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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결사 항전을 주장하던 그는 항복 후 집으로 돌아갔다

by 한국의산천 2020. 4. 15.

[박종인의 땅의 歷史] 결사 항전을 주장하던 그는 항복 후 집으로 돌아갔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4.07 03:12 | 수정 2020.04.07 09:28


[207] 국난에 대한 두 가지 자세… 김상헌과 최명길 ①
조선 양반 무덤 비석 첫머리 '有明朝鮮'과 연호 '崇禎 紀元後'
망한 명나라에 바치는 충성과 의리 상징
병자호란 두 지도자 척화 김상헌, 주화 최명길
두 사람 묘비에 보이는 '有明朝鮮'과 '朝鮮'
시대를 바라보고 공동체를 경영하는 방식의 차이
김상헌 묘… '유명' '숭정', 최명길 묘… '조선'뿐
"김상헌은 최명길이 열어준 성문으로 나갔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비문의 비밀

1637년 병자호란 때 항복을 주장한 사람은 최명길이다. 결사 항전을 주장한 사람은 김상헌이다. 두 사람은 각각 충북 청주와 경기도 남양주에 잠들어 있다. 그 비석들을 한번 눈여겨본다.


최명길 묘소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조선 상국(朝鮮相國) 증시 문충 지천 최공 명길지묘'. '조선의 정승, 문충공 최명길의 묘'라는 뜻이다. 비석 뒤에는 '세(歲) 임오년 5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1702년에 건립했다는 뜻이다.


경기도 남양주 김상헌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유명조선(有明朝鮮) 문정공 청음 김선생 상헌지묘'. '황제국 명나라 제후국인 조선의 문정공'이라는 뜻이다. 건립한 1669년을 비석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42년 기유 4월'이라고 기록했다.

'유명조선'과 '조선', 그리고 '세 임오년'과 '숭정기원후 42년'. 두 사람이 국가 비상사태에 대처했던 상이한 자세를, 비석이 말한다.


숭정기원후 유명조선

웬만한 조선 후기 사대부 묘소 앞 비석에는 '숭정기원후 ○○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숭정(崇禎)'은 1644년 망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연호다. 명 멸망과 함께 '숭정' 또한 사라졌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기원후'라는 꼬리를 달고 부활했다. 망한 나라 연호를 계속 쓰겠다는 것이다. '숭정기원후' 시작은 숭정제가 등극한 1627년이다.


경기도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산5(석실로336번길 11-63) 석실마을은 조선 후기 명문가 장동 김씨 가문이 살던 마을이다. 마을 가족묘에는 장동 김문 핵심 인물 김상헌이 묻혀 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한 척화파였다. 그는 항복이 결정된 뒤 목을 매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삼전도로 가는 인조 일행을 따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묘 앞 비석에는 '유명조선 문정공'(명나라 제후국인 조선의 문정공)이라고 새겨져 있다. /박종인 기자
 
또 비석에 적힌 글은 '조선(朝鮮)'이 아니라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한다.

'유(有)'는 별 뜻이 없는 접두사고, '유명조선'은 '황제국 명나라 제후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1607~1689)이다. 송시열은 '언제나 크고 작은 글에 숭정 연호를 기록해 존주지의(尊周之義·천자국을 존숭한다는 뜻)를 나타냈는데, 사람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사람을 더럽게 여겼다.'(1681년 8월 23일 '숙종실록')

조선 후기 정치를 좌지우지한 거물의 지론에 따라, 왕실에서도 명나라 연호를 썼다. 결정적인 사건은 병자호란이다.


지조와 절개, 예조판서 김상헌

1636년 겨울, 국가 지도자들은 일찌감치 예견된 전란에 대비 없는 논쟁을 벌였다. 수도가 함락될 때까지 손 놓고 있던 이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0일 넘도록 또 논쟁을 벌이다 '오랑캐'의 신하가 되었다. 그 병자호란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생략하자. 대신 당시 예조판서 김상헌의 행적을 세밀하게 추적해본다.


김상헌은 죽어도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다고 주장했던 척화신(斥和臣)이요, 훗날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 반대편에 최명길이 있었다. 이조판서였던 최명길은 이미 10년 전 정묘호란 때부터 척화는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한 주화파였다. 김상헌에 따르면 최명길은 "죽기로 기를 쓰고 힘을 다하면 오랑캐를 끼고 권병(權柄·권력)을 도둑질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였다.(김상헌, '남한기략·南漢紀略') '남한기략'은 김상헌 본인이 기록한 남한산성 항전기다.

김상헌은 이 책에 남양주 석실마을에서 전쟁 소식을 들은 날부터 산성에서 나온 날까지를 꼼꼼하게 기록해놓았다.


결사항전의 의지

'남한기략'에 따르면 인조 뒤를 쫓아 산성으로 들어간 김상헌은 왕을 알현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김상헌은 "싸우다 패하면 화친을 해야 하지만, 먼저 강화를 청한다면 강화 자체가 가망없다"고 했다.

 

석실마을에 있던 석실서원 흔적. '醉石(취석)' 두 글자는 송시열 친필이다. '도연명이 술 마시던 바위'라는 뜻이다. 멀리 언덕 위에 김상헌 묘가 보인다.
 
12월 21일 김상헌이 다시 인조에게 말했다. "성을 지키는 군사가 일만칠천 수백 명이고 산성 형세도 험준하다. 어찌 죽기만을 기다리는가." 성 안 백성과 피란 온 관리들 하인, 아전과 관노도 800명에 이르니 충분히 싸울 만하다고 했다.

김상헌은 성벽을 보수하고 각 부대에서 정예병을 차출해 심야 기습전을 펼치면 된다고 구체적인 계획도 내놨다.


하늘에 기댄 결사항전

의지는 굳건했지만 그가 쓴 나머지 기록을 보면 항전은 불가능했다.

어느 날 성 아래를 보니 '오랑캐 기병이 눈앞 들판에 가득 찼고 멀리 (오랑캐 왕 홍타이지가) 누런 우산을 펴고 성에 올라 산성 형세를 굽어보았다.' 청군이 건너편 산까지 진격해온 것이다. 겁에 질린 인조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믿겠는가."

김상헌이 답했다. "하늘의 뜻은 믿을 만합니다(天道可恃也·천도가시야)." 중화기 홍이포(紅夷砲)로 무장한 적군 앞에서 예조판서가 내놓은 계책이었다.

천도를 믿고 내보낸 군사들이 야간 기습전에서 청병 2명 목을 베 왔는데, 알고 보니 이미 전사한 조선군 목이었다.

병사 수백 명이 북문(北門) 밖에서 벌인 전투에서 조선군은 서른 명 넘게 전사하고 청군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상헌은 인조 명으로 서낭당과 백제 시조묘에 가서 다시 하늘에 뜻을 빌었고 절을 찾아가 인조 아버지인 원종대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인조가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계책을 묻자 모두 묵묵히 입을 다물다 회의가 끝났다. 왕을 떠받드는 근왕병(勤王兵)이 속속 도착했지만 모두 패하여 물러났다. 오랑캐는 날로 교만하게 굴고 처지는 궁지에 몰려갔다.(김상헌, '남한기략' 일기)


아무 비전도, 아무 결과물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청나라 진영이 '초항(招降)'이라고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항복하라는 뜻이었다. 군사들은 얼어 죽기 시작했다.(1637년 1월 14~15일 '인조실록') 1월 17일 홍타이지가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싸우고 싶다면 속히 일전을 벌여 하늘에서 처분을 받자'고 적혀 있었다.


다음 날 이조판서 최명길이 항복문서 초안을 인조에게 제출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문서를 찢어버렸다.(1월 17~18일 '인조실록') 김상헌은 "군신 상하가 죽기로써 맹세한다면 천명(天命)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지하에서 선왕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참봉 심광수는 "형편없는 대신(大臣) 최명길을 죽이자"고 했고 이조참판 정온은 "힘만 있으면 최명길 대가리를 깨뜨려 부수고 싶다"고 했다. 김상헌은 20일부터 단식에 들어갔다.('남한기략' 일기)


항복하던 그날

1월 26일 봉림대군이 피란 중인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날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항복 문서를 작성해 청나라 진영으로 보냈다. 28일 이조참판 정온이 '진실로 부끄럽다'고 글을 쓰고 칼로 배를 그었다. 단식 중이던 김상헌도 끈으로 목을 맸다. 두 사람 모두 미수에 그쳤다. 실록 사관은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고 평했다.(1637년 1월 28일 '인조실록')

 


비석을 보면 그때 세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충북 청주에 있는 최명길 묘비(왼쪽)는 최명길을 '조선(朝鮮) 상국'으로 기록해 놓았다. 반면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김상헌 묘비에는 '유명조선(有明朝鮮) 청음 김상헌'이라고 새겨져 있다. '유명조선'은 '황제국 명나라의 제후국인 조선'이라는 뜻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을 주장한 최명길 묘비는 '조선'을 앞세웠고, 대의를 앞세워 결사항전을 주장한 김상헌의 묘비는 조선이 명나라 제후국임을 명백히 했다. 국가 위기에 대처한 두 관료의 자세 차이가 극명하다.
 
1652년 그가 남양주 석실마을에서 죽었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산성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1652년 6월 25일 '효종실록') 김상헌이 목을 맸을 때 옆에는 아들 김광찬이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마침내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으로 내려와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을 치렀다. 김상헌은 산성에 7일을 더 머물다가 아들과 함께 동문(東門·실록에는 북문으로 돼 있다)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많은 척화파 관리들이 항복을 반대하고 인조를 따라가지 않았다.


왜 인조를 수행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에 김상헌은 이리 답했다. "성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갔다면 순리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원수를 떠받들고 상국(上國·명나라)을 범하는 일은 옳지 않으니, 임금의 명이라도 따르지 않는 게 순리였다."('남한기략' 풍악문답) 1641년 김상헌은 청의 대명 전투 참전 요청을 거부하자고 주장했다. 김상헌은 청으로 끌려갔다. 심양에 억류 중이던 소현세자 일행의 보고서 '심양장계'에는 김상헌이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적혀 있다. "신하로서 어찌 따르고 싶지 않았겠는가. 다만 내 병이 위중하였다."('국역 심양장계'2, 신사년 정월 10일)


그해 가을 인조가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나도 그리 여겼다. 그런데 (김상헌이) 나를 버리고 젊고 무식한 자들 앞장을 섰다."(1637년 9월 6일 '인조실록')


최명길이 열어준 문

1644년 명이 멸망했다. 5년 뒤 인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이다. 대명의리를 존숭하고 병자년 원수를 갚겠다는 전쟁 계획이었다.

북벌이 비현실적임이 드러나면서 새 논리가 탄생했다. 명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이 그 중화(中華)를 계승했다는 '조선 중화(朝鮮中華)' 이념이다. 명이 부활했으니 오랑캐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조선은 명나라 연호 숭정을 쓰고, 비석에는 '명나라 제후국 조선(有明朝鮮)'을 굳이 명시하게 되었다. 척화를 주장하며 청에 억류까지 당했던 김상헌은 대로(大老)라 불리며 대명의리 상징으로 부활했다.


그런데 인조 때 문신 이식은 이렇게 평했다.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귀향한 것은 고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최명길이 열어준 문으로 나간 것이다(淸陰之從南漢還鄕 雖高矣 亦從完城所開之門 而出去矣·청음지종남한환향 수고의 역종완성소개지문 이출거의).'(최창대, '곤륜집' 20 '지천공유사', 한명기, '최명길 평전' p497 재인용)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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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이 후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 남한산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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