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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맹씨행단

by 한국의산천 2007. 4. 9.

맹씨행단(孟氏杏壇), 맹사성 고택

2007. 4. 8일. 일요일 날씨 안개, 흐림  [ 한국의산천 ]

 

05:00 성산대교 출발 

아산만 방조제 - 공세리 성당 - 광덕산(699.3m) - 강당사,관선제 - 외암마을 - 맹씨행단. 

 

아산 광덕산(699m) 4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외암리 강단사를 돌아보고 이곳 맹씨행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과 들에 봄기운이 가득한 길을 따라 설화산 자락에 자리한 맹사성 고택으로 들어섰다. 집 그 자체가 선조의 기풍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듯 고색창연하게 옛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아산시에서 공주 유규방면으로 약 20분정도 가다보면 왼쪽으로 아주 커다란 접시 안테나가 보이며 그 뒤로는 높은 산이 이어가고 있다.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외암마을의 뒷산 해발 (448m)인 설화산이다. 오암마을에서 설화산 반대편 자락에는 조선 초의 명재상인 맹사성(1360∼1438)의 고택으로 알려진 맹씨행단(孟氏杏壇)이 북향집으로 자리잡고 있다.

찾아가는 길은 충남 온양에서 천안 방향으로 약 2.5km쯤 가다 남리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3km쯤 가면 중리라는 마을이 나온다.(도로변에 이정표 있음)
이 마을에 아주 오래된 집이 하나 있다. 이 고택이 바로 황희 정승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인 고불(古佛) 맹사성 정승이 살던 집이다. 사람들은 이 고택을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檀)이 있는 집이라 해서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고 부른다. 맹씨행단은 현재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맹사성 정승 기념관 ⓒ 2007. 한국의산천 우관동  

맹사성 기념관 오른쪽에 고택출입문이 있으며 맹씨행단도 자리하고 있다.

 

소를 타고 다니셨다는 청백리 맹사성(孟思誠 ) 어르신

 

※ 청백리 (淸'白吏) 란?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총 219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맹사성·황희·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

 

 

▲ 어제사액(御製賜額) 1750년 (영조 26년) 9월 22일) ⓒ 2007. 한국의산천 

 

기념관내 벽에는 안빈낙도와 유유자적한 선비의 생활을 읊은 한국 최초의 연시조 “강호사시갚가 걸려 있고 한 쪽에는 영조대왕이 내린 다음 여덟 자가 걸려 있는데 이것이 맹사성 대감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忠孝世業(충효세업: 충과 효를 대대로 실천해 왔으며)
淸白家聲(청백가성 : 청렴과 결백은 가문의 영예로다) 

 

 

맹사성 정승의 유물 전시관에는 대감이 즐겨 읽던 몇 권의 책과, 벼루, 붓 그리고 즐겨 불던 대금이 있다. 

 

 

▲ 국도에서 마을로 약 200m 들어가면 맹사성 고택이 나온다. ⓒ2007 한국의산천

 

고불 맹사성 (孟思誠) 1360(공민왕 9) ~ 1438(세종 20)

출생지 : 개성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맹사성 선생은 1360년(고려 공민왕 9년) 지금의 개성 근교 농촌에서 아버지 맹희도(孟希道)와 어머니 홍양조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에서 10세 사이에 한산(서천)을 거쳐 지금의 아산시 배방면 중리(행단)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간혹 맹사성 정승의 출생지를 온양으로 기재되어 있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오류이며 맹사성 어르신의 고향은 개성이다) 

효성이 지극한 맹사성은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7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어머니를 추모했으며 계속 3년 동안 묘막생활을 했다고 한다. 

 

태종대왕 때 맹사성의 부친이 위독해지자 평소에 맹사성의 효성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던 태종은 맹사성을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부친을 간호하게 했고, 1418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나라에서는 효자정문과 효자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동포(東浦)이며 고려말에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최영(崔瑩)의 손녀사위이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기거랑, 사인, 우헌납, 수원판관, 내사사인 등을 역임했다. 조선에 들어와 예조의랑, 간의우산기상시, 간의좌산기상시, 공주목사를 지냈다. 태종초에 좌사간의대부, 대언, 이조참의를 거쳐,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으로 진표사(進表使)의 시종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한성부윤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 판충주목사, 풍해도도관찰사, 이조참판, 예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417년 생원시의 시관(試官),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의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1427년 우의정,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음률에 밝아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1411년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예조는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도록 건의했으며, 풍해도도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도 영의정이던 하륜(河崙)이 서울에 머물면서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태종실록〉 편찬에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했다. 청백했으며 관직이 낮은 사람이라도 예로 잘 접대해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맹사성 고택 대문 ⓒ 2007. 한국의산천

 

현재 이곳에는 맹사성 어르신의 21대손 맹건식님이 살고 계시며 맹건식님의 師母님이신 성여사님께서는 방문객을 반가이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특별히 볼 것은 없으나, 맹사성 그 어르신 처럼 청렴결백하게 사는 것이 가장 살 사는 것이라고 청백리 정신을 강조하신 그 말씀이 가슴깊이 남아있습니다.

 

창녕 성씨 이신 성여사님은 성삼문의 후손이시며 오늘도 집 마당에서 소박하신 촌부의 복장으로 마늘을 다듬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할머니와 꼭 같은 모습이셨습니다. 

   

 

▲ 맹씨행단이라는 말을 낳게한 두그루의 은행나무ⓒ 2007. 한국의산천

 

은행나무(쌍행수)

본채 밖에는 는 1,400여 년경에 심어져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랐다. 맹사성 대감이 9세에 직접 심었다고 하는 600여년 된 은행나무가 두 그루가 지금도 의연히 서 있어 고택과 함께 흘러 간 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은행나무 두 그루는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가을이면 해마다 다섯 가마씩의 은행을 선물한다고 한다.  

가을이 오면 다시 꼭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 맹씨행단 ⓒ 2007 한국의산천

 

본시 행단(杏壇 행단 杏: 살구나무 행. 제터 단)은 공자가 은행나무 위에서 가르쳤다는 얘기에서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을 상징한다.

 

맹사성 고택은 청백리답게 검소한 고택이며, 경내에는 세덕사(世德祠), 구괴정(九槐亭)과 마당에는 두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그래서 행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맹사성이 뜰 안에 은행나무를 심고 후학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해서 맹씨 행단으로 불린다. 

 

은행나무가 있는 맹씨행단과 고택 주위에는 키 큰 소나무와 커다란 고목이 많이 풍경이 운치있고 아름답다.

 

 

 ▲ 맹사성 고택  ⓒ 2007. 한국의산천

 

맹사성 고택을 고택을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檀)이 있는 집이라 해서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고 부른다. 맹씨행단은 현재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시원한 통풍을 할 수 있는 창호 ⓒ 2007. 한국의산천

 

고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21대손인 맹건식씨가 기거하는 안채가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맹씨행단과 고택으로 들어가는 담장 문이 있다.

 

1388년 (우왕 14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무민공이 죽임을 당하여 비어있던 집을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한산(충남 서천)을 거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한 집이다.  

 

1330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맹씨행단은 현재 맹사성 정승의 21대 손인 맹건식씨가 관리하고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학창시절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 <강호사시가>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이 봄에 이곳에도 흥예겨워 매화가 환하게 피었구나.

 

江湖四時歌(강호사시가)

- 맹사성

江湖(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흥)이 절로난다.
濁樂 溪邊(탁요계변)에 錦鱗魚(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閒暇(한가) 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江湖(강호)에 녀름이 드니 草堂(초당)에 일이 업다.
有信(유신)한 江波(강파)는 보내나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늘해 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江湖(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잇다.
小艇(소정)에 그물 시러 흘리두  여 더뎌 주고,
이 몸이 消日(소일) 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江湖(강호)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픠 자히 남다.
삿갓 빗기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 해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출전: 청구영언
연대 : 조선 세종

<강호사시가>는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가 한가한 세월을 보낼 때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우리의 역사상 최초의 연시조(聯詩調)로써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아울러 유가(儒家)의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가 되는 작품으로 학창시절, 국어 시험에 자주 나온다고 하기에 참 열심히 외우던 시조이다. 

 

 

▲ 고택의 측면  ⓒ 2007. 한국의산천  

 

맹씨 고택은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2월 무민공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으며  무민공이 실재 거쳐 하였던 집이다. 

 

 

 

▲ 고택의 측면 ⓒ 2007. 한국의산천

 

최영장군과 고불의 인연

 

고불과 최영장군은 한 마을에 살았다. 최영장군의 집앞에는 배나무가 몇그루 있었다. 고불이 다섯 살 때의 일인데,최영장군은 아직도 햇볕이 따가운 초가을 날씨에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용이 짙은 안개속에 배나무 꼭대기에서 용트림을 하며 승천하려고 하는 꿈을 꾸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고불 맹사성이 집앞 배나무에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거 배를 따고 있는게 뉘집 아들인고"하고 점잖게 물으니 그아이는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맹 희자 도자입니다"하고 겸연쩍어 하면서 배나무에서 내려와 정중히 절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최영장군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아버지가 맹희도라면 오 년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온 동네가 떠들썩했던 바로그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꿈에 배나무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아이가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 또한예사 아이가 아니어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집 아래쪽에 사는 이부상서 맹 유(고불의 조부)의집을 방문하여 꿈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고불은 최영장군의 손녀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맹온재(孟縕在 글 참조)>

 

 

ⓒ 2007 한국의산천 

 

효성이 지극한 맹사성이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몇 번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받아주지 않았다.
만년에 가서야 벼슬에 물러나 낙향한 그는 79세를 일기로 온양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긴 것은 옥피리 하나뿐이었다.

청백리 고불의 생활철학은 청빈 낙도(淸貧樂道)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고향을 오고갈 때 결코 관복을 입거나 공무용 교통편인 역마를 이용하지 않았다. 또 촌로의 행색으로 소를 타고 오고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의 집은 비가 샐 정도였다.

 
고불이 세상을 떠나던 날 세종은 문무백관에게 휴무를 명하고 크게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그에게 ‘충성과 믿음을 예로 삼았으니 文이요, 청렴과 결백함을 절도있게 지켰으니 貞’이란 뜻의 시호를 내렸다. 


 

고불의 청백리 사례(1)  

 

새로 장만한 고불의 집은 청빈거사의 집답게 작고 허술했다.

고불의 우의정때의 일이다. 국사를 의논하기위하여 병조판서가 고불정승의 집을 찾아왔다. 마침 7월장마때라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때가 많았다. 고불은 병조판서와 한시간 가까이 국사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소낙비가 쏟아졌다. 고불의 집은 비가 새어 가구등 세간살이가 모두 물에 젖었고 두사람은 삿갓을 쓰고 앉아 대화를 했다. 소나기가 멎자 병조판서가 즉시 고불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귀가한 병조판서는 말하기를 "판서를 4조나 역임했고 우의정이라면 일국의 재상인데 비가 새는 집에 살다니" 하고 고불의 청백리 정신에 감탄하여 자기집 행랑채를 부수고 행랑들 모두를 내어 보냈다는 사례가 있다.

 

 

 

▲ 고택의 측면 ⓒ 2007. 한국의산천

 

고불의 청백리 사례 (2)

 

고불은 효성이 지극하여 자주 온양으로 근친하러 갔는데, 그때마다 하인 하나만 데리고 소를 타고 왕래하였다.
왕래할 때마다 그가 고관인줄 모르게 허술한 옷차림이 소박하기만 하여 촌 늙은이와 같았다. 평소나 다름없이 개인적으로 나들이 할 때는 언제나 정장을 피했다.

 

온양에 근친하러 오고 갈 때에도 도중에 있는 지방관에게 폐가 될까봐 들리지도 않고 특히 날이 저물어 도중에 숙식할 때는 역리의 소개로 간편하게 숙식을 하는 편이어서 고불은 신분을 역리에게 단단히 경고하여 모르게 하고 다녔다.

하루는 양성과 진위 두현감이 불이 근친하려고 온양에 내려 온다는 말을 듣고한성에서 온양가는 길 도중에 있는 정승을 맞이하기 위하여 연못가 정자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융숭히 대접하여승진이나 해볼까 하는 허영심에서였다. 이때 고불은 하인과 같이 현감들이 있는 앞으로 검은 소를 타고 어슬렁 어슬렁 가고 있었다. 이를 본 현감들은 마땅치 않게 여기고 하인들을 불러 소타고 가는 일행을 "무례하고 거만하다"하며 꾸짖게하였다. 현감이 보낸 하인의 말을 다 듣고 있던 고불은 그 하인에게 이르기를 "내소타고 내마음대로 나들이 하는데 무슨상관인가, 나를 알고 싶거든 온양 사는 맹고불이라고 가서 현감에게 여쭈어라"라고 말하면서 그대로 유유자적 먼산만 바라보고 갔었다. 이 말을 들은 하인들은 맹꼬불? 맹꼬불? 하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고불이 한말을 우스꽝스럽게 현감에게 일러바쳤다.

 

두 현감은 이때 감이 잡힌 듯 맹대감의 호가 고불인 것을 알아차리고 혼비백산하여 연못가에 있는 평상에서 놀라 달아나다가 허리띠에 차고 있던 관인을 연못에 빠뜨렸다. 그래서 그 연못을 인침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고불은 개인적이거나 공적이거나를 막론하고 나들이를 할 때 일체 남의 신세를지지 않고 청백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 고택의 후면ⓒ 2007. 한국의산천

 

 

▲ 고택 창호와 문고리 ⓒ 2007. 한국의산천

 

 

 ▲ 세덕사 ⓒ 2007. 한국의산천 

 

맹사성 고택  바로 옆 뒤쪽에 자리한 사당으로 고려말 이군불사(二君不事)의 고결한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두문동 72현(賢) 의 한분인 맹유 상서공, 맹희도 돌포공과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 문정공등 신창맹씨 선조 3대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 신창 맹씨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 세덕사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 세덕사 ⓒ 2007. 한국의산천

 

 

 

 

▲ 구괴정 가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 구괴정 ⓒ 2007. 한국의산천

 

구괴정(九槐亭)

이 정각은 조선시대 명상이신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정승이 방촌 황희, 독수와,권진 정승이 함께 느티나무 세그루씩 모두 아홉그루를 심어 구괴정이라 명명한 정각으로 일명 삼상당(三相堂)이라고도 한다.  

 

600여년전 인적이 드믄 이곳은  설화산(448m)을 배경으로 앞에 북풍을 막아주는 배방산과 금곡천의 맑은 물이 만궁형으로 흘러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을 들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삼(三) 정승이 국정을 논의를 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그중 두어그루만이 쇠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하였던 500년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구괴정 앞의 느티나무 ⓒ 2007. 한국의산천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그중 두어그루만이 쇠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하였던 500년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고택의 담장 ⓒ 2007. 한국의산천 

 

오래된 담을 따라 한바퀴 돌고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편안해 짐을 느낄 수 있다. 고택을 에워 싼 송림과 고목에서 나오는 좋은 향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선조의 청백리 정신이 물질 문명이 발달한 금전 만능의 시대에 우리 후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것이다.  

 

 아름다운 구괴정 풍경 더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22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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