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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독산성 세마대

by 한국의산천 2007. 4. 15.

독산성과 세마대

( 禿山城 洗馬臺사적 140호 위치: 경기 오산시 지곶동 162-1

 

답사 2007. 4. 15일. 일요일 날씨 흐림,차차 맑음

답사코스: 용주사 - 융건릉(융릉,건릉) - 독산성 세마대    

 

▲ 독산성 세마대 ⓒ 2007. 한국의산천

세월은 흘러도 아픔은 남아.

 

오늘 이곳을 찾아 본 이유는 독산성에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흔적이 남아있다기에..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다시 생각나 이곳에 올랐다.  

(사도)세자 제거의 음모가 계속되는 동안 흉흉한 소문이 돌더니 끝내는 땡볕이 내리쬐는 윤5월(1762년 영조 38년) 뒤주속에 갇히고 그 위에는 큰 돌이 얹혀졌다.  

그 직전 열한살의 세손(훗날의 정조)은 관과 도포를 벗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빌었다 " 아비(세조)를 살려주옵소서" 

 

그리고 세자는 뒤주의 양모서리를 잡고 부왕을 우러르며 애소했다. " 아버님 살려주옵소서"       

 

 ▲ 독산성에 오른 가족 (부모, 부부,  형제는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 2007. 한국의산천  

해발 200여m의 독산성은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휜히 트이고 전망이 좋아 높은 산에 오른 느낌을 받는 곳이다. 산림욕장과 더불어 벚꽃이 만개하여 가족나들이로 좋은 곳이다.

 

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장조(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맏아들 진종(효장세자)이 요절하자 영조 12년(1736년)에 두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그는 매우 영특하였으며 글씨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다고 전한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언으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붓을 들어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영조는 쌀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에 갇혀있던 사도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여  28세의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의 天倫之情의 아픔은 어떠했을까?

 

▲ 사도세자와 정조가 올랐던 독산성에는 그때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였다. ⓒ 2007. 한국의산천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그 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대왕은 아버지를 죽인 정파와 20년 이상을 함께 정사를 논의 할수밖에 없었던 심정은 어떠 하였을까.     

참아야 했다. 영조는 죽기 한달 전 세손과 대신들에게 사도세자에 대하여 유언을 했다. "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말 할 수 없다."  이와함께 영조는 앞으로 사도세자 사건의 잘잘못을 언급하는자는 역률로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영조는 '나의 통석(慟惜)한 마음' 이란 표현으로 그 때의 일을 후회했다.

 

 

▲ 세마대 ⓒ 2007. 한국의산천 

 

정조는 재위 14년 (1794년 2월 10일) 화성 행차시 독산성에 올랐다가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았다. " 그대들중에 경진년에 어가(임금의 가마 : 사도세자)가 머물렀을 때 구경한 사람이 많겠구나". 경진년은 사도세자가 온양 행궁에 행차한 때였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냐?"  부로(父老)들은 일제히 대답하였다. "

 

어가가 머무른 날에는 친히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보시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어 주셨으며 진남루에 올라 과녘을 쏘아 연거푸 네발을 맞추셨습니다.  

부친의 행적을 직접듣는 정조의 가슴은 떨렸다. " 지금 내가 31년만에 이 산성에 오르고, 이곳에서 예전일을 묻노라니 슬픈 감회를 누를수 없다. 뜰안에 들어 온 부로 가운데 온천 행차때 은전을 입은 사람은, 승려이건 속인이건 나이를 따지지 말고 한자급(資級)씩 올려주고, 성안의 민가에는 집마다 쌀 한섬씩을 주어 이날의 감회가 깊은 뜻을 표시하라" 고 일렀다.

 

 

▲ 독산성 성벽 ⓒ 2007. 한국의산천 

돌아오는 길에 정조는 활터가 있는 득중정(得中亭)에 들러 신하들과 활을 쏘았다.

정조는 다섯발을 쏘아 일부러 네발을 맟췄다. " 오늘 활을 쏜것은 경진년의 옛일과 똑 같으니, 마땅히 뜻을 보이는 일이 있어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 이덕일著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중에서>

 

 

▲ 독산성과 세마대 안내판 ⓒ 2007. 한국의산천

 

독산성(독성산성)은 원래 석대산 혹은 향로봉이라고 불려왔다. 권율장군의 절묘한 전략으로 독산성 세마대로 불리면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과 호응하에 서울을 수복한 전략거점으로 더 유명해 졌다. 208m의 낮은 산, 평범한 산 같지만 수원·오산간을 에워싼 주변평원에 우뚝 선 산이다.

 

삼남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지에 버티고선 지형으로 사방을 관망 통제할 수 있는 위치다. 그래서였는지 삼국시대부터 국방의 보루가 된 곳이다.

세마대의 주봉은 북쪽으로 흘러 양산봉(182m)에 이어진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4㎞가량 떨어진 화산(花山)산록에는 저 유명한 화성·수원지역의 상징적인 효문화유적 융건릉이 있으며 성황산 아래 자리잡은 용주사가 내려다보인다.

 

용주사가 있는 일대는 옛 수원의 읍치(邑治)의 터전이다. 옛날 읍성터가 남아 있는 융릉으로부터 독산성으로 이어진 넓은 들의 한 가운데에 황구지천(黃口池川)이 남행해 흐르고 있다.

독산에 일찍이 성책이 설치되었던 것은 이렇듯 주변지세를 위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해안 남양 주위에 설치돼 있는 여러 방어시설들과 서로 관련을 가지며, 또한 화산(花山)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지방읍치(地方邑治)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유사시에는 백성들을 피신시켜 외적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세마대 정자 ⓒ 2007. 한국의산천

 

국토의 요새로 국난극복의 일익을 담당했던 독산성(禿山城)은 오산시 지곳동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충으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용인·양지 사이의 여러 성과 남한산성이 연결되는 중요 지점이다.

산꼭대기를 둘러쌓은 이 성을 ‘독산성’이라고도 불려지며, 옛 기록에 의하면 백제때 처음 쌓아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겸 순변사(巡邊使)였던 권율(權慄 : 1537~1599)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여 명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면서 왜적들을 물리쳤다. 이때 왜군대장 가토(加藤 淸正)가 벌거숭이산(독산성)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군사들을 멀리 후퇴시키고 성을 포위하여 조선군의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권율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려고 흰말을 산 위로 끌고 가 흰쌀을 끼얹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성내에 물이 있다고 생각 하여 물러갔는데 말을 씻은 높은 곳이 바로 세마대(洗馬臺)다. 1957년 복원 당시 쓴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선조(宣祖) 35년(1602) 변응성(邊應星)이 다시 쌓고 정조(正祖) 20년(1796) 화성(華城)을 쌓을 때 함께 고쳤다.

성벽은 비교적 온전하며 높이는 2~4m이다. 문터는 5곳에 남아있으며 일부는 보수복원이 되었으나 이 중 남문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배수로는 둘레의 곳곳에 남아있고 성안에 우물터는 3곳이 있지만 물이 부족한 것이 결점이다.   

▲ 누각? 천정의 돌이 사라진 성문 ⓒ 2007. 한국의산천

 

▲ 성문ⓒ 2007. 한국의산천

 

▲ 독산성(사적 140호)  ⓒ 2007 한국의산천

 

독산성은 백제가 축성한 고성으로 연장 1,100m이며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이용된 성이다. 임진왜란을 맞은 1592년 , 권율장군이 근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는 도중 이성에 주둔하여 수만의 왜병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물이 부족한 이 곳의 조건을 알고 왜병이 물을 한 지게 올려 보내 조롱하자, 권율장군이 백마를 산상에 세우고 말에 쌀을 끼얹어 말을 물로 씻는 시늉을 해 보이자 왜군은 성내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 퇴각하였다는 세마대의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세마대는 독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독산성 축성 후 전승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보적사가 성내에 자리하고 있다.

 

▲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성곽 ⓒ 2007. 한국의산천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왕도인 한양을 수호하는 외곽진지로서도 독산성이 남한산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기인 선조(宣祖) 26년(1593) 10월에 관찰사 유성룡(柳成龍)이 왕에게 건의한 글에 “광주 남한산성과 수원의 독산성, 그리고 금주(衿州 : 지금의 시흥시)의 금지산은 모두 산의 험함이 기이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어 여기를 지킴으로써 가히 호남(湖南)을 막을 수 있는 즉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를 차출하여 광주, 이천 등지의 군사를 모아 서울을 지킴이 좋을 듯 하다”고 했다. 3년 후에도 유성룡은 “용인의 양지에 있는 고성(古城) 석성산(石城山을 말함)이 있어 지형이 험하고 긴요함이 독성보다 낫고 곧은 길이 요충이니 여기에 군기와 군량을 비축하고 훈련하면 오른쪽으로 독산성에 접속되고 왼쪽으로는 광주의 남한산성에 연결되어 솥발(鼎足)의 세를 이루어 서울인 경도(京都)의 문호(門戶)로서 견고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 문을 여닫는 기둥이 있던 돌쩌귀가 그대로 남아있다.ⓒ 2007. 한국의산천

 

 ▲ 걷기 좋은 산성길 ⓒ 2007. 한국의산천 

 

▲ 독산성내에 있는 보적사 ⓒ 2007. 한국의산천

 

전통사찰 제34호  보적사 (경기도 오산시 세마대길 94)     
고려초 창건 당시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소멸, 의복, 음식등을 만족케 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중심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다.

대웅전 좌두에는 요사채 2동이 있으며 대웅전 정면에 3층 석탑이 조성되어 전통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조선후기의 사찰, 호국의 군진으로 이름난 사적 제140호 독산성 세마대지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보적사는 아무런 사적 자료없이 고려초기 창건으로만 전해올 뿐이다.

 

수원유수가 관할하는 3백여호의 변화한 촌락이 되었으나 한일 합방후 왜인은 세마대를 파괴하고 주민을 각처로 분산 이주케 하였다. 여러차례 전란으로 중건을 거듭하다 조선 22대 정조가 용주사 건립시 재건하였고, 1957년 세마대의 복원과 함께 산상에 연무의 3개 광장도 마련하였다.  

 

보적사 바로 뒤편이 산 정상이며 세마대 정각과 넓은 송림숲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절로서 현재 성곽 보수와 불사로 인하여 다소 어수선하다.

 

▲ 보적사 지붕과 벚꽃.ⓒ 2007. 한국의산천

 

정조가 즉위한 후 부왕의 능원을 옛 수원의 치소였던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에 있는 화산 밑으로 옮기면서 능행차가 잦아졌고, 능행시에는 가까운 독산성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친히 순행하여 살피었음을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정조 14년(1790) 2월 능행 때에는 『독산성에 행차해서 장대에 임하고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해 가로되…(중략)』여기에 보이는 운주당이라는 건물이 어느 건물을 지칭하는 것인지, 그리고 독산성을 수축하고 토신(土神)에게 고유(告由)토록 하였는데, 고유제품(告由祭品)과 제문(祭文)의 격식을 정하여 부사가 헌관이 되고, 중군 및 부내 당상관이 추천한 조신(朝臣)이 다음 헌관이 되고, 향과 축문을 경기감영에 전하고, 경기감영 정문찰방(定文察訪)이 대축관을 겸해 행사를 치렀다고 하였다.
<정조실록 16년 7월조> 같은 해 10월에는 독산성을 수축하고 세마대를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무진(일진이 3일임) 수 독성산성 성주 1천4보…수문 三개축 신축남장대…』
이때 왕이 전교를 내려 지시한 내용을 보면 “산성은 중한 땅이요, 원침(융릉-사도세자릉을 말함)에 가깝고, 또 할아버지인 영조께서 1760년(영조36)에 머물러 숙박하였던 곳이며 장대는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려야겠다. 원임 각신(閣臣)들 중에서 적임자를 좌상(左相)이 써서 올리도록 하라.” <정조 16년 10월3일 무진조>의 기록이다.
 다음페이지에 융건릉을 기록합니다.-한국의산천-  

 

▲ 산성위의 상춘객들.ⓒ 2007. 한국의산천

 

▲ 독산성 ⓒ 2007. 한국의산천

 

▲ 일부 붕괴된 곳은 보수 공사중이다.ⓒ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벚꽃이 만개한 이곳은 가족 나들이 상춘객으로 붐볐다.ⓒ 2007. 한국의산천

 

▲ 참고 서적 ⓒ 2007. 한국의산천 

 

정조대왕께서 극진히 아끼셨던 정약용 선생에 관한 책 일부 참고.(정약용 선생의 전기에는 정조대왕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8세기 정조의 재위 시절을 흔히 조선의 문예부흥시대라고 일컽는다. 이 시대의 주역은 역시 정조와 그의 총애를 듬북 받았던 정약용 선생이다. 왕과 대학자의 만남은 어쪄면 이미 결정지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얕은 식견과 이제는 그 지식 마저도 희미해지는 요즘, 책을 다시 읽고 보며 자료를 준비합니다. 

 

정조 관련 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의 고백 >>> https://koreasan.tistory.com/13737026

정조이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https://koreasan.tistory.com/13691642

수원 지지대와 정조 이산의 효심>>> https://koreasan.tistory.com/13675557

한중록 한듕록 읍혈록 혜경궁 홍씨 >>> https://koreasan.tistory.com/14028037

정조이산 홍국영과 장태우 >>> https://koreasan.tistory.com/14266198

한림(翰林)과 사관(史官)이란?   >>> https://koreasan.tistory.com/13886930

사당 경모궁 함춘원지 돌아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4043881

경가 화성 융건릉 둘러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1275811

경기 화성 용주사 둘러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1275807

경기화성 독산성 세마대 >>> https://koreasan.tistory.com/11275816

 

주변 둘러 볼 곳

물향기 수목원  >>> https://koreasan.tistory.com/8037932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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