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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0 두물머리 정약용 생가

by 한국의산천 2016. 7. 12.

실수로 삭제된 사진 다시 업로드합니다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무번째 이야기

두물머리(양수리)와 정약용 생가 여유당 둘러보기 ...준비중



  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거슬러 오른다. 양평 나들이 길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언제나 한강 줄기다.

한강을 이루는 두 개의 큰 물줄기, 곧 남한강과 북한강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양평은 한강을 빼놓고는 결코 한 마디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왼쪽은 용문을 의지하고 오른쪽으로는 호수를 베고 누워있다(左據龍文右枕湖)'는 기록으로 양평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호수란 바로 남한강과 북한강을 일컫는다. 거기에 용문산은 백두대간의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오며 두 강을 가르는 한강기맥의 맹주니, 양평은 한강기맥을 중심으로 양쪽 날개에 남한강과 북한강을 거느린 형국이 된다. 그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로 두물머리다.

 


그 옛날 삼남대로의 갈림길인 천안삼거리가 유명했다면, 물길에선 양평의 두물머리도 제법 큰 삼거리였다. 서울과 강원·충청지방 간의 수송물자 나르는 배가 휴식하던 곳이며, 예전엔 술을 파는 객주집도 넘칠 정도였다. 양평엔 남한강의 양근나루·앙덕나루, 북한강의 내미연나루·수입나루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상징성에 있어서 두물머리나루에 떨어진다. 


▲ 두물머리 도당나무로 불리는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 ⓒ 2016 한국의산천

팔당댐이 생기기 오래전에는 이곳이 아마도 어느 정도 높이를 가진 언덕이었을 것이다. 댐이 건설되고 담수가 시작되며 지금 이곳까지 물이 차오른것이다.


  두물머리(행정지명은 兩水里)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예전에는 이곳의 나루터가 남한강 최상류의 물길이 있는 강원도 정선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마지막 정착지인 탓에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다가 팔당댐이 건설되고 철도와 육로가 신설되자 수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어로행위 및 선박건조가 금지되면서 나루터 기능이 정지되었다.



이곳은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옛 영화가 얽힌 나루터, 강으로 늘어진 많은 수양버들 등 강가마을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사진 출사, 웨딩, 영화, 광고, ·드라마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나 되었다.



두 강물이 만나는 양평의 두물머리(兩水里).

  두물거리·두머리·두거리·양수두·양수 등으로 불렸던 양평의 두물머리는 적어도 남한에선 규모가 가장 큰 합수점이다. 한반도의 중심을 적시고 흐르는 큰 물줄기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는 좀 특별한 감이 있다. 


  두물머리의 지금 풍경은 한가한 수채화지만, 팔당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한강에서 제법 번잡한 편에 속하는 나루터였다.

예부터 '두머리'(옛날엔 두물머리를 두머리라 불렀다)는 서울로 들어가기 전 하루 머물러 가는 쉼터였다. 강원도 산골에서 물길을 따라 온 뗏목과 나무들이 이곳에서 쉬어 가고 사람도 같이 쉬었다. 주막집이 늘어서고 50가구가 넘게 살면서 서울로 오가는 길손들로 북적거리는 마을이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와 남한강과 북한강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한강기맥의 끝자락이기도 한 두물머리엔 늙은 느티나무가 전설처럼 서있다.

400년쯤 전부터 이곳에 뿌리박고서 남한강이나 북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오가던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쉼터 역할을 하던 나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도당 할아버지’라 부르며, 지금도 매년 가을 젯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낸다. 하지만 ‘도당 할아버지’의 배필이었던 ‘도당 할머니’ 나무는 1974년 팔당호가 생기며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뗏목과 떼돈

뗏목이란 나무를 엮어서 뗏목을 만들고 강을 통하여 먼 곳에 나무를 운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떼돈이란 말은 오래전 대원군이 임진왜란에 불탄 경복궁을 재건할 당시에 나무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고 이때 강원도의 나무가 필요했기에 뗏목으로 남한강을 통하여 마포나루까지 뗏목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때 뗏목을 만들고 운반해주고 떼꾼들이 받는 돈이 바로 떼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큰 금액이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떼꾼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에서 '떼돈' 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떼돈을 번다는 떼꾼들은 사라지고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 제8권 '인사문'에는 그 소나무 재목에 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영서(嶺西)의 소나무 재목이 좋기는 하나 영동 것만은 못하다. 오늘날 온 나라 안에서 쓰고 있는 관재(棺材)는 모두 영동과 영서에서 뗏목으로 만들어서 띄워 보낸 것들이다. 영동은 토지가 메마르지만 가뭄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 풍속이 호화로워서 잔치를 벌여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영서는 넓은 들이 없고, 오직 화전만이 있으므로 조밥을 먹을 뿐 쌀밥은 없다. 벌을 길러 꿀을 따서 돈을 마련하며, 임목(林木)을 벌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역사(役事)로 벌어먹는 백성이 많다.


  이렇듯 질 좋은 소나무 재목을 실어내던 뗏목꾼들의 애환이 오랜 세월에 걸쳐 켜켜이 쌓이고 쌓인 곳이 정선과 영월이다. 당시 정선군수와 영월군수의 월급이 20원일 때 정선에서 떼 한 바닥 타고 가서 강 주인한테 넘기면 단번에 30원을 받았고, 보통 떼꾼들이 정선에서 서울을 한 번 다녀오면 큰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잘 벌었는지 ‘떼돈 번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광복 이후 정선에서 한강까지 오는 길목에는 1000여 개의 객줏집이 늘어서 있어 떼꾼들의 떼돈에 기대어 살았다. 밤낮없이 떼를 모는 떼꾼들을 위해 객줏집 여자들은 거룻배에 장구와 술 등을 싣고 아예 한강까지 따라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니 여자를 사귀거나 노름하는 데 떼돈을 모두 날려버려 서울에 도착한 뒤에는 집으로 돌아갈 여비마저 없어 고생하는 떼꾼들도 적지 않았다. 능숙한 떼꾼들은 1년에 대여섯 차례 서울을 오가며 돈을 벌었다는데,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최영준은 「남한강의 수로와 해운」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뗏목은 정선군 여량에서 통나무 8~10개(큰 나무는 3개)를 한 동가리로 엮어 물에 띄웠다. 한 동가리는 폭 25자, 길이 12자 내외이며 통나무의 굵기는 보통 40센티미터였다. 정선군 가수리에서는 정선군 각지의 뗏목을 모아 6~7개의 동가리를 칡으로 엮어 반 바닥짜리 뗏목을 만들었다.


  영월 맛밭(나루)에 집결된 뗏목들은 평창에서 온 뗏목과 합쳐져 한 바닥짜리 뗏목으로 엮였다. 한 바닥 뗏목은 보통 15동가리로 구성되며 이 뗏목엔 앞과 뒤에 각각 벌부(筏夫) 한 명씩이 탔다.


  뗏목 운행은 4월부터 11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영월 맛밭 상류 쪽은 급류가 많아 숙련된 벌부들조차 사고를 많이 당하였다. 정선 가수리에서 맛밭까지는 하루가 걸렸으며, 맛밭에서 서울까지는 수량이 풍부할 때는 이틀, 적을 때는 열흘, 일반적으로는 닷새 정도 걸렸다.


  1910년대 광나루ㆍ뚝섬 등지에 집산되었던 목재의 4분의 1이 정선산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뗏목 집산지였던 여량ㆍ가수리ㆍ맛밭ㆍ사평의 경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18년 한양에 이입된 상류 지방 화물 총액은 약 60만 원인데 그중 할목(割木) 16.3퍼센트, 잡목(雜木) 4.4퍼센트, 시목(柴木) 17.1퍼센트로 임산물이 약 37.8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출처 : 떼돈을 번다는 떼꾼들은 사라지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강원도 정선 산골에서 벌채된 나무들을 배로 실어 나르던 이들을 '떼꾼'이라 불렀는데 벌이가 군수 월급 못지않아 '떼돈 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물길 따라 서있던 2,000여개의 주막에서 기녀들의 아리랑 가락에 취해 빈털터리가 됐다니 쓴웃음이 나온다.




 매년 음력 9월이면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도당제’를 올린다.
두물머리의 당산목인 400년 된 느티나무에서 마을의 안녕과 무병 무탈, 풍년을 기원하는 도당제는 '축원' '제사' 등 신성한 의례로 해마다 음력 9월2일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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