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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스치는 바람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2 평화누리길 손돌목

by 한국의산천 2016. 9. 3.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 두번째 이야기 평화누리길 손돌목 손돌묘


아라뱃길을 따라서 손돌목 손돌묘 왕복하기 


손돌목과 손돌의 전설은 김포와 강화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 손돌목 전설은 김포와 강화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것으로, '손돌목이라는 여울과 관련된 지명 전설이며, 동시에 손돌 풍신, 즉 손돌추위 또는 손돌바람의 배경전설' 이기도 하다.

 

▲ 인천의 명산인 계양산이 보이는 계산역에서 출발 ⓒ 2016 한국의산천  


즐거운 휴일 토요일이다

아직 더운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하더이다  


▲ 아라뱃길 아라마루 전망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잔 후 출발 ⓒ 2016 한국의산천





▲ 평화누리길 입구에서 ⓒ 2016 한국의산천



▲ 요즘은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알아야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ㅎ ⓒ 2016 한국의산천






▲ 덕포진 포대진지 ⓒ 2016 한국의산천


  

▲ 덕포진 파수정터 ⓒ 2016 한국의산천



▲ 손돌의 묘 옆으로 업힐해서 올라오는 봄님 ⓒ 2016 한국의산천



손돌의 묘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92호

지정일 : 1981년 09월 25일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

시대 : 조선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위치하며 고려시대 뱃사공인 손돌의 무덤이다. 1970년에 덕포진 내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1977년에는 묘비를 세우고 주변 묘역을 단장하였다.



▲ 바닥에는 암초가 많으며 물결이 센 손돌목 ⓒ 2016 한국의산천


손돌목의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서기 1231년에 이르러 몽고군이 대거 침입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오자 고려 고종은 위급을 면하려고 화평을 내세워 돌려보냈으나, 몽고의 부당한 조공의 요구에 불복,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232년(고려 고종 29년) 강화로 파천하게 된다.


  고종은 충신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서 손돌이의 배를 타고 임진강과 한강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가게 된다. 가는 도중 지금의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소재 덕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가 흐르는 목에 닿게 되었다. 


  고려 왕인 고종이 급히 피난하면서 바다를 건너갈 배를 마련하지 못해 손돌의 작은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물길이 좁아 앞이 보이지 않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겁에 질린 왕은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손돌이 이지역의 물길이 험해서 그러한 것이라고 했지만 고종은 손돌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손돌은 체념하고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흘러가는 바가지를 따라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손돌이의 죽음을 자기 잘못으로 뉘우치고 그의 충성심을 위로키 위해 국가에서 지금의 대곶면 신안리 덕포하류 손돌목이 내려보이는 산 언덕 위에 묘지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했다고 한다.
 
  조선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지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낸다.  



▲ 좁고 해류가 빠른 손돌목을 배경으로 ⓒ 2016 한국의산천


손돌목  

  손돌목은 인천 앞바다에서 마포나루까지 올라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서 강화군 광성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을 말한다.

이곳은 평상시에는 세곡미를 운반하는 뱃길로 이용되었으며, 전시에는 적을 방어하는 진지로 사용되었다. 손돌목은 고려이래 조선말까지 경제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었다.



손돌목과 손돌의 전해오는 이야기


  음력 10월 20일로 뱃사공 손돌(孫乭)이 억울하게 죽은 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비롯한 세시기에 의하면, 이날은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파천하는 고려의 왕을 모시던 뱃사공 손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날이라고 한다.


  경기도 김포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을 위해 매년 '주사 손돌공 진혼제(舟師孫乭公鎭魂祭)'를 지낸다. 동절기에 속하는 음력 10월 20일을 전후해서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손돌이 죽은 장소를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풍이 불 때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이 강풍을 몰로 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바로 음력 10월 20일이다. 또한 손돌과 관련지어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풍이라 부르고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부른다.



 




              -  천 상 병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 들판은 어느덧 황금 물결을 이룬다 ⓒ 2016 한국의산천



길처럼  


                   - 박목월


머언 山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 계속해서 염하강 철책을 따라 이동 ⓒ 2016 한국의산천  
















집으로 가는 길

                                  -   신 경 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아라뱃길은 왜 생겼는가?

아라뱃길의 존재가치는 세월이 흐르며 후손들이 판단할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각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물건을 보관하는 조창(漕倉)이 있는 곳과 한양을 왕래하는 조곡선이 있었다.

그러나 조곡선이 다니는 길목에 암초가 많고 조류가 빨라 선박이 파손되거나 침몰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곳 손돌목 역시 그러한 곳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천에서 손돌목을 피해서 서울 마포로 들어가는 운하 계획이 여러번 있었다.


  그 첫번째로 인천의 서해바다와 한강을 연결하려는 운하계획이 굴포 운하 계획이었다.

조운에 의하여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서울의 창고(경창)까지 운반하는데는 배가 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배를 이용하여 서해수로를 이용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양에 이르게 되는데, 이 수로에는 크게 3곳의 험로가 있었다.

충청남도 태안반도 근처의 관장목과 강화도와 김포사이의 손돌목, 행주의 염창목 이 그 곳이다.


  영조때의 기록만 보더라도 이 곳을 지나는 세곡수송선이 영조 4년에 40여척, 영조7년에는 90여척이 침몰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도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계획한 것이 바로 굴포 운하 계획이다. 굴포 운하 계획은 인천에서 보면, 세갈래의 방향에서 시도되었다.

첫 번째가 바로 남동구 간석동의 원통현 고개를 뚫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무넘이 고개를 뚫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가 청천동의 안하지 고개를 뚫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고려시대, 조선시대 운하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지형과 단단한 지질등으로 그 당시의 토목기술로는 어려웠기 때문에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 굴포천 ⓒ 2016 한국의산천

  인천시 부평구와 부천시, 김포시, 서울 강서구를 흐르는 하천은 굴포천(掘浦川)이다. 여기에 한자 '팔 굴(掘)'이 있는 것은 인공적으로 수로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굴포천 역시 부평 삼거리와 간석오거리 사이에 있는 고개를 뚫을수 없었기에 운하는 만들어 지지 않았다. 그 고개이름은 지금도 원통(원통이)고개다  


원통고개 [圓通峴] : 위치 : 인천광역시 부평구,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부평삼거리에서 남동구 간석동 간석오거리로 넘어가는 지점에 위치한 고개이다.

조선 시대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대동미 운송은 주로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운송로 중 강화도 손돌목은 소용돌이가 심하여 난파가 빈번하였고, 결국 이 노선을 대체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부평을 넘어가는 운하를 굴착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 원통고개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암반으로 된 지반을 굴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통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46번 국도와 경인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다.


무넘이 고개 (물넘이 고개) : 송내역/ 구산동과 장수동 사이에 있는 순환도로 아래 고개 언덕

  물넘이 고개는 옛날 경인운하를 파서 배를 띄우기 위해 부평의 굴포천과 장수천을연결하여 서로 물을 통하게 하는 공사를 하다가 고개의 암석을 뚫지못해 중지하게되어 붙여지 이름이라 한다.


  물넘이 고개는 장수동과 부평구 구산동을 있는 고개로거마산과 국골산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 수현과 관련된 이름이 남아있는 곳은 장수사거리에서 부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장장골을 지잔 장수천을 건너는 다리가 바로 수현교이다. 참고로 굴포운하 계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하지 고개 : 인천광역시 계양구, 인천광역시 부평구, 인천광역시 서구

  인천광역시의 계양구 효성동 혹은 부평구 산곡동에서 서구 가정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고개이다.

경명현과 함께 과거 서구 지역으로부터 부평으로 넘어가던 주요 고개의 하나로서 조선 시대 삼남지방의 대동미를 한양으로 운반하던 통로이기도 했다.

당시 창고가 설치되어 있던 서구 원창동으로부터 부평을 경유하여 한양으로 대동미를 옮기기 위한 고개였다고 전한다. 또한, 운하 굴착을 시도했던 고개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조운선이 자주 난파되었던 강화도 손돌목을 피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부평을 넘어가는 운하를 굴착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 원통고개, 두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 무네미고개, 그리고 세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 안하지고개라는 유래가 있다.

안하지란 '더 이상 굴착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부여된 지명이라고도 전한다. 현재 경인고속도로가 통과한다.


▲ 딸 퇴근 시간에 맞춰서 집앞에서 호프 한잔하기

아내와 딸과 함께 호프 한잔하기  







[만물상] 맥주의 맛

•선우정 논설위원  입력 : 2016.09.01 03:11

 
  몇 년 전 일본 맥주회사 간부를 만나 일본 맥주가 맛있는 이유를 물었다. 몇 가지를 말했는데 하나가 뜻밖이었다. 일본 맥주 역시 옛날엔 맛없기로 유명했다가 100년 전 큰 기회를 잡았다고 했다. 1차대전 패전국 독일의 중국 조차지 칭다오(靑島)를 일본이 점령했다. 독일은 그곳에 큰 맥주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공장을 일본이 접수해 선진 맥주 공법을 홀랑 베꼈다고 했다.


▶이 공장을 차지한 회사가 다이닛폰(大日本) 맥주였다. 지금 아사히와 삿포로 맥주의 전신이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하면서 이 공장은 중국에 넘어갔고 거기서 생산한 것이 양꼬치와 궁합이 맞는다는 칭다오 맥주다.


  다이닛폰 맥주는 일본이 강점하던 조선에도 공장을 만들었다. 이 공장이 해방 후 한국인에게 넘어가 지금의 하이트맥주가 됐다. 오비맥주 역시 일본 기린 맥주의 조선 공장에서 출발했다. 둘 다 칭다오 점령 후 세웠기에 독일 공법이 적용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중국 맥주보다 훨씬 박한 평가를 받고 있으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

 

 
▶ 몇 년 전 어느 영국 기자가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고 꼬집었다. 대동강 맥주는 16년 전 생겼다. 처조카에게 삐딱하게 굴었다가 사형당한 장성택이 김정일 지시를 받고 만들었다고 한다. 짧은 역사에도 좋은 맥주를 빚는 비결이 뭘까. 대동강 물맛도 있지만 영국 양조장을 통째로 들여온 덕분이다. '어셔'라는 회사의 양조장 문짝과 바닥 타일, 변기 뚜껑까지 싹 쓸어 왔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 맥주 맛은 단순한 듯하지만 아주 미묘하다. 축적된 노하우와 전통이 필요하다. 뜻밖의 나라가 만드는 맛있는 맥주는 칭다오처럼 대개 식민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자부하는 빈탕 맥주도 지배국이던 네덜란드가 하이네켄 맥주의 공법을 들여다 생산했다. 물론 전통만으론 안 된다. 맥주 시장은 사람들 미감(味感)이 조금만 바뀌어도 일거에 뒤집히기 때문에 끝없는 혁신이 필요하다. 일본 맥주의 오늘은 30년 넘게 업체들이 맛을 놓고 경쟁한 '드라이 전쟁'의 산물이다.


▶ 공정거래위원회가 한국 맥주가 뒤떨어진 이유를 정리해 발표했다. 시설·유통망 규제, 종가제 세금, 가격 결정 구조를 꼽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빠졌다. 혁신 노력이다. 엄혹한 독재 왕국의 대동강 맥주, 술에 완고한 이슬람 국가의 빈탕 맥주가 설마 적은 규제와 많은 자유 덕분에 맛있을까. 한국 맥주 업계는 폭탄주용 맥주에 만족하다 이 지경이 됐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로운 맛 개발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