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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16. 삼남길 지지대고개 서호 축만제 항미정 융건릉 용주사 정조

by 한국의산천 2016. 1. 22.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여섯번째 이야기 [2016 · 1 · 22 · 정말 추운 금요일 · 한국의산천]

경기지방 삼남길 구간 라이딩

 

날이 춥다.

라이딩 코스

지지대고개~ 서호(축만제)~ 항미정~ 수인선 철교~ 융건릉~ 용주사 (오산 독산성까지 왕복하려 했으나 너무 추워서 용주사에서 반환. 왕복 54km )

 

※ 삼남길과 정조의 능행길이 일치하는것은 아니지만 수원하면 역사적으로는 화성과 정조의 이야기를 빼놓고 말할수 없는곳이기에 함께 기록한다.   

 

경기 삼남길

수원·화성·오산~평택 잇는 길

정조 孝心 따라 뚜벅 다시 태어난 ‘삼남길’

어머니 혜경궁 홍씨 모시고 사도세자 융륭 찾아가던 길 한양~삼남~해남 땅끝 이어져

      
삼남길

남태령을 지나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 전라도(해남), 경상도(통영)를 연결하는 삼남길은 조선시대 10대 대로 가운데 가장 긴 도보길이었다.

삼남길은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능(융릉)을 찾았던 원행길이다. 이 길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했고 정도전과 정약용 선생이 나주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삼남길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길로, 한양과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을 잇던 길이다.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을 통해 전국의 물산도 오고 갔으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전국의 선비들도 이 길을 걸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남태령을 건너 수원, 화성, 오산을 지나 평택을 지난다.

평택 소사에서 처음으로 길이 갈라지는데 서쪽으로 갈라진 길은 지금의 보령 땅인 충청수영으로 향한다.

남쪽으로 계속 뻗은 길은 충청도를 지나 삼례에서 두번째로 길이 갈라지는데 여기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길은 지금의 경남 통영으로까지 이어져 남쪽으로 길을 가다보면 마지막에는 해남 땅끝 마을을 지나게 된다.

     

 

  20세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도로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산과 강과 내가 많은 지형적 특성이 한계로 작용했다. 더불어 물길 및 산줄기가 동에서 서로 뻗어 나가는 경우가 많은 바, 평양ㆍ개성ㆍ한양 등 정치 중심지 또한 한반도의 서쪽 해안 가까이로 치우쳐 입지함으로써 수로나 해로에 비해 도로 개발의 효용성이 저감되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도로가 발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역대왕조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한 후 도로개설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외침을 받아 오면서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의 집권층들은 차라리 길이 없는 편이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치도 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길을 고쳐 닦는 일은 병가가 크게 꺼리거나 싫어함)”라는 숙종의 말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군사적 측면에서 도로의 역기능이 강조됨으로써 도로 건설은 곧 외적의 침략을 부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즉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있으면, 외적이 신속하게 쳐들어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산으로 도망가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도로가 열악해야만 했다. 도로가 없는 편이 전쟁 피해를 최소화시킨다고 믿었다. 이 말은 조선 중·후기의 국방전략과 도로정책을 잘 대변하고 있다. 

 

  조선인 뇌리 속에서 사라졌던 도로가 다시 살아났다.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견학한 홍대용·박제가·박지원·홍양호 등과 같은 북학파들은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개혁·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상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개설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도로를 닦지 않았다. 산이 많다거나, 공사가 어렵다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수구세력들의 반대였다.

 

  정조는 결단을 내렸다. 도로혁명은 현륭원 이장사업(1789년)과 함께 은밀하게 시작됐다. 한양에서 옛 수원부 읍치(융·건릉 주변)까지 가는 길은 팔달산 서로(삼남길, 현재 서부우회도로 노선에 가깝다)였다. 이장 시 거리는 ‘삼남길’이 훨씬 가까웠지만, 정조는 새로 건설한 팔달산 동로(구 1번국도 노선에 가깝다)를 이용한다. 운구행렬은 이장지에서 남쪽으로 5리 떨어진 세람교까지 내려갔다, 다시 북으로 올라왔다. 팔달산 서로보다 10리를 더 돈 셈이다. 정조에게 ‘삼남길’은 도로가 아니었다.

 

   화성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도로의 진행방향을 우선시하여 화성행궁의 좌향을 남향을 포기하고, 동향으로 했다. 행궁 앞에는 상업로인 십자가로를 만들고 ▲십자가로에서 동장대 북쪽까지 ▲십자가로에서 장안문까지 ▲장안문에서 영화정까지 신작로를 개설했다. 도시계획도로였다.

 

  도로혁명의 진수는 시흥대로였다. 1794년(정조18) 4월, 정조는 을묘원행을 준비하며 건설했다. 거리는 남태령을 넘는 기존의 ‘삼남길’인 과천로와 비슷했으나 지세가 평평하고 넓었다. 수레운행에 대비한 도로였다. 도로 폭은 10m 정도로 수레와 사람이 자유롭게 교차 통행할 수 있었다. 1번 국도의 모체였다.

 

  그렇게 정조는 경제혁명의 길을 건설하기 위해 삼남길보다는 새로운 넓은 길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화성효행길

 

 

◀ 정조의 초상화

 

  아바지 사도세자가 죽고 살얼음판을 걷듯 그렇게 숨죽이며 고립무원의 길을 걸어온 세손(정조)

 

사도세자란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후 세자에게 하사한 시호이다.

思悼 (생각 '사'와 '슬플'도' 를 써서 '생각하니 슬프다'라는 뜻)

아들 정조가 올린 시호는 '장헌세자'이다

 

 재위 18년(1794년) 1월13일,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했다. 사도세자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기 위해 엎드렸다가 일어서지 못하고 목메어 울었다.

 

  <정조실록>은 “상(임금)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영의정 홍낙성 등 대신과 승지들의 부축을 받아 현륭원으로 올라간 정조는 제단 앞에 설치된 사도세자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보자 다시 몸을 땅바닥에 던지고 통곡했다. 손톱이 상할 지경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쥐고 뜯던 정조는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비명에 간 부친에 대한 정조의 한(恨)은 이처럼 극심했다. 그 한은 부친을 죽인 노론 벽파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배가되었다.

 

  정조는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한을 억눌렀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재위 1년(1777년) 자객 전흥문을 보내 정조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비 정순왕후 김씨를 내세워 정조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정조 10년(1786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론 벽파와 짜고 정조의 유일한 동생인 은언군을 죽이라는 내용의 ‘언문 전교’를 내렸다. 그런데 이 사건의 불똥이 엉뚱하게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숙장(宿將) 구선복에게 튀었다.

     
   구선복은 이 사건으로 사형당했는데, 정조는 재위 16년(1792년), 이에 대해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后)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27일)라고 평가했다.

 

  구선복 역시 자신의 혐의가 드러나자 “저는 모년(某年) 이후 용납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항상 의구심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시인했다. 구선복이 말하는 ‘모년(某年)’은 바로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임을 당한 임오년(영조 38년)을 뜻하는 것으로서 사도세자 살해 사건에 가담했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했다.

 

   정조는 만 열 살의 어린 나이로 14년 동안 대리청정하던 아버지가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살해당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부친을 죽인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이른바 ‘8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며 세손(정조) 제거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정조는 부친 제거에 서로 손잡았던 조부 영조와 외조부 홍봉한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의 호적을 사도세자에게서 빼 이미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입적시켰다. 일종의 호적 세탁이었다.

 

  홍봉한 또한 세손이 즉위해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고 영조에게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했다. 이로써 세손은 겨우 숨을 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손은 이런 초인적인 노력 끝에 사도세자가 죽은 지 14년 만인 1776년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즉위 일성으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정조의 숙원 사업 중 하나는 양주 매봉산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길지(吉地)로 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노론 벽파가 민감하게 반응할 문제였기에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재위 13년(1789년) 7월,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면서 이장 문제를 공론화했고, 정조는 부친을 수원 화산(花山)에 이장했다.

 

  그리고는 부친의 묘소 현륭원의 배후 도시로 화성(華城)을 건설했다. 이때 정조는 “(화성 축성에는) 단 한 사람의 억울한 백성도 없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원 화성 축성에는 단 한 사람도 강제 부역을 시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은 “토지 8결에서 농부 1명을 내며 1년에 부역 일수는 6일을 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1년에 6일씩은 부역을 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조 18년(1794년) 5월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국가에 큰 역사가 있을 경우 백성을 부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통용되어온 관례입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정조는 “경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사세가 이러함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본부(本府)의 성역에 기어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다”라면서 굽히지 않았다.

 

  정조는 인문학과 과학에 모두 능했던 정약용에게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하게 했는데,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서애 류성룡이 지은 <성설(城設)>을 참고해 화성 설계도를 작성했다.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화성은 백성들의 노역이 아니라 전면적인 임금 노동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성이었다.

 

▲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팔달문 ⓒ 2016 한국의산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화성을 완공한 후 펴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 중앙의 출입문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이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고, 팔달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시전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18세기 조선 상인들의 분주한 생활을 상상하며 종로삼거리 쪽을 둘러봐도 좋다. 본래 십자로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영남 유생들이 '무신창의록'을 정조에게 올린 다음 해인 정조 13년(1789) 7월. 정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장헌세자(한 여름날 뒤주속에 갇혀 비운에 떠난 사도세자) 의 묘를 이장 하기로 한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정조 자신이 할아버지인 영조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 임금임을 분병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조선이 노론의 국가가 아니며 뱃성들의 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픈 심정이었을것이다. 조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개국 초 태조가 수도 서울을 개경에서 현재의 한양으로 옮긴 까닭은 개경이 신흥 사대부의 정적인 권문세족들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듯이... 

 

  정조는 노론의 서울이 아닌 백성의 서울, 사도세자의 서울, 국왕의 서울을 만들려고 노력하였기에 규장각 설치와 장용영 강화와 새로운 신도시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지로 손 꼽은 곳이 수원면 용복면에 있는 '지극히 길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 화산(花山) 이었다.  

 

대대적인 정치 개혁 구상, 독살설로 무산

 

  정조는 화성을 쌓을 때 단순히 현륭원의 배후 도시라는 의미에 국한하지 않았다. 화성 건설을 통해 조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화성을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계획 도시로 만들었다. 화성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관건은 사람들이 살러 오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인구 증진 방안을 보고하라고 명했고, 채제공은 정조 14년(1790년),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廛房·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라고 상가 유치 계획을 보고했다. 정조는 화성 행궁(行宮) 앞에 경복궁 앞처럼 십자로(十字路)를 만들고, 호조에서 만든 6만냥으로 상가를 조성해 상업도시로 만들었다.

 

 

  화성 행궁 앞 십자로에는 서울의 종로처럼 미곡전(米穀廛·곡식상)·어물전(魚物廛)·목포전(木布廛·옷감상)·유철전(鍮鐵廛·놋과 철상)·관곽전(棺槨廛·관과 곽 등 장의상)·지혜전(紙鞋廛·종이와 신발상) 등 상가가 흥성거렸다. 이 십자로는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가는 길목으로 전국 각지의 상업 발달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2016 한국의산천 

 

   정조는 재위 28년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갑자년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해는 사도세자가 칠순이 되는 해였는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자신의 평생 소원인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승하는 작업을 주도하게 하고, 자신은 화성으로 이주해 상왕 자격으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실시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그 4년 전인 재위 24년(1800년) 독살설 끝에 끝내 세상을 떠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정조의 숙원이었던 조선 정치 체제의 획기적 개편은 무위에 그쳤지만 정조는 조선에서 성공한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미래가 있었고, 그래서 희망이 있었다. 만약이지만, 그가 조금만 더 살아서 아들 순조가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이가환·정약용 같은 신하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정조의 개혁 정치를 이어갔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덕일]

 

삼남길을 따라가자

출발 ~ !

 

  정조의 행차길은 시흥행궁을 뒤로하고 현재의 1번 국도를 그대로 따라 수원으로 내려가다 관악 전철역 옆의 만안교(萬安橋, 시도유형문화재 제38호)를 만나게 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새로운 시흥대로를 만들면서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만안교는 원래 관악전철역사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전철역을 만들면서 안양천의 원래 위치에서 약 200여 미터 아래로 이동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 만백성이 평안하라는 뜻을 지닌 만안교 ⓒ 2016 한국의산천

  만안교의 글씨는 일반적인 글씨체와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인가 튀어 올라가는 이 글씨체는 정조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유한지(兪漢芝)의 글씨로 만안교 아래로 흐르는 장쾌한 물의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 계속된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그 옛날 정조의 능행때보다는 많이 낮아진 지지대고개 ⓒ 2016 한국의산천

 

 

 

▲ 제1구간 ‘서호천길’

서호천 길은 수원시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해 서호공원 입구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지지대고개는 정조임금이 화성에 능행차를 왔다가 돌아가는 걸음이 못내 아쉬워 자꾸 행차를 늦췄다는 이야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곳으로 정조임금의 애틋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해우재는 지난 2007년에 문을 연 화장실문화전시관으로, 옛 추억을 되새기며 화장실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해우재를 지나 서호천변에 조성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여기산에서 대규모 백로서식지를 볼 수 있다.

 

 

 

 

◀ 원행정례(園行定例) 중 일부 
 
  이 책은 1789년 사도세자 무덤을 화성으로 옮긴 후 1800년 1월까지의 원행과 관련된 여러 사항을 정례화하여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왕의 명령을 소개한 전교에서 시작하여, 어가를 따라간 백관과 군병들의 행렬배치와 복장, 수행원 등에 관한 규정을 적고, 이어서 행차에 소요된 비용, 배다리 놓는 방법, 화성에서의 군사훈련 방법. 한양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도로의 교량과 역참에 대한 규정, 수행원의 총수, 말의 징발, 화성행궁의 여러 시설, 문무과 시험에 대한 규정 등을 담고 있다.

 

  보통 왕의 궁 밖 나들이를 ‘거둥’ 혹은 ‘행행(幸行)’이라 하는데,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능행(陵幸), 원(園, 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원행(園幸)이라고 한다.

 

  국왕이 능원에 참배하기 위해 궁 밖을 나가는 일은 모든 왕들의 관례로서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도 궁 밖 나들이가 많은 임금이었다. 국왕의 능행이나 원행은 1년에 1회 혹은 2회가 보통이지만, 정조는 재위 24년간 66회의 행행을 하여 1년 평균 약 3회를 기록했고, 아버지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왜 이토록 많은 행행을 가졌을까?

  물론 그것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拜峰山)에서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하지만 왕이 행행 중에 한 일을 살펴보면, 행행이 효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행행 중에 3,355건의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처리했다. 그러니까 한 번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民怨)을 처리했다는 이야기다. 상언이란 백성들이 임금을 직접 만나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말하고, 격쟁은 행차 중에 징을 치고 나와서 왕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상언과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했던 임금이었다. 이 사실은 정조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차가 지나가는 시흥, 과천, 화성 일대 주민들의 민정을 직접 시찰하고,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행의 목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가 따랐다. 우선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려면 자연히 길을 닦고 다리를 건설 혹은 보수하게 되어 치도(治道)의 효과가 있었다. 또한,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가면서 수도권의 방위체제를 점검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이밖에도 왕은 현지에 가서 별시(別試)를 시행하여 지방의 인재들을 수시로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며, 행차 중에 혹은 행차를 마치고 돌아와서 많은 신료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려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므로 왕의 궁 밖 나들이는 때로는 민폐를 끼치는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역사회 발전과 지방민의 사기진작에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 의왕시에서 수원을 향해 오르는 길 고개. 지지대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 2016 한국의산천

 

  정조께서는 아버지이신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現 융·건릉)을 참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 갈때 이곳에 이르면 말씀하셨다.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는 지지대 고개 - 이 앞을 지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 - 저 역시 고개를 올라와 이곳에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렸습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서울에서 국도를 타고 수원 오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양,의왕을 지나서 수원과의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된다. 지금은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넓은 도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도 더 높은곳에 굽이 굽이 이어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고개의 제일 높은 마루턱 이곳이 사근현이었으며 지금은 지지대고개라고 부른다.   

 

▲ 지지대비(경기유형문화재 제24호)

지지대비(遲遲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비의 높이 150㎝, 너비 6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비문을 통하여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사실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됨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행차길에 특별히 많은 소나무를 심었다. 그 소나무가 이제는 노송지대란 이름으로 수원시민들의 명소가 되었는데 1970~80년대에는 이 주변에 참으로 많은 포도밭과 딸기밭이 있었다. 이제는 딸기밭의 흔적은 사라지고 높은 아파트와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문인 장안문. 성문앞에 반원형태의 옹성을 지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 2016 한국의산천

 

북쪽의 정문인 장안문(長安門)

 중국의 번화가 장안을 생각하며 정조께서 지으신 이름. 장안문

197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화성에는 팔달문,창룡문,장안문,화서문 등 4대문이 있다. 남북의 정문인 팔달문과 장안문의 위용이 눈길을 끈다. 봉돈(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치성(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한 구조물),공심돈(적을 살피는 망루의 일종),암문(군수물자를 성 안으로 공급하는 곳) 등을 볼 수 있다.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울에 자리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 바깥에는 반원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마치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노송지대에 가득한 화성유수부의 송덕비를 보며 정조의 능행길은 계속된다.

  아직도 2차선인 이 길은 그대로 이어져 '만석거'라는 큰 저수지에 다다른다. 정조가 만든 이 저수지는 조선의 농업개혁의 산실이자 우리 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이 저수지 옆에 정조는 잠시 쉬면서 융복 위에 빛나는 황금갑주를 걸치고 장안문으로 향했다.

 

  그가 장안문으로 들어올 때는 세차게 내리던 비도 멈추고 갑자기 태양빛이 가득하여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가까이는 친위 특수부대 장용영과 수 많은 군사들과 함께 온 백성들의 마음을 담고 화성유수부의 종루 앞을 지나 화성행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무려 100여 리. 요즘의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무려 56㎞를 내려온 그의 능행길은 단순한 국왕의 행차가 아닌 백성들을 위해 행복을 주는 행행(幸行)이었다.

[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글 참고] 

 

 

 

▲ 제2구간 ‘중복들길’

서호공원에서 출발해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인 배양교에까지 이르는 구간이다.

서호는 정조임금이 수원을 신도시로 개발하면서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판 인공저수지로 제방 너머에는 아직도 농업진흥청 시험장이 남아있다.

서호 남쪽의 항미정에서 바라본 해질녘 풍경은 손꼽히는 절경이다.

서호공원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옛 수인선 철로를 만날 수도 있고, 수원비행장 서쪽으로 펼쳐진 중복들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배양교에서 화성시와 만나게 된다.

 

 

축만제

 

  농촌진흥청 북서쪽 여기산(麗妓山) 밑에 있는 호수로, 후에 서호(西湖)로 개명되었고, 현재에도 화성 인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다. 현재는 농촌진흥청 및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축만제의 축조연대는 1799년(정조 23)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한 것이다. 당시 수원성의 동서남북에는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를 말하는 것으로 1795년에 완성한 속칭 조기정방죽을 가리킨다. 또한 남지(南池)는 원명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축만제의 남쪽에는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항미정(杭眉亭, 경기도 향토유적 제1호)이 있다.

현재의 축만제에는 농업과학기술원의 행정 및 연구시설이 인접하여있고, 서울대학교 농생대 캠퍼스도 위치하여 한국농업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 축만제 안내판속에 내가 있구나 ⓒ 2016 한국의산천  


   팔달산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호수 축만제는 ‘오래도록 축복받을 호수’라는 뜻으로, 지금은 ‘서호’라고 많이 불린다. 

그 이유는 화성의 서쪽에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 항저우(杭州)라는 도시에 있는 ‘서호(西湖, 시후)’만큼 아름답고 넓은 호수라는 의미였다.

 

  나름 그 당시에는 우리도 중국에 못지않은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서호의 남쪽으로 물이 빠지는 수문앞에는 '항미정(杭眉亭)'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주변 경치와 어울리게 했는데, 항미정은 '항저우의 눈썹'이라는 의미로 봄에 꽃이 활짝 필 때에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 축만제 앞에 잘 정리된 농경지 ⓒ 20126 한국의산천

▲ 여기산을 배경으로 축만제비 앞에서 ⓒ 2016 한국의산천  

 

 

 

 

 

 

 

  축만제의 남쪽에는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항미정(杭眉亭, 경기도 향토유적 제1호)이 있다. 

 

  항미정은 순조 31년(1831)에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朴綺秀)공이 건립한 정자로, 석양에 비치는 서호 주위에 여기산(麗妓山) 그림자를 보고 읊은 서동파(蘇東坡)의 시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美)이니라”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축만제에는 농업과학기술원의 행정 및 연구시설이 인접하여있고, 서울대학교 농생대 캠퍼스도 위치하여 한국농업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 항미정에서 보이는 서호 ⓒ 2016 한국의산천

 

 

 

 

 

 

 

 

 

 

 

 

 

▲  제3구간 ‘화성능행길’

  배양교부터는 화성시에 접어든다. 황구지천변의 들판을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용주사에 도착할 수 있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조성하면서 함께 세운 절로, 템플스페이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색다른 체험을 하면서 하루쯤 묵어갈 수도 있다.

 

 

길에서 위용을 뽐내고 축제를 펼치다

  정조의 궁 밖 나들이 중에서도 흔히 ‘을묘원행(乙卯園幸)’이라고 불리는 1795년(정조19년)의 현륭원 방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75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회갑을 맞는 해로, 행차는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더라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리는 해이기도 했으니 표면상으로는 명분이 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조는 화성에서 잔치를 벌인 뒤 6월 18일에 정식 회갑잔치를 서울의 연희당(延禧堂)에서 다시 치렀다. 이는 8일간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회갑잔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작게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행차였지만, 크게 보면 자신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그간 쌓아 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왕권을 확실히 펼쳐 보이려는 거대한 정치적 시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수천 명의 병력과 인원이 동원되고,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행행은 왕이 군수권과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조 최대의 정치적 행사로 꼽히는 을묘년의 화성행차, 그 8일간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  사진1.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 일부

 

  1795년 윤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 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당시 화성에서 있었던 7박 8일 간의 행사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생생히 남아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1794년 12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 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가마 2채를 특별 제작한 것은 행차를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고안했으며,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국도)를 새로 건설했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 사진2. 정조대왕 『능행도』 중 일부

  정조가 1795년의 화성행차를 널리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궁중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의 주요장면을 그리게 하여 만든 병풍. 노량주교도섭도, 시흥환어행렬도, 득중정어사도, 서장대성조도, 낙남헌방방도,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양로연도, 봉수당진찬도 등 능행차와 관련된 여덟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첫째 날: 새벽에 창덕궁을 떠나다.
아침 묘정3각(卯正三刻, 6시 45분경)에 세 번째 북이 울리자 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모자에 깃을 꽂고 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돈화문에 나와 두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를 대동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기다렸다. 어가 행렬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돈녕부 앞길~파자전 돌다리(지금의 단성사 앞)~통운 돌다리(지금의 보신각 앞길)~대광통 돌다리(지금의 서린동 122번지 남쪽)~소광통 돌다리(남대문로1가 23번지 남쪽)~동현(銅峴, 지금의 명동)병문 앞길~송현(松峴, 지금의 한국은행 부근)~수각(水閣) 돌다리~숭례문(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거쳤다.

 

  이 어가는 노량행궁(용양봉저정, 지금의 동작구 본동 30번지)에서 점심을 들고 휴식을 취한 후 오초2각(午初二刻, 11시30분)에 시흥행궁으로 향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하였다. 행차가 출발하는 시간을 알릴 때에는 꼭 세 차례에 걸쳐서 악기를 불었다고 한다.

 


-둘째 날: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에서 휴식을 취하다.
시흥을 출발하여 지금의 시흥대로와 안양시 만안로, 그리고 1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로 만안대로를 따라 남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 거의 없어 평탄했다. 장산모루를 지나 청천평(晴川坪)에 이르자 왕은 말에서 내려 혜경궁에게 문안을 드리고 휴식을 취한 후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도 정조는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드디어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했다. 창덕궁에서 화성행궁까지의 거리는 정확하게 63리였고, 화성행궁에서 현륭원까지는 20리였다. 당시의 10리는 약 5.4Km에 해당한다.

 


-셋째 날: 아침에 화성 향교 대성전에 참배하다.
화성에서의 첫 행사를 향교 참배로 정하였다.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했다. 오후에는 행궁의 봉수당에서 회갑잔치의 예행연습인 진찬습의(進饌習儀)가 거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대신들 외에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척들까지 대거 초대했다.

 


-넷째 날: 아침에 현륭원에 전배하다.
이날은 오전에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를 하였다. 행차는 화성 남문인 팔달문으로 나와 지금의 정조로(正祖潞)를 따라 남으로 향했고, 현재 매교삼거리(梅橋三巨理)인 상류천점(上柳川店)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어 정조는 참포(袍, 연한 청흑색 옷)로 갈아입고 장내(帳內)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날 혜경궁 홍씨의 울음소리가 장 밖에까지 들렸다고 전해진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정조는 친히 어머니를 위로하였지만 본인 역시 슬픈 감회를 억누르기 힘들어했다. 이후 왕은 서장대에 친림하여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000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 날의 훈련은 정조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노론 벽파 세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도 포함돼 있었다.

 

-다섯째 날: 오전에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하다
이날은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진찬례(進饌禮),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진정3각(辰正三刻, 오전 8시 45분경)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의 자리는 행궁 내전의 북벽에 남쪽을 향해 마련됐고, 왕은 동쪽 자리에 앉았다.

  혜경궁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 쳐졌으며 왕의 자리에는 표피방석과 진채병풍이 놓여졌다. 왕이 술잔을 올리고 치사를 드리자 혜경궁은 “전하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한다.”는 선지(宣旨)를 내리고 술을 마셨고 여민락과 천세만세곡이 연주되자 왕은 절하는 자세로 가서 경의를 표한 다음 천세(千歲), 천세, 천천세를 불렀다. 봉수당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궁중 무용인 선유악이 공연되었고,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되는 상의 숫자와 음식이 준비된 상황이 낱낱이 기록되었다.

 

-여섯째 날: 새벽에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다.
새벽에 신풍루(新豊樓)에서 화성부의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四民)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진정1각(辰正一刻, 8시 15분경)에는 낙남헌(洛南軒)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양로연에는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날 노인들의 밥상과 왕의 밥상에는 차별이 없이 모든 같은 음식이 올랐다고 한다.

 

-일곱째 날: 귀경길에 오르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려올 때와 같았다.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이 이 날의 일정이었다. 진정3각(辰正三刻, 오전 8시 45분경)3취에 왕은 군복을 입고 출발하여 미륵현(彌勒峴, 지지대고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오늘날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선에 해당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화성은 물론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에 왕은 “이곳이 오면 떠나기 싫어 나도 모르게 방황하게 되니 이곳을 지지(遲遲)라고 이름 지으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 유래를 적은 비각(碑閣)이 서 있다.

 

-여덟째 날: 시흥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다
이 날 아침 왕은 시흥행궁을 떠나 궁에 돌아가기에 앞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생의 질고(疾苦)를 듣고자 묘정3각(卯正三刻時, 오전 6시 45분경)에 부로(父老)와 민인(民人)을 만나 백성들의 소망을 듣고 이 자리에서 환곡을 탕감해 주기도 했다. 노량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서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8일간의 장엄한 효행의 화성 어가행차가 막을 내렸다. [자료 및 사진=수원문화원]

 

 

 

 

▲ 방화수류정의  야경 ⓒ 2016 한국의산천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을 지으며 정조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화성을 중심으로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제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 , 못이룬 사도세자의 꿈을 담은 나라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기대와 좌절의 시간이 흐르며 몸은 불편해지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며 학문수련과 삶은 수도자를 연상시킬 만큼 수신제가를 잘하였으나 그의 뜻대로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큰 뜻은 이루지는 못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고 국망의 길로 치달았다.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24년 3개월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미완(未完)의 군주는 승하하셨다.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100년이었다 

  

 

 

 

 

▲ 화홍문의 야경 ⓒ 2016 한국의산천

 

▶ 관련글 : 정조 미완의 꿈이 서린 수원 화성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949

 

 

 

 

창덕궁~수원화성~융릉까지 62.2km에 이르는 정조의 능행길
   

 

 

    정조 능행길은 원래 시흥 방향이 아니고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노량의 배다리(주교)를 건너 용양봉저정-만안고개-금불암-금불고개(지금의 숭실대 부근)-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찬우물점-인덕원천교-갈산점-원동점-사근참행궁-지지대고개를 거쳐 화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1795년 거둥길은 이 길을 피하고 시흥길을 택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남태령 길을 닦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한편, 야사에 의하면, 능행차길은 과천을 거쳐 인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찬우물점을 거치게 되는데 이곳에 김약로(金若魯 1694~1753) 무덤이 있어 이를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김약로는 노론의 영수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김상로(金尙魯)의 형이다. 아마도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통한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새로 선택된 시흥길은 언덕이 적은 편이어서 길을 내기가 비교적 쉬웠다. 이 길을 만들기 위해 경기감사 서용보(徐龍輔)가 책임을 맡았고, 평안도의 남당성(南塘城) 공사에 쓰고 남은 돈 1만 3천 냥을 투자하여 1794년에 완성하였다.

 

   이 길에도 안양천을 비롯하여 많은 개울이 있어서 크고 작은 교량을 세워야 했는데 서울에서 현륭원까지 모두 24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또한, 1천7백여 명의 인원이 말을 타고 5열, 많은 경우 11열로 행진하는 까닭에 길의 폭이 이를 용납할 만큼 넓어야 했다.

 

  길의 너비는 대략 24척으로 오늘날 10미터 정도에 해당한다. 이 도로는 순조 때에도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전국적으로 10대로(大路)에 들어가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과 수원화성, 지금은 터만 남아 정확한 위치조차 알 수 없는 시흥행궁, 정조가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갯길에서 못내 발길이 더뎌진다하여 이름 지어진 지지대고개 등 정조의 능행길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만나게 되는 문화유산들이다. 그 흔적을 따라가며 우리의 이산, 정조의 흔적을 찾아봅니다


  

지도로 보는 능행길 문화유산 (위 지도 참고 )


▶ 창덕궁(ⓛ-*지도상 표기숫자)
1405년(태종 5년)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그 빼어난 풍광으로 이름이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노량행궁 (용양봉저정, ③)
용양봉저정은 정조15년(1791)에 지어진 행궁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참배 길에 한강을 건넌 후 점심을 들면서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건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인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툇간을 붙였으며,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단 기와집 한 채만이 있다. 이곳은 잠시 휴식하며 점심식사를 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 시흥행궁 터(④)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 5동에 남아 있는 행궁 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 5동 831번지 6호 부근으로 추정된다. 1794년(정조 19)에 경기감사 서용보가 왕의 능행을 위하여 시흥에 행궁을 설치하였다. 행궁의 규모는 114간이나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금천현은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이곳에 행궁은 없어지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수령 830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 만안교(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교. 왕이 행차하는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끝난 뒤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행차 때마다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평상시에도 백성들이 편히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명으로 영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7개의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축조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 안양행궁 터(⑥)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 전인 1794년, 안양리(安養里)에는 안양주필소(安養駐 所)가 당시의 경기감사 서 용보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원래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서 만들어진 행궁(行宮)과는 구별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궁이라고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원행정례에 따르면, 안양행궁은 대청과 방의 비품 7종, 종이와 기름을 합쳐서 7종, 방석 4종을 합쳐 도합 3개 항목 16종의 비품을 항시 비치할 것을 예시하고 있다. 이곳은 수리산 끝자락으로 예로부터 밤나무 숲이 무성했던 곳으로 평촌들과 관악산이 잘 보이는 풍광이 좋은 곳이다. 정조대왕이 쉬어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주접동(住接洞)이 되었다

 

▶ 사근참행궁 터(⑦)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고천동사무소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사근행궁터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일시 쉬어가던 곳 이다.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행차할 때 이 곳에서 쉬어간 일이 있었는데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서 부왕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성으로 이장하던 1789년 10월 6일 상여가 이곳에 이르자 마중한 이 곳 노인들에게 경기감사로 하여금 쌀을 나누어 주게 하고 행궁을 지으니 이름을 사근행궁(肆覲行宮)이라 하였다.

 

▶ 화령전(⑨)
1801년(순조 1년) 순조가 선왕인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유덕을 길이 받들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진 익공(翼工)집이다. 정전 안에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으며 ‘운한각(雲漢閣)’이라는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친필이다. 경내에 풍화당(風華堂)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순조가 풍악을 즐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순조가 선왕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 자리로 여겨진다.

 

▶ 화성행궁(⑩)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長安區) 신풍동에 있는 행궁(行宮).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으로, 수원 화성의 부속물이다. 1796년(조선 정조 20년)에 수원 성곽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침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 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던 것을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고,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나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 수원 화성(⑪)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벽.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 ~ 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중심이 되어 당시 신기술을 총동원해 구축한 뛰어난 과학적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 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수원향교(⑬)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 있는 향교.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수원향교는 원래 고려 원종 22년에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던 것을 조선 정조 때 수원성곽을 축성하면서 현재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文廟) 공간에는 대성전 좌우에 서무와 동무를 배치하여 공자, 맹자 등 중국의 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인의 위패도 봉안하고 있다. 석전은 해마다 음력 2월, 8월의 첫째 정일날 11시에 행하고 있으며 분향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 월 2회 10시에 한다.

 

 

 

▶ 용주사(⑭)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 융릉(옛 현륭원, ⑮)
조선 정조(正祖)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 후에 장조로 다시 추존]와 그의 비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홍씨)의 능.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에 있다. 근처에 있는 정조의 건릉(健陵)과 함께 동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능은 원래 경기 양주군의 배봉산(拜峰山)에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라 하였으며 이를 지금의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자료:수원문화원]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대왕께서는 1776년 3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이때 많은 신하들은 기겁을 했다. 죽은 사도세자가 살아온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히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또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 그리고 장용영을 통한 정조의 꿈은 차차 무르익어 가는듯 하였지만 끝내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수원에 자리한 화성.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용주사 (용주사 동종 국보 제120호)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 당시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면서 함께 세운 절이다. 이 때문에 용주사는 세워질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사찰에 뒤지지 않는 큰 규모와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의 ‘승무’의 배경이 됐던 곳이기도 하다.

 

 

 

▲ 지금도 엄첨 추운데 이번 일요일은 영하 18도라네... 가자 집으로 ⓒ 2016 한국의

콧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떨어진다. 감기 기운이 있나보다.

 

 

 

 

 

 

▲ 융건릉에서 만난 일몰 ⓒ 2016 한국의산천

눈이 내릴듯한 흐린 날씨지만 그래도 노을은 서편하늘에 붉게 물든다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은 사도세자, 그리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기리는 정조대왕 여러 행적의 효는 이 시대가 본 받아야 할 교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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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