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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17. 상록수 최용신 선생 81주기 샘골교회 기념관 돌아보기

by 한국의산천 2016. 1. 24.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열일곱번째이야기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 선생의 81주기를 맞아.  

[2016 · 1 · 24 · 영하 20도 · 정말 추운 일요일 · 한국의산천 : http://blog.daum.net/koreasan/]


상록수 : 최용신 / 채영신


상록수역 이름과 안산시 상록구는 이곳 샘골이 바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에 그 이름이 탄생하였다.


 최용신 선생은 1930년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안산 샘골교회를 기반으로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닌 '상록수'처럼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희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키워내다 1935년 1월 23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참된 스승이자 독립운동가다. 


  소설 '상록수'는 란 심훈이 지은 장편소설로 전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농촌계몽운동을 모델로 삼아 저술한 작품으로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 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농촌계몽소설이며, 주인공 채영신은 최용신 선생을 모델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1995년 고 최용신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안산시는 2007년 10월 안산시 본오동에 최용신 기념관을 세운다.
또 그녀의 업적을 기념하여 안산시 상록구, 기념관 주위에 있는 도로의 이름을 용신로로, 전절역을 상록수역으로 명명하였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갈 뿐이다   



상록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 1933년 샘골강습소 낙성식 사진


상록수의 주인공
  1935년 1월23일 경기도립 수원의원에 입원해 있던 샘골강습소 교사 최용신이 숨을 거두었다. 향년 26세. 사회장으로 샘골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아이들 200여명을 비롯한 1천명이 사람들이 상여 뒤를 따랐다. 1월 27일 <조선중앙일보>에 ‘수원군하의 선각자 무산아동의 자모 최용신 양 별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최용신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최용신양은 금년 26세로 우리 농촌 개발과 무산아동의 문맹을 퇴치코자 1931년 10월에 수원군 반월면 사리에다가 천곡학술강습소를 설립하고 농촌부녀들의 문맹퇴치와 무산아동 교육에 많은 파란을 겪으며 노력 중이던바 과로와 더불어 불행하게도 장중첩증에 걸리어 신음하다가 지난 9일에 도립수원의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었으나 23일 오전 영시 23분에 쓸쓸한 병실에서 최후로 유언 몇 마디를 남겨 놓고 영원한 세상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최용신의 불꽃같은 26년의 생애가 이 짤막한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몇 달이 지나 <신가정> 5월호에 ‘영원불멸의 명주(明珠) 고 최용신 양의 밟아온 업적의 길’이라는 탐방기사가 실렸다.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연재되면서부터 최용신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 상록구 샘골(본오동)에 위치한 최용신 선생 기념관이 있는 샘골교회 ⓒ 2016 한국의산천  


한국최초의 감리교회 인천 내리교회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298


 높은 첨탑을 보며 교회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다.

문득 이문열씨의 소설 사람의 아들이 떠올랐다. 과연 인간을 구원해줄 이는 누구인가...


100년 역사의 샘골교회.(川谷.천곡교회 / 샘골교회)

샘골은 일제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한자로 천곡(川谷)으로 불려지다가 광복이 된 후에도 한참 후에야 다시 샘골로 부르기 시작했다는데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샘골교회보다는 천곡교회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고 한다.



함경도 원산에서 자라 경기도 안산의 상록수가 되다
 


  ◀ 최용신 선생님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원산(덕원)에서 최창희의 5남2년 중 넷째로 태어났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항구도시 원산은 1880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가 설립되었고 1920년대에 비키니를 입었을 정도로 개방된 지역이었다.


  최창희는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었을 때 덕원(원산)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였다.

5형제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을 정도로 집안형편도 넉넉했다. 최용신은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다가 생긴 곰보자국 때문에 가끔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나 성격이 활달하고 공부를 잘 하는 야무진 학생이었다.


   1928년 3월, 최용신은 우리나라 5대 명문 여자학교로 꼽히는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루씨는 선교사 루시 컨님김(Lucy Cuninggum)의 이름이다] 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이때 <조선일보>에 이 학교 졸업생 4명을 취재한 ‘새봄 맞아 교문을 나서는 재원들-원산 루씨학교의 특출한 네 규수’라는 기사에 최용신이 기고한 글이 실렸다.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진 이 사회가 남성만의 활동과 노력만으로써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여기에 교육 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본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처지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하려는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앞장서서 농촌에 봉사하고 양성평등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담대한 주장이다. 최용신은 재학 중에 존경하며 따르던 교목 전희균 목사의 권유로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 진학하여 전영택, 정인보, 조병옥, 정경옥 같은 교수들에게 전문지식과 나라사랑의 길을 함께 배웠다.


  독실한 감리교도였던 최용신은 민중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농촌 운동에 뜻을 둔다.
1929년 여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재학 중 강원도 포항 옥마동과 황해도 수안군 원곡면 용현리에서 농촌 운동을 했으며, 1931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의 파견 교사로 샘골에서 농촌 운동을 시작한다.


▲ 100년 전 이곳에 자리 잡은 기독교 대한감리회 샘골교회  ⓒ2016 한국의산천

 

1907년 7월 6칸짜리 작은 교회로 출발한 샘골 교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 이곳 터에 자리잡은 교회이다.

샘골 감리교회 뒤편 야트막한 동산에 최용신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은 기독교계통의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YWCA의 농촌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샘골:현재 안산시 본오동)에 파견되면서 그녀는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농촌 아동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는 구국교육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농촌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던 최용신은 1931년 10월10일, 스승 황에스더, YWCA 간부 김활란과 함께 수원군 반월면 천곡, 곧 샘골 강습소를 찾았다. 함께 왔던 동지들은 돌아가고 최용신만 남았다. 다음날부터 최용신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부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었다.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은 최용신이 아이들의 동무이자 선생님이 되었다.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처녀로서의 수줍음과 부끄러움도 버린 채 직접 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매며 농촌부녀자들과 함께 밭을 매면서 구슬땀을 같이 흘리고, 밤에는 가갸거겨의 한글강습의 야학을 열고 아동들과 한글·산술· 성경과 재봉·수예 가사같은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도 가르치며 치먀 농촌계몽활동에 힘썼다.


  그녀가 천곡(샘골)에서 우선 실행한 것은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여도 마땅한 교육장이 없는 것을 절감하고 강습소 설립에 온 힘을 경주하였다. 천곡에 온지 8개월만에 강습소 인가를 받아 내고 1년 3개월만에 강습소를 신축하여 110명의 아동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최용신의 천곡에서의 활동은 천곡강습소의 교장 겸 교사로서, 마을 주부들의 주부회 지도자로서, 마을 청년회의 후원자로, 천곡교회의 종으로서 천곡의 온 마을에 그녀의 손길과 마음이 아니 거친 데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천곡의 산 선지자였다고 전한다.





최용신의 정신
샘골 아이들이 부르던 '강습소가'의 가사에 최용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반월성 황무지 골짜기로 / 따뜻한 햇볕은 찾아 오네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빛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빛
오늘은 이 땅에 씨 뿌리고 / 내일은 이 땅에 향내 뻗쳐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싹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싹

 

노랫말처럼 최용신은 식민지 조선 아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던 위대한 교육자였다.





▲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최용신 선생 기념관 돌아보기 ⓒ 2016 한국의산천


학창시절 필독서 이광수의 유정 ,무정, 흙, 심훈의 상록수...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

  

심훈의 소설 상록수(常綠樹)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며 연재되었다.  

그 이전인 1932년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장편소설 '흙'을 연재해 전국 농촌계몽운동에 활력소을 불어넣기도 했다.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상록수 최용신 

사계절 언제나 푸른나무를 우리는 상록수라고 부른다. 그 이름처럼 지금까지도 우리곁에 상록수로 존재하시는 분 최용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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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세월이 지난 후 1974년 11월 30일 루씨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최용신 선생의 묘 
-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1932년 3월, 최용신은 더 배우기 위해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감리교에서 세운 고배여자신학교 사회산업학과에 입학한 최용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각기병을 얻어 결국 6개월 만에 귀국길에 올라야했다.


  샘골에 돌아온 최용신은 아픈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루도 쉬지 않는 그에게 좀 쉬라고 하자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해 생긴 것”이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과로와 장중첩증(장이 꼬이는 병)으로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도 샘골의 운명을 걱정했다. 하지만 1935년 강습소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임종한다.


   “천곡 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해 달라”는 최용신의 유언은 지켜졌다. 언니의 뒤를 이어 여동생 최용경이 샘골로 찾아와 교사로 활동하고 신문을 통해 사정을 알게 된 많은 청년학생들이 찾아왔다.

 

  1962년에는 대학교수를 지낸 김학준이 샘골을 찾아와 학원 이사장을 맡아 농촌운동을 함께 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켰다. 최용신의 관에 외투를 덮어주었던 김학준은 결혼한 몸이지만 아내의 동의를 얻어 약혼자 최용신 옆에 묻혔다.


▲ 샘골교회 뒤편 언덕에 자리한 최용신 선생의 묘 ⓒ 2016 한국의산천

(지금은 없어진) 강습소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강습소 바로 옆에 마련된 최용신 선생의 묘소

선생의 묘소앞에서 국화꽃 두송이를 놓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묵념을 했다 


그 옆에 있는 묘소는 최용신 선생의 약혼자 였던 김학준 교수의 묘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최용신(崔容信)선생 연보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차녀로 출생
2남 3녀( 언니 - 시풍 - 시항 - 용신 - 용경)
두남리는 동해 바다가 보이고 원산읍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마을로 일찍 기독교가 들어왔음.

1918년 3월 20일(9세) 두남학교 입학
1920년 4월(11세) 元山 樓氏女子普通學校로 전학
1924년 3월(15세) 원산 루씨여자보통학교 졸업
1924년 4월(15세) 元山 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입학
1925년(16세) 한동네 건너 살고 교회 회장이던 김학준군과 약혼
1928년 3월(19세)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최우등 졸업. 선교사 루씨 컨닝킴(Lucy Cuinggim)의 이름을 따 세워진 우리나라 5대 여자 사립(배화,이화,호수돈,숭의여고)중의 하나
1928년 4월(19세) 서울 여자협성신학교 입학(현 감신대). 학제가 변경(4년제,남녀공학)됨에 따라 1929년 새로이 뽑은 남학생과 이미 입학한 여자신학생이 합해져 남녀공학이 된 협성신학교 다님
1929년(1학년)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농촌 실습
1930년(2학년) 강원도(경상도란 주장도 있음) 포항 옥마동 농촌 실습
1931년 4월(3학년) 교내 스트라이크 사건 주도
1931년 10월(22세)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옴
※35.1.23 운명까지 3년 3개월, 일본 유학 기간을 빼면 샘골 활동 기간은 총 2년 9개월임
1931년 10월 11일 샘골 예배당을 빌려 한글, 역사, 산술, 초보의 재봉, 수예 가사, 노래공부, 성경공부 등 시작.
1932년 5월 샘골 학술 강습소 창설인가 받음
1932년 7월 경성 YWCA회관에서(제10회 Y전국대회) 샘골활동 보고
1932년 8월 학원건축 발기회 조직. (샘골부인 친목계, 염석주 등 지역 유지, YWCA 재정후원)
1932년 10월 강습소 짓는 계기 마련을 위해 추석놀이 개최
1932년 10월 27일 강습소 정초식 거행
1933년 1월 15일 2개월여만에 강습소 낙성식
1933년 7월 13일 수원경찰서 호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주재소, 경찰서로 자주 호출돼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문 등의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생존 지인들 증언)
1933년 10월 5일 학부형, 지역유지들이 참석한 운동회 개최
1933년 10월 YWCA의 재정 후원 절반으로 삭감
1934년 3월(25세) 일본 유학,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 입학. "이 땅을 농촌 운동의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함. 덴마크 그룬트비, 약혼자 김학준을 만남.
1934년 7월 고베신학교 학내잡지인 푸른 하늘에 나의 소감 기고
1934년 9월 각기병의 악화로 6개월만에 귀국
1934년 YWCA의 재정 후원 완전히 끊김
1934년 10월 30일 '여론' 잡지에 도움을 호소하는 '농민의 하소연' 기고
1935년 1월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입원.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운명(26세, 만 25년 6개월)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 최용신 선생의 마지막 유언 중에서 (1935. 1) -





▲  심훈 선생의 부조 ⓒ 2016 한국의산천

 

심훈(沈熏)
1901∼1936. 소설가·시인·영화인.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으로 삼준 또는 삼보가 있고 아버지 상정(相珽)의 3남1녀 중 3남으로 서울 노량진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번안의 〈장한몽 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 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하였다. 같은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 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 常綠樹〉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문화관광부 선정 1996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소설 상록수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가  00일보사에서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동혁은 수원 고등 농림 학생이고 영신은 여자 신학교 학생이다.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36년 YWCA는 비석을 세워 Y정신의 실천자, 농촌사업가의 산 표본으로서의 최용신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사업과 정신을 계속하기로 총회에서 결정.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상록수 저자 심훈 서울대병원에서 36세의 일기로 운명(병명 장티프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1974년 11월 최용신 기념비 제막
1975년 3월 11일 약혼자 김학준교수 타계
1976년 루씨 상록 회관 준공( 최직순 동문 등 루씨동창회 기금 모금)
1990년 경기도 안산시 최용신봉사상 제정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최용신묘 향토유적 18호 지정
1993년 8월 24일 안산시 상록수공원(4064평) 향토보호구역 지정고시
1994년 11월28일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추서 청원(지역신문 金明玉記者)
1995년 8월 15일 국가독립유공자(建國勳章 愛族章) 추서
2001년 2월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2001년 2월 20일 감리교신학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몇년만에 들이닥친 한파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만큼은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