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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영조 정조의 새해맞이

by 한국의산천 2010. 1. 21.

 영조·정조의 새해 맞이[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새해벽두 민심탐방…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는 새해맞이는 전통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의 국왕들은 새해 첫날을 분주하게 보냈다. 조정 신하들의 새해 문안을 받고 정전의 뜰에서 신년하례식을 했다. 지방의 관리들은 특산물을 왕에게 올렸으며, 왕은 세화(歲畵:새해를 축하하는 뜻에서 궁궐에서 하사하는 그림)와 같은 선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종묘와 경복궁을 찾기도 했다. 70세 영조와 40세 정조가 보낸 새해 하루의 모습을 통해서 조선시대 왕들의 새해 동선을 따라가 본다.

 

                    ◇ 영조                                                            ◇정조

#1. 영조의 새해 행차

궁궐의 새해 하루는 “왕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근정전에서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고, 경회루에서 종친과 2품 이상의 관원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중궁(中宮)도 역시 내전(內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처럼 새해를 맞아 왕과 신하가 모여 신년하례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도였다. 실록 이외에도 왕의 비서실에서 쓴 ‘승정원일기’와 왕의 일기 형식에서 출발한 ‘일성록’과 같은 자료에는 왕이 보낸 새해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63년(영조 39) 1월 1일의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칠순을 맞아 유난히 바쁜 거둥을 했던 영조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경희궁 경현당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한 영조는 여러 신하들이 성수(聖壽)가 칠순에 올랐다 하여 천안(天顔:용안)을 우러러 뵈올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선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진 종묘에 거둥했다. 이 거둥에는 도승지 심수, 좌승지 김효대, 우승지 이유수 및 사관(史官) 홍검·이승호 등이 수행했다. 종묘에 행차한 영조는 선왕들의 신위에 참배한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연(輦:왕의 가마)을 타고 시가로 나왔다.

시가로 들어선 국왕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날 영조가 처음 불러들인 이들은 국왕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나온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을 본 영조는 왕의 앞으로 나오게 한 뒤 나이 순서대로 서게 하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영조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밖으로 나아가 가마를 멈추게 하고 지방 향리의 우두머리인 각 읍 호장(戶長)들을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영조는 재임 중 궁궐 앞 문 밖에까지 나가 백성들을 자주 만났다. 균역법 등 주요 현안을 결정할 때마다 백성들의 현장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내가 비록 칠순이지만 마음만은 오막살이집과 같아 오늘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하물며 삼남지방(경상, 전라, 충청)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절실하다. 해가 시작되기 전에 모두 진휼(賑恤)을 베풀었는데, 지금 백성들은 근심이 없는가?”라고 물었고, 나주 호장은 “진휼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흩어지는 근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영조는 왕 앞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말임을 간파하고, “너희의 말이 이와 같지만 어사가 보고하는 것과 서로 다르다. 내가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거둥은 중요한 바가 있으니, 지난해 애휼(愛恤)의 뜻을 생각하여 너희들을 소견하는 것이므로 품은 바가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고 하며 솔직히 민원을 말할 것을 독려하였다. 호장들과의 면담이 끝난 후 영조는 이들에게 머물지 말고 속히 내려가라고 지시하였다. 현장에서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는 의미였다.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 자리에 있던 경모궁의 옛 모습.

경모궁은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이다. 정조는 40세가 되던 해인 1791년 예조 관리들의 새해 인사를 받은 뒤 종묘와 경모궁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했다.

#2. 종묘, 기로소, 경복궁으로 바쁘게 이어지는 하루

영조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로 다시 향했다. 영조는 신위가 모셔진 전각을 살핀 뒤에 수리가 필요한 부분을 직접 만지며 영의정 신만(申晩) 등에게 고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영조는 종각에서 잠시 머물며 시전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그리고 책임자에게 문제점 해결을 지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시전상인과의 면담에 이어 영조는 기로소(耆老所)의 기영각(耆英閣)으로 갔다. 기영각은 연로한 고위 문신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인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해 만든 전각이다. 유교 사상의 핵심인 경로사상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왕으로는 태조와 숙종에 이어 영조가 들어갔으니 이곳에 대한 영조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기영각에 들어간 영조는 이곳의 방문을 기념하여 ‘기영각전 칠순군신(耆英閣前七旬君臣)’ 글씨를 직접 남겼다.

새해 거둥은 경복궁까지 이어졌다. 당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에 복구되지 못한 채 터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 영조가 거둥한 것은 비록 빈 터로 남아 있었지만 조선의 정궁인 국가의 상징 경복궁을 국왕이 여전히 잊지 않고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경복궁 앞에 이르러 영조는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유생들을 대상으로 내일 글을 짓는 시험을 실시하겠노라고 했다. 영조는 숭현문을 거쳐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을 찾아 사적인 예를 다하였다.

이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거쳐 사정전의 옛 터에 이르러 작은 막차를 세우고 근정전 쪽으로 향했다. 근정전 앞에서 신하들의 진하(陳賀)를 받은 영조는 사면령을 내렸다. 영조의 행보는 늦은밤까지 이어졌고, 출발한 궁궐 경희궁에 다시 돌아오면서 새해 하루 영조의 긴 여정은 끝이 났다. 종묘와 육상궁에서의 새해 인사, 조선의 상징 경복궁 터 답사를 통하여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지방 호장과 노인, 유생 등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영조는 70세가 되는 1763년 새해의 긴 하루를 보냈다.

 

#3. 정조의 새해맞이

 

◇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은 1795년 수원화성 낙남헌에서 수원부 노인 380여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을 묘사한 김홍도의 ‘낙남헌양로연도’. 영조와 정조는 새해 첫날 유교 사상의 핵심인 경로행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1791년(정조 15)은 정조가 40세 되던 해였다. 왕으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의 새해 첫날 정조는 먼저 역대 왕의 어진(御眞:왕의 초상)을 봉안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이어 예조 관리들의 인사를 받고, 4일에 종묘와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조는 종신(宗臣)으로서 가장 나이가 많고 벼슬한 지 오래된 서계군에 대해 별도로 음식물과 옷감을 주었다. 새해를 맞아 왕실의 친척 대표를 배려한 것이다. 나이가 많은 재상들에게는 세찬을 하사하였다.

정조는 교서를 내려 “판부사 이복원과 좌상은 대신이자 각신(閣臣)이다. 나이가 모두 70이 넘었지만 정력이 왕성하여 젊은이와 다름이 없다. 좌상이 근래에 혼자서 수고하는 것으로 말하면 젊은이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내가 항상 칭찬하고 감탄하고 있다. (…) 두 대신의 집에는 원래의 정식 외에 더 보내주고 이어서 낭관으로 하여금 문안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어 “신하로서 나이가 70이 넘었고 내외가 해로하는 자가 자그마치 13명이나 된다. 이런 경사스러운 때를 맞아 기축(祈祝)하는 일로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노인을 공경하는 정사는 또한 은혜를 베풀어 봉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연로한 신하들과 그 부인의 나이를 언급하였다. “지사 송제로는 81세이고 정부인 엄씨는 80세이며, 전 참판 서병덕은 80세이고 정부인 박씨는 74세이며, 전 참판 신응현은 70세이고 정부인 윤씨는 70세이다. 이상 여러 기로(耆老)들의 집에는 별도로 쌀과 고기를 주고 안사람들에게는 명주를 주고 이어서 오부(五部)의 낭청으로 하여금 문안하게 하라고 해당 조 및 한성부에 분부하라”고 하면서 조정에서 70세 이상 노인들과 그 부인을 각별히 챙길 것을 당부하였다.

 

#4. 농사를 권장하는 윤음을 내리다

이어 정조는 팔도에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綸音:왕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글)을 내렸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새해에도 농사에 매진할 것을 각 도의 관리들에게 당부한 것이다. 정조는 “내가 하늘과 조종(祖宗)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 지난해 경술년(1790년)에 나라에 원량(元良:세자)을 두게 되었고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성인이 탄생하신 해에 맞추어 상서로운 징조를 얻었으니 내가 온 나라와 더불어 그 경사를 함께하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은 언제나 은혜를 널리 베푸는 데 있고 거듭 풍년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은 금년에 더욱 간절하다”면서 세자(후의 순조)를 얻은 기쁨을 표시하였다.

 

정조는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 새해에는 언제나 권농 윤음을 내린 것은 곧 삼가 열성조께서 근본을 중시하고 농사에 힘쓰셨던 거룩한 법도를 계승한 것인데, 이해 이달에는 더욱더 간절하다. 원량이 나라의 근본이 되듯이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이 편안해야만 나라가 평안한 법이다. 둘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이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하면서도 명백하다. (…) 나는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소중히 여겨 ‘권농’이란 두 글자를 앞에 닥친 많은 일 가운데 첫째가는 급선무로 삼으려고 한다”면서 새해를 맞아 권농과 민본정책을 더욱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어 정조는 새해 계획을 발표하였다. 관례대로 했던 5일의 조참(朝參)은 거둥과 겹치므로 10일 전후로 연기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종묘와 경모궁 참배에 대한 경호 계획까지 세세히 점검하였다. 정조는 병조에서 종묘와 경모궁에 전알(展謁:찾아 뵙고 인사를 함)할 때 군병을 마련하는 방안을 보고하자, “훈련도감의 보병 15개 초(哨)와 마군 3개 초를 선상(先廂:앞에서 호위함)과 후상(後廂:뒤에서 호위함)으로 삼고, 금군 3개 번(番)이 가마를 수행하고, 금위영과 어영청은 머물러 진을 칠 것”을 지시하였다.

 

40세를 맞이한 정조의 새해 첫날은 선원전 행차, 조정의 70세 이상 대신들에 대한 배려, 권농 윤음의 반포, 종묘와 경모궁의 행차 점검, 1월 10일을 전후한 조참(朝參) 계획 확정 등으로 이뤄졌다. 영조와 정조의 새해 모습을 통하여 분주하게 국정을 구상하고 민심을 챙기던 왕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