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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B등산여행

공민왕 지극한 아내 사랑… 한 남자로선 눈물겹지만 나라 지도자로는 실격

by 한국의산천 2025. 8. 7.

지극한 아내 사랑… 한 남자로선 눈물겹지만 나라 지도자로는 실격
[이한수의 길에서 만난 역사]
집이냐 나라냐: 고려 공민왕 몽진 루트를 따라서 <상>

이한수 기자
입력 2025.08.06. 23:30 / 업데이트 2025.08.07. 03:13

664년 전 고려 31대 임금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했다.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했다. 훗날 몽골 세계제국 원(元)을 무너뜨리는 세력이다. 봉화 청량산에 산성을 쌓고 결전에 대비했다. 회백색 바위 절벽을 좌우에 거느린 청량사가 그곳에 있다. 절집 ‘琉璃寶殿(유리보전)’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진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역사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때 다른 길로 갔다면?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순간이 있다. 우리 국토는 역사가 층층이 쌓인 퇴적물이다. 어떻게 베어내느냐에 따라 색다른 단면이 나타난다. 내 집도 못 지키는 나라가 나라인가? 내 집만 지키려 하면 나라는 어떻게 되나? ‘집이냐 나라냐’ 논쟁적 순간을 길에서 만났다. 먼저 664년 전 공민왕 몽진 루트를 따라간다. 길에서 만난 역사의 무늬를 탐색한다.

경북 안동역에서 내비게이션에 ‘청량사’를 입력했다. 봉화 청량산 중턱에 있는 절집이다. 거리는 43㎞, 57분 걸린다고 한다.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산은 높아지고 골짜기는 깊어진다. 심심유곡(深深幽谷)이다.

깊은 산속에 파묻혀 있는 청량사. 심심유곡이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664년 전인 1361년 고려 공민왕(재위 1352~1374)도 이 길을 지났다. 그해 음력 11월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했다. 단순한 ‘도적[賊]’이 아니었다. 훗날 몽골 세계 제국 원(元)을 무너뜨리는 세력이다. 7년 후 일파(一派)인 주원장은 명(明)을 건국한다. 중국의 주인을 89년 만에 다시 한족(漢族)으로 돌려놓았다.

경북 봉화 청량사 풍경. 회백색 바위 절벽이 둘러싼 곳에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사태는 긴박했다. 고려에 침입한 적은 당초 10만명에서 두 배로 불었다. 공민왕은 남(南)으로 몽진(蒙塵)을 결정했다. 몽진이란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남을 말한다. 신속한 판단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했다. 목적지를 복주(福州)로 정했다. 지금의 안동이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아래 깊은 내륙이다.

청량사 유리보전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진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청량산 곳곳에 공민왕의 흔적
청량사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절 입구 선학정 주차장에 자동차를 놓고 걷는다. 경사가 45도 넘을 듯한 가파른 길이다. 몇 걸음 옮겼는데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폭염 경보가 내린 날이었다. 계곡 타고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그래도 위안을 준다. 공민왕 몽진 때는 꽁꽁 언 추위가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느린 걸음으로 20분쯤 올랐다. 회백색 수직 절벽을 좌우에 거느린 절집이 나타난다.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절’이라 할 만하다. 중심 건물 이름은 유리보전(琉璃寶殿).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썼다고 한다.

공민왕을 기리는 사당 '공민왕당'. /이한수 선임기자

공민왕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산성 입구로 간다. 이름하여 ‘공민왕산성’. 공민왕 기리는 사당 ‘공민왕당’도 있다. 입구에서 공민왕당까지 1.6km. 다시 산길을 오른다. 숨이 턱턱 차오른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공민왕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까. 산길 오른쪽 나무 계단을 오르니 문짝 하나 달린 작은 기와집이 나타난다. 산성 마을 사람들이 훗날 공민왕을 기려 사당을 지었다.

홍건적이 예까지 침입한다면 최후 결전을 벌일 요량이었다. 청량산에서 둘째로 높은 봉우리 축융봉(860.9m) 중턱 둘레에 긴 산성을 쌓았다. 깎아지른 절벽 산성 위에 누각 밀성대가 있다. 말 안 듣는 군졸을 절벽 아래로 밀어 처형했기에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나라가 위기일 때 필부필부(匹夫匹婦)는 더 고난을 겪는다.

임시 수도 안동에서 보낸 70일
공민왕 일행은 11월 19일 개경을 떠났다.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다급한 전갈이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이튿날 임진강 건너 파주에 이르렀다. 행렬은 초라했다. 따르는 신하는 시중 홍언박부터 시어사 전녹생까지 28명뿐이었다. 아내 노국공주도 연(輦·가마)을 버리고 말을 탔다. 21일 경기도 광주, 24일 이천에 도착했다. 어의(御衣)가 눈비에 젖어 얼어붙었다. 섶을 태워 몸을 녹였다. 음성(25일) 충주(28일) 지나 복주(안동)에 도착했다. 12월 15일이었다.

안동시청 청사 현관에는 '안동웅부'라고 쓴 한자 현판이 걸려있다. 공민왕의 글씨다.

공민왕은 안동에서 70일간 머문다. 곳곳에 사연이 남아 있다. 안동시청은 청사 현관에 공민왕이 쓴 현판을 내걸고 있다. ‘安東雄府(안동웅부)’라고 쓴 글씨다. 왜 ‘웅부(雄府)’일까. 사찰 중심 건물을 대웅전(大雄殿)이라 하듯 나라의 중심이란 뜻을 담았다. 공민왕은 훗날 복주를 ‘안동대도호부’로 명명했다. 비로소 안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대도호부 자리는 지금 웅부공원이다. 현판 실물은 시립박물관에 있다고 했다. 안동댐 인근에 자리한 박물관에 가 보니 1층 전시실에 실물 아닌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현판 실물은 수장고에 있다. 워낙 오래돼서 전시를 못 한다”고 했다.

안동 시립박물관 1층에 전시한 공민왕 글씨 '안동웅부' 현판 사진. 실물은 수장고에 있다고 한다.

고려군 20만명, 기적 같은 승리
공민왕이 경기도 이천에 도착했을 무렵 홍건적은 개경을 점령했다. 고려 임금 일행을 더 쫓지는 않았다. 전쟁이란 보급이 팔 할이다. 추운 겨울날 식량 구하기 어려웠다. 고려사는 기록한다. “(홍건적은) 남녀를 잡아 불에 굽고 임산부 유방을 구워 먹으면서 잔인하고 포악함을 방자히 하였다.” 잔혹한 비극이지만, 인육(人肉)을 먹을 만큼 열악한 보급 정황이 드러난다.

그래픽=양진경

고려군의 반격은 놀라울 정도다. 복주에 도착한 공민왕은 군사를 모으는 총병관을 임명했다.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를 잇는 고개 죽령에 병사를 집결시켰다. 무려 20만이었다. 믿기지 않을 규모다. 

조선 초기 기록한 ‘고려사’가 전 왕조의 결전을 과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라 지키려는 열정이 모인 것이다. 군령이 아주 망가지진 않은 것이다. 총병관 정세운이 지휘하고 안우·이방실·김득배·최영 등이 군사를 나눠 이끌었다. 이성계도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섰다. 1362년 1월 17일 개경을 포위했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었다. 적의 방비는 해이했다. 전격 기습. “적의 무리들이 저희끼리 서로 밟아 쓰러진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였다.” 홍건적 10만이 죽고 10만은 압록강 너머로 달아났다. 병기(兵器)를 모두 팽개치고 도주했다. 원 황제의 옥새(玉璽) 2개도 놓고 달아났다. 압승이었다. 이때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는 홍건적의 말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국공주(왼쪽)와 공민왕 초상.

공민왕 최대 실패의 순간
시간을 빠르게 돌려 공민왕 최후의 순간으로 간다. 승전 후 장군끼리 서로 죽인 비극, 국왕 시해 미수 사건, 원 제국의 공민왕 폐위 시도 같은 개경으로 돌아오며 겪은 기막힌 일들은 다음 편에 소개한다.

환도 후 3년 만에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만삭의 몸이었다. 난산으로 아이도 함께 하늘로 갔다. 공민왕은 비통에 잠겼다. 공주 초상을 그려놓고 매일 밤낮으로 슬피 울었다. 어머니 명덕태후가 물었다. “어찌하여 비빈(妃嬪)을 가까이하지 않으시오?” “공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공민왕은 또 울었다.

한 남자로서 지극한 사랑이었으나 나라 지도자로선 실격이었다. 인간으로서도 파탄에 이르렀다.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남색(男色) 상대로 뽑았다. 이들을 시켜 후궁들과 관계하도록 했다. 나라 위해 후사를 이으려는 충정이라 여겼다.

1374년 9월 22일이었다. 환관 최만생이 후궁 익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누가 아비라더냐?” “홍륜이라 하옵니다.” 공민왕은 절대 발설해선 안 될 계획을 말했다. “내일 창릉을 배알할 때 짐짓 주정을 부려 홍륜 무리를 죽여 입을 막겠다. 너도 이를 알고 있으니 면치 못할 것이다.” 몽진을 결정하고 절치부심 결전을 준비하던 공민왕이 아니었다. 판단력마저 흐려졌다. 그날 밤 최만생과 홍륜은 침전으로 들어가 잠자는 임금을 흉기로 내리쳤다. 뇌수가 벽에까지 튀었다고 한다. 고려라는 나라는 몰락으로 가고 있었다. 18년 후인 1392년 고려는 사라졌다.

<여행 수첩>
가는 길: 공민왕 몽진 루트는 개경→파주→광주→이천→음성→충주→안동. 공민왕 일행은 안동까지 26일 걸렸지만 지금은 고속도로(중부→광주원주→중앙)로 3시간 30분. KTX 서울역→동대구역(1시간 45분), 시외버스 동대구터미널→안동터미널(1시간 24분). ITX 청량리역→안동역(2시간 33분). 안동에서 봉화 청량사까지는 자동차로 45분. 안동시청 건너편서 512번 버스 타고 청량산도립공원 입구까지 62분(매일 1회).

먹을거리: ‘안동 간고등어’를 안 먹을 수 없다. 옛 안동역 옆 일직식당(054-859-6012)은 간고등어구이 정식 1인분도 낸다. 1만4000원. 고등어 반쪽을 주는 게 아쉽지만,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다. 반찬도 정갈하다. 조림은 2인부터. 청량산 입구에 식당 여럿이 있다. 맛고을식당(054-673-8854) 당귀산채비빔밥 1만3000원. 안동 간고등어 정식은 2인부터.

읽을 책: 미리 알고 떠나면 여행은 더 풍성해진다. 공민왕 이후 고려 말 정치사는 ‘건국의 정치’(김영수 지음, 이학사). 840쪽으로 상당한 분량이지만 당대 정치의 풍경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이승한 지음, 푸른역사)는 공민왕 즉위부터 왜구·홍건적 침입, 노국공주 죽음과 신돈의 부상 등 당대 주요 사건을 자세히 서술한다.

 

城 쌓아도 권력 지킬 수 없다… 신뢰 무너지자 나라는 나락으로
[이한수의 길에서 만난 역사]
집이냐 나라냐: 공민왕 몽진 루트를 따라서 <하>

이한수 기자
입력 2025.08.21. 00:50
업데이트 2025.08.21. 15:13

경북 봉화 청량산 축융봉 중턱에 '공민왕 산성'이 뱀처럼 길게 산허리를 둘러있다. 홍건적을 피해 몽진한 공민왕이 군사 및 민력을 동원해 쌓게 했다. 오른쪽 위 우산처럼 보이는 건물은 밀성대에 자리한 밀성루. 밀성대는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을 절벽 아래로 밀어서 처형했다 하여 이름이 붙었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역사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때 다른 길로 갔다면?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순간이 있다. 우리 국토는 역사가 층층히 쌓인 퇴적물이다. 어떻게 베어내느냐에 따라 색다른 단면이 나타난다. 

내 집도 못 지키는 나라가 나라인가? 내 집만 지키려 하면 나라는 어떻게 되나? ‘집이냐 나라냐’ 논쟁적 순간을 길에서 만났다. 먼저 664년 전 공민왕 몽진 루트를 따라간다. 지난 회(8월 7일 자 A28면) 몽진 루트에 이어 이번엔 개경으로 환도하는 길이다. 길에서 만난 역사의 무늬를 탐색한다.

그래픽=양진경


경북 안동엔 낙동강이 흐른다. 서울 한강처럼 동서 방향이다. 강북 안동시청에서 영호대교를 건넜다. 강남 언덕에 누각 영호루(映湖樓)가 있다. 현판 글씨를 고려 공민왕(재위 1352~1374)이 썼다고 전한다. 

누(樓)에 올라보니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다. 홍건적 피해 몽진한 공민왕은 1361년 음력 12월 18일 이곳에서 배를 띄웠다. 풍광을 구경하고 강변에서 활을 쏘았다. 관할 지방관이 잔치를 마련했다. “구경꾼이 빽빽이 모였다.”(고려사 권39)

한심한 노릇이었나? 당연히 그렇게 여겼다. 전쟁 중이었다. 봄은 아직 멀고 먼 때였다. 누군가 탄식하고 통곡했다. “남쪽으로 도적이 노략질해 와우봉(臥牛峰) 깊숙이 들어왔구나.” “‘소가 크게 울부짖으니 용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 하더니 현실이 됐다.” 모두 임금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안동 영호루에 오르면 낙동강과 안동 시내가 보인다./이한수 기자


공민왕은 견뎌냈다. 비난한 이들 처벌은 없었다. 청량산 축융봉 허리에 산성을 쌓으며 결전을 준비했다. 군사 20만을 모아 개경 탈환 작전을 도모했다. 한 달 후인 1362년 1월 18일 고려군은 개경으로 진격했다. 홍건적 10만을 죽이고 10만을 압록강 너머로 쫓아냈다. 역사에 남을 대승이었다.

전쟁 승리 후 서로 죽인 자중지란
때로는 가까운 동료가 외부의 적보다 치명적이다. 총병관 정세운이 띄운 승전보는 닷새 후인 1월 23일 임시 수도 안동에 도착했다. 공민왕은 감격했다. 옷과 술을 하사했다. 전할 수는 없었다. 정세운은 이미 하루 전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일을 꾸민 이는 전임 총병관 김용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입지가 역전됐다. 승전을 이끈 장군 안우·김득배·이방실을 꼬드겼다. 왕명을 조작한 교지(敎旨)를 전했다. 정세운을 처단하라는 내용이다. 안우도 솔깃했다. 거만한 총병관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였다. 거짓이라도 괜찮았다. 증거가 있으니 나중에 밝히면 될 일이었다. 반대도 있었다 “그를 대궐 밑에 잡아 놓고 주상이 처치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게 옳지 않겠소?” 김득배 말은 곧 묻혀버렸다. 1월 22일 정세운은 세 장군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살해됐다.

정세운 피살 소식은 이틀 후 안동에 전해졌다. 정세운 총병관 임명은 공민왕이 안동 몽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천성이 충직·청백하여 주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적을 소탕할 것을 자임한” 장수였다. 전권을 위임한 터였다. “군사를 독려하고 명령을 좇지 않는 자를 군법으로 다스릴 것”을 허락했다. 그런 장군이 살해당한 것이다.

환도하는 길… 상주에서 장군들 처형
공민왕은 생각했다. 임금이 명하지 않았으니 반란이다. 응징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주력 군사는 저들에게 있었다. 장군들을 용서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안동 행재소(行在所·임금의 임시 거처)로 장군들을 오라고 했다. 옷과 술을 내리고 승진시키면서 안심시켰다. 장군들은 한 달 넘도록 오지 않았다. 임금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1) 안동 영호루.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썼다고 한다.(2) 상주 왕산역사공원. 해발 72미터 야트막한 언덕이다. (3)경북 상주 왕산.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해발 72미터. (4)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망선루. 공민왕이 환도할 때 청주에서 과거를 보이고 이곳에 방을 붙였다고 한다. /이한수 기자


공민왕은 2월 25일 장군들을 더 기다리지 않고 안동을 떠났다. 이틀 후 경북 상주에 도착했다. 옛 자취가 지금도 이름으로 남아있다. 왕산(王山) 공원이다. 경찰서와 우체국 있는 지역 중심에 있다. 이름은 왕산이지만 걸어서 오르면 1분도 걸리지 않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장원봉 해발 72m’. 마치 높은 산처럼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안우는 2월 29일 상주 행재소에 도착했다. 늦었지만 명을 받들었다. 이미 김용은 안우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려 놓았다. 문지기가 머리를 내리쳤다. 안우는 죽기 전 세 차례 주머니를 들어 보이면서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라. 임금 앞에 주머니 속 글을 보이고 죽음을 맞겠다!” 글이란 김용이 꾸민 위조 교지였다. 이방실·김득배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둘도 상주로 오는 길이었다. 이방실은 용궁현에서, 김득배는 산양현에서 최후를 맞았다.

공민왕은 세 장수 처형 후 교서를 내렸다. “총병관이 나를 대신해 모든 일을 집행하는데 아래 있는 자가 감히 마음대로 그를 죽이니 이는 나를 무시한 것이다. 적을 깨뜨린 공은 한때 있을 수 있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에 용납될 수 없다.”(고려사 권40)

나라 지킨 공(功)보다 왕권에 흠집 낸 죄(罪)가 더 크다는 말이었다. 국가보다 왕가 안전이 우선이었다. 백성들 생각은 달랐다. 상주 행재소 앞에 김득배 머리를 내걸었는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우의 아들은 열 살 남짓이었다. 저잣거리에서 놀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편안히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세 원수(元帥)의 공이다.”

청주 거쳐 개경으로… 공민왕 시해 미수 사건
공민왕은 개경 환도를 늦추고 있었다. 상주에서 다섯 달 넘게 머물렀다. 떠난 때는 더위가 한풀 꺾인 8월 13일이었다. 보은(18일)·회인(19일)을 거쳐 8월 20일 청주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다섯 달 넘게 체류했다. 청주에도 공민왕 자취가 남아있다. 중앙공원에 있는 목조 누각 망선루(望仙樓)다. 누각 앞 설명문에 공민왕이 청주에서 과거를 보이고 합격자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적었다. 공원 가운데엔 나이 900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압각수(鴨脚樹)’란 별명이 있다. 뿌리 모양이 오리 다리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공민왕이 이곳에 머물 때도 이미 300살 된 큰 나무였다. 모든 역사를 지켜보고 이제 1000년을 앞두고 있다.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 '압각수'. 현재 900살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공민왕이 머물 때 이미 300살 큰 나무였다./이한수 기자

청주에서 새해를 지났다. 1363년 2월 4일 출발했다. 5일 죽주(안성), 10일 교하, 11일 파주를 거쳐 12일 개경 남쪽 사찰 흥왕사(興王寺)에 짐을 부렸다. 김용을 경호처장 격인 순군제조(巡軍提調)에 임명했다.

한 달여 지난 윤3월 1일이었다. 새벽 4시. 김용이 군사 50명을 이끌고 흥왕사로 달려왔다. 쿠데타였다. 문지기를 죽이고 소리쳤다.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다.” 정당한 거사라는 주장이었다. 원 황제가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한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인 충선왕 서자이니 공민왕의 삼촌뻘 인물이다. 황제의 힘은 약해지고 있었지만 권한이 없지 않았다. 공민왕도 원 황제의 명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쿠데타 무리는 공민왕 침전으로 달려갔다. 환관 강원길을 베었다. 숙위 병사들은 모두 달아났다. 환관 이강달이 공민왕을 업었다. 샛문으로 빠져나가 명덕태후 침전 밀실에 임금을 숨겼다. 노국공주가 문 앞을 막고 앉았다. 원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다는 이들이 원 황실의 여인을 어찌할 순 없었다. 임금과 용모가 비슷한 환관 안도치가 침전에 대신 누워 있다가 죽었다.

“누구를 믿을 수 있나”… 무너진 신뢰
최영·우제·안우경 등 장수들이 개경에서 달려왔다. 쿠데타는 진압됐다. 공민왕은 눈물 흘리며 탄식했다.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쿠데타 수사를 중지시켰다. 왜? 김용이 저지른 총병관 살해와 세 장군 처형은 공민왕의 지시였나? 임금 자리 지키려고 나라 근간을 무너뜨린 것인가. 임금도 신하를 못 믿고, 신하도 임금을 믿을 수 없었다. 공민왕이 의지할 상대는 아내 노국공주밖에 없었다. 한번 신뢰가 무너지자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청량산 깊은 산속에 있는 청량사. 공민왕은 이곳에 있는 유리보전 현판 글씨를 썼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공민왕은 절치부심하던 안동을 잊었다. 청량산에 쌓은 산성으로 권력을 지킬 수는 없다. 

영호루 누각 안에는 당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여러 정치인의 시판(詩板) 묵적(墨跡)이 줄줄이 걸려 있다. 

공민왕 시대를 살다가 각각 개혁과 혁명을 꿈꾼 젊은 정치인 정몽주와 정도전의 글씨도 나란히 걸려 있다.

정몽주는 장군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피눈물로 하늘에 묻는다”고 절규했다.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누구의 공로입니까. 죄가 있더라도 공로로 덮어주어야 옳고,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죄를 자복시킨 뒤에 처형해야 옳습니다. 

어찌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도 그치지 않았는데 태산 같은 공로를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고려사 열전 ‘안우전’; 공민왕 시대 상황은 김영수 ‘건국의 정치’ 참조)

피맺힌 절규였다. 한낱 개혁으로 끝날 일인가. 정도전은 새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여행 수첩>
공민왕은 안동에 70일 머문 후 개경으로 환도하는 길에 상주와 청주에 각각 165일가량 길게 머물렀다. 자취가 지금도 남아있다.

안동 영호루: 낙동강 남쪽 강변 영호대교 건너편에 있다. 영호루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썼다고 전한다. 

누각 안에 ‘洛東上流(낙동상류) 嶺左名樓(영좌명루)’라고 쓴 대형 현판이 눈길을 끈다. 

낙동강 상류 영남 좌도의 이름난 누각이란 뜻이다. 글자 크기가 1m는 될 듯하다. 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썼다. 

정몽주·정도전·권근·김종직·주세붕 등 유명 인물의 시판(詩板)이 줄줄이 걸려있다. 지금 건물은 1970년 중건했다.

상주 왕산역사공원: 옛 상주읍성 중심 왕산을 2011년 시민 휴식 공간으로 만들었다. 설명문에 “왕산은 고도 상주의 중앙에 자리한 명산”이라고 썼다. 고려 우왕 7년(1381년) 왕산을 중심으로 상주읍성을 축조했다고 적었다. 공민왕 이야기는 없다. 이름의 유래가 문헌에 있지 않지만 공민왕이 머문 곳이기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한다. 조선 시대 경상감영이 있었다. 당대 지방관 송덕비가 입구에 늘어서 있다. 한때 ‘앙산(央山)’이라 했는데 ‘왕산(王山)’으로 바로잡았다.

청주 망선루: 중앙공원은 옛 충청도 병마절도사 관청 자리. 고려 말엔 청주옥도 있었다. 줄곧 관아가 있던 곳임을 짐작하게 한다. 망선루는 2층 누각이다. 정면 기둥 6개로 상당히 웅장한 규모다. 청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 이름은 취경루(聚景樓). 여러 차례 중수했고 자리가 옮겨지기도 했다. 2000년 현재 자리에 복원했다.

공민왕;청량사;청량산;공민왕 산성; 봉화

#이한수의 길에서 만난 역사
이한수 선임기자 
문화부에서 학술 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고 문화부장을 거쳐 선임기자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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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