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릉 가는 길[2011 · 12 · 11 · 하늘 맑은 일요일 · 한국의산천]
조선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왕
고종·명성황후, 순종·순명효황후 모신 황제릉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유릉은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채 스러져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이자 최초의 황제릉으로 고종과 순종이 묻혔다.
홍유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인 홍릉(洪陵)과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가 묻힌 유릉(裕陵)을 합하여 홍·유릉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황제의 능을 볼수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며 앞에 보이는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진 정원을 기점으로 왼쪽으로 가면 홍릉이, 오른쪽으로 가면 유릉이 나온다.
홍릉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청량리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이곳에 묻히면서 명성황후릉도 옮겨지면서 조성됐다.
▲ 경춘국도 사릉 IC에서 나와서 홍유릉으로 이동 ⓒ 2011 한국의산천
서울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어 구리, 남양주를 거쳐 춘천으로 이어지는 46번 국도는 흔히 경춘국도라고 불린다. 이 길은 우리 챌린지팀이 수없이 다니던 길이다.
춘천, 강촌, 대성리, 축령산, 소리산, 유명산으로 갈때...이 길 주변으론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경기도의 구리~동구릉 구간은 조선 태조가 잠든 동구릉을 비롯해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고종·순종의 홍유릉, 단종 비가 묻힌 사릉, 그리고 광해군묘와 대원군묘 등이 흩어져 있어 특별히 '왕릉 길'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 사릉옆을 지나며 홍유릉으로 고고씽 ⓒ 2011 한국의산천
홍유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과 유릉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이 모셔진 능이다. 홍릉에는 명성황후 민 씨와 고종이 합장돼 있고,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 씨, 순정효황후 윤 씨의 합장릉이다. 두 능을 합쳐 흔히 홍유릉이라고 부른다.
▲ 2009년 6월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 왕릉 ⓒ 2011 한국의산천
홍유릉(洪裕陵)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능으로 합쳐서 홍유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적 제207호이다. 홍유릉은 고종과 순종이 모셔져있는 곳으로서 대한제국의 제1대, 2대 황제의 능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98호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조성시기
조선 1895년 (홍릉)
조선 1904년 (유릉)
▲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고종대여 (국상때에 사용하는 큰 상여)의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욱일승천기를 든채 행군하는 일본군대 ⓒ 2011 한국의산천
▲ 1919년 3월 3일 덕수궁 대한문을 출발한 고종의 대여가 중랑천을 건너고 있다 ⓒ 2011 한국의산천
▲ 1926년 6월 10일 살곶이 다리를 지나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 대여 ⓒ 2011 한국의산천
시간의 門을 넘어 조선 왕들과의 대화
유럽의 조경 전문가들이 둘러보고는 "자연과 인공의 최적의 조합. 이것이야 말로 신의 정원이다"고 극찬했다는 조선의 왕릉. 유네스코는 최근 한국의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왕릉은 유교와 풍수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 방식, 지금까지 지켜 내려오는 제례 의식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학창시절 행주산성과 구파발 북한산성, 서오릉 동구릉 홍유릉은 소풍 단골 장소였다 ⓒ 2011 한국의산천
▲ 홍릉의 참도는 삼로이며 침전(배전)은 일자형인 것이 특이하다. ⓒ 2011 한국의산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 뒤로 홍릉이 자리하고 있다. 궁전, 관아, 능, 묘, 원,사당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양쪽에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세가지 색깔의 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은 곧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하여 지금 대부분이 있는 홍살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길을 따라 들어서면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인 홍살문이 본격적으로 황제의 능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황제의 능답게 이전에 조성된 왕릉과는 다른 구조와 형식이 눈에 띈다.
능과 홍살문 사이에 있는 일(一)자형의 침전(寢殿)은 평소 임금의 집무실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랐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봉분 앞에 정(丁)자 모양의 정자각을 세웠다. 침전의 규모는 5칸으로 뒤편의 봉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으며 임금이 오르는 계단과 일반인들이 오르는 계단을 나눠 놓았다. 또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석상들이 양옆에 가지런히 위치해 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홍릉은 황제의 능제에 따라 석수가 침전 전면에 배치되고 숫자도 많아졌다.
홍릉(洪陵)은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皇帝, 1852~1919, 재위 1863~1907)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민씨의 동봉이실 합장릉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지구에 있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승하하자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조 대비(추존왕 익종비)는 220년 전에 대가 갈린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인 남연군을 사도세자의 3남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하고, 그의 손자를 왕위에 앉혔는데 바로 그가 고종이다.
철종이 승하한 날 고종을 즉위시킨 조 대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조 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익종)를 고종의 양부로 하고 자신(신정왕후)을 모친으로 입적해 왕위를 이었다.
고종은 43년 7개월간 재위하며 세도정치를 분쇄해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어 황제국으로 했으며, 신식 군대를 만들어 친히 통솔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야욕은 친러 정책을 지향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강제로 하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너무 늦은 외세에 대항한 개혁 정책
고종은 황제국 선언 직후 전주의 시공묘를 봉산(정비)한 사당인 조경단(肇慶壇)을 설치하고 삼척에 있는 이태조 5대조의 묘소를 찾아 보수하고 준경묘, 영경묘라 명명했다.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하고 장조와 정조, 순조, 문조 등 4대조를 황제로 추존 배향했다. 이때까지 장조는 장종, 정조는 정종, 문조는 익종으로 불렸다. 장조(사도세자)의 현륭원도 융릉(融陵)으로 능호를 추존 변경했다. 황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통한하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음력 1918년 12월 20일)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일제 강점 하의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렀는데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 장으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총독부가 ‘대훈위 이태왕 훙거(薨去)’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장례위원장인 총호사도 일본인인 정무총감이 맡아 진행했다. 국장이 아닌 이왕직제로 이루어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였다.
장례는 일본군과 일본군함까지 동원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치렀다. 일제의 만행과 억압에 분노한 국민은 고종의 발인 날인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3월 4일 현궁에 관을 내리는 하관식도 민심이 두려워 밤 10시에 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을 조영한 후, 조선을 황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릉을 만들어 자신의 능과 합장하고자 했다. 그래서 금곡에 능의 자리를 잡고 틈틈이 많은 석물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천봉을 위해 청량리에서 금곡까지 60여 리 신작로를 만들고 버드나무(미루나무) 가로수를 심었다. 황제국에 대한 고종의 의지와 집념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성황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51년 9월 25일에 태어났다. 세도정치에 치를 떨며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시어머니 민씨의 천거로 왕실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고종이 친정에 들어가자 쇄국정책을 지향하는 흥선대원군과 다르게 열강과 우호적 관계를 이뤄 대원군과 대립관계를 유지했다. 민비가 정권의 핵심이 돼 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을 외세를 끌어들여 막았다.
그런데 민씨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 분위기를 조성하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묘시(새벽 4시경)에 민비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하고, 시신은 경복궁 뒷산 녹원(鹿苑)에서 불태웠다. 한 나라의 국모가 외세에 의해 실로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바로 을미사변이다. 일제에 의해 집권한 김홍집 내각은 시해 사실을 고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일본군의 내정간섭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비는 시해 3개월 만에 소렴과 대렴을 마친 후 재궁에 안치됐다. 능호는 숙릉(肅陵)으로 정했다. 하지만 장지는 쉽게 정하지 못했다. 맨 처음 동구릉 숭릉의 오른쪽으로 정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지하고 다시 교하, 창릉 주변 등 27곳의 후보지를 놓고 길지를 택했지만 1년 3개월이 돼도 정하지 못했다. 후보지 중 연희궁터는 길이 번창할 땅이고 청량리는 더없이 편안한 곳으로 평가돼 최종적으로는 청량리로 결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국장을 치르지 않고 날마다 재궁(관)에 가칠(加漆)할 것만 명했다. 불태워진 부인에 대한 통한이었을까? 복수를 위한 준비였을까? 그리고 1년간 묘, 전, 궁, 능, 원의 향사(제사 올리는 행사)를 정지했다. 심지어 사가의 장례조차 한동안 금지했다 풀어줬다.
일제는 삼통의 삭일인 11월 17일을 양력 1월 1일로 쓰도록 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양력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양력 1월 1일 바로 전날, 즉 음력 11월 16일에 고종은 500년마다 변하는 시운(時運)에 대응한다며 상투와 망건을 벗고 삭발을 했다. 그리고 구습과 쇄국을 버리고 시제의 변화를 백성도 따르도록 명했다. 연호도 건양(建陽)으로 했다.
고종황제가 친히 조영한 홍릉.
각 능·원·묘의 한식 제사도 청명에 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가 매년 청명에 조상의 산소를 찾는 문화로 이어져온다. 종묘와 각 능·원의 제사는 신역서보다 구역서를 따르는 것이 혼란을 덜 가져온다고 해 구역서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례는 음력을, 일상생활은 양력을 따르는 이중과세의 발단이 됐다.
1897년 5월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그해 10월 민비를 황후로 추봉했다. 민비는 황후로 추봉된 다음 달 청량리에 황후의 예에 따라 모셔졌으니, 홍릉은 한반도 최초의 황후릉이 됐다.
그것도 일본군에 시해된 지 2년 2개월 만이니 민비는 조선의 왕과 왕비 중 장례기간이 가장 긴 기록을 갖게 됐다. 여기서 고종이 민비의 시해와 죽음을 애통해하며 국왕으로서 권위를 강화하고 자주독립국가로 위상을 높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민비의 국장을 빌미로 조선을 대한제국의 황제국으로 승격해 국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년여에 걸쳐 조영한 홍릉의 석물은 고종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시 총호사(장례위원장), 부석소 낭청(석물제조 책임관), 감조관(감독관), 석수 등이 징계를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홍릉 석물은 이제까지의 조선왕릉 석물과는 규모와 형태 등에서 사뭇 달랐다. 하지만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의 홍릉에 함께 묻히기 위해 시간 끌기를 한 것이다.
고종은 풍수적으로 허하다는 이유를 들어 홍릉을 자신이 묻힐 황제릉(수릉·壽陵, 생전에 만들어두는 능)으로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고종이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석물까지 직접 감독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홍릉을 청량리에 조영하면서 강화에서 채취한 석물 운반을 위해 마포나루에서 청량리까지 신작로를 만들고(현 중앙선, 이후 일제는 이것을 중앙선 열차 놓는 데 사용했다) 종각에서 청량리까지 전철을 놓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철이다.
▲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 2011 한국의산천
홍릉은 한반도 최초의 황후릉
고종이 생전에 황제릉을 구상해 만들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홍릉의 사자상. 정교하고 해학적인 표현이 예술미를 더해준다. 조선 왕릉에는 호랑이상이 있으며, 사자상은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금곡의 홍릉 정자각은 ‘오례의’의 예대로 침전(寢殿)이라는 배위청을 전각 안에 두도록 했다. 정자각 변화를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홍릉은 혼란기였던 조선 말기에 조성한 황릉제 능역으로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침전) 앞으로 배치했으며, 정자각 대신 일(一)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한 석수는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해 나란히 세웠다. 황제릉은 일반 왕릉에 비해 능침의 석수가 배전 앞에 놓이고 정자형의 정자각이 일자형 침전으로 바뀌며 석수가 많아졌다. 특히 능침의 석양과 석호가 없어지고 명·청의 황제릉처럼 여러 종류의 석수가 놓였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 1좌를 세웠다. 그 양옆으로 망주석 1쌍과 사각 장명등을 놓았다. 이곳 능침의 석물은 청량리 홍릉의 명성황후 능침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침전 앞 석물은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를 한 쌍씩, 그리고 말상을 두 쌍씩 대칭 배치했다. 중국 황제릉의 석물 배치에서와 같은 동물상이지만 그 조각의 형태는 사뭇 다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돼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돼 있다. 이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산신석, 어정, 제정 등이 배치돼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해 7명의 아내에게서 6남 1녀를 두었는데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친왕이 장남,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이 둘째다. 순종의 능호는 유릉(裕陵)으로 바로 옆 능선에 있다. 의친왕과 영친왕의 원이 능선 너머에 있다. [신의 정원 조선 왕릉 참고 -이창환 상지 영서대 교수- ]
▲ 홍·유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문무석과 석수들을 홍살문부터 침전까지 배치하여 조성하였다 ⓒ 2011 한국의산천
홍릉은 조선 제26대 고종과 그의 비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 민씨의 능이며, 유릉은 조선 제27대 왕 순종과 그의 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와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능의 제도를 따라 조선의 왕릉 중 홍릉과 유릉만이 황제릉으로 규모도 일반 왕릉에 비하여 크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사적 207호) 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능이지만 정작 명성황후의 유해는 없다. 파란만장했던 인생만큼이나 사후에도 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1895년 음력 8월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져 불태워진 것으로 알려진다. 장례는 숨진 지 2년여 만인 1897년 11월 국장(國葬) 으로 치르게 되고 청량리 인근에 안치된다. 이때 능이 있던 곳이 지금 홍릉수목원으로 유명한 서울 홍릉이다.
당시 관에는 유해의 일부인 손가락 뼈마디 정도만 겨우 수습했을 뿐 사실상 시신은 없었다. 그러다 고종황제가 서거한 1919년에야 명성황후는 현재의 남양주 홍릉에 고종황제와 합장됐다.
홍릉은 태릉 등 다른 조선 왕릉에 비해 화려하다. 다른 곳에는 봉분 주변에만 올망졸망 모여있는 석물이 이 곳에는 신도(神道) 라 불리는 진입로 양편에 늘어서 있다.
또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꽤큰 규모의 침전(寢殿) 이 있다. 이는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황제의 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효석(吳孝錫) 관리소장은 "한 왕조의 운명이 다하는 시점에 만든 능이 가장 화려하다는 것이 묘하다" 고 말했다. 홍릉 옆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가 합장된 유릉이 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묘도 이곳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인 마석공원묘지 근처에 있다.
이전의 일반 왕릉과 능제가 다른 홍유릉
기울어 가는 조선의 마지막을 지켜봐야만 했던 고종과 순종을 모신 금곡동의 홍유릉(洪裕陵)은 산책 삼아 들르기에도 좋은 곳이다. 우선 홍릉(洪陵)에는 26대 고종과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가 잠들어 있고, 유릉(裕陵)에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27대 순종황제와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잠들어 있다.
홍릉에 묻혀 있는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은 왕이고,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다. 명성황후는 원래 1897년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뜨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당시 일제가 “고종은 한일합방 뒤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억지를 부리자 조선 왕실에서 “그렇다면 명성황후의 묘를 이장한 후 합장하자”는 나름대로의 대응 논리를 찾은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홍유릉은 조선의 여느 왕릉과 많이 다른 능제가 눈길을 끈다. 1897년(광무 원년)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황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는 물론이거니와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도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또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인 침전을, 앞 양쪽으로 문·무인석을 세웠으며, 이어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 · 해태 · 사자 · 낙타 · 말의 순서로 석수(石獸)를 배치했다.
하지만 비록 황제라 했으나 능역 조성 당시 일제의 간섭이 심했기 때문에 능역의 전체 규모와 분위기는 처음 의도에 크게 따라오지 못했다.
왕릉과 황릉의 차이
마지막 임금 고종·순종 묘소, 중국 황제릉 본떠 큰 규모
금곡동에 있는 홍릉·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들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잠들어 있는 왕릉이다. 조선왕조가 흔들리던 시절 개혁을 꿈꿨던 학자와 망국의 비운을 맞아야 했던 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역사탐방을 떠나보자. ◇홍릉과 유릉
홍릉(洪陵)은 조선 26대 고종과 왕비인 명성황후, 유릉(裕陵)은 27대 순종과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묘소이다.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나중에 고종의 무덤에 합장했다. 특히 홍릉과 유릉은 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했기 때문에 중국의 황제릉을 본떠 조성했다. 이 때문에 다른 조선 왕릉보다 규모가 크고 볼거리도 많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 정자각/ 왕릉 앞에 제사를 지내려고 만들어놓은 건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고무래 같은 丁자 모양이라 해서 정자각이다) 대신에 일(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특히 석물도 봉분 앞이 아니라 참도와 침전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호랑이와 양을 배치한 다른 왕릉과 달리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 종류도 다양하다. 유릉의 경우에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돼 있어 눈길을 끈다.
▲ 홍릉연지 ⓒ 2011 한국의산천
홍유릉의 삼문을 지나 오른쪽 홍릉을 향하다 보면 원지원도(圓池圓島) 형태의 홍릉 연지가 있다. 조선의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다.
원형의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인데,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라 네모난 연못에 원형의 섬을 둔 일반적인 조선시대 연못과는 다르다.
왕릉의 연지는 능역의 방화 및 급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풍수적 합수의 의미가 있어 중요시하는 시설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식물이 있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식재돼 아름답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는 황제릉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일반적인 외재실은 능역 담장 밖 입구에 일부 훼손된 상태로 있다.
▲유릉 " 丁" 字 모양의 정자각이 아니라 "一" 字모양의 침전이다 ⓒ 2011 한국의산천
1926년 4월24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사망
일제에 짓밟힌 치욕과 비운의 삶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그것은 일본의 국권침탈 야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기의 허수아비 황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순종의 인생은 치욕과 비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종은 1874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해 세자에 책봉됐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황태자에 책봉된다. 황태자 책봉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종은 암살 기도를 당한다. 황실의 통역관이자 고종의 측근이었던 김홍륙이 고종과 순종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다. 고종은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독이 든 커피를 마셨다가 치아를 잃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왕위에 오른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밀려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순종의 대한제국 통치의 역사는 국권 상실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황제에 즉위한 그해,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강행한 조약인 한·일신협약이 체결됐고 사실상 국내 정치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간다. 8월1일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했으며 12월에는 이복동생이던 황태자 영친왕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게 된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해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됐다. 1909년 일본은 국권탈취를 위한 작업을 더욱 가열차게 진행한다. 7월에는 군부를, 10월에는 법부를 폐지해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했다.
1910년. 일본은 이름만 앙상하게 남은 대한제국을 통째로 흡수한다. 일제는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순종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자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대신 서명에 나섰다. 이로써 1910년 8월29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막을 내렸다.
순종은 일제가 주는 ‘이왕(李王)’의 직위를 받고 일본천황가의 황족에 편입돼 이왕가를 구성해 창덕궁에 머물렀다. 순종은 1926년 53세를 일기로 운명한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의 장례식날에 맞춰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3·1운동처럼 확산되지는 못했다.
순종, 영친왕, 이방자 여사 타계
1910년 일제는 순종(純宗)에게 한일병합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순종은 아버지 고종(高宗)이 폐위된 후 왕권을 물려받으며 조선왕조의 마지막이 될 것을 직감했지만 일본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 수는 없었다.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결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서명했다. 조선왕조의 치세가 끝을 맺은 것이다.
1926년 순종은 병세가 악화되자 조칙을 내려 유언을 전했다. "병합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림으로써 이른바 이전에 이루어진 한일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아, 국민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지하에서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대한제국의 융희황제(隆熙皇帝)이기도 한 순종은 그 해 4월25일 승하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였다.
일본은 일찌감치 순종의 이복동생이자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강제로 일본에 보냈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라는 일본 왕녀와 결혼한 것도 강제였다. 나약했지만 꺾이지 않으려 했던 순종과 달리 영친왕은 일본의 순치를 받아들였다. 일본 황실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으며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제1항공군사령관(육군 중장) 지위에까지 오르는 등 물질적으로 일본 황족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암살하자 매우 슬퍼하며 석 달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영친왕은 일본 패망 이후 황족의 지위도 잃고 귀국도 거부당하면서 심신이 쇠락해 갔다. 1963년 뇌출혈로 인해 혼수상태인 채로 귀국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끝까지 그의 생계와 명예를 지켰던 것은 부인 이방자 여사였다. 이 여사는 메이지 천황의 친족으로 히로히토 황태자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였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대한제국 황태자와 결혼했다. 황족의 명예와 재산을 몰수당한 후에도 영친왕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이여사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국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농아와 소아마비 장애인 재활사업에 열정을 보인 이여사는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 받았다. 남편인 영친왕은 1970년 5월1일 숨을 거뒀으며,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던 이 여사는 1989년 4월30일 경기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에 남편과 함께 자리했다
▲ 어정 ⓒ 2011 한국의산천
유릉의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과 제정(祭井) 두 우물이 아직까지 제 모습을 갖춘 채 남아 있다. 능에서 우물의 중요성과 기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 신들의 정원 조선 왕릉 ⓒ 2011 한국의산천
유럽의 조경 전문가들이 둘러보고는 "자연과 인공의 최적의 조합. 이것이야 말로 신의 정원이다"고 극찬했다는 조선의 왕릉. 유네스코는 최근 한국의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왕릉은 유교와 풍수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 방식, 지금까지 지켜 내려오는 제례 의식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금곡동의 홍유릉은 한눈에 보기에도 선대의 다른 무덤과는 형식이나 배치가 다르다. 중국의 제후국 왕릉 양식에 맞춰 석물을 사초지 위 봉분 앞에 소박하게 두었던 이전 것과 달리, 홍살문을 넘자마자 양 옆으로 열을 지어 문무백관처럼 세워둔 것이 대표적이다.
정자각 대신 한 일(一) 자 모양의 침전을 사초지 앞에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 제후가 아니라 황제이고자 했던 고종의 눈물겨운 자주 선언이 죽어서도 이어진 형국이다.
▲ 유릉 ⓒ 2011 한국의산천
기울어 가는 조선의 마지막을 보듯 이곳 홍유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그리 넓은 면적이 아닌 작은듯하여 조금은 갑갑한 느낌. 화성 융건릉의 광활하게 펼쳐진 구릉에 비교됩니다
▲ 유릉(裕陵) ⓒ 2011 한국의산천
유릉은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분(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을 모신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
▲ 유릉앞 침전의 추녀마루에 있는 잡상(雜狀) ⓒ 2011 한국의산천
광화문, 덕수궁, 숭례문의 추녀마루를 바라보면 자그마한 장식물 몇개가 눈에 뜨인다. 한줄로 죽 늘어선, 사람 같기도 하고, 엎드려 절하는 형상이기도 하고, 무슨 동물의 형상 같기도 하다. 바로 그것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러 가지의 형상의 토우(土偶·흙인형). 잡상(雜像)이라고 말한다.
잡상의 설치는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설치되며 목조 건물의 화재예방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는 것이며 조선시대에 성행 했던 잡상은 3마리 에서부터 11마리 까지 대게 3, 5, 7, 11의 홀수로 앉혀진다.
잡상의 임무는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키는 일.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 도성의 성문이야말로 왕조의 기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잡귀를 막고자 했으며 민간신앙의 하나인 셈이다.
잡상의 모습은 주로 원숭이 사자 용 봉황 기린 해마(海馬) 물고기 해치 등의 동물이 특별한 원칙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꼭 하나 지켰던 것은 맨앞엔 언제나 도인(道人) 선인(仙仁)과 같은 인물상이 자리잡아 뒷자리 동물들을 이끄는 선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삼장법사로 보기도 한다.
잡상이 있으므로 해서 높이 솟은 추녀의 멋을 한층 더 멋지게 해주는것이 아닐까?
▲ 홍유릉에서 나와서 다시 영원길을 따라서 덕혜옹주 묘를 찾아갑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왕릉으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왕릉으로가는 길은 침묵과의 대화이다. 수백년된 노송 사이로 세월의 무게와 시간의 덧없음을 느끼는 나만의 시간을 가져본다.
조국과 일본이 모두 외면했던 망국의 황년
"내 가장 큰 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핏줄로 태어난 것입니다"
덕혜옹주 묘 가는 길 >>> https://koreasan.tistory.com/15605277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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