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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1 내포 가야산

by 한국의산천 2016. 7. 12.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한번째 이야기

서산 내포 가야산

 

이것 역시 날아간 사진이기에 다시 올리는 이야기...


▲ 새벽에 출발하여 화성 휴게소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 2016 한국의산천

업무차 가는 길에 비가 와도 가야한다. 일을 보고 라이딩으로 가야산을 한바쿠 돌아보련다.



  내포(內浦)는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포구'를 말한다.

오늘날 태안,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등 가야산을 중심으로 열 고을이 바로 그곳이다.

아산만, 가로림만, 천수만에 연결된 하천을 통해 내륙 깊숙이까지 뱃길이 닿았다.

중국의 불교문화가 이곳을 통해 곧바로 백제에 밀려들었다.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 사면석불 등이 바로 그 흔적이다. 당시 내포지역은 한반도의 불교문화 선진지역이었던 것이다.


▲ 덕산에 자리한 유명한 밴뎅이 식당 ⓒ 2016 한국의산천  








▲ 날씨가 영 안좋다 ⓒ 201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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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인가 서풍이 부는 날이면 누구든 나를 깨워주오

무명 바지 다려입고 흰 모자 눌러 쓰고 땅콩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 가지고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고 싶어도 내가 잠들어 있어 못가고 못보네
그래도 서풍은 서풍은 불어 오네 내 마음 깊은 곳에 서풍은 불어 오네
아 ~아 ~아 ~ 서풍아 불어라 불어라

무명 바지 다려입고 흰 모자 눌러 쓰고 땅콩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 가지고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고 싶어도 내가 잠들어 있어 못가고 못보네
그래도 서풍은 서풍은 불어 오네 내마음 깊은 곳에 서풍은 불어 오네
아 ~아~ 아~ 서풍아 불어라 불어라


▲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 잠시 비를 피하자


▲ 가야산의 으뜸이었던 사찰 '가야사'

 

  서산 예산 홍성에 걸쳐 있는 가야산은 '내포의 중심'이다. 옛 백제인이 지상에 건설한 '부처님 나라'이다.

백제인의 꿈과 얼이 서려 있다. 골짜기마다 수많은 절과 탑이 있었다. 현재 확인된 옛 절터만도 얼추 100개가 넘는다. 발에 걸리는 게 기왓장과 도자기 조각이다.

 

  보원사 터, 봉두암 터, 용자암 터, 취대암 터, 영구암 터, 곰방사 터, 보현사 터, 정수암 터, 서림사 터, 온양사 터, 백암사 터, 수도사 터, 안흥사 터, 약사암 터, 일조암 터, 하당당이절터, 용나르니절터, 생앙절터, 원효암 터, 아랫절터, 윗절터, 안터절터, 큰골절터, 샛바람절터, 새절터, 지럭절터, 남림절터, 고장절터, 제절터, 오박난(오백나한)절터, 바랭이절터, 옥계절터, 수리바위절터, 내원남절터, 빈대절터, 가새골절터, 문하절터, 능인절터, 용연절터, 도시랭이절터….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경주남산을 '절집들이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 같이 줄지어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고 표현했다.

내포 가야산 절집과 탑들도 경주남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나같이 무성한 잡초와 나무에 묻혀 있다. 망한 나라 백제의 운명과 닮았다. ‘목 없는 불상’이나 무너진 탑조차 찾아볼 수 없다. 주춧돌 등 땅바닥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내포 가야산은 천하명당이다. 수정봉(453m)-옥양봉(621m)-석문봉(653m)-가야봉(678m)-원효봉(677m)이 연꽃잎처럼 빙 둘러 있다. 연꽃 한가운데 꽃심이 바로 옛 가야사 터이다. 가야사는 가야산 100여 개의 절 가운데서도 '으뜸 절집'이었다. 하지만 1846년 흥선대원군이 이 절을 불태우고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구) 묘를 이장하는 바람에 졸지에 사라졌다. 대원군은 미안했던지 가야사 맞은편 기슭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작은 절을 지어줬다.

 

  남연군 시신은 고려시대 나옹선사(1320∼1376)가 세웠다는 가야사 금탑자리에 묻혔다.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혈처이다.

실제 묘를 쓴 이후 대원군 후손 중에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재위 1863∼1907), 순종황제(재위 1907∼1910)가 나왔다. 풍수지리상으로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의 명당'이라고 한다. '사방이 돌로 쌓여 있는데 시신이 묻힌 자리만 흙'이라는 것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무덤 주위에 돌이 워낙 많은 데다 관의 회벽이 두껍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상왕산(307m), 남쪽엔 덕숭산(495m)이 있다. 상왕산엔 개심사, 덕숭산엔 수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아무래도 꽃심 자리에 있던 가야사의 빈자리가 크게 보인다.





▲ 남연군 묘 ⓒ 2016 한국의산천

 

  흥선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恩信君) 이진의 후사였다. 은신군은 열여섯 때 죽어 후사가 없자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李秉源)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그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이구(李球)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젊은 시절 재산을 탕진하며 파락호(破落戶)로 불우한 생애를 보내던 야심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오랜 시절을 공들여 시작한 일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南延君, ?~1822)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흥선군은 당대의 지관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명당 자리를 부탁하여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구하였는데 그 명당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묘자리에는 금탑이 서 있었다.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며 스님들을 쫓아낸 후 이곳에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절은 폐허가 되고 금탑만 남는데, 탑을 헐기로 한 날 밤에 네 형제가 똑 같은 꿈을 구게 된다.

 

꿈에....

"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았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내 너희를 용서치 않으리라 "

 

겁에 질린 형들은 모두 그만두기를 원했으나 막내 흥선군은 분통하면서 

"그렇다면 이 또한 진실로 명당이다". 라고 말한뒤


"장김의 문전을 다니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때 잘 사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탑을 부수자 도끼날이 튀었다고 한다.


이에 대원군이


"왜 나라고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라고 소리치자 도끼가 튀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곳 명당으로 이장 후 정만인의 예언대로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으며 고종, 순종 등의 2대 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다.

이런 일화들은 풍운아 이하응의 강한 권력 지향성을 보여준 것이다.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에 봉하고 즉위를 명하였다.

그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왕족으로서 흥선군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빈궁한것은 물론이요 세도를 이어가는 데 위협이 되는 왕족의 씨를 말려버리는 안동 김씨 일문의 횡포로 목숨을 부지하는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철종이 대를 이을 후손이 없자 흥선군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자신은 건달들과 어울리며 또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궁색한 구걸도 하며 파락호로 보이게 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하여 철종이 죽자 흥선군의 야망대로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이다.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였을 때 나이는 12살로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대비는 흥선군을 대원군에 봉하고 섭정의 권한을 맡겼다. 섭정의 권한을 맡은 흥선대원군은 포효했다

" 조선을 강력한 왕의 나라로 만들겠다!"  고...


이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무너뜨려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을 천명한것이었다.





  내포 가야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옛 절터이다.

골짜기 평평한 곳이면 어김없이 빛바랜 주춧돌이 누워 있다. 아늑한 산기슭에도 기왓장 조각이 널려 있다. 탑이 놓였던 사각형 밑동만 덩그마니 남아있는 곳도 있다.

 

  그렇다. 내포 땅엔 어디에나 돌미륵부처가 널려 있다. 길가에 배시시 웃으며 서 있다. 낡은 민가 귀퉁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헌헌대장부 얼굴로 우뚝 서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누가 말 걸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천년만년 산처럼 바다처럼 서 있다. 내포 땅 가야산은 그런 곳이다. 


























▲ 보원사지가 있던 곳을 강댕이라고 불렀다

오래전 이곳 보원사지는 큰 절에 강론을 하는 건물과 강당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강당...강댕이로 불리어졌다고 생각한다


서산 보원사(普願寺) 터는 서산마애삼존불과 가깝다. 걸어서 10~15분 정도 소요된다.

산에 빙 둘러싸인 강당계곡은 입구는 좁아도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벌판이 나온다. 그곳에 장대한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 화엄 10찰의 하나였다.


 보원사는 서산마애삼존석불 개심사 가야사 사이에 놓여 있다. 백제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절집과 마애석불 사이에 통일신라가 새 절을 지은 것이다.

승려가 한때 1000명이 넘었다니 통일신라의 관심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당진(唐津)은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중요한 새 뱃길 루트였다. 

 










▲ 용현계곡에 있는 방선암 ⓒ 2016 한국의산천

  

▲ 해미읍성 ⓒ 2016 한국의산천 



 ▲ 구부러지고 못생긴 나무지만 그래도 제 할일을 다하는 심검당의 나무 기둥 ⓒ 2016 한국의산천  

'못 생기고 굽은 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는 옛 속담처럼 쓸모없어 보이는 것 나무가 도리어 제구실을 하고 있다.


심검당(尋劍堂)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다. 심검당의 '검(劍)'은 마지막 무명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을 증득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개심사(開心寺)

  마음을 여는 절이 바로 개심사다. 그리고 개심사가 위치한 곳은 세심동(洗心洞)이라는 곳이니, 둘을 합치면 마음을 닦고 여는 절이라는 의미가 된다. 누군가가 만약 개심사에서 세속의 때를 벗고 마음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심사가 지닌 소박함과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상왕산 자락에 자리한 개심사는 신라진덕여왕5년(651년), 또는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국사가 개원사(開元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1000년이 넘은 사찰인 셈이다. 고려 충정왕 2년(1350년) 중건하면서 이름을 개심사로 고쳤다 한다. 


  개심사에는 경허선사(1849-1912)가 1889년 이후 20여 년간 호서지방의 문수사,부석사(서산),수덕사, 정혜사, 천장사등을 돌며 선기어린 행동과 법문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다닐 때 머물기도 했던것곳이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 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 정순왕후 생가 ⓒ 2016 한국의산천

조선시대에 정순왕후는 두분이 계셨다.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송씨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두분이셨다.

정순왕후 송씨는 어린나이에 상왕이 되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비로서 홀로 남은 비운의 왕비였고, 정순왕후 김씨는 열다섯 나이에 육십육살의 영조에게 시집을 와서 노론의 수장 역활을 톡톡히 하였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인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의 열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속에 가두고 죽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시파인사들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원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도 같은 이유로 사사시켰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년 지금 나와 같은 나이인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영조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원릉에 묻혔다.





▲ 정순왕후 생가를 돌아보고 집으로 귀가 ⓒ 201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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