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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지지대와 정조 이산의 효심

by 한국의산천 2008. 1. 26.

수원 지지대와 정조의 효심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천천히..."

 

지지대(遲遲臺) [답사 · 사진 2008.1.26.(토요일) 한국의산천  

 

서울에서 국도를 타고 수원 오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양,의왕을 지나서 수원과의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된다.

지금은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넓은 도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도 더 높은곳에 굽이 굽이 이어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고개의 제일 높은 마루턱 이곳이 사근현이었으며 지금은 지지대고개라고 부른다.

수원과 의왕시의 경계인 지지대고개(지지대 고갯마루 양쪽으로 지지대와 길건너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08 한국의산천 

 

조선 왕조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효자 정조에 대해서...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느리고 더딜 '지(遲)자를 쓴 지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고 돌아오던 언덕에 위치한다.

 

화산의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 고개에서 어가를 멈추어서게 하고 한참을 머무르며 부친의 묘역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 장조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져 이고개를 느리고 더딜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지지대고개에서는 1807년 순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비문을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쓴 '지지대비(碑)'를 만날 수 있다.

 

노론이 지배하는 시대의 희생양이 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당시 나이가 어렸던 정조대왕은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께서 묻힌 수원 화산에 자주 행차하셨던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능을 지키며 관리하는 관리인 능참봉이 '어렵게 능참봉 자리 하나 얻으니 임금님 행차가 한달에 스물 아홉번'이라고 한탄아닌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지지대로 오르는 계단에 음각되어있는 글ⓒ 2008 한국의산천 

 

정조(이산)의 아버지 사도세자 (이선·장조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선(李煊),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추존왕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세자가 되었다. 노론을 지지하는 아버지 영조와 정견을 달리하여 늘 대립했으며, 결국 노론을 상징하는 아버지에 의해 뒤주 속에서 굶어 죽었다.

영조는 뒤에 이를 후회하여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세자는 노론의 '소론 사냥'에 반대했고 노론의 눈 밖에 났다. 노론은 세자를 압박했고 세자는 노론에 대항하기 위해 더욱더 소론과 가까워졌다. 급기야 노론에 속한 장인(홍봉한)이 '사도세자와 소론의 영수 조재호가 손잡고 정변을 꾀한다'고 고변한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노론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되며,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를 상시하었다. 1899년(광무 3년)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아버지: 영조(1694년 - 1776년)
어머니: 영빈 이씨
비(妃):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1735년 - 1815년)
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년 - 1752년)
아들: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딸: 청연공주(淸衍公主)
딸: 청선공주(淸璿公主) 

 

▲ 지지대고개는 광교산에서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2008 한국의산천

지지대 고갯마루에서 약 150m 수원방향으로 내려오면 지지대 쉼터를 만난다(주차장 넓음) 이곳에 주차를 하고 고갯마루방향으로 150m~200m 차길을 따라 걷거나 추차장에서 산길을 따라 차길과 나란히 걸으면 나온다.   

 

사도세자 (장조 · 장헌세자)  

장조(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맏아들 진종(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출생한 탓으로 영조 12년(1736년)에 두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그는 매우 영특하였으며 글씨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다고 전한다.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으며 7세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1743년(영조19) 관례(冠禮)를 행하고 나서 부왕이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 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辛壬獄事)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25) 15세가 되던 해 건강상의 이유로 영조의 명을 받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장조는 1749년 15세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른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한중록 恨中錄'에도 이때 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나온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

그러나 "무릇 임금이 배라면 신민은 물과 같다"고 세자는 말했다. 어찌 세자가 미치광이였는가?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윤급의 종)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 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신하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속에 놓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이때 어린 왕세손(정조)은 울며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붓을 들어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그리고 쌀을 담아두는 나무 상자인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목마름과 더위, 허기에 지쳐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지금으로부터 246년전의 일이다)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에 (사도)세자를 가둔다.' '여드레 후인 윤 5월 21일 세자가 사망한다.’( 세자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하고 뒤주에 갇혀있던 8일간엔 복날이 끼여 있었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 생각할 사, 悼: 서러워할 도)의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 넓은 주차장과 휴게실이 있는 지지대 쉼터ⓒ 2008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이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대왕께서는 1776년 3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히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지지대 쉼터와 주차장(사진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가면 지지대 전각이 나온다)ⓒ 2008 한국의산천 

 

또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조선 임금의 연보태정태세문단세 /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 정순헌철고순종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순종(純宗).

 

▲ 지지대비로 오르는 계단 (찻길 바로옆에서 오르는 계단이 있다)ⓒ 2008 한국의산천 

▲ 지지대비가 있는 비각ⓒ 2008 한국의산천 

이 앞을 지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다. 

통행이 잦은 길가에 있었을 듯한 지지대비가 고개를 자꾸 깎아내려 도로를 만들다보니 이제는 높은 곳에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형제, 김상로, 홍계회 등 집권 노론 인사들은 모두 세자의 반대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반면 이종성, 조현명, 조재호 같은 소론 인사들은 시종 세자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일련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세자가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속에 갇혀 찌는 삼복더위에 물 한방울 못마시고 굶어죽는 궁중 참극을 낳았다.

 

지지대비(遲遲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 한국전쟁 당시 격전으로 비신에 탄흔이 남아있는 지지대비석 ⓒ 2008 한국의산천

 

지지대비(遲遲臺碑)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비의 높이 150㎝, 너비 6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비문을 통하여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사실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됨을 알 수 있다. 

▲ 비문 측면에 쓰여있는 '영보'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지었다 .ⓒ 2008 한국의산천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소케 하게 하였다.  나경언의 상변 (羅景彦 上變)


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장헌세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
나경언은 액정국별감(掖庭局別監) 나상언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 그는 장헌세자가 그의 빈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다녔고, 북성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형조에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영조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자, 세자에게는 물론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왕에게 고하지 않은 신하들에 대해서까지 격노하고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세자는 석고대죄하고 나경언과의 면질을 요구했으나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세자가 포도청을 통해 나경언의 가족을 심문해 본 결과, 나경언은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 광유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파, 벽파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에 벽파는 세자를 배척하는 파였다. 그러므로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는 벽파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모르는 세자의 비행을 알려준 나경언을 충직한 사람으로 보아 그를 살려주려 했으나, 남태제,홍낙순 등이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했기 때문에 결국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비행 문제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어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게 되는 사건으로 진전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정조의 어머니로서 1744년(영조 20)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도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광무3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 청계천에 있는 능행반차도 벽화(2007.5. 5.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 청계천에 있는 능행반차도 벽화 (2007.5. 5. 촬영)  혜경궁 홍씨의 가마 ⓒ 2008 한국의산천   

▲ 청계천에 있는 능행반차도벽화 (2007.5. 5. 촬영) 혜경궁 홍씨 뒤로 왕(정조)의 가마 정가교가 따른다. ⓒ 2008 한국의산천       

▲ 청계천에 있는 능행반차도 벽화 (2007.5. 5. 촬영) 왕(정조)이 타는 말  ⓒ 2008 한국의산천

왕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면 불경스럽다하여 정조의 모습은 그리지 않고 좌마만 그려놓았다.      

  

▲ 화성 융·건릉안에 있는 융릉  2007.4.15.(일) 촬영ⓒ 2008 한국의산천  

 

홍살문(紅살門)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 뒤로 융릉이 자리하고 있다.궁전, 관아, 능, 묘, 원,사당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양쪽에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세가지 색깔의 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은 곧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하여 지금 대부분이 있는 홍살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융릉 : 장헌세자 (思悼世子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능이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라고 하였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바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에는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꿨으며, 고종 때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懿皇后)로 올렸다.

 

능 주위에 병풍석을 돌리고 혼유석과 팔각 장명등, 문무인석을 세웠으며, 뒤에는 곡장을 둘렀다.

정조는 불행한 삶을 보낸 아버지의 묘소를 같은 격의 어느 원(園)보다도 훌륭히 상설하였고 이후의 능묘석물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정조의 부친에 대한 효심의 발로이며 왕릉 상설로라도 치장하고 싶었던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융·건릉 안에 있는 융릉. 2007.4.15.(일) 촬영ⓒ 2008 한국의산천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합장릉이다.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과 정자각, 능선이 차례로 올려다 보인다. 홍살문을 넘어서면 참도가 다른 능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걸을 폭의 참도는 물론이고 그 아랫단 왼편에도 정자각까지 넓게 박석을 깔아놓고 있다. 참도 왼쪽에는 수복방이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비각 안에 비는 두 개인데, 하나는 '朝鮮國思悼莊獻世子顯隆園'이라고 씌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大韓莊祖懿皇帝隆陵獻敬懿皇后附左'라고 씌여져 있다. 정자각을 지나 계좌정향(癸坐正向: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의 능 위로 올라가면 매우 특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첫째로 봉분이 장릉(長陵)에서와 같이 목단·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석(引石)이 특이하게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장명등이 전기(前期)의 팔각장명등과 숙·영조 연간의 사각장명 등의 양식을 합하여 구름무늬를 다리에 새겨 넣었고 대석(臺石)에는 꽃을 새겨 넣어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며, 넷째는 난간석을 생략하면서 방위 표시를 위해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추존왕릉임에도 무인석을 만들어 세웠다는 점이다. 문, 무인석은 크기가 장대하지는 않으나 가슴에 파묻었던 목이 위로 나와 답답하지 않고 사실적이다.
 

 

정조는 융릉 조성에 많은 애를 썼다. 세자의 묘인데로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그만큼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사후에도 효도를 다하겠다는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석마가 무인석 곁에만 한 마리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지지대비각와 겨울 하늘 ⓒ 2008 한국의산천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지지대비 전각 ⓒ 2008 한국의산천  

 

정조는 능에서 1.5km 떨어진 용주사를 증축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50여 목판과함께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 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 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대왕이 심었다는 대웅전앞 회양목은 수령이 무려 200여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264호였다. 현재는 회양나무가 고사하여 천연기념물에서 제외되었다.    

▲ 지지대비 입구 -이 앞을 지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다.

ⓒ 2008 한국의산천   

 

▲ 상기의 일부내용은 이덕일 역사서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참고 했습니다. ⓒ2008 한국의산천 

 

 

▲  2008년 1월의 마지막 주말. 쌀쌀한 아침 지지대 주차장에서. 글·사진 ⓒ 2008 한국의산천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몫을 챙기려는 객꾼들이 많은 정치세계에서 올바른 정치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은 사도세자, 그리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기리는 정조대왕 여러 행적의 효는 이 시대가 본 받아야 할 교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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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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