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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승무 조지훈 용주사

by 한국의산천 2008. 6. 17.

승무  조지훈  [2008· 6· 17 화요일· (날씨: 비 장마시작) 한국의산천]  

 

정조 융건릉 & 회양나무...그리고 용주사의 승무

 

 

▲ 경기 화성 용주사 ⓒ 2008 한국의산천   

 

  조지훈님은 1938년 용주사에서 영혼의 고뇌를 춤으로 승화시킨 승무를 참관하고 영감을 얻어 詩"승무"를 쓰게 되었다.

산에서 내려오며 숲이 우거진 도고산 동막골로 접어들며 조지훈님의 '승무'를 외우며 내려왔더니, 곁에서 같이 걷던 친구가 詩 전문을 올려 달라기에 이곳에 참고 자료와 함께 올립니다.

 

 

▲ 2005년 6월5일 용주사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 2005년 6월5일 용주사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 2005년 6월5일 용주사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조지훈님은 1938년 용주사에서 영혼의 고뇌를 춤으로 승화시킨 승무를 참관하고 영감을 얻어 詩"승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승무(僧舞)
             - 조지훈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 2005년 6월5일 용주사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조지훈 趙芝薰 [1920.12.3~1968.5.17]  

본명 동탁(東卓). 1920년 경북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1962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 2005년 6월5일 용주사 ⓒ 2008 한국의산천 

 

화성에 있는 지금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호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는 손수 회양나무 (前 천연기념물 264호) 한그루를 심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렸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최근에 지어진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께서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하여 보물 1095호 봉림사 아마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이 있다.  

 

 

▲ 용주사 대웅전 ⓒ 2008 한국의산천

용주사 대웅전의 오른쪽 기둥앞에는 정조께서 손수 심었다는 가녀린 회양나무가 서있다. 

 

▲ 대웅전 오른쪽에 앞에 서있는 정조께서 손수 심은 수령 약 200년의 회양나무(촬영 2005· 6· 5일) ⓒ 2008 한국의산천

 

경기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에 있는 회양나무.이 회양목은 조선 정조(1776∼1800, 재위)가 장조(사도세자)의 능을 이 근처( 현재의 융건릉)에 두고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지을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고 전해 오고 있다. 
회양목은 본래 석회암지대에서 주로 나고 키가 7m 정도까지 자라는 늘푸른 나무로서 관상용으로 심는다.

 

용주사 회양나무 천연기념물 264호해제사유

용주사 회양나무는 높이 4.6m, 둘레 0.53m이며,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의 능(陵)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능을 지키는 용주사를 다시 지을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고 전하여 나이를 약 2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주사의 회양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역사를 간직한 채 조상들의 관심속에 자라왔을 뿐만 아니라, 회양나무 가운데에서는 매우 큰 편이라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생육공간 협소로 뿌리 생육환경이 불량하고 회양목으로는 보기 드문 노거수로 워낙 노쇠하여 회생의 가능성이 희박하고, 수형의 훼손이 심하여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를 상실하였기에 천연기념물에서 제외되었다

    

 

▲ 정조가 직접 심었다는 수령 약 200년의 치료받는 회양나무 (촬영 2005· 6· 5일) ⓒ 2008 한국의산천  

대웅전 앞에 서있는 가녀린 회양목 한 그루. 2005년 6월 5일 이곳 방문 했을때 회양나무는 치료와 수술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천연기념물 제264호였으나 나무가 고사하여 천연기념물에서 폐위(?)되었다.

절을 중수하면서 정조가 직접 심었다는 나무로 수령 약 200년으로 추정하고있다. 앙상하고 치료를 받는 중이라 보기가 안스러운 모습이고 뒤주에 갇혀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이 가슴에 절절히 다가온다.

   

 

 

▲ 용주사 대웅전 앞의 회양나무 (촬영 2007· 4· 15일) ⓒ 2008 한국의산천

2007년 4. 15일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죽어있었다. 천연기념물 제264호였으나 나무가 고사하여 천연기념물에서 폐위(?)되었다

다. 

2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다시금 정조를 생각한다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 그는 18세기 왕권을 강화시키며 규장각을 설치하고, 붕당정치를 비판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 화성 신도시 건설을 통해 민생을 어루만지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시대를 이끈 혁신적인 개혁군주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현실에 부딪혀 끝내는 자신의 뜻을 다 펴지못하고 실패하고만다.

지금은 고사해버린 회양나무를 보니 정조께서 고군분투, 필마단기하며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나버린 그리고 그 자신의 생애를 대하는 듯하여 가슴이 아리다.

 

 

▲ 드라마에서 정조 이산 ⓒ 2008 한국의산천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오며 왕에 올랐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을 지으며 정조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화성을 중심으로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제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 , 못이룬 사도세자의 꿈을 담은 나라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기대와 좌절의 시간이 흐르며 몸은 불편해지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며 학문수련과 삶은 수도자를 연상시킬 만큼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잘하였으나 그의 뜻대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큰 뜻은 이루지는 못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갈길은 멈추고 국망(國亡)의 길로 치달았다.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24년 3개월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개혁 미완(未完)의 군주는 승하하셨다.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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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