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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조정과 백성이 최명길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by 한국의산천 2020. 4. 15.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4.21 03:14 | 수정 2020.04.21 16:57


[209] 국난에 대한 두 가지 자세 ③최명길을 간신으로 낙인찍은 '황제의 신하(陪臣)' 송시열
1671년 '삼학사전' 쓰며 최명길을 간신으로 묘사… 5년 뒤 최명길 부분 삭제
"나는 간신이라 한 적 없다" 펄쩍 뛰며 부인
1683년 노소론 분당… 두 달 뒤 '삼학사전' 후기에 "최명길 부분 삭제" 명시
간신 최명길 이미지 되살려 최명길 지지파 맹폭격… 事大를 이용해 권력 장악
송시열 무덤 비석에는 '황제 속국 조선 좌의정' 날짜는 '숭정 180년 후'
화양계곡 절벽에는 '황제 신하 송시열이 황제 땅에서 쓰나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1623년 인조반정 성공 나흘 뒤 왕위에 오른 능양군 이종이 선언했다. "금수(禽獸)의 땅이 다시 사람 세상이 되었다."(1623년 3월 17일 '인조실록') 사람 사는 세상은 4년 뒤 오랑캐 후금과 형제의 맹을 맺으며 균열이 갔다. 다시 10년 뒤 인조가 삼전도에서 이마를 아홉 번 찧었다. 세상은 금수의 시대로 회귀했다.


세 사람의 이상한 관계

1633년 9월 송시열(1607~1689)이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과거 시험관은 "마땅히 세상을 울리는 큰선비가 되리라"라고 예언했다.('송자대전 부록'2 연보) 송시열은 능참봉 직을 얻었으나 보름 만에 사직했다.

3년 뒤 병조판서가 인조에게 인사 추천서를 올렸다. "3년 전 장원급제한 송시열은 흔한 유학자가 아니기에 지역에서 함부로 그른 짓을 하지 못한다."(1636년 6월 11일 '인조실록') 송시열은 대군 사부로 임명돼 소현세자 동생인 봉림대군을 가르쳤다. 반년 뒤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최명길에 의해 실질적으로 종료됐다.

 

충북 괴산 화양동계곡에는 송시열이 꿈꾼 대명 사대주의 이상향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만동묘(萬東廟)'는 송시열이 죽고 유언에 따라 후학들이 만든 명나라 황제 사당이다. 마지막 황제 의종, 임진왜란 때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다. 저 급경사 계단을 오르려면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병자호란 후 정신적 혼란에 빠진 당시 권력층은 사라진 황제국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사대(事大)를 통해 성리학적 지배구조 안정을 꾀했다. 송시열은 주화파 최명길을 이 질서에 대한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다. /박종인 기자
 
항복하던 날 송시열은 인조 일행을 따르지 않고 속리산으로 갔다. 속리산 복천사 앞에서 젊은 천재 윤휴(尹鑴·1617~ 1680)를 만났다. 윤휴는 송시열이 "우리네 독서 30년이 헛되도다"라며 찬탄했던 선비였다. 윤휴는 "벼슬을 하더라도 이 치욕을 잊지 않겠다"고 송시열과 함께 통곡했다.('백호전서 부록'2 윤휴 행장)


훗날 송시열은 윤휴를 주자를 배신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찍었다. 서인세력은 윤휴를 처형했다. 또 훗날 송시열은 이리 선언했다. "최명길은 간신이다." 그리고 말을 바꿨다.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 간신 최명길이 송시열을 장원으로 뽑은 시험관이었고, 3년 뒤 그를 인조에게 추천한 병조판서였다.

그가 위기에 대처했던 자세, 사대

 

 

화양동계곡 첨성대 절벽에 송시열이 새겨넣은 '대명천지 숭정일월'. '천지는 명나라 것, 해와 달은 숭정 황제 것'이라는 뜻이다.
 
약소국 조선에 명나라는 큰 세력이었다. 신라 때 당나라가 그랬다. 고려 때 송과 원이 그랬다. 군사 대국이며 선진 문명국인 명나라에 조선은 창업 때부터 사대를 택했다.


사대는 제후국이 황제국에 충성을 주고 보호를 받겠다는 외교 정책이다.


삼전도 항복 후 많은 관료가 인조를 '더러운 임금(汚君·오군)'이라 불렀다. 조정은 '하찮은 정부(小朝·소조)'라 했다.(김영조, '망와선생문집'4 대사헌 사직의 소, 한명기, '최명길 평전', 2019, p377 재인용) 주군에서 천민까지 수직으로 서 있던 위계질서가 파괴된, 금수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반정으로 이룩한 서인(西人) 정권이 위태로웠다.


금수의 시대를 돌파할 무기를 송시열은 사대(事大)에서 찾았다. 사대는 임금까지 더럽다고 비난하는 세상을 바로잡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해) 나의 피와 살이 누가 내려 준 피와 살인가 하며 모두 감격해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생각했다."(송시열, '송자대전' 19, 논대의잉진윤증사소(論大義仍陳尹拯事疏))


명나라는 단순한 황제국이 아니라 아들 조선을 보살피는 아버지 나라로 바뀌었다. 조선과 명은 충(忠)이 아니라 효(孝)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되었다. 사대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는 그 세계에 대한 모독이며 반란이었다. 명나라 멸망 5년 후 송시열이 말했다. "우리나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백성 머리털 하나까지도 황제 은총을 입은 것이다."(송시열, '기축봉사', 1649)


그런데 그 조선이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오랑캐가 군사력이 어마어마한지라 복수는 불가능했다. 치욕을 씻어 낼 정신승리가 필요했다. 정신승리를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게 최명길이다.

'삼학사전' 저술과 간신 최명길


1671년 송시열이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었다. 척화 3신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기리는 글이다.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명길이 윤집과 오달제를 끌고 가는데, 양지바른 언덕(陽坡·양파)에서 명길이 말했다. '저들에게 척화신이 더 많이 있다고 하면 모두가 살 수 있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이리 말했다. '우리를 빙자해서 명류(名流)들을 한꺼번에 죽이려 하니, 대간(大奸·크게 간사한 자)의 꾀는 간교하고 참혹하구나.'" 송시열은 홍익한의 말을 빌려 최명길을 이렇게 비난했다. "조정과 백성이 모두 최명길을 씹어 먹으려 한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서인 세력에 최명길은 만고의 간신이 되었다. 그런데 5년 뒤 성균관 관장 격인 대사성(大司成) 남구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일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남구만에게 "최명길이 화친의 장본인인데, 이 에피소드를 없앤다고 뭐가 달라지는가"라며 수정을 거부했다.(송시열, '송자대전' 76, 남구만에게 답함, 김민혁, '숙종조 정치상황에 따른 정치적 글쓰기', 한문학연구, 2017 재인용) 하지만 해명 요구는 이어졌다. 결국 송시열은 '양파' 사건을 삭제했다.


괴산 청천면에 있는 송시열 무덤. 크고 작은 묘비가 2개 서 있다.
 
2년이 지난 1678년 윤3월 21일 이조판서 홍우원이 숙종에게 상소했다. "최명길은 송시열이 간신이라 지목한 자이다."('숙종실록') 한 달 뒤 송시열이 이 말을 들었다. 송시열이 말했다. "저들이 임금을 속이는구나. 나는 간인(姦人)이라고 한 적이 없다. 아마 삼학사전을 봤겠지."('송자대전'125, 1678년 4월 아들에게 답함)


노소론 분당과 간신의 부활

1680년 송시열이 극찬했던 천재 선비 윤휴가 처형됐다. 역모죄였다. 일찌감치 윤휴는 송시열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나를 알아줄 분도 오직 주자(朱子), 죄줄 분도 오직 주자"('송자대전'28, 이사심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주장하는 송시열에게 윤휴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허다한 의리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다는 말인가."(남기재, '아아록') 남인(南人)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혔고, 죽었다.


1681년 윤휴를 두둔하던 윤증(尹拯) 가문과 송시열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송시열은 윤휴를 두둔하는 자 또한 사문난적이라고 몰아붙였다. 이듬해 윤휴 잔당 처리 문제를 두고 서인 내부에 균열이 생겼다. 1682년 어영대장 김익훈이 정치 공작으로 남인을 숙청하려다 발각됐다. 서인 소장파가 처벌을 요구했다.

송시열이 뜻밖에도 김익훈을 변호했다. 이유는 "우리 편이니까"였다.('송자대전 부록' 15 어록2) 이에 소장파가 당을 갈라 나가니 노론과 소론의 분열이다.(1683년 2월 2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소론 당수는 윤증이었고,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찍은 박세당, 최석정 등이 뒤를 이었다. 최석정은 최명길의 손자다.

 


'유명조선'으로 시작하는 송시열 묘비(가운데)와 '조선'으로 시작하는 박세당 묘비. 오른쪽은 송시열 묘비 뒤쪽. 명나라 최후 황제 숭정제 등극부터 세번째 맞은 갑자년(1804년)에 세웠다는 '숭정기원후 삼갑자' 연호다.
 
붕당 두 달 뒤인 4월 13일 송시열이 '삼학사전'에 '부기'를 추가했다. "(양파 사건 에피소드가) 있었다가 삭제됐다는 실상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면 의문점이 남기 때문에 '내가 이러이러한 사실을 삭제했다'고 여기 기록해 둔다."('송자대전'213 삼학사전) 어제까지 동지였던 최명길 지지 세력이 소론으로 갈라지자 송시열이 보인 행동이었다. 오랑캐에 나라를 판 간신을 끄집어내 원리주의파 노론을 결집시킨 것이다. 최명길은 이후 오래도록 간신 낙인을 지우지 못했다.

*

충북 괴산 화양동계곡은 송시열과 그 정치 후배들의 아지트다. 송시열 후배들이 명나라 황제 제사를 지낸 '만동묘(萬東廟)'도 복원돼 있다. 만동묘에서 계곡 안쪽으로 가면 첨성대라는 절벽이 나온다. 절벽 아래에 송시열이 이렇게 새겨 놓았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온천지(공간)는 명나라 땅이요, 해와 달(시간)은 숭정황제 것이라.' 그 옆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앞 여덟 자는 배신(陪臣) 송시열이 삼가 새긴다.' '배신'은 '황제의 신하'라는 뜻이다.


화양동에서 가까운 괴산 청천에는 송시열 묘가 있다. 묘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유명조선(有明朝鮮·황제나라 명의 제후국 조선) 좌의정 송시열'. 1804년 후손이 세운 또 다른 묘비에는 건립 날짜가 이렇게 적혀 있다. '숭  정 기원후 삼 갑자 7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등극(1627년)부터 세번째 맞는 갑자년 7월이라는 뜻이다.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박세당 묘비에는 '조선 숭정대부 박세당', 건립 날짜는 '금상(今上·영조) 7년(1731년)'으로 기록돼 있다. 금수(禽獸)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 김상헌과 최명길과 송시열 이야기였다.〈'국난에 대한 두 가지 자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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