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하기
[기사 옮김 : 한국의산천 ]
▲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세계일보 기획편 옮김 ⓒ 2010 한국의산천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덕수궁과 대한제국 그리고 덕혜옹주
‘황제의 나라’ 된 조선, 끝내 ‘망국의 설움’ 겪다
많은 이에게 덕수궁은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이해된다. 서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에게는 미술대회나 소풍 장소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몇 년 전부터 덕수궁 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문장 교대의식은 이제 덕수궁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100여년 전 덕수궁은 한국 근대사의 영광과 굴욕이 함께했던 곳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곳이자 고종황제가 가장 사랑한 공주 덕혜옹주가 태어난 곳이었다. 100년 전 격동의 근대사의 중심 공간이었던 덕수궁과 대한제국, 덕혜옹주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1897년 10월12일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고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1.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1895년 한 나라의 황후가 시해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전 공사 이노우에와 현 공사 미우가 기획하고 일본의 우익 청년들이 가담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아무리 허약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만행은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었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1896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바로 아관파천이다.
◇프러시아 제복을 입고 기념촬영한 고종황제.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여의 세월을 보낸 고종은 1897년 2월20일 거처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겼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대신에 덕수궁을 택한 것은 미국,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가까이 있어서 일본을 견제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1897년 8월16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부국강병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10월12일에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였다. 왕의 나라 조선이 황제의 나라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대부분 전왕이 사망하고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국왕의 즉위식은 경축 행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특히 기쁜 즉위식은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태종의 뒤를 이어 세종이 즉위한 것이다. 태종은 생전에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기에 세종의 즉위식은 기쁜 즉위식이 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고종이 왕위에 있다가 황제로 즉위한 경우이다. 고종의 즉위식은 고종 스스로가 황제가 되는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에 축하 분위기 속에서 치를 수가 있었다.
1899년 8월 고종은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제(大韓國制)’를 발표하여 황제에게 육해군의 통수권과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면권 등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다. 또한 국가의 자주성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국방과 재정,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근대적 기술학교들이 대거 설립되고, 교통과 통신을 근대화하는 사업들도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그리고 덕수궁은 ‘구본신참(舊本新參:옛 것을 근본하고 새것을 참작함)’과 민국(民國) 건설을 이념으로 제시한 고종의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중심 공간이 되었다.
#2. 고종 즉위식의 기록, 대례의궤
고종 즉위식의 모습은 1897년에 편찬된 ‘대례의궤(大禮儀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0월13일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의 빈전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오전 8시경 ‘대한’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였다. ‘대례의궤’의 말미에는 황제 즉위식에 필요한 책문(冊文)과 옥보(玉寶)를 가마에 싣고 환구단으로 향하는 36면의 반차도가 실려 있다. 고종의 황제 즉위식은 덕수궁 인근의 환구단에서 이루어졌다. 즉위식 하루 전인 10월11일 고종은 세자를 데리고 환구단으로 가서 제물과 제기를 살피고 돌아왔다. 이날 고종은 대신들과 함께 새 나라의 국호를 논의했다. 고종은 조선이 삼한의 땅을 통합한 것을 상기시키고 국호를 ‘대한’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국호가 되는 ‘대한민국’의 시원인 셈이다.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 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10월12일 고종은 국새를 싣고 환구단으로 가서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황금색 의자에 앉아 국새를 받았다. 옷은 12장(十二章)의 문장이 새겨진 곤면(袞冕)을 입었다. 그동안 조선의 왕들은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는데, 이제 당당한 황제의 복장을 갖춘 것이었다. 즉위식을 마친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와 태극전(즉조당)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이어 12시에 왕비를 황후로 책봉하였고, 2시에 왕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동안 ‘천세’만을 부르던 신하들은 ‘만세’를 세 번 불렀다. 이날 밤 서울 시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고 황제의 즉위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황제로 격상됨으로써 의궤의 제작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왕이 보는 ‘어람용 의궤’가 아닌 황제용 의궤가 따로 만들어졌고, 표지 빛깔 역시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120여년 전 덕수궁은 당당한 황제국 조선의 중심 공간이었으나 그 영광은 그리 길지는 못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하면서 덕수궁은 무너져가는 마지막 왕조의 모습을 목격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3. 비운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경성 일출소학교를 다닐 때의 덕혜옹주.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긴 슬픔이 가시지 않았던 2년 후 어느 봄날 덕수궁에서는 새 생명이 탄생하였다. 환갑을 맞은 고종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1912년 5월25일 고‘고종실록’은 ‘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으니 양씨에게 복녕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고 덕혜옹주(1912∼1989)의 출생을 알리고 있다. 50일 후인 7월13일 고종은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아기를 데려왔다. ‘고종실록’을 보면 아기에 대한 기록이 무척 잦아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만큼 고종의 옹주에 대한 사랑이 컸음을 보여준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특별히 유치원도 마련하였다.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은 황제의 편전이었으나 고종은 이곳을 ‘덕수궁의 꽃’ 옹주의 유치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황제의 위상마저 흔들렸던 시절, 옹주의 평안한 미래는 보장할 수 없었다. 특히 고종은 아들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 일본 황족인 마사코(이방자)와 혼인한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고종은 신임하던 시종 김황진에게 덕혜의 배필을 은밀히 부탁했다. 김황진은 자신의 조카 김장한을 천거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본 세력에 의해 김황진은 궁궐에서 쫓겨났고 결혼은 무산되었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고종의 죽음은 여덟 살 어린 옹주에게 큰 슬픔으로 자리를 잡았다. 1921년 옹주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충무로의 일출소학교에 다니며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고종 사망 이후 조선의 상징이 된 옹주에 대해 일제는 철저히 일본의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도쿄 유학의 명이 떨어졌다. 아예 옹주를 조선인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일제의 의도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 옹주를 만난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 여사는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내가 본 옹주와는 영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한 눈초리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보고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고 큰 상처를 입은 어린 옹주의 모습을 증언하기도 했다.
#4.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대한민국 우리나라”
◇일본에 머물던 덕혜옹주가 1962년 1월26일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서고 있다.
일본에 온 덕혜옹주는 천황가와 귀족 집안 자제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고종의 독살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인지 늘 보온병을 들고다닐 정도로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29년에는 생모인 귀인 양씨가 사망하였다. 잠시 귀국한 옹주는 검은 양장 차림으로 슬픔에 겨운 몸으로 창덕궁에 들어가 이전 어머니께서 계셨던 관물헌에서 잠깐 기거한 후 서둘러 일본 귀국길에 올랐다. 1931년 5월 덕혜옹주는 도쿄대 출신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옹주의 결혼 소식은 조선 백성들을 더욱 비탄에 빠지게 했다. ‘덕혜옹주는 양장을 입으시고 자동차로 소 백작 집에 이르러 11시25분부터 순일본식으로 혼례를 치르었다’는 짧은 보도가 있었지만, 일부 신문에서는 결혼식 사진에서 남편의 얼굴을 지웠고 이후 조선의 신문 기사에서 덕혜옹주는 사라졌다.
옹주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47년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남편이 백작의 지위를 잃었고, 옹주는 이 무렵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1955년 6월에는 남편과 이혼을 하면서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한국인에게 거의 잊혀졌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주를 찾는 데 소극적이었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김장한의 형)이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옹주를 찾아 귀국을 요청했지만 이승만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김을한은 박정희 의장을 찾아갔고 마침내 옹주의 귀국이 허락되었다.
1962년 덕혜옹주는 38년 만에 그렇게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불행하게도 조선 공주의 자격이 아니었다. 의식까지 거의 불명인 안타까운 상태였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7년간의 병원 생활 끝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72년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를 찾아왔지만 옹주는 만남을 거부했다. 1983년에 쓴 옹주의 낙서 한 장은 대한제국 마지막 공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하게 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 여사) 오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1989년 4월 78세로 사망한 옹주는 경기 남양주시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다.
1912년 실의한 고종에게 마지막 희망의 빛이 되어, ‘덕수궁의 꽃’으로 자라났던 덕혜옹주. 그러나 망국의 설움을 겪었던 대한제국 조선 황실의 운명처럼 그녀의 운명 또한 비극의 연속이었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오후 9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오랜만의 폭설로 눈 덮인 겨울의 서울. 덕수궁에서 100여년 전 근대의 격동기를 살아간 고종과 대한제국, 그리고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의 삶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출처 : 세계일보 / 글: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왕의 명칭에서 ‘祖’와 ‘宗’은 어떻게 다른가
조선일보 김기철 문화부 학술팀장
A: 개국 군주 또는 국난 치른 왕은 '祖',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은 '宗'
임금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를 모실 때 정하는 존호(尊號)를 '묘호'(廟號)라고 합니다. 묘호에는 종(宗)과 조(祖), 두 가지가 있는데 생전의 공적을 평가하여 붙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는 '조(祖)'를 썼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은 '종(宗)'을 붙였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태조로 칭한 것이 대표적이지요. 반정(反正)을 통해 즉위했거나 재위시에 큰 국난을 치른 임금들도 대체로 조(祖)의 묘호를 가지게 됐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 등이 그렇고, 반정은 아니지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도 같은 범주에 들어갑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중종도 인종 초에 '조'로 칭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중종이 성종의 직계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종'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우세하여 중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조'가 창업이나 중흥을 이룬 왕에게 붙인다는 원칙 때문에, '종'보다 격이 높다는 관념이 은연중에 유행했습니다. 영조와 정조<사진>(정조의 어진)·순조는 본래 영종과 정종·순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정조로, 철종 때 순조로 개정한 것입니다. 참고로 신라 왕 가운데 묘호를 쓴 이는 태종 무열왕밖에 없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만 조(祖)를 묘호로 썼습니다.
묘호는 원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열왕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자, 당나라 고종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너희 신라가 해외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람하게 썼으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 그 칭호를 고치라." '삼국유사'엔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이뤘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썼다고 맞서서 그 뜻을 관철시켰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다른 왕들은 묘호를 못 쓰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려와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런 묘호를 쓸 수 있었을까요? 고려 전기, 중국은 송·요·금이 서로 각축하면서 절대 패자(覇者)가 없었기에 고려가 황제를 일컬을 수 있는 국제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충렬왕·충선왕 등으로 묘호를 쓰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충실한 제후국임을 표방했으나 때로 중국의 협박을 받아가면서도 묘호만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면서도 내부적으로 자존의식을 키우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사대(事大)와 자주(自主)의 교묘한 줄타기'라는 거지요. [출처 조선일보 글 : 김기철 문화부 학술팀장]
"모든일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모든 것은 사라짐으로써 덧없나니,"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 !
덕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숨이 천천히 잦아 들었다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꿈길이 꽃길이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었다 덕혜의 입가에 생애 처음으로 평안한 미소가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皇女)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말미에서]
▲ 권비영 장편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다산책방)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역사공간)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 https://koreasan.tistory.com/15604422
홍유릉 부속림에 영면하신 덕혜옹주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5605277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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