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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이번에 개통된 강화 교동대교를 건너서 교동도 화개산 등산

by 한국의산천 2014. 7. 5.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된 강화교동대교를 건너서 화개산 오르기 [2014 · 07 · 05 · 토요일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금일 사용렌즈: 광각 14-28mm f4 /  표준 40mm f1.7 / 망원 70-200mm f2.8

 

렌즈를 모두 챙겨서 간 이유

1. 교량 정면에서의 촬영은 역시 앞과 뒤를 밀착시키는 망원의 효과를 고려해서 망원을 챙겼음.(역시 촬영자 위치와 교량 도로의 고도차가 확실하게 표현되었습니다)  

2. 화개산 정상에서 산아래 평야를 촬영할때 광각보다는 오히려 망원이 보다 더 평야의 느낌을 주었음.

3. 대룡시장의 좁은 골목에서는 광각렌즈가 전체 풍경을 표현하기 좋았음. 교동읍성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4. 화개산으로 오르는 중에 산행사진은 꽃사진 촬영이 아니라면 망원보다는 광각 또는 표준렌즈가 적합했음.   

5  40mm 표준렌즈는 밝기가 f 1.7 이므로 1년 365일 휴일과 자전거라이딩때, 출근시에도 카메라에 장착하여 다님. 기본이자 표준렌즈이기에 가장 아끼는 렌즈이며 꼭 지참하는 렌즈임 ( 야간 촬영시 플레쉬 없이도 실내 촬영이 가능하고 야경에서는 빛갈라짐 현상이 매우 아름다움. 인물 촬영시 주제이외의 앞뒤 배경 날림이 탁월하여 인물사진 또는 소품, 또는 음식사진 촬영에 매우 적합한 렌즈임) 

 

인천시 강화본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했습니다.

 

 

 

 

  2014년 7월1일 인천 강화도 본섬과 북한 접경 지역인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정식 개통됐습니다. 길이 3.44km,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연륙교는 총 사업비 890억 원이 투입됐으며, 2008년 19월 25일에 착공하여 6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사장교 형태이며 교량의 길이는 3.44km로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도 심한데다 빠른 물살 때문에 교각 일부가 유실되는 등 공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합니다.

 

  교동도는 민통선 북방지역이기에 해병 군부대에서 검문을 하며 교동 군민은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외지인들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까지만 통행이 가능합니다.

검문소에서 외지인들에게 출입 목적 확인 등 소정의 절차를 확인 후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발부 받아야만 다리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나올 때는 출입증을 제출하고 신분증을 찾아옵니다.

 

※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량이 많이 밀려듭니다.이때 출입증 교환절차로 대기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문화시민들의 힐링여행이므로 차분히 기다리는 여행자의 미덕이 필요할때입니다 (한정된 인원에 검문 초병 근무자 인원수를 늘리는 많큼 군인들의 여가시간과 수면시간은 줄어듭니다)  

 

 

▲ 교동도 개념도 (네이버지도를 베이스로 지명을 추가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교동도

 

   교동도는 북한쪽 황해남도 연안군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화도 북단 최전선의 섬으로 특별한 명승지나 볼거리는 부족(?)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여행의 무게감을 느끼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입니다.

 

  해변의 평지에 자리한 거대한 난정저수지와 강화군 전체에서 가장 넓은 교동평야, 그리고 교동읍성과 철책선의 긴장감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섬으로 얼마전까지만해도 페리호를 타고 건너가던 섬이었지만 지금은 다리를 건너서 갈수있게된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는 섬입니다

 

  역사속의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 1천년간 개성과 서울의 관문이자 군사요지였으며, 활발한 무역항이었습니다. 지금도 옛날 중국 화폐가 많이 출토된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 교동의 위치는 수도 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개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들려야 하는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교동 남산포구에 도착한 중국 사신들을 맞았던 곳이 남산포 대변창입니다. 대변은 손님을 맞는다는 대빈(待賓)이란 말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형된 글자입니다. 남산포구에 내린 사신들은 인근에 있는 절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침 배로 개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교동은 충청도, 황해도, 경기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 통어영이 설치된 곳입니다. 당시 교동의 원님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았던 곳입니다. 무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적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 방어선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개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가 지금도 존재하는 곳이지요. 얼마전까지만해도 강화도와 같은 행정기관이 있었으며, 부자들이 많이 사는 인구가 많은 섬이었습니다.

 

 또한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습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그간 교동도가 잘 알려지지 않고 멀게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교통이 불편했고 교동도의 북쪽 해안과 서쪽해안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으로 교동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이기에 입출입이 제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외지인 통제도 많이 완화되었으며 뱃길보다는 다리를 통해 쉽게 왕래할 수 있는곳으로 변했습니다. 아직은 생소할 수 도 있고 개발의 바람을 덜타서 시골스러움이 오히려 외지인들에게 더욱 좋은 매력으로 끌리는 모양입니다.

 

  단, 교동은 전체적으로 관광지 개념의 섬이 아니기에 식당과 마트가 거의 없습니다. 저수지쪽에 작은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큰 식당과 마트는 대룡리에 있으므로 장거리를 트레킹하실분은 물과 간식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최전방 군사보호지역이어서 해안 철책선 가까이 가거나 손을 대면 안 되고,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곳도 절대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역사의 섬

차타고 가는 섬

시간이 정지한듯한 6~70년대의 시장 풍경

섬 정상 화개산에서의 막힘없이 조망이 좋은곳  

힐링 여행을 떠나봅니다.  고고~ 쒸 ~이~잉

  

 

▲ 강화 교동대교 초입에서 신분증과 출입증을 교환해주면 그것을 가지고 다리를 건널 수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저는 이곳 교동대교 초소앞이 아닌 다른곳에서 민통선 출입증을 받았기에 1차선으로 지체없이 바로 통과했습니다. 아마도 휴일에는 이곳에 밀려드는 차량으로 인하여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는 출입증 교체시간이 많이 걸릴것으로 생각됩니다.  

 

 

▲ 신분증을 제출하고 미리 받아놓은 출입증을 앞유리에 부착하고 교동대교를 향하여 고고씽 ~!!! ⓒ 2014 한국의산천 

 

오늘 트레킹 코스 : 강화교동대교 ~ 고구저수지 ~ 대룡시장 ~ 연산군적거지 ~ 화개산 등산 ~ 남산포구 ~  비석군과 교동향교 ~ 폐쇄된 월선포 선착장 ~ 교동대교 ~귀가

 

 

▲ 교동대교로 가는길가에 가득히 핀 루드베키아 ⓒ 2014 한국의산천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는 결코 멀지 않지만 마음으로 짚어보는 거리는 너무도 멀고먼 교동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교동도의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3km 내외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인다. 도서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으며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다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이다.고림(高林)또는 달을신(達乙新) 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주민들의 주업이 농사일 만큼 넓디넓은 평야를 품고 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더 벌이가 좋은 일을 찾아 하나둘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 교동도는 한적한 섬이 됐다.

 

강화교동대교

 

 

▲ 총연장 3.44㎞의 강화교동대교 ⓒ 2014 한국의산천

차량과 이륜차량, 자전거는 출입증 발급후 교량 통행이 가능하지만 도보로 걸어 갈수는 없습니다.  

 

강화 교동대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간의 연륙교로 강화도와 교동도간 연결다리이다. 이 대교는 총연장 3.44㎞로 총 904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리를 타고 건너가는 섬 교동도. 빠르고 편리한 반면에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아수라 백작의 양면성이 떠오릅니다

 

 

▲ 지금은 폐쇄된 월선포 선착장에서 바라 본 교동대교 ⓒ 2014 한국의산천

건널때는 몰랐는데 엄청나게 길게 보이는 다리입니다

 

 

▲ 사진촬영 동호회가 탄 버스가 대교를 넘어 교동으로 진입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이곳은 교동도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찾는이가 별로 없던 봉소리입니다. 창우리와 월선포 선착장은 폐쇄되고 이제는 봉소리가 교동도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세상일은 예측하기 힘든 일이 참 많습니다

 

교동대교 연혁

2008년 9월 25일 : 착공
2011년 : 2012년 개통 예정예정이었으나, 갯벌에 설치되어있던 기초말뚝이 2011년 중순 거센 바닷물에 의해 전도되어 공사가 지연됨 (기초 말뚝 인양 후 재시공)
2014년 : 설날연휴에 임시 개통후 폐쇄.
2014년 6월 20일 : 임시 개통 시작
2014년 7월 1일 : 정식 개통되었다

 

 

▲ 그대 하루 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 2014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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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   - 김신우
하늘아래 땅이 있고 그위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몸 둘곳이야 없으리
하루해가 저문다고 울터이냐 그리도 내가 작더냐 별이 지는 저 산넘어 내 그리 쉬어 가리라
바람아 불어라 이내 몸을 날려 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몸 실어 떠나 가련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그안에 내가 숨쉬니 어디인들 이내몸 갈곳이야 없으리
작은것을 사랑하며 살터이다 친구를 사랑하리라 말이없는 저들녘에 내님을 그려보련다
바람아 불어라 이내 몸을 날려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몸실어 떠나가련다
바람아 불어라 이내 몸을 날려주려마 하늘아 구름아 내몸실어 떠나가련다

 

 

▲ 햇살 쨍한 토요일 아침 강화 교동대교를 건너서 배경으로 ⓒ 2014 한국의산천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 감탄과 우울이 교차하는 수도권의 변경(邊境)지대 교동에 들어서서 ⓒ 2014 한국의산천

주말에는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일탈 
믿고 싶어서 믿었던 것들과 희망으로 삼았던 것들 다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걸어가기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길 떠나기

등산화 끈을 조이고 배낭을 메고 똑딱이 카메라만 있으면 어디던 떠날 수 있으며 행복 할 수 있다. 

 

 

▲ 토요일 아침이지만 많은 차량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때 나라에 중대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전라도 방면으로 귀향을 보냈지만 왕족이나 또는 왕손에 한하여는 강화도로 보내고 조금 더 중죄를 졌다면 강화도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교동도로 보내어졌다. 그렇다면 왕족은 왜 전라도로 귀향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왕족과 왕손을 가까이서 관찰해야했기 때문이다. 

 

 

▲ 2014년 6월 20일 날 개통된 강화 18번 군내버스 ⓒ 2014 한국의산천

※ 교동 주민이 아닌 외부지역 방문객은 필히 주민증 또는 신분증을 지참하셔야 합니다.

 

현재 교동대교 개통에따라 지역,관광객 편의를위해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교동대교를 넘어서 교동도까지 운행되는 버스노선 18번이 신설되었습니다.

강화 터미널에서 출발하며 교동도 내를 돌고 돌아서 월선포가 종점입니다 : 현금 1,300원(교통카드 1,100원) 월선포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5~60분

 

교동대교는 민간인통제구역에 위치하고 있어, 출입시 군 초병의 검문에 적극 협조 해주셔야 합니다.

교동대교 입구 검문소에서 정차하면 초병이 버스에 탑승하여 교동도 주민과 외지인을 구분하여 검문하데, 이 때 외지인은 신분증을 맡기면 임시방문증을 교부받게 됩니다. 임시방문증은 다시 버스를 타고 강화도 본도로 돌아오실 때 검문소에 반납하고, 그 때 신분증을 돌려받으시면 됩니다.

 

 

▲ 7월 2일부로 교동대교에 자전거와 이륜차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검문소 구간에서 교동도 주민 이외의 사람들은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신분증을 제시하면 해병대 검문소에서 보관하게 되고, 대신 '교동지역 임시 출입증'을 받게 됩니다.

교동도를 빠져나갈 때 검문소에 이 증을 반납하면 신분증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참고 하시고 분실하지 않도록 유의하여 주셔야 합니다. 검문소를 통과하면 바로 교동대교를 건너게 됩니다. 대교를 건너서 바다건너 보이는 산 능선이 북한의 황해도 지역입니다. 대교를 건너서 직진방향으로 고구저수지를 지나면 대룡시장이 나옵니다.

 

옛 추억 깨워주는 대룡시장

교동도에서 먼저 찾은 곳은 가장 번화하다는 대룡시장입니다. 막상 대룡시장에 가보니 '번화하다'라는 단어가 쑥스러울 정도로 한가했습니다. 시장은 조용하고 시간이 멈춘듯 6~70년대의 풍경이 그대로 멈춰있는 느낌입니다. 300m 남짓한 골목길은 사진찍는 여행자들의 발길만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룡시장입구에는 교동초등학교가 있으며 광무10년(1906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합니다.

 

 

▲ 몇해전에 방문해서 이발관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한국에서 열네 번째로 큰 섬이지만 교동도는 민통선 안쪽 지역이라 최근까지도 주민이외에는 출입이 어려웠다. 그렇기에 개발도 더뎠고, 바깥바람도 덜 탔다.

그렇기에 6~70년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곳은 외지인이 즐겨찾는곳이 되었다

 

 

 

▲ 변화가 심한 요즘에 이렇게 50년 넘게 제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이 또 있을까 ⓒ 2014 한국의산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있는곳 시간이 머물러 있는 섬 교동도. 대룡시장  

 

 

 

 

▲ 대룡시장내의 오래된 건물들은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歸去來辭 (귀거래사) - 陶淵明도연명  

歸去來兮 (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兮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고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고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 깨닫고 보니 지금이 맞고 지난날이 그런 줄 알았다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간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고 물어 보는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녘 희미한 빛마저 한스럽구나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네
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의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景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 빛이 어둑어둑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리오

* 주註 :
귀거래사는 도연명이 41살 때 마지막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는 소회를 운문으로 쓴 작품이다. 
초사체楚辭體의 형식을 따른 전문은 모두 240여 자字이며, 각운脚韻이 다른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가노라)"로 시작되는 첫째 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둘째 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셋째 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느낀 철학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장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려 한다는 자신의 다짐과 소감을 드러내고 있다. 
"귀거래혜"라는 감탄사가 중간에 반복되면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흐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귀거래사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영향을 바탕으로 전원생활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안을 노래한 시다. 
입신과 양명에 눈이 멀어 권력에 아부하고 금권을 좇아 타락하는 관료 사회에 대한 염증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원에서 자연을 접하는 아름다움과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도연명의 대표작으로 꼽히면서 6세기 초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편찬한 시문선집詩文選集인 “문선文選”에 수록되었고, 송나라 말 원나라 초에 뛰어난 시문을 모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이후 한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전해 내려왔다. 

“고문진보”는 14세기에 조선에도 전해져서 조선의 선비들이 문장을 사숙하는 교본이 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

 

▲ 어두운 방에서 도장을 파고 계시는 할아버지 ⓒ 2014 한국의산천

귀가 어두우신 할아버지께 사진 한장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촬영하였습니다  

 

 

 

 

 

 

 

 

 

 

 

 

 

 

 

 

▲ 교동대교 개통으로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붐빌듯한 교동도 ⓒ 2014 한국의산천

 

연산군 유배지 둘러보기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읍내리의 부근당에는 일반 당집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 등을 갖춰 입은 부부그림이 걸려있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로 추정된다.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굿을 한다고 한다.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달을 지냈다고 한다. 집터와 우물이 남아있다.

 

 

 

  대룡시장쪽에서 오르는 화개산 들머리는 교동면사무소 뒤 대촌마을이다. 마을 안 수령 500여 년이 되는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대촌마을 마지막 집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정상까지 무리없이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는 삼림욕 하기에 좋은 숲이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한다.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봉우리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대가 있다.

 

 

▲ 연산군 유배지 가는 길 ⓒ 2014 한국의산천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융.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연산군 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1494~1506 재위).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31세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 2개월 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죽자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나중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 2014 한국의산천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 2010년 교동도 답사시 촬영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 2014 한국의산천

몇해전 어느 겨울 배에 자전거를 싣고와서 교동을 한바퀴 돌때. 현재도 민간인 통제지역이지만 그 당시는 자전거를 가지고 어렵게 교동도에 들어갔습니다.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연산군 금표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 ⓒ 2014 한국의산천

  연산군시대 금표비는 1995년 금천군 묘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문화재자료 제 88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서울 주변 지역을 왕의 사냥터, 유흥지로 지정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비를 세웠는데, <연산군 일기>에는 기록이 보이나 실제 연산군의 금표비가 발굴된 곳은 고양시 대자동이 유일하다. 따라서 연산군 금표비를 통해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조선 전기의 역동적인 역사 전개 과정과 정치 상황을 생동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연산군 시대에 만들어진 이 비는,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연산군은 1494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왕으로 있으면서 성균관 유생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모아 유흥장을 차리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고, 민간인이 한글로 연산군의 행동을 문제삼는 글을 올리자 이를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 등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로 결국 중종반정으로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후 강화도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하고 있는 연산군시대 금표비  ⓒ 2014 한국의산천

 

일망무제의 화개산

 

 

 

 

 

 

 

 

 

 

 

 

 

 

 

 

▲ 묘 앞에 절하는곳에 발자욱과 무릎 닿는자리와 손 짚은 자리가 깊게 패어져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누구의 묘 인지는 모르나 매일 같이 성묘하던 손자국, 무릎 자국이 뚜렷이 남아있는 효자묘. 동네 사람들이 이곳에 흙은 메워놔도 다시 그 흔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 화계약수 ⓒ 2014한국의산천

 

 

▲ 약수에는 새 두마리가 물을 튀기며 목욕을 하기에 가까이 가지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정상 아래쪽으로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화개산에는 내,외성이 있었으나 내성만 터가 남아있고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 사방을 둘러봐도 막힘이 없는 화개산(華蓋山  : 259,6m) 정상 ⓒ 2014 한국의산천

 

은둔의 땅 교동도

  교동도 화개산 정상이다. 가벼운 걸음, 가벼운 생각으로 몇분 오르니 그새 산의 정상이다. 일망무제 막힘이 없이 온 사방을 둘러봐도 잘보인다. 섬에서의 산행이 좋은 점은 이처럼 조금만 올라도 사방이 확 트인다는 것이다. 해발 300m도 안되는 산이지만 그 호쾌함은 내륙의 산을 1,000m 이상 올랐을 때 이상의 느낌이다. 푸른바다와 하늘이 눈부시고, 태양 가득 담은 바다의 빛에 또 다시 눈이 시려온다. 조용한 호수 같은 바다에 점점이 보석처럼 섬들이 떠있다.

 

 교동도는 섬마을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서울에서 지척이고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가 따랐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이다. 하지만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제 이 섬을 이어주는 대교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좋던 나쁘던 어떤 형태로의 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흐를것이다.

 

   교동도는 아주 옛날 상고시대에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3개의 떨어진 섬이었다. 교동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화개산 자락에서 보이는 교동도는 그래서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화개산(華蓋山)은 교동면 읍내리, 상룡리, 고구리, 대룡리에 걸쳐있는 교동의 최고봉으로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 동쪽으로 하음산성, 남쪽으로 망산봉수에 응하였다고 전한다.

 

 

▲ 산 아래 남쪽으로는 교동읍성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 2014 한국의산천

 

 

▲ 정상 바로 아래 남쪽으로 교동향교가 손에 잡힐듯 보인다 ⓒ 2014 한국의산천 

 

교동향교

  고려 충렬왕 때 안유(안향, 1243∼1306)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봉안하였다고 전하며, 이 후 각 고을에 향교가 생겼다고 한다.
원래 화개산 북록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남록으로 옮겼으며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과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현을 배향하고 있다. 매달 음력 초하루, 보름에는 전교, 유림들이 모여 분향을 하며 교동향교 왼편의 약수가 있는데 마시면 학문에 더욱 정진케 된다는 말이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최초로 창건된 유서깊은 곳이다. 최초 창건은 1127년(인종 5)으로 이때는 화개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1286년(충렬왕 12)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원나라에서 공자상(孔子像)을 들여와 봉안하였다. 그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철(聖哲)화상 10점과 제기(祭器) 등을 구해오게 했는데, 이때 서해로부터 귀환하면서 교동에 기착하여 문묘에 봉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와 제자들의 화상(畵像)을 봉안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경도와 각읍에 문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교동도의 평야 ⓒ 2014 한국의산천 

 

 

 

 

▲ 바다처럼 넓은 고구저수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북한땅 황해도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의 북쪽 해안 청주뻘에서는 숭어가 많이 잡혔습니다. 숭어는 임금님 상에 올라가는 공물로 지정될 정도로 맛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방되기 전에 교동 사람들의 활동 무대는 강화도가 아니라 황해도 연백이었습니다. 교동에서 연백의 거리는 겨우 3Km에 불과합니다. 교동 사람들은 연백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합니다

 

남산포구 교동읍성 월선포 선착장

 

▲ 비릿한 갯내음과 함께 밀물이 들고 있는 남산포구 ⓒ 2014 한국의산천

 

 

 

 

 

 

▲ 교동읍성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하 하였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있습니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白東?)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남문 앞의 해자도 역시 메워 버렸다.32) 규모는 둘레가 4정 26칸 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33)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 좌측 측벽에 '南樓(남루)'와 '三道統門 (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이곳이 남문이며  삼도통문이라 교동에는 3도 즉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는 뜻을 추측케해준다.

 

▲ 돌 하나에 이쪽 저쪽으로 '남루'와 '삼도통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저있다 ⓒ 2014 한국의산천

 

 

 

 

▲ 절묘하게 돌을 짜맟추어 홍예를 이루는 성문 ⓒ 2014 한국의산천

 

 

 

 

 

 

 

 

▲ 교동도의 관문 역할을 했었던 월선포 선착장.

창후리와 교동도의 월선포를 연결해주던 페리호는 보이지 않고 페리의 매표소와 대합실 겸용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선착장 주차장에는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온 여행자들의 주차장이 되고 있습니다 

 

 

 

 

▲ 월선포에서 바라 본 교동대교 ⓒ 2014 한국의산천

 

예전에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의 섬 교동도.

가시적 거리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교동도는 아직도  민통선(민간인 통제선)안에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 월선포 선착장에서 200mm망원으로 촬영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강화도 검문소에 도착하면 해병대 초병이 탑승하여 '교동지역 임시출입증'을 반납 하고, 들어가기 전에 제시했던 신분증을 되돌려 줍니다.

이제는 교동도에 연륙교가 놓이게 되어서 민통선이라는 제약은 있지만 그래도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한때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던 다리였고, 또 한때는 조선 삼도수군의 심장부였던 교동은 이제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인하여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시간의 멈춤이 있는 공간과 역사의 심판속에 광란의 일생을 마친 연산군의 행적들을 돌아보며 산다는것의 정답은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해보며 교동대교를 건너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2014 07 05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