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한듕록
(지은이 혜경궁 홍씨) [2008 . 2. 27 (수) 한국의산천]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인 자전적 회고록(자서전)이다.
한중록은 '한중만록(閑中漫錄)'이라고도 불리며 '피 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한중록은 네 차례에 걸쳐 쓴 6권 6책의 회고록으로 원본은 소실되고 없다. 다섯종의 필사본이 남아있다.
우리가 중학교 시절 배운 한중록은 그 내용에 있어서 국어시간에 따른 문학 즉 궁중에서 쓰여진 순수 한글 소설이라는 점에서 대표궁중문학이라고 교육 받아 왔다. 그런점에서 역사적인 흐름을 잘 모르던 중학교 시절에는 혜경궁 홍씨와 한중록에 깔린 깊은 내막은 정확이 알기는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 한중록 ⓒ 2008 한국의산천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영조의 며느리로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정조의 어머니로 순조의 할머니가 되는 61세부터 71세에 걸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친정의 일에 대해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것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이라고 비난받는 아버지 홍봉한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손자인 순조(정조의 아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곧 홍국영 등 정적들의 모함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홍봉한이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할 때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자 아버지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쓴 것이다.
'한중록'의 이본에는 한가로운 날에 쓴 기록이라는 '閑中錄'과 恨스러운 일의 기록이라는 '恨中錄' 또는 '閑(閒)中漫錄' 등의 한문 제목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는 이미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고 영조,정조,순조 세임금을 지켜본 70대의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노회한 정객이 되어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던 해에 1권과 4권을 썼고, 5권은 67세, 6권은 68세, 2권과 3권은 71세 이렇게 네 차례에 걸쳐 쓴 6권의 회고록 으로, 글은 각권마다 계속 이어지는 글이 아니라 각권마다 내용이 겹치고 다시 그 내용에 대해 서술하는 면이 많다.
아울러 혜경궁 홍씨가 그 당시에 직접 보고 들은 핵심 인물로 왕실 내부와 사대부 집안의 이야기, 자신의 친정이 당한 애절한 이야기를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비사(秘史)를 개인적으로 적었으며 문체가 유려하고 아름다운 고어와 궁중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순수 국문 문학이라는 점에서도 문학적인 가치가 높고 그 당시 궁중의 언어를 엿볼수있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인현 왕후전(仁顯王后傳'),'계축일기(癸丑日記)'와 함께 우리나라 궁중 문학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졌다.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세자를 살려주옵소서!"라고 영조에게 빈 조정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세손(정조)만이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관과 도포를 벗고, 아비를 살려 달라고 빌었을 뿐이다.
14년 동안이나 대리청정했던 저군(儲君)이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 대신들은 세자를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 행위에 열중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 날 좌의정 홍봉한은 영조에게 이런 주청을 한다.
"한림(翰林) 윤숙(尹塾)은 '어제' 신(臣)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윤숙이 홍봉한 등 대신들에게 '왜 사도세자를 구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었다는 이유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좌의정 홍봉한이『한중록』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라는 점에서 세자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승자의 기록이 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홍봉한 집안
영조 20년 1744년 1월 9일 안국동 홍씨家는 아침부터 술렁거렸다.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부절과 예물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열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 홍씨는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친정이 아닌 별궁에서 아버지 홍봉한으로 부터 영조가 내려준 '소학'과 '어제훈학'등을 배우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조숙했던 것처럼 홍씨도 조숙했다.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가문이 일어날수있다는 일과 아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버지 홍씨는 작년에 과거에 또 낙방했던 것이다. 나이 서른 한살. 동년배들은 종6품이상 참상관이 수두룩했고 빠른이는 벌써 정3품 통정대부인 당상관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나마도 그 과거시험도 영조가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를 마친 후 특별히 실시한 알성시(나라에 경사가 있을시 치루는 특별시험)였다.주위 유생들의 부러움을 사며 보게 된 시험에서 또 떨어졌으니 아홉살된 어린 홍씨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만해도 홍봉한의 집은 가난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받는데 필요한 의복을 마련할 돈이 없어 홍씨 언니의 혼수로 쓰려고 준비해 둔 옷감으로 치마를 만들고 낡은 천으로 속옷을 만들어 입고 어머니가 빚을 얻어 겨우 치루어냈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문마저 한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선조들의 벼슬로 따지자면 쟁쟁한 집안이었다. 안동 풍산현이 본관인 풍산 홍홍씨의 시조는 고려의 국학 직학(直學)인 홍지경이며, 조선조에 많은 현관을 배출했다. 그리고 대사헌 홍이상과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부군 영위안 홍주원이 그 직계조상이다.
또한 홍씨의 고조부인 홍만용은 예조판서를 역임한 쟁쟁한 가문이었다. 이런 가문인데도 과거에 게속 낙방하자 더 이상 출사를 늦출 수가 없었던 홍봉한은 결국 음직(蔭職)을 두드렸다. 홍봉한은 아버지가 정2품 판서였으므로 음관으로 출사할 자격이 있었다.
음직으로 진출한 홍봉한이 처음 맡은 관직은 의릉(懿陵)참봉이라는 종9품 말단직이었다. 판서의 아들이 서른이 넘어 음직인 참봉에 나갔으니 홍봉한의 심정이 얼마나 쓰렸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딸이 세자빈이 되었으니 홍봉한은 임금인 영조의 사돈이자 다음 임금의 장인이 된것이다.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 된후 어린 딸에게 존대를 했다.
"신하의 집이 척리가 되면 총애가 따르고 총애가 따르면 문벌이 왕성해지고 문벌이 왕성해지면 재앙을 부르는 법입니다. 내집이 도위(선조의 부마영안위)의 자손으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를 위해 끓는 물, 타는 불속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이것이 복의 징조가 아니라 화의 징조가 될까 두렵습니다."
홍봉한의 훈계는 계속되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대비 인원황후, 중전 정성왕후서씨, 세자의 생모 영빈이씨)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에 힘쓰고 동궁섬김을 반드시 옳은 일로 돕고 말씀을 삼가시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
그랬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라는 홍봉한의 이 마지막 말 한마디에 홍씨가 걸었던 81년간의 삶, 궁중에서 보낸 파란 만장한 70여년의 역경이 담겨있었다. '나라와 집'이 아닌 '집과 나라'에 대한 복을 닦으라는 말은 홍씨가 평생동안 일관되게 지킨 정치 이념이었다.
그리고 그 후 홍봉한은 세자와 자신의 딸 홍씨가 대혼을 올린 그해 10월에 실시된 과거에 급제를 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 과거는 영조의 병환이 나은것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치뤄졌지만 실상은 홍봉한을 급제시키기 위한 별시(別試)였다. 그리고 이제 갓 합격한 홍봉한에게 제수한 관직은 파격적으로 정5품 문학이었다.
이후 눈부실 정도로 승진을 거듭해 다음해인 영조 21년에는 일약 종2품 광주 부윤에 제수되었다. 이때 '영조실록'에는 '여론이 좋지 않다'고 기록 될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였으나 집권노론은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있다.
참고 풍산 홍씨문중 관련글
영의정 봉한(鳳漢)은 영조때 예조판서를 지낸 현보(鉉輔)의 아들로, 그의딸이 혜경궁 홍씨로 유명하며, 영조때에 많은 업적을 남긴후 조선후기의 문화 부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동생 인한(麟漢)도 형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 영조의 계보도 ⓒ 2008 한국의산천
영조 (이금:1694 -1776 재위기간 1724년 8월 - 1776년 3월.51년 7개월.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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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이선:1735-1762. 27세 卒) (妃: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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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1752-1800 재위기간 1776년3월-1800년 6월.24년 3개월. 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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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 1790년 ~ 1834년)는 조선의 제23대 임금(재위 1800년-1834년)이다. 휘는 공(蚣),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대되었다. 정조(正祖)와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아들이다.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에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순조는 즉위 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벽파의 핵심 권력자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학문을 좋아했던 순조는 20권에 달하는 개인 문집 '순재고'를 집필하였으며 학문에 발전에도 힘을 기울이다가 1834년 11월에 45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인릉이다.
노론이 가장 두려워한것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어찌 그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1775년 82세로 재위 51년을 맞은 영조는 자신의 명이 다하여 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결국 사도세자를 죽이고 말았지만 어떻게던 삼종혈맥을 잇는 세손을 보호해야 겠다고 다짐한 영조는 대신들을 불러 세손의 대리청정 하게 할것을 논하게 하였다." 시시각각 몸이 쇠약해 지고 있으니 국사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수가 없다 어린 세손이 노론이며 소론을 알겠으며 누가 병조판서 할만한지 이조판서를 할만한지 알겠는가 그러니 이제라도 국사를 대리케해 후일을 도모하리라"
그러자 그자리에 참석했던 노론의 영수이자 혜경궁 홍씨의 숙부인 홍인한이 말했다.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팔요도 없으며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
이는 세손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며 세손을 등극 시킬 수 없다는 노론의 의지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영조의 강경한 의지로 세손이 대리 천정을 하게되고 얼마 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1776년 3월 마침내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난 효장세자(진종)은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다음해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니 그때 나이가 7살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3년 뒤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영조는 세자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후에 왕세손(正祖)에게 유언처럼 남긴 것이 효장세자의 추존(追尊)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정조는 그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正祖)에게는 진종보다 친부(親父)였던 장조(莊祖:사도세자)에 대한 정성이 더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영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세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서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하지 않는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위 일성(一聲)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물어넣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열흘 후인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고 묘호는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이라 높혔다. 그리고 그 5일 후 홍인한등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환완공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어 정후겸의 양모이자 자신의 고모이기도한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형조판서 이계의 상소가 있고 성균관과 사학의 유학생까지 나서서 홍봉한(정조의 외할아버지· 어머니 혜경궁의 친정아버지),홍인환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전하께서는 홍봉한의 도당이 대략 제거되어 근심할것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홍봉한의 한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조는 이 주청을 거부했다.
"비록 죄가 용서 할수 없는 것이라도 자궁(慈宮:혜경궁)의 어버이이고 내가 목숨을 부지한것은 곧 우리 자궁(慈宮:혜경궁)덕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가담자인 홍봉한의 동생 홍인환은 유배를 간 후 그해 7월 사사당한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을 처단하면 어머니에 대해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정조를 괴롭힌 딜레마였다면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자식을 죽인 시아버지 영조의 비리를 일방적으로 들추어 낼수도 없는 (영조가 행한 사도세자의 처분이 옳다면 지아비 사도세자는?) 이율배반적인 사건. 지아비와 시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혜경궁 홍씨로서는 여타 변명하지도, 영원히 풀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였다고 말 할 수있다.
즉 한중록을 쓰게 된 동기는 당시의 세도가 홍국영 등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할 때,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를 받고 친정이 멸문의 화를 입은데 대하여 아버지의 결백을 입증하기 호소가 전편(全編)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훗날 한중록에서 혜경궁은 이렇게 말한다. " 사적인 애통으로서 하고, 공적인 의리는 의리로서 한다."
혜경궁은 친정이 위태롭게 공격을 당하자 단식까지 하며 아들 정조에게 시위하지 않았다면 친정아버지인 홍봉한과 그 아들들, 아우 홍인환은 일찌감치 저 세상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명문가 였던 풍산 홍씨를 비롯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노론의 명문가는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궁중문학의 효시라고 여기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역시 자신의 친정과 사도세자와의 죽음은 관련이 없다는 것과 친정아버지인 홍봉한을 변명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 역대 선왕의 릉 만큼 잘 꾸며진 파란 하늘이 펼쳐진 사도세자의 융릉 ⓒ 2008 한국의산천
사도세자의 평양행이 있던 그 해겨울 10세가 된 왕세손(정조)의 혼인이 추진되었고, 다음해 2월에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4개월 뒤인 윤5월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를 낳은 선희궁이 영조에게 아들에 관해서 무언가 비밀리에 고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는 그 내용을 가지고 사도세자를 질책하였다고 한다.
김상로등 노론들이 사도세자를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동궁 앞에서는 감히 말을 다 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었다. 그들은 세자를 두려워했다. 얼굴빛으로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는 과묵함이나, 나주 벽서사건과 4대신 정려사건에서 보여준 뚜렷이 보여준 세자의 반노론 친소론 자세는 노론으로 하여금 세자의 즉위에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 하였다. 영조와는 달리 세자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가 무엄한 일을 해도 세자는 분노하지 않았다. 노론 4대신 정려상서에 대해서도 세자는 다만 '다르지 않겠다'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그러니 노론은 그 한마디로 세자의 속내를 짐작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주 벽서 사건때 세자가 소론을 보호하려고 애썼음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노론은 두려웠다. 게다가 세자는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도 잘하며 무인기질까지 갗추고 있었다.
'무인군주!'
두려운 일이 아닐수없았다. 세자가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군사적 잠재력을 지녔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14년간 대리청정했던 사도세자.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는 뒤주의 모서리를 잡고 "주부(主父)님 살려주시옵소서" 세자(사도세자)의 세손(정조)는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소서" 하였을 뿐 세조가 복더위에 뒤주에서 여드레간 물한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신음하고 기력을 잃으며 죽어가는 동안 그 누구도 세자를 살려 달라고 영조에게 말한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다. 사도세자가 갇힌 다음 날 좌의정 홍봉한은 영조에게 아뢴다.
"한림(翰林) 윤숙(尹塾)은 어제 신(臣)들을 꾸짖었고(사도세자를 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안심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주청을 한다. 이어서 윤숙은 해남으로 유배를 떠난다.
영조는 칼끝을 두드리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하라고 명하였다.
"네가 자결하면 조선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것이니 자결하라"
영조는 전에서 내려와 섬돌 위에 앉아 말했다.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보존 될것이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
이말에 (사도)세자는 통곡했다.
세자는 말했다.
"전하께서 칼로 찌르신다해도 신은 칼끝에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지금 죽기를 청합니다." 이어 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맸고 곧이어 땅에 쓰러졌다.
모두가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손(정조)이 들어왔다. 당시 세손의 나이는 만 10살이었다. 세손은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관과 도포를 벗고 세자뒤에 엎드렸다.
"할바마마, 비를 살려주옵소서"
영조는 말했다.
누가 세손을 데려왔는가? 빨리 데리고 나가라."
정조는 노론의 주청에 못이겨 세자를 뒤주(소주방·燒廚房에 있는 쌀 담는 궤를 홍봉환이 준비하였다)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면 어느 누군가 목을 내놓고라도 사도세자의 구명에 힘쓸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세자를 살려달라고 한 이는 없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한림) 임덕제(林德蹄)는 최후의 수단으로 황급히 내전에 연락하여 당시 열한 살의 왕세손(훗날의 정조)을 업어 오게 한 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사도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빌게 하였다. 세손의 눈물에도 영조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한림 임덕제가 세자 뒤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자 영조가 끌어내라고 명했고, 위사(衛士)들이 달려들자, "내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끊을지언정 나를 끌어낼 수는 없다"고 항의했지만...
이미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어 놓은일을 다시 어찌 군왕이 거둘수있었단 말인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죽던 그날, 뒤주를 갇다 바친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김양택 등과 함께 삼포(한강)에서 배를 띄우고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들어왔다.
세손을 비호하고자 한 영조에 의해 친아버지 사도세자가 아니라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정조가 등극 하고 나서 한 첫마디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것이었다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마저도 죽이려 혈안된 노론과 홍봉한 가문에게는 청천병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에 의해 풍지박살난 친정을 복원하기 위해 혜경궁은 끊임없이 아들 정조에게 매달리며, 정조가 친정을 복원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이번엔 손자인 순조에게 "네 아비가 내 친정을 복원해 주기로 하였다"는 증거물로 한중록을 창작해 낸것이다.
김조순이 지은 지문에나타난 혜경궁 홍씨의 인간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어려서부터 나가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의복은 검소하게 입고 음식은 절약하는 쪽으로 정조를 교육시켰다. 또한 기억력이 뛰어나 정조 임금이 궁중의 옛일, 국가제도, 인물 출처에 이르기 까지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고 한다. 곧 무신적 기질을 가진 사도세자와는 달리 학문에 깊이 들어가도록 교육을 하였으며 자녀 교육을 포함하여 매사의 일을 외부로 들어나지 않게 조용조용 처리하는 성품이었다."
한중록 전체의 대강.
1권
1권에서는 '한중록'을 쓴 동기와 목적을 밝혔다. 조카인 홍수영의 부탁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자신의 출생에서 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의 추억과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 이듬해 궁궐에 들어간 후 50년간 살아 온 궁중 생활과 남편이 당한 참변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 할수없다고 하여 중요사안은 회피해 버리며 장례후 시아버지 정조를 만난 이야기로 이어진다. 환갑이 되던 정조 19년(1795년)에 집필된 것으로 작가의 생애 중에서 비교적 안정적 시기였다
후반부에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버지 ,삼촌, 동생등 친정 식구들이 화를 입은 이야기와 정조와 같이한 수원 능행의 이야기의 감격을 적으며 마지막에는 친정 조카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친정 중심의 일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상하게 집필되어있어 '한중록'을 집필하게 된 의도를 유추할수있다.
관련 글 (궁중의 고어로 쓰여져서 많은 귀중한 문학 자료로 꼽힌다)
임오화변(壬午禍變:영조 38년 임오년에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일)이 쳔고 업는 변이라. 선왕(先王:정조)이 병신 초의 영묘(英廟:영조)긔 상쇼하오셔, 졍원일긔(政院日記:승정원 일기)를 업시하야지라 하야, 그 문적(文蹟:영조 52년에 왕세손이던 정조가 정원일기의 처분을 청하는 상소를 하자, 영조가 이를 받아들여 사도세자의 기록을 차일암에서 없앰) 을 업시하여시니, 선왕의 효사(孝思)로 그 때 일을 듕인(衆人)이 아니 보리 업시 셜만(褻慢:행동이 무례하고 단정치 못함)니 보는 거슬 설워하시미라. 임오화변의 기록을 없앰
(중략)
그날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하오시니, 그 때 오정 즈음이나 되는데, 홀연 까치가 수를 모르게 경춘전을 에워싸고 우니, 그는 어인 징조런고? 고이하여, 그 때 세손(정조)이 환경전에 겨오신지라, 내 마음이 황황한 중, 세손 몸이 어찌 될 줄 몰라 그리 나려가 세손다려 아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 천만 당부하고 아모리(어찌) 할 줄을 모르더니, 그리할 제, 소조(小朝)에서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재촉하오시기 가 뵈오니, 그 장하신 기운과 부호하신 언사도 아니 겨오시고, 고개를 숙여 침사상량(沈思商量)(한 곳에 정신을 몰두함)하야 벽에 의지하야 앉아 겨오신데, 안색을 나오사(바꾸시어) 혈기 감하오시고 나를 보오시니, 응당 화증(화를 내는 증세)을 내오셔 오작지(심상지) 아니하실 듯, 내 명이 그날 마치일 줄 스스로 염려하야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더니, 사기(辭氣) 생각과 다르오셔(평소 생각하던 바와 다르시어) 날다려 하시대,
"아마도 고이하니, 자네는 좋이 살겠네. 그 뜻들이 무서외" 하시기, 내 눈물을 드리워 말없이 허황하야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휘령전으로 오시고 소조를 부르오시다 하니, 이상할 손 어이 피(避)차(피하자), 돌아나자(달아나자) 말도 아니하시고, 좌우를 치도(물리치지도) 아니 하시고, 조금도 화증 내신 기색 없이 썩 용포를 달라 하야 입으시며 하시되,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방한모)을 가져오라."하시거늘,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시고저 하야, 내인다려, 당신 휘항을 가져오라 하니, 몽매밖에(대뜸, 느닷없이) 썩 하시기를,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다리고 오래 살랴하기, 내가 오날 나가 죽게 하얏기 사외로와(마음이 꺼림직하여) 세손의 휘항을 아니 쓰이랴 하는 심술(아니 쓰도록 하려는) 심술을 알게 하얏다네." 하시니, 내 마음은 당신이 그 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 모르고 이 끝이 어찌 될꼬? 사람이 다 죽을 일이요, 우리의 모자의 목숨이 어떠할런고? 아모라타 없었지(우리 모자의 목숨은 아무 일도 없었지). 천만 의외에 말씀을 하시니, 내 더욱 설워 다시 세손 휘항을 갖다 드리며,
"그 말씀이 하 마음의 없는 말이시니, 이를 쓰소서."하니
"슬희(슬프구나), 사외하는 것을(죽을 사람이 세손의 휘항을 쓰는 것을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써 무엇할꼬?"
2권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하게 된것은 화완옹주의 이간책이라는 것을 강하게 서술하고 사도세자의 비행으로 겪었던 마음고생과 친정이 멸문하게 된것은 홍인한 사건의 배후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홍국영의 개인적인 한풀이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며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또한 동생 홍낙임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사 당했으니 그 누명을 벅겨 달라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3권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이 겪은 일련의 일들에 대해 억울한 소원을 풀어 달라고 서술하며 정조는 자신에게 효성이 지극했다는 말을 하고 갑자년에는 예전에 외가에 내렸던 처벌을 풀어주겠다고 언약한 이야기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실각하게 된 이면을 폭로한다.
또한 2권부터는 <한중록>을 읽을 순조를 의식하였는지 1권에 비해 사건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주관적인 생각을 많이 기술하고 있는 편이다.
관련 글
지금은 즉위 한지 초년이시고 국영에의 총명을 가짐으로서 지나친 거동을 하시메 필경은 깨달으시기 머지 않으리라 하고 참고 참아서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예사로운 듯이 지냈더라 그러니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고 나약ㅎ하다고 꾸짖는것을 어찌 달게 받지 않으리오
그러나 과연 선왕(正祖)이 개달으심이 위의 말씀과 같더라 또 갑자(정조가 갑자년에 세자 순조가 15세이니 홍씨문중의 誣罪를 다 풀어주겠다고 말한것) 년에 내 집의 원한을 다 풀으실 제, "중부(仲父: 작은 아버지)일도 같이 풀어주려고 하노라." 하고, 여러 번 간절한 말씀을 하셨으므로 나는 금석같이 믿고 갑자년 오기가 더딘것을 민망히 여기고 기다렸더라.
그런데 하늘이 미워하시고 선왕이 중도에 돌아가시고 , 만사가 흩어졌으매, 이런 원혹이 어디 있으리오. 내 비록 여편네나 국조야사(國朝野史) 번역한것을 많이 보았도다. 우리나라에 원통한 옥사가 필경은 억울한 누명은 씻지 못한적이 없더라. 그런데 내 삼촌의 일은 만면 원통하니 주상(순조(純朝)이 장성 하셔서 시비를 분간 하실때면 응당이 늙은 할미의 지한을 풀어주실때가 있을 까 기다렸으매 내가 살아서 미처 보지 못할것 같으니 이글을 내가 없는 후에라도 주상이 보시면 필연 감동하여 삼촌의 삼십년 쌓인 원한을 풀어 주실까 하늘에 빌고 또 빌도다.
중략
나는 병신년 칠월에 내 중부 처분때 전교가 내가 그리했다하니 그렇다면 이는 내가 죽인셈이 되지 않는가 세상은 진정을 모르고 내가 삼촌이 화입는데 구하기는 커녕 그런 양으로 알고 나를 절륜의 죄인으로 하여도 사양치 못할 것이매, 만고에 제 삼촌이 화 입는데 그리하라고 할 사람이 있으리요.
4권
갑신년(1764), 영조가 적법한 국통을 잇게 하려 한다며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은 데 대한 안타까움과, 영조 곁에서 자기의 뜻에 거스르는 일을 한 화완옹주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한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완옹주에게 세손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오히려 모자 사이가 서먹해 지고, 친정집에는 안 좋은 일만 계속된다. 이에 대해 혜경궁 홍씨는 이 일들이 모두 모함이며, 그녀의 친정은 다 나라와 집안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임오화변 즉 사도세자가 참변 당한 일의 진상을 폭로한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지며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는 비탄에 잠기고 세자에게는 무관심하게 되며 세자는 공부를 태만이 하고 무예에민 정성을 기울이고 부자간의 성격차이로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서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리고 울분을 푸눈 방법으로 살인까지 하게되며 나경언의 고자질과 영빈의 종용으로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9일만에 죽게한다. 혜경궁이 말하기를 영조가 세자를 죽인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속에 유폐시켜 죽게 한것은 영조 자신이 한 일이지 아버지 홍봉한이 시킨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5권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과 김귀주의 이간으로 혜경궁 홍씨 집안이 겪게 된 일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홍국영과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게 벼슬을 시켜 주지 않은 일로 앙심을 품은 홍국영이 훗날 정조의 신임으로 권력을 손에 쥐자 혜경궁 홍씨의 중부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을 대역 죄인으로 몰고 간 일에 대해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다. 덧붙여 홍국영이 혜경궁 홍씨와 정조, 또 중전과 정조 사이를 이간하며 세도를 누리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6권
6권은 지금까지의 전체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역시 정조를 생각하고 사도세자가 죽은 것에 대하여 또 다시 거론한다. 즉 정조를 보호하기 의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적극적인 방법을 도모 하지 못한것은 정조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또 정조에게 후사가 없던 것을 걱정하던 중 가순궁이 순조를 낳은 일과, 정조가 순조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에 사도세자의 일과 외가의 죄를 씻어 주겠다고 혜경궁 홍씨에게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이 글을 읽을 순조에게 정조가 한 약속을 지키도록 청하고 있다.
참고 글
중략
여염집의 여편네라 하더라도 칠십노인의 외아들을 잃었으면 서로 조문하고 위로하여 불쌍히 여길터이더라. 선왕을 여윈뒤 수월안에 내 선친께서 해괴망측한 참욕을 당하고 내가 처의 (자결)하려는 일로 숙제의 충동이라하여 참화를 받게 하더라 내 주야로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고 울면서 살려고 해도 살덕이 없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어 주상이 시비를 분간하여 내 지원을 풀어주실날이 있을 줄 알으매 허다한 사적을 내가 만일 기록하지 않으면 또한 자세히 아실 덕이 없으므로 소모한 정신을 거두고 점점 쇠진하는 근력을 억지로 차려서 선왕이 나를 섬기던 성효(誠孝)와 나와 나누던 말씀을 따로 옮겨쓰고, 그 나머지는 조건마다 자세히 명백히 알렸으니 내가 아니면 누가 자세히 이런말을 능히 하리오.
▲ 관련참고서적
참고 서적
한중록 [청목사刊 엮은이 박동우]
한중록 [일신서적刊 엮은이 남용]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著]
조선왕조실록 [들녘 박영규]
이야기 조선 왕조사 [청아 출판사 이근호]
조선왕조사 [수막새 刊 김경수 ]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박광용]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해냄 이한우]
조선의 왕세자 교육[김영사 김문식 김정호]
사관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가람 박홍갑]
ⓒ 2008 한국의산천
한중록은 역사의 현장 중심에서 살아온 혜경궁 홍씨의 한 많고 애절한 사연의 기록이다. 특히 친정의 모든 사람이 멸문지화 (滅門之禍 : 온 집안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재앙) 당한 후 혜경궁 홍씨의 주관적인 억울함을 호소코자 쓰여진 글이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하여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최고의 명문가 집안이었으나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유인 즉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만약 혜경궁 홍씨의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한중록이라는 글은 이 세상에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한중록은 한 시대의 아픔이요 살아있는 역사이다.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였지만 결국 하고자 했던 개혁,치국(治國)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버지 영조가 이루지 못한 개혁을 정조 역시 해내지 못했다.
정조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신 스스로가 무명옷을 즐겨입고 헤진 옷을 기워 입으며 궁녀의 수를 줄이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고루 등용을했다. 문벌을 타파하고 붕당을 깨뜨리며 탕평책을 앞세웠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보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뿌리를 완벽하게 뽑지 못했고, 그들의 방해를 끊임없이 받았다.
기득권 세력의 자기 방어는 완강했던 것이다. 정조를 반대하는 벽파 또는 일부 노론들이 집권한 뒤에 정조의 여러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조는 영조가 만들어놓은 기초 위에서 열렬한 개혁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그 좌절을 맛본 것이다. 뒤따라 등장한 문벌정치는 부정과 불법, 벼슬의 독점 등 반동정치를 자행했다.
결국 이들은 조선 말기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으며 끝내 나라가 유리되는 현실을 빚었다. 개항기 국력이 기울어졌다. 국력의 소진은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이 갈등을 빚어 내부의 분열이 가중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빛나는 개혁정치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간의 몸소 행하신 노력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남을 것이다.
만약에 이 자리에 사도세자가 있었다면...-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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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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