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으로 가득한 화성행궁
[ 2014 · 4 · 19 · 봄바람 세게부는 토요일]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수원의 화성에서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갈 뿐이다
▲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 수원화성과 행궁 답사 : 총거리 10km ( 성곽 약 6km 수원역 ~ 팔달산 ~ 시내도보이동 약 4km)
바람이 분다. 약간 세찬 봄바람이다.
오늘 행복한 걷기 겸 답사코스는 수원에 자리한 팔달산으로 정하고 전철을 타고 떠났습니다.
수원역에서 내려 병무청 앞을 지나서 팔달산에 오른 후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 남수문을 지나서 화성행궁에 닿았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웠습니다.
▲ 화성행궁 가는 길 ⓒ 2014 한국의산천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 정조.
왕위에 올라 노론과 소론의 나라가 아닌 진정한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라고 선정을 베풀고자 고뇌했던 그 아픔을 되새기며 건설했던 수원 화성
아버지에 대한 효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수원 화성 그리고 정조의 못 다 이룬 꿈이 어린 수원 화성
▲ 아름다운 수원 화성 ⓒ 2014 한국의산천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쓰임새는 드러남 속에 숨어있고 드러남은 쓰임새속에 숨어있다. 쓰임새와 드러남이 서로 숨고 또 숨겨서 함께 드러나는것은 아름다움의 강력함과 강력함의 아름다움이다.
수원 화성에서는 아름다움은 강력함으로 발현되고 강력함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아름다움과 강력함이 다르지 않고 삶과 꿈이 다르지 않다. 수원 화성은 땅위의 성곽이고, 마음속의 왕도이다.
정조(正祖,이산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 ⓒ 2014 한국의산천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옆 작은 언덕에 세워진 정자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정조께서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방문한 뒤 찾아와 활을 쏘고 직접 시를 지어 읊었다고 전해진다. 워낙 풍광이 뛰어나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아래쪽의 작은 연못인 용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용연은 용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가운데에 버드나무가 심어진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 인근의 길은 성벽 안쪽도 바깥쪽도 호젓하고 한가롭다.
아름다운 풍경이 내 마음이고
아름다운 꽃 또한 내 마음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내 마음과 같다.
▲ 정자인지 초소인지 구분이 어려운 매우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지붕의 모양이 여러가지로 바뀐다 ⓒ 2014한국의산천
수원에 위치한 화성은 정조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시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도호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이 축조되었다. 화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6km 성벽 높이는 약 5m 이다. 화성 성역은 정조의 사도세자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조를 정점으로 관료, 학자, 기술자, 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며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조선, 중국, 일본의 축성법중에서 장점을 택하였으며 거중기, 녹로와 유형거 및 각종 수레등 각종 과학기기를 사용한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화성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화성성역의괘라는 공사보고서를 통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 팔달산 화성장대에서 내려 본 화성행궁과 수원시내 ⓒ 2014 한국의산천
▲ 팔달산 아래 자리한 화성행궁 ⓒ 2014 한국의산천
수원에 자리한 화성(華城).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바라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 화성장대와 노대 ⓒ 2014 한국의산천
화성장대는 성안에서 가장 높고 조망이 넓은 지휘소이다. 공격 지휘소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예술적 건축물로 보이는 곳이다. 서장대 옆에 있는 노대는 돌과 벽돌의 조화를 보여준다.
▲ 화성장대와 노대 ⓒ 2014 한국의산천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것으로서, 화성의 노대는 서노대와 동북노대의 2기가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8각형 평면의 기와 벽돌로 쌓았다.
수원 화성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 앞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시미돈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비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 웅장하게 서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 장안문 ⓒ 2013 한국의산천
화성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할 의도로 축조한 성이다. 이곳 수원에는 정조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문인 장안문. 성문앞에 반원형태의 옹성을 지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 2014 한국의산천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중 북쪽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울에 자리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 바깥에는 반원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마치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2014 한국의산천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야경 ⓒ 2014 한국의산천
효성이 남달랐던 정조는 국사로 바쁜 중에도 부친의 능을 13차례 참배했으며 그 기간에는 행궁에 기거했다. 그래서 지방의 궁궐이라고는 해도 규모가 큰 편이다.
정조는 수원에서의 노후를 꿈꾸며 행궁에 노래당(老來堂)을 지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도 행궁에서 촬영됐다.
▲ 신풍루 야경 ⓒ 2014 한국의산천
효성이 남달랐던 정조는 국사로 바쁜 중에도 부친의 능을 13차례 참배했으며 그 기간에는 행궁에 기거했다. 그래서 지방의 궁궐이라고는 해도 규모가 큰 편이다.
정조는 수원에서의 노후를 꿈꾸며 행궁에 노래당(老來堂)을 지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1790년에 340칸이 완성되고 1796년 화성성역이 완성되면서 576칸으로 조성되었다. 현류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께서 1804년 양의 후 장차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나 일제 강점기에 의도적으로 파괴된 후 1996년 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전체 600칸 중에서 482칸을 복원 완료하였으며 2007년 6월 사적 제 478호로 지정 되었다.
▲ 입장원(1500원)을 구입 후 행궁으로 들어갑니다 ⓒ 2013 한국의산천
행궁(行宮)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을 말한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 한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는 소원나무 ⓒ 2014 한국의산천
신풍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커다란 노거수 느티나무가 서있습니다. 마치 고사목처럼 보이는데 나무 중간에 가지가 돋고 새잎이 나고 있습니다
나이가 600년도 훌쩍 넘은 느티나무인데 이곳에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준다고 하여 그곳에 걸려있는 새끼줄에 소원쪽지가 가득 매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번 진도에서 일어난 세월호 수학여행 학생 조난자들의 무사생환과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장남헌은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 장락당 ⓒ 2014 한국의산천
장락당은 정조의 어머니(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때를 위해 1794년 화성 축성시에 새로지은 건물이다. 1795년 을묘행원때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정조의 효심이 가득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조선 22대 왕 정조가 정조19년(1795년) 윤2월9일~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 가 묻힌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를 하였다. 본래의 목적은 사갑(死甲)을 맞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였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맞아 잔치를 열었다.
화성으로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조금이라도 험한 길이 나오면 정조는 매번 말에서 내려 혜경궁의 가마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물었다. 어의가 비에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화성에 도착하여 여러 예식을 차례로 치루면서 정조가 의식에 따라 절을 마치자 정조가 지은 어제 장락장(長樂章)을 부르고 어머니에게 머리를 세번 조아리고 천천세를 불렀다.
"긴긴 봄날 장락궁에서 술잔을 올리며, 세차례의 축원을 올리옵니다. 자손에게 끼쳐주신 어머님 은혜, 그 무엇이 이보다 높으리까. 복록이 풍성하게 넘쳐흐르며 찬란하게 빛나옵니다.함지(咸池)의 북소리에 운문(雲門)의 거문고,신선주 따라 올리며 해마다 축원하오리다.
정조가 머리를 세번 조아리자 다시 여집사가 외쳤다.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정조가 손을 마주잡고 이마위에 올리며 '천세'를 축원했다.
여집사가 또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다시 천세를 축원했고, 또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정조가 '천천세'를 외쳤다.
정조가 천세를 부를 때마다 내,외명부와 여관들이 모두 선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했다.
여민락의 환환곡과 청평악,오운개서조곡등이 연주되는 가운데 음식상과 술상이 차려졌다.계속이어지는 가무속에 정조가 연회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자궁(慈宮)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 아 어머니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의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도다. 떠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오래 사소서".
그날 혜경궁 홍씨는 감격했다고 전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몸소 실천하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눈에 선하게 그림처럼 떠오른다.
행궁은 서울의 정궁을 축소해 놓은것 같은 느낌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생각했던 보다는 곳곳이 아기자기하게 잘 지어진 궁궐입니다. 이곳에서 대장금, 정조 이산, 해를품은달 등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 화성을 돌아보고 나올 무렵 운좋게 조선시대의 실전 무예가 펼쳐지는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활기차고 패기있는 그리고 정확한 ..탄성을 자아내게하는 멋진 장면들이었습니다.
신풍루 앞에서는 매일 오전11시,오후3시 (연중진행,월요일제외)에는 실전 무예를 볼 수 있습니다.
무예24기는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 이덕무,박제가, 무예가 백동수가 조선 전통 무예와 중국,일본의 무예를 수용하여 만든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로 조선 최정예부대인 장용영 외영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 실전 무예라고 합니다.
▲ 활쏘기와 검술, 그리고 창술 등등 조선시대 무술이 정확하고 힘차게 진행되었다 ⓒ 2014 한국의산천
▲ 멋진 장면을 촬영하는 외국인 ⓒ 2014 한국의산천
이곳 화성을 답사하다보니 일본인 중국인등 외국인들이 참 많이 오시더군요. 새삼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값지고 자랑스러움을 느꼈습니다
▲ 화성행궁 앞길은 공방거리와 맛촌거리로 이어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행궁 앞길은 볼거리가 많고 활기가 살아있 젊음의 길입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웅장하고 아름다운 팔달문 ⓒ 2014 한국의산천
공방거리를 지나오니 팔달문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로데오거리를 지나서 수원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입니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화성을 완공한 후 펴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 중앙의 출입문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고, 팔달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본래 사거리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 팔달문 야경 ⓒ 2014 한국의산천
팔달문을 둘러보고 인파가 북적거리는 로데오 거리를 지나서 장단지와 허벅지가 뻐근함을 느끼며 수원역으로 다시 돌아오며 10km의 수원화성 답사기행을 마칩니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 그리고 장용영을 통한 정조의 꿈은 차차 무르익어 가는듯 하였지만 1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예기치 못한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 융건릉. 정조께서는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곁에 묻혔다 ⓒ 2014 한국의산천
정조께서는 많은 비행을 저지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극정성으로 자주 참배하셨다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장조 莊祖· 1735년 ~ 1762년, 장헌세자)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의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1762년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갇혀죽는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1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6년에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3월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으며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조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워나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또한 정조는 영조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해 왔던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 특히 노론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 한국의산천
▲ 위 본문의 내용 일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참고 또는 인용하였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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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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