이 남아있다.
함춘문은 경모궁과 함춘원을 드나들던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초익공(初翼工)의 간결한 공포를 가진 세련된 건물이다.
▲ 서울대학병원 안에 있는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이 있던 곳)터 ⓒ 2008 한국의산천
경모궁(景慕宮)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으며 경모전(景慕殿)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1764년(영조 40) 봄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건축하였다가 여름에 동부 숭교방(崇敎坊)으로 건물을 옮겨 수은묘(垂恩廟)라 한 것을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비명에 간 부친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사당도 다시 지어 경모궁이라 하였다. 1839년(헌종 5)에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함춘문(含春門)과 석단(石壇)만 남아있다.
▲ 경모궁 석단 ⓒ 2008 한국의산천
경모궁은 사도세자의 사당이었다. 정조는 창경궁에 머므르셨는데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은 찾아 뵙겠다는 의미에서 창경궁에 문을 하나 내고 '월근문'이라 이름했다.
월근문
뒤주에 갇혀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본 정조(이산)는 멀리 휘경동에 있는 아버지묘를 쳐다보기좋은 곳 창경궁의 경치 좋은 높은 언덕(지금의 통명전 뒤 언덕)에 어머니가 거처하실 '자경궁'을 짓고 대궐 밖 곧바로 건너다 보이는 곳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은 일반 선비들의 집같은 '영춘헌'에 머물며 어머님을 곁에서 살펴드렸다. 창경궁의 '월근문'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가기 위해 만들었다.
▲ 경모궁 석단의 계단 ⓒ 2008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무릇 임금이 배라면, 신민은 물과 같다(夫君者舟也 人者水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철학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세자가 과연 미치광이였나?
붕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다가 노론의 주청으로 뒤주에서 스러져간 사도세자.
영조의 아들,(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서 1762년(영조 39), 28세를 일기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뒤주 속의 죽음' 이 사건은 조선왕조 사상 왕위계승권자와 국왕 사이에서 붕당정치로 일어난 최악의 사태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릴 때 (사도)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왕자가 태어난 날 영조 11년 (1735년) 1월 21일 영조는 왕자가 태어난 집복헌(集福軒 :복이 모이는 집)으로 갔다. 배냇저고리에 싸여있는 아이는 이목구비가 뚜렸했다. 눈물 많은 영조가 이때 흘린 눈물은 어머니 숙빈최씨를 회상하는 눈물이었으리라. 영조의 어머니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와 이제 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는 궁녀들의 업신을 받던 천인 출신.모두가 한과 눈물의 여인들이었기에....
그러나 훗날 이 아이를 둘러싸고 이변이 일어나니... 영조가 주역을 맞고 생모 영빈이씨가 주요 배역을 맡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사도세자의 성품
영조와 궁녀 출신 선희궁(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는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장난감 무기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즐겨할 만큼 어려서부터 풍부한 무사적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는 부왕을 닳아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자라면서는 한상궁이 만들어준 칼과 활을 가지고 논 탓인지 칼쓰기와 활쏘기를 위시한 기예에 특히 뛰어났고, 유교경전보다는 점복을 비롯한 잡서들을 즐겨 읽곤 하였다. 부왕의 강한성격에 눌려 지내서인지 소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스갯소리를 곧잘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세 이전에는 부왕이 능행 등의 바깥나들이에 데려가지 않아서 궁궐 안에서만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했다 15세밖에 안 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영조가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 같지는 않다. 영조의 의도는 탕평정치 규모를 빨리 익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대리청정중인 사도세자에게 늘상 당론을 타파해야 한다는 탕평의 뜻을 가르친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리청정이 화근이 되어, 결국에는 노론의 주청으로 '뒤주 속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 경모궁 석단의 계단 ⓒ 2008 한국의산천
▲ 경모궁 석단의 계단 ⓒ 2008 한국의산천
▲ 경모궁 석단의 계단 ⓒ 2008 한국의산천
함춘원지(含春苑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조선 정조의 생부인 장조(莊祖:思悼世子)의 사당이 있던 곳.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서울대학교 본관 건물 바로 뒤에 있다)
1973년 8월 14일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부근 일대에 있던 함춘원의 옛터로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함춘원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을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궁궐의 동쪽에 있는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잡인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1493년(성종 24)에는 창경궁에 딸린 후원(後苑)으로 함춘원이라고 불렀다.
장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맡기도 했으나 유폐되어 죽었는데, 영조는 그를 불쌍히 여겨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1762년(영조 38)에 사도묘(思悼廟)를 건립한 뒤 수은묘(垂恩廟)로 개칭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함춘원으로 옮겨 지었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4년(정조 8)에는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였다. 1899년(광무 3)에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경모궁에 있던 장조의 신위를 종묘(宗廟)로 옮기면서 경모궁도 그 기능을 잃게 되자 경모전(景慕殿)으로 고쳤다. 1900년에는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인 영희전(永禧殿)을 경모궁 터에 옮겨 세웠다. 일제강점기 때 함춘원 옛 터인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이곳의 원래 모습은 사라졌다.
또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옛 건물들이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경모궁터인 거대한 석단(石壇)과 그 앞에 함춘문(含春門)만 남아 있다. 석단은 길이 30m, 너비 18m 정도나 되는 큰 것으로, 앞의 네 곳에 돌계단이 있다. 함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뒷면 기둥은 두리기둥, 가운데는 네모기둥이고 공포는 초익공이며 겹처마로 조선 후기의 세련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 함춘문 ⓒ 2008 한국의산천
▲ 함춘문 ⓒ 2008 한국의산천
함춘문은 경모궁과 함춘원을 드나들던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초익공(初翼工)의 간결한 공포를 가진 세련된 건물이다.
▲ 함춘문 ⓒ 2008 한국의산천
함춘문은 경모궁과 함춘원을 드나들던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초익공(初翼工)의 간결한 공포를 가진 세련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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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