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가는 왕실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皇女 덕혜옹주
[2010 · 1 · 22 · 금요일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덕혜옹주가 태어난 1912년은 마침 고종이 회갑이 되는 해였다. 한국에는 회갑에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를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만 1살때의 사진을 보면 부리부리하고 귀여운 눈동자가 어딘지 어머니 양귀인을 연상 시키기도 하지만, 커가면서 부터는 아버지 고종의 얼굴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알 수있다.
옹주(翁主) : 왕녀의 의미로 어머니가 측실(후궁)인 경우에 사용합니다 (어머니가 정비일때는 공주라고 합니다)
▲ 히노데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황녀) ⓒ 2010 한국의산천
조국과 일본이 모두 외면했던 망국의 황녀,
“내 가장 큰 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핏줄로 태어난 것입니다”
덕혜옹주가 태어 난것은 1912년, 그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부왕의 비호아래 그녀는 행복한 유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겨우 만 열두살이 된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도쿄의 여자학습원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도쿄에서 고독한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내성적인 성격의 소녀는 한층 더 말이 없어지고, 열일곱 살 때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공족의 일본인화를 기도하고 있던 일본이 그녀를 대마번주의 후예인 소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시켰습니다. 이 결혼으로 첫 딸 마사에가 태어나지만, 덕혜옹주의 병이 다시 악화되면서 전쟁 후에는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1962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병은 회복되지 않은 채,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1989년 비극적인 생을 마쳤습니다. -본문 중 저자의 말-
▲ 첫돌때의 모습 ▲ 히노데 소학교 시절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에 얻은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덕혜옹주는 부모와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서 덕수궁에 넘치는 기쁨과 활기를 불어 넣는 커다란 꽃송이가 되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월 25일 덕수궁 궁인 양씨 딸을 낳다. 양씨에게 당호를 내렸는데 복녕(福寧)이라 하였다.
▲ 덕수궁의 정전(正展) 중화전 ⓒ 2010 한국의산천
1912년 덕수궁에서는 여자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그 소녀는 만 여섯 살 때 고종이 죽을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이 덕수궁에서 보냈다. 그 아이는 후에 덕혜옹주로 불리게 된다.
◀ 1923년경 덕혜옹주 ⓒ 2010 한국의산천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
고종황제의 막내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족,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고종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십대 시절을 보낸 그녀는 일본인과의 강제결혼, 7년간의 감금생활, 일방적인 이혼통보 등을 겪으면서 점점 무너진다. 오직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터전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만이 그녀를 붙들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은 일본 패망 후에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조선의 마지막 황녀
당시에는 모두가 외면했고,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 덕혜옹주
부왕 고종에게는 순종제를 비롯하여 의친왕, 영친왕의 세 아들이 있었고 막내따님으로 늦게야 덕혜공주를 얻었다.
고종은 손바닥에 쥔 보물처럼 덕혜옹주를 무척 사랑했다. 옹주의 나이 7살이 되자 덕수궁안 준명당에다 유치원을 특설해서 훌륭한 옹주가 되도록 훈육에 애썼다.
고종은 덕혜를 정말 손에 들어 온 보물처럼 귀여워하며 편히 쉬고 있을 때에는 무릎위에 앉혀 놓고 어전의 상궁들에게 " 이 갓난애 좀 보아라, 손을 만져 보아라" 라고 했다고 한다. 상궁들이 주군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어전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 황송하게 어찌 감히 아기씨의 손을 만져 보곘습니까? " 라고 대답하면, 고종은 괜찮다. 머리를 들어 웃고 있는 이 아이의 얼굴을 보아라"라고 했다 한다. 궁중에서 고종을 모셨던 상궁이 전하는 말이다.
▲ 즉조당에서 정관헌으로 들어가는 문 ⓒ 2010 한국의산천
덕수궁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어린시절 아치형의 아름다운 문을 지나 이곳을 뛰어 다니며 놀았을 것이다.
▲ 덕홍전에서 석어당으로 나가는 문 ⓒ 2010 한국의산천
◀ 학습원 시절의 덕혜옹주 ⓒ 2010 한국의산천
그녀는 이국땅에서 철저히 방치되었다가 37년 만에 쓸쓸히 조국으로 돌아온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총기가 돌 때마다 이런 글을 남겼다는 그녀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체념했다. 하지만 한평생 잊지 않았던 것은 나라 잃은 자의 설움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 주문한 책 두권이 도착했기에 틈틈히 읽고 있습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조선 황실 계보 ⓒ 2010 한국의산천
▲ 고종일가 ⓒ 2010 한국의산천
왼쪽부터 영친왕 이은, 순종, 고종, 윤비(순종비),덕혜옹주.
500년에 걸친 조선왕조 정사를 '조선왕조실록'이라 한다. 실록 가운데 덕혜옹주만큼 태어났을 때 환영받은 왕녀는 없었다고 전한다.
▲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 고종 황제, 순종효황후 윤씨(순종의 부인),
덕인당 김씨(의친왕의 부인), 의친왕의 큰 아들 이건.
고종은 정비였던 명성황후를 포함한 8명의 부인에게서 9남4녀를 뒀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0)과 덕혜 옹주(1912~1989) 넷뿐이었다.
▲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
가운데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덕혜옹주.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일본 거류민 학교라서 때로는 일본옷을 입업다고 합니다(1925년 촬영)
▲ 1931년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소 타케유끼 · 덕혜옹주 부부 (사진 출처:위키백과) ⓒ 2010 한국의산천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설은 외국으로 끌려간 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 결혼을 하게 되자 모든것이 구슬프고 귀찮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어머니의 죽음과 또한 여러가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 환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1962년 1월26일-
35살, 그녀가 사는 곳은... 정신병원
덕혜옹주는 1946년 이래 15년 남짓을 마츠자와 병원에서 지냈다. 이혼 후 부터치자면 6년 7개월이 지났다.
일본이 패전한 후 덕혜옹주는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혀있었다. 그녀가 왜 정신병원에 있는 것일까? 덕혜옹주는 사실 결혼하기 직전 조발성 치매증(정신분열증)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아버지 고종이 독살당한 후 일본으로의 강제유학, 어머니 양귀인, 오라비 순종의 사망. 그리고 정략결혼까지. 덕혜에게는 일본의 강압과 가혹한 운명에 저항할 그 어떤 수단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고통을 삭히는 것 밖에는.
1931년 5월 대마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적인 결혼을 한 후 2년 후 딸 마사에( 한국이름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유일한 혈육인 딸 (마사에 · 한국 이름 정혜) 역시 일본에서 한국인 어머니를 둔 이유로 마음적인 수모를 겪으며 그 역시 어머니 덕혜옹주만큼이나 서러운 삶을 살다가 1956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사에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의 투성이로 바다 투신설과 종가에 의한 살해설이 바로 그것이다.
"연꽃은 썩은 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매화는 엄동설한 중에 꽃을 피우지"
", , , , ,"
의친왕은 목소라를 낮춰 좀 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너는 어디에 있던지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
"마음속에 품은 이가 진정 네 벗이라. 함께 있는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호랑지국(虎狼之國)속에 있다 하여도 결코 네 중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덕혜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 '조국에 있는 순간에도 조국이 그리웠다'
열네 살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유학한 뒤 대마도 번주(藩主)의 후예와 정략 결혼한 고종 딸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14세 때 인질로 일본에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됐다. 인질로 끌려갔다가 51세가 돼서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 1962년 1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창덕궁 낙선재)
덕혜옹주는 조국의 국적도 잃어버린채로 남의 나라에서 유령처럼 떠돌다가 37년이 지나서야 쓸쓸히 조국 땅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약해진 육신과 정신으로 기억이 온전치 못했던 그녀가, 정신이 들 때마다 표현한 것은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준비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낮에 다녀갔던 전의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유모의 눈시울이 자꾸 붉어졌다
덕혜는 옛날을 떠올렸다. 어머니, 아바마마, 순종황제, 영친왕과 영비의 얼굴이 차례로 스쳤다.
불쑥 덕혜가 물었다.
" 유모 내 아버지는 어찌 되셨나요?"
" 돌아 가셨습니다"
유모가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덕혜가 슬픈 얼굴로 또 다시 물었다.
" 내 어머니는 어찌 되셨나요?""
" 돌아 가셨나이다. 그리운 이들은 모두 사라졌나이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모든일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모든 것은 사라짐으로써 덧없나니,"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 !
덕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숨이 천천히 잦아 들었다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꿈길이 꽃길이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었다 덕혜의 입가에 생애 처음으로 평안한 미소가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皇女)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 한국의산천 >>> http://blog.daum.net/koreasan ⓒ 2010 한국의산천
덕혜옹주 연보(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 만76세)
구왕가의 일족으로 고종이 60세가 되던 해에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이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능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있다. 그의 단촐한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
1912년 5월 25일 이덕혜 덕수궁에서 태어남
1919년 1월 21일 덕혜 부친인 고종사망
1921년 4월 히노데소학교 제 2학년 입학
1931년 5월 이덕혜와 소 타케유끼 결혼식 거행
1932년 8월 14일 외동딸 소 마사에 탄생
1955년 6월 소 타케유끼와 이혼
1956년 8월 26일 소 마사에 행방불명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 퇴진
1961년 5월16일 박정희, 군사혁명으로 국가 최고회의 의장이 됨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 하네다에서 특별기편으로 고국에 돌아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1985년 4월 22일 소 타케유끼 사망 (만77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 낙선재에서 사망 (만76세)
끝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덕혜옹주. 그리고 정신이 맑은 날 썼다는 낙서 한 장...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참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역사공간)
권비영 장편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다산책방)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정비석 산정무한 中에서-
덕수궁과 대한제국 그리고 덕혜옹주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425
'문화문학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의 노래 (0) | 2010.02.10 |
---|---|
덕수궁과 대한제국 그리고 덕혜옹주 (0) | 2010.01.27 |
영조 정조의 새해맞이 (0) | 2010.01.21 |
한림 사관 (0) | 2010.01.21 |
2010 신춘문예 당선 詩모음 (0) | 2010.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