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역사, 아픔의 역사 명성황후.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명성황후 생가와 신륵사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에서 나오면서 여주방면으로 우회전하면 200m 거리에 우측으로 명성황후 생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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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는 새벽 해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라 [2005.7월19일(화) 한국의산천 ]
▲ 대신면에서 본 이정표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 명성황후 기념관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 하마비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이 비석앞을 지날때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던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1413(태종13년)에 최초로 종묘와 궐문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을 세워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새우게 된것이다.
하마비는 왕궁,향교 또는 명사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앞에 세워져있는데 이것은 민유중선생의 묘와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어서 그 분들에 대한 경의 표시로 말에서 내렸음을 알수있다.
(비석 표면이 훼손된것은 6.25때 북한군의 총탄 흔적이다)
▲ 명성황후 생가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살해당한 후 뒷산에 묻혔다. .
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 해 11월국장이 거행되었다.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붕어하자 2월에 미금시로 이장되었다.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이다.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 이외의 여러 조각작품이 있어 잠시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이곳에서 나와서 우회전하여 여주시내쪽으로 가다가 우회도로를 이용하여 여주대교를 건너 사거리에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가면 신륵사주차장과 집단상가지구가 나온다.(입장료 2,000원)
▲ 신륵사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 驪江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 普濟尊者 나옹화상 懶翁和尙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 후기 문인 김병익 金炳翼은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 儒學者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 牧隱 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
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
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신륵사 중수기는 세종의 능인 영릉 英陵 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이와 같이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가지를 들어 여주팔경驪州八景으로 일컬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이니,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 팔각정에서 바라본 황포돗배(엔진을 달고 달리는 배)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 신륵사 다층전탑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고려시대의 벽돌 탑. 보물 제226호. 높이 약 9.4m.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 강월헌(江月軒)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정자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보면 강물이 흐르는것이 아니라 내가 흘러감을 느끼게 된다. 강건너의 백사장이 태풍 루사로 인하여 모두 쓸려가고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강 풍경은 언제보아도 멋지다.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 경내의 식수대
주요문화재
1)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2)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3)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4)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5)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6)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7)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8)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주변유적지와 관광지
영월루, 세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 고달사지, 목아불교박물관, 파사성
여주여행안내
신륵사의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팔각정 모습의 관광 안내소가 있다.
이곳에는 친절하신 무척이나 친절하신 여성 관광 안내 전문가의 일어,영어,중국어등으로 외국인을 동반한 여주여행에도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정밀한 관광안내도를 무료로 구할수있다.
관광안내소 전화:031 - 887 - 2868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의산천)
휴가철입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 만들어 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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