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 (落星臺)
2007. 4. 11일. 수요일 [ 한국의산천 ]
장소 : 낙성대
촬영기종: 파나소닉 루믹스 LC1(28~90mm)
▲ 고려의 명장 강감찬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서울대 사거리에서 사당동 방향으로 잠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낙성대라고 있다. 낙성대는 별이 떨어지면서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집터다 < 낙성대유지(落星臺遺址)>
낙성대유지에서 (서울大 후문쪽으로) 약 700m 떨어진 낙성대(공원)는 강감찬 장군 동상, 안국사, 분수 등을 갖춰 운치 있는 공원으로 거듭났다.
※ 낙성대유지(출생지)와 아래의 글 낙성대 공원은 약 700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 낙성대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광장에는 봄꽃으로 가득하며 강감찬 장군의 거대한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분수가 물을 뿜어 올린다. 분수 뒤로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가 보인다.
낙성대란 이름의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자리한 안국사 내부는 벚꽃과 목련으로 화사하며 낙성대 삼층석탑,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서 있다. 이곳에서는 주말마다 전통야외혼례식이 이뤄진다.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 948~1031)
본관 : 금주(衿州 : 서울 관악구 봉천동 現 서울대 후문쪽 낙성대) ,
별칭 : 초명 은천, 추충협모안국공신
지정번호 서울기념물 제3호
소재지 : 서울 관악구 봉천동 218-14 (현 서울대 후문 입구 낙성대)
낙성대유지(落星臺遺址)
1974년 8월 21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관악산 산자락에 위치하며, 강감찬이 태어난 고려시대에는 금천이라고 불린 곳으로, 원래 여기에는 그의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한 사리탑식의 삼층탑이 있었다.
훗날 마을 사람들이 강감찬이 태어난 옛터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의 생가가 있던 곳에 ‘낙성대’라는 글자를 새긴 기념비와 사리탑식의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정기를 없애기 위하여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었으며, 탑 안에 있던 보물도 모두 훔쳐갔다고 한다. 또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고,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까지도 부수어 놓았다고 한다.
1964년 탑을 보수하고 1972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하였다. 1973∼1974년에 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안보의 의표로 삼게 하고자 출생 유적지를 정화하여 낙성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그 경내에 새로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원래 이곳에 있던 석탑을 옮겼다. 그리고 그 옛터인 낙성재유지에는 유허비를 세워 강감찬이 탄생한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 탑을 촬영 후 흑백 모드를 변환시키지 않아 본의 아니게 흑백 사진이 많습니다.
▲ 낙성대 사당앞에 있는 사적비 ⓒ 2007. 한국의산천
이 곳을 낙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 마침 이 고을을 지나던 중국 사신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상히 여겨 관원들을 시켜 그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 보도록 하였더니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기가 바로 강감찬이며, 후에 당나라 사시이 와서 만나보고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化身)임을 확인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 낙성대 사적비 (글 이은상)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인헌공 강감찬 장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 승지, 중추원사, 이부상서,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사당 안국사 ⓒ 2007 한국의산천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중협모안 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이 있다.
▲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사당 안국사 입구 ⓒ 2007 한국의산천
▲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사당 안국사 ⓒ 2007 한국의산천
▲ 고려의 명장 강감찬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귀주대첩 (龜州大捷 구주대첩)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강감찬(姜邯贊)이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싸움. 이에 앞서 거란은 두 차례나 대규모로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려에게 강동6주(江東六州)를 개척하는 기회만을 제공하였다. 그에 큰 원한을 품고 있던 거란의 성종(聖宗)은 마침내 1018년 소배압(蕭排押)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또다시 제3차의 침입을 하게 하였다. 이같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에서는 당시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였던 강감찬을 총사령관인 상원수로 삼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맞아 싸우게 하였다. 영주(寧州)에 둔을 치고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른 강감찬 등은 먼저 정예기병 1만2천명을 뽑아 산기슭에 매복시킨 뒤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기다리다가 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며 기습하여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곧바로 서울인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강민첨에게 공격을 당하여 자주(慈州)에서 패전한 데 이어 마탄(馬灘)에서는 조원(趙元)이 거느린 고려군에게 공격을 당하여 다시 만여명이 전사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해를 넘기면서도 강감찬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데다가 수도 일원의 방비가 철통같아 도저히 공략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 소배압은 전의를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러가던 거란군은 연주(漣州)와 위주(渭州)에서 다시 많은 전력의 손실을 보고, 2월에는 구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과 함께 공격하여 적을 거의 섬멸해 10만명 가운데 겨우 수천명만이 살아서 돌아가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유명한 구주대첩인 것이다. <고려사>에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당시 구주대첩의 성과는 우리나라 전쟁사상 길이 빛나는 것이었다. 패전에 접한 거란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신을 보내,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보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질책하였다 한다. 이 구주대첩으로 거란의 성종은 다시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되어, 이후 양국간에는 화의의 교섭이 진행돼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 고려의 명장 강감찬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낙성대(落星垈)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외적을 물리친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의 영웅인 고려의 명장 강감찬 동상 그는 경주에서 금주(衿州)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이 된 궁진(弓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2년(983) 과거에 급제한 뒤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현종 9년(1018) 12월 소배압이 10만 대군의 거란군을 이끌고 고려를 세번째 침공했을 때는 총사령관격인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의주 위원면)에서는 수공(水攻)과 매복 공격을 적절히 구사하는가 하면 구성에서는 정벌을 포기하고 퇴각하는 적을 불과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갈 만큼 철저히 격멸하는 등 탁월한 전략전술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거란은 무력으로 고려를 굴목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되었고, 고려 국왕이 거란 조정에 친히 조회하라는 주장과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 고려의 명장 강감찬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전해오는 이야기 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그의 빛나는 생애와 공적은 차츰 미화되고 변형되다가 마침내 신비화되어 숱한 민담과 설화를 만들어냈다. 그에 얽힌 이야기는 다양하다. 1.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으로 들어서다가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전을 시켜 가보도록 하였더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신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기르니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다. 뒷날 송(宋)의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말하길, '문곡성(文曲星: 九星의 네번째 별로 文星 이라고도 함)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더니 지그 여기에 있군요'라고 했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의 출생지인 낙성대, 곧 '별이 떨어진 곳'이란 지명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 구전설화에는 또 이런 것이 있다. 그가 소년의 나이로 한 고을의 원님이 되어 부임했다. 어린 그를 본 관속들은 공공연히 얕잡아보았는데, 어느날 강감찬이 관속들을 불러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집어넣어보라고 명한다. 관속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호통을 쳤다.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 이렇게 해서 관속들의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3. 그가 어느 고을에 부임하여 여름날 업무를 보는데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아전에게 부적을 써주면서 못에 던지게 했더니 다시는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에 전승되고 있다. 그가 호랑이를 퇴치했다는 설화도 있는데,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년 묵은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해친다는 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 크게 구짖고는 앞으로는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그 후로 호환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기백이 넘치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낙성대(공원)의 봄 ⓒ 2007. 한국의산천 ▲ 명장 강감찬 장군의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 귀여운 손주를 촬영하는 행복한 할머니 ⓒ 2007 한국의산천
▲ 봄나들이 나와서 손주를 촬영해 주고 확인하는 멋진 할머니 ⓒ 2007 한국의산천
♣ 업무차 서울대학교에 갔다가 잠시 둘러 보았습니다. 업무에 쫓기다보니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답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낙성대 가는 길
남부 순환도로상의 지하철 서울대역에서 사당 방면으로 가다보면 낙성대라는 지명의 입간판이 보임 (서울대 후문으로 가는 길) 서울대 후문쪽으로 15분 소요.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로부터 500m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