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隆陵),건릉(建陵) 사적 206호
(위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1-1)[오산 물향기 수목원, 수원 융건릉 답사 2006. 5. 5.]
세월은 흘러도 아픔은 남아
2006년 5월 5일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어린이날이기에 입장객중 어린이들에게는 두꺼운 노트한권과 샤프펜슬을 선물로 주었다.
ⓒ2006 한국의산천.
융릉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장헌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능은 건릉(健陵)이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서 1744년(영조20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장조가 세상을 떠난 뒤 혜빈, 정조 즉위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고, 뒤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에 추존되었다.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閑中錄)을 남겨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건릉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정조는 장조(장헌세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영조35년) 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년) 연로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재를 재정비하기위하여 영조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며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융,건릉 정문 매표소를 들어서서 융릉으로는 약 350m, 건릉으로는 약 450m 거리이다.
ⓒ2006 한국의산천.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2006 한국의산천.
세월은 흘러도 아픔은 남는 법.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장조(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맏아들 진종(효장세자)이 요절하자 영조 12년(1736년)에 두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그는 매우 영특하였으며 글씨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다고 전한다.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의으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그 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심지어 잡은 송충이를 입으로 씹어 송충구제를 독려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각별하게 하며 송충이를 직접잡고 잡은 송충이를 씹어서 보여줌으로서 송충이 구제작업을 독려하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금도 빽빽한 송림과 상수리 나무,잔디로 덥혀 흙을 볼수없는 이곳의 초록 풍경은 정조의 각별한 정성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어느왕릉보다 아름답고 뛰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다.
26만평의 드넓은 곳이 송림과 황금잔디로 뒤덮혀 별천지를 이루는 곳으로 지금은 산책로도 개설되어있어 가족단위의 고적답사 나들이나 역사 탐방 학습훈련장으로 적극 추천드립니다.
정조는 능에서 1.5km 떨어진 용주사를 증축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50여 목판과함께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 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 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대왕이 심었다는 대웅전앞 회양목은 수령이 무려 200여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264호다.
ⓒ2006 한국의산천.
우리의 자부심 원대황교 (元大皇橋)수원의 남쪽 경계인 화성군 태안면 황계리(黃鷄里)에 '大皇橋' 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이 다리의 이름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즈음 조정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사신은 상복 차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이 사신이 중국에 도착하니 공교롭게도 대비가 죽어 상중(喪中)이었는데, 상복을 제대로 차려 입고 들어가니 중국 조정에서는 그 선견지명에 놀라 감히 대황교 명칭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다리는 현재 융능 바로 앞을 흐르는 개울 앞에 놓여있으며 원대황교(元大皇橋)라 쓰여 있다. 세월의 풍상 속에 망가지고 헐리어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을 1970년 역사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남은 석재 일부를 사용하여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다.
ⓒ2006 한국의산천. 원대황교를 지나서 좌측으로는 둥근 연못이 있다. 연못안에는 큰 잉어도 있고 작은 고기도 있다.
ⓒ2006 한국의산천. 융,건릉 주변은 키가 높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하늘을 가릴듯이 빼곡히 심어져 있다.
ⓒ2006 한국의산천. 원대황교
ⓒ2006 한국의산천.
ⓒ2006 한국의산천.
ⓒ2006 한국의산천.
빽빽한 소나무밭 사이로 양탄자처럼 잔디가 깔려있고 가족동반 탐방객들이 자리를 깔고 쉬고 있다.
ⓒ2006 한국의산천.
ⓒ2006 한국의산천. 융건릉 재실.
왕릉을 답사하게 되면 언제나 태정태세 문단세를 흥얼 거리게 된다.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순종(純宗).
ⓒ2006 한국의산천.
ⓒ2006 한국의산천.
ⓒ2006 한국의산천.
화성 팔경중 제 1경 융건 백설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번지에 위치한 융건능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효의 상징으로서, 정문에서 볼때 오른편에 있는 융능은 정조대왕의 생부인 장헌세자(일명 : 사도세자, 후에 장조로 추존)와 경의왕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의 합장능이며, 왼편의 건능은 정조와 효의 왕후의 합장능이다.
정조대왕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을(뒤주속에 갇혀 죽음) 애석해하며 양주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겼는데 어느날 아버지의 능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 먹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행차를 서둘러 산에 와보니 송충이의 기승이 목불인견이라, 정조가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이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융건능은 용주사와 함께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유적으로 효(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답사지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할만하다. 특히, 능 전역에 빽빽히 들어선 노송의 백설이 덮힌 풍경은 세인들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로 빠지게하는 장관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융건릉 가는 길
신갈-안산간 고속도로 동수원IC 또는 북수원IC에서 수원 시내로 진입, 수원역 지하차도를 이용 발안,남양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고색동을 지나 오목천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여기서 약 500m 가면 발안,태안,수원대 방면의 수영리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태안,수원대 방면으로 약 5km 직진하면 좌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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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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