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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대들은 명나라를 위해 조선을 망하게 하려는가"

by 한국의산천 2020. 4. 15.

[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대들은 명나라를 위해 조선을 망하게 하려는가"

Chosun.com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4.14 03:12


[208] 국난에 대한 두 가지 자세… 김상헌과 최명길②
1627년 정묘호란, 모두 침묵할 때 적진으로 가서 화친 국토 유린 막아
1636년 9월 임박한 전쟁 대비해 압록강에 군사 배치 주장
1636년 12월 무악재까지 온 적군과 협상 핑계로 시간 끌어 그 사이 인조 산성 피란
1637년 1월 "조선 신하는 명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다"며 청과 화친 주도
1638년 청나라 파병 요청에 목숨 걸고 거부해 병사 희생 막아
박세당, "말로 칼날에 맞서 백성을 안정시켰다"
비석에는 '조선의 대신' 최명길


   

   


박종인의 땅의 歷史
 
충청북도 청주 대율리에 최명길 묘가 있다. 주소는 북이면 대율리 253-3이다. 사별한 첫 아내와 두 번째 아내 그리고 본인 묘가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朝鮮 相國 贈諡 文忠 遲川 崔公鳴吉之墓(조선 상국 증시 문충 지천 최공명길지묘)' 뒷면 끝에는 건립 날짜가 새겨져 있다. '세 임오 5월(歲 壬午 五月)'이라 적혀 있다. 1702년이다.


병자호란에 함께 맞섰던 김상헌 묘비와 대비되는 비문이다.(2020년 4월 7일 '땅의 역사-국난에 대한 두 가지 자세①' 참조) '황제국 명나라 제후국 조선(有明朝鮮·유명조선)' 대신 '조선(朝鮮)'을, 명나라 마지막 숭정 황제를 그리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연호 대신 무심한 '세월(歲·세)'을 새겨 넣은, '조선의 대신' 최명길 이야기다.


정묘호란과 최명길의 행적

1623년 3월 12일 밤 능양군 이종과 그 무리는 광해군을 끌어내렸다.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쿠데타 명분은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廢母殺弟) 혐의, 오랑캐 후금과 통교해 대명의리를 저버린 패륜 혐의 용의자 처단이었다.


충북 청주에 있는 최명길 묘소. 가운데가 최명길 묘이고 왼쪽은 첫 아내 인동 장씨, 오른쪽은 두 번째 아내 양천 허씨 묘다. 가운데 비석에는 '朝鮮相國贈諡文忠遲川崔公鳴吉之墓(조선 상국 증시 문충 지천 최공명길지묘)'라고 적혀 있다. 비석을 세운 1702년은 노론이 권력을 장악한 사대(事大)의 시대였다. 조선은 그냥 조선이 아니라 '황제국 명의 제후국 조선(有明朝鮮·유명조선)'으로 기록하고 날짜는 멸망한 명나라 연호 '숭정(崇禎)'을 쓰던 시대였다. 최명길이 죽고 55년 뒤 세운 이 비석에는 그가 '유명조선상국'이 아니라 '조선상국'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의 정승'이라는 뜻이다. /박종인 기자
 
쿠데타 4년 뒤 정묘호란이 터졌다. 대명의리를 기치로 반정공신이 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전쟁 불사라고 큰소리만 쳤지 실제로는 화의 성립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오로지 최명길만이 나서서 강화를 주장해 관철했다.(장유, '계곡만필'1 만필)


그 또한 반정 공신이었던 최명길이 앞장서서 조선은 강화도 연미정(燕尾亭)에서 화약을 맺었다. 오랑캐 후금은 형이 되었고, 문명국 조선은 동생이 되었다. 반정 공신들은 이를 갈았다. 사람들이 교대로 상소를 올려 최명길 탄핵을 요구했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박세당, '서계집' 최명길 신도비명)


병자년 9월 서울시장 최명길

전쟁 냄새가 진하게 피어오르던 1636년 9월, 한성판윤 최명길이 인조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1627년 정묘호란 강화조약을 맺었던 강화도 월곶 연미정. 정묘호란 때도 최명길이 나서서 화친을 주도했다. 사진은 2019년 6월 모습이다. 연미정 왼쪽에 있던 500살 된 느티나무는 촬영 3개월 뒤 태풍 링링으로 쓰러졌다.
 
'군사령부를 평안도로, 평안도 병력을 (압록강이 있는) 의주로 이동시켜야 한다. 늦긴 했지만 의주를 굳게 지키면 대책 없이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

압록강물이 얼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다.' 인조는 보고서에 대해 답을 내리지 않았다.(1636년 9월 5일 '인조실록') 군 병력 이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12월 8일 청나라 기병대가 압록강 얼음 위를 건넜다. 의주는 비어 있었다.


병자년 12월 무악재와 최명길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기병부대는 중간에 있는 모든 성들은 지나쳐 버리고 순식간에 서울 홍제동 무악재까지 들이닥쳤다. 입으로 전쟁을 외치던 조선 정부 관료들은 또다시 강화도행 피란길에 올랐다.


창덕궁을 떠난 일행이 남대문에 이르렀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적진 동태를 살피겠다고 인조에게 말했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했다.(1636년 12월 14일 '인조실록') 병사 20명이 동행했는데, 최명길이 적진에 이르니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그사이 인조 일행은 수구문(水口門·신당동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최명길이 귀환했다. 인조가 말했다. "조정 관료들이 모두 경(卿)과 같았다면!"(최명길 신도비명) 최명길은 귀환한 그날 다시 협상단 대표로 청나라 군영에 투입됐다.


17일 예조판서 김상헌이 결사 항전하자고 인조에게 말했다. 18일 전 참봉 심광수가 인조에게 극언했다. "한 사람 목을 베 화의를 끊고 백성에게 사과하시라." 인조가 물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전 참봉이 답했다. "(오랑캐와 협상하고 온) 최명길이다."(1636년 12월 18일 '인조실록')


병자년 명 황제 생일과 망궐례

  

2020년 4월 연미정. 2019년 9월 쓰러졌던 느티나무는 살아나지 못했다.
 
압록강 국경을 지키자는 건의는 무시됐다. 그 덕에 왕실과 관료들은 산성으로 내몰렸다. 국토는 유린 일보 직전이었다.

이보다 14년 전인 1623년 윤 10월 반정공신 이귀가 인조에게 말했다. "조선은 원래 군사가 없는 나라라 지식인들이 걱정한다." 공감하는 인조에게 이귀가 내놓은 최종 계책은 남한산성 보수였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멀지 않고 형세가 험고하니 미리 수축하여 둠으로써 급박할 때 기지로 삼아야 한다."(1623년 윤 10월 16일 '인조실록')


14년 뒤 공신들은 최명길이 시간을 지체시켜 그 남한산성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최명길이 돌아오자 이들은 강화도로 다시 도망갈 계책을 논의했다.

9일 뒤 인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서쪽을 향해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하며 절을 올렸다. 그날은 명나라 황제 숭정제의 생일이었다. 신하가 주군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지 못하고 멀리서 예를 올리는 이 의식을 '망궐례(望闕禮)'라고 한다. 대명 의리를 저버렸다고 광해군을 몰아낸 이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해가 바뀌고 정축년이 밝았다. 정월 초하루 인조는 문무백관과 함께 또 새해맞이 망궐례를 올렸다. 그날 오랑캐 황제 홍타이지가 30만 대군을 끌고 탄천에 도착했다. 홍타이지는 남한산성 동쪽 망월봉에서 망궐례를 올리는 인조 일행을 지켜보았다.(1637년 1월 1일 '인조실록')


"조선의 대신들 맞소?"

1월 18일 마침내 이조판서 최명길이 항복 국서 초안을 작성했다. 최명길은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화를 내며 국서를 찢어버렸다. 찢어진 국서를 최명길이 주워담았다. 다른 대신들이 날을 미루고 국서 재검토를 요구했다.

최명길이 말했다.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다투느라 이런 치욕을 맞게 되었다. 국서 송달 시기는 당신들 일이 아니니 입 다물라."(1월 18일 '인조실록')

문무대신과 지도자는 적 앞에서 망궐례를 올리고 황제라 적힌 국서 송달을 망설였다. 최명길은 훗날 이렇게 적었다.

 

최명길 묘비 뒤에 새겨진 날짜. '숭정기원후'라는 연호 대신 '歲(세) 임오 5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명 황제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다만 조선의 신하로서 명을 위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의리(義理)요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하는 일이다.'(최명길, '지천집 속집'1, 장유에게 보내는 답신, 한명기, '최명길 평전', 2019, p492 재인용)


결국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어놓은 국서를 다시 수정해 인조에게 제출했다. 인조 결재를 받은 최명길은 국서를 들고 내려가 홍타이지에게 제출했다. 치욕스럽되, 조선의 신하 최명길은 조선의 왕 인조와 조선의 백성을 살렸다.


협정을 맺었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명나라 잔존 세력을 박멸하려는 청은 조선에 대병력 파병을 요구했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대신 한두 사람이 죽어야 천하와 후세에 떳떳이 할 말이 있으니 내가 감당하겠다"고 말했다. 그해 9월과 이듬해 12월 최명길은 심양으로 떠났다. 최명길은 장례 도구까지 들고서 길을 떠났고, 가족은 곡송(哭送·통곡하며 배웅)했다.(박세당, '최명길 신도비명') 징병 요구는 철회됐다.


구국 재상 그리고 간신

그 최명길이 1647년 죽었다. 서계 박세당은 이렇게 기록했다. '모두가 헛말만 하고 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병이 성 아래 닥치고 말았다. 공은 적군으로 달려 들어가 구설(口舌·말)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사직이 온전하고 위태로웠던 생민이 안정됐다. 누구의 공인가.'(박세당, '서계집' 7, 지천집 서) 최명길의 일관된 삶이었다.


최명길은 1681년 숙종 때 뒤늦게 문충공 시호를 받았다. 100년 뒤 정조가 결론을 내렸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강화를 감행할 수 있었겠는가."(1778년 11월 5일 '일성록', 한명기, p577 재인용)


그런데 1653년 효종 4년에 완성된 '인조실록'에는 그가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救時之相·구시지상)'이며 동시에 '소인(小人)'이라고 기록돼 있다.(1647년 5월 17일 '인조실록') 한 사람을 두고 극명하게 갈린 평가다.

또 많은 사람은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고 척화파 김상헌을 절개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조선 사람들이 잠자리를 편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음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그에게 힘입은 자들이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박세당, '지천집 서') 누가 그를 간신으로 낙인찍었고, 왜 우리는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는가.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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