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비법정 동부능선] 태극종주 품은 천하절경… 생태보존 가치 높아
조경훈 입력 2024.07.24 07:30 수정 2024.07.25 11:54
사진(제공) : 이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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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봉 일대는 반달가슴곰 보호지역… 산사태 위험성도 높아”
일부 “장거리 종주의 상징…무조건 막는 건 능사 아냐” 주장도
드론으로 본 중봉~천왕봉 일대. 집단 고사한 고사목이 눈에 띈다.
‘간미능선, 황금능선, 국골, 쇠통바위능선, 초암능선, 심마니능선, 마야계곡, 목통골, 도장골, 빗점골…’
이들은 모두 전체, 혹은 일부가 비법정탐방로인 능선과 골짜기들이다. 비법정탐방로에 대한 의식이 흐렸던 시절 지리산을 다녔던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이름들이다. 법정탐방로만 산행해야 한다는 의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힌 현재 이곳을 찾는 발걸음은 대폭 줄었다.
지리산 고산 지대의 산사태 모습. 사진 녹색연합.
고사목 집단 군락은 산사태 발생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사진 녹색연합.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비법정탐방구간이 있다. 중봉(1,875m)에서부터 밤머리재까지 이어지는 동부능선이다.
지리산국립공원 탐방안내도를 보면 이곳에는 지정탐방로 표시가 없다. 이들은 왜 비법정탐방로인 동부능선을 걷는 걸까? 그건 이곳이 바로 지리산 태극종주 구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태극종주는 산에 다니다보면 한 번쯤 들어보고, 또 꿈꾸게 되는 길이다.
종주코스가 지도상에서 옆으로 누운 S자 형태로 이어져 마치 태극문양인 것 같은 길들을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지리 태극종주다.
산행 코스는 서북능선의 구인월교에서부터 산청 덕천강까지, 90km 정도의 장거리라 산행 난이도가 매우 높다.
이외에도 설악, 영남알프스, 덕유, 속리, 소백에 태극종주 코스가 있다.
태극종주는 15여 년 전에 가장 관심이 높았고, 지금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생태보전가치 높은 아고산대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지리산 동부능선은 공단 관리 이래로 쭉 비법정탐방로였다.
공단은 원칙에 따라 공원 계획에 고시된 지정탐방로만 관리한다. 그 외의 등산로는 모두 비법정탐방로로 간주해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등산객의 출입이 금지된다. 이 내용은 자연공원법 제28조 제1항에 명시되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리산 중봉~하봉 일대는 아고산대에 해당하기에 생태를 보전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아고산대는 해발 1,500~2,500m의 지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희귀한 지형이다.
이곳 생태계는 기후변화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 기후변화의 정도를 파악하는 연구 자료로 자주 활용된다.
또 아고산대에 속하진 않지만 새재 부근 동부능선에는 ‘생태계의 보고’로 불리는 ‘왕등재 습지’와 ‘외곡 습지’가 특별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아고산대의 대표 식생인 구상나무는 하봉 일대에 집단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녹색연합이 2022년에 발표한 ‘지리산 구상나무 집단 고사 지도’를 보면, 이 일대의 수목 90%가량이 고사가 진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고지대 구상나무의 집단 고사는 등산객의 안전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최근 10년 사이 고지대의 고사목 집단 군락지가 늘어나며 산사태 발생 빈도도 증가했다고 한다. 고사목은 비가 오지 않는 초봄이나 늦가을에도 뿌리째 뽑혀서 쓰러지는 경우가 많은데, 약해진 토양층에 집중강우가 스며들게 되면 산사태 발생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봉 일대가 이런 지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3년 하봉 인근에서 산사태로 추정되는 사고가 발생해, 등산객 1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사례가 있다.
지리산 내 지정탐방로의 산사태 위험 지역은 공단에서 관리하기에 비교적 안전하지만, 동부능선은 산사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생태보전을 이유로 동부능선을 지정탐방로로 지정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국립공원공단 측은 “탐방로 지정 고시는 생태보전뿐만 아니라 안전성, 탐방로 이용 수요 및 편의성, 관리 용이성 등을 복합적으로 검토한 후 시행된다”고 답했다.
(2020 멸종위기야생동물 증식복원사업 연간보고서)에 실린 반달가슴곰 행동권 자료.
하봉 일대는 반달가슴곰 서식지
2007년에는 하봉 일대의 출입을 막는 논리적 쐐기가 하나 더 박혔다. 바로 ‘반달가슴곰 특별보호지역’이다.
<2020 멸종위기야생생물증식복원사업 연간보고서>의 반달가슴곰 행동권 자료를 보면 동부능선 일대에 반달가슴곰이 상당수 서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공단이 반달가슴곰 복원을 시작하기 전인 2000년대 초, 하봉과 중봉 일대에서 야생곰이 무인카메라에 찍힌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리산에 반달곰이 하봉에만 사는 것은 아니다. 반달곰 핑계를 댈 것이라면 지리산 다른 길도 다 막아야 할 판이다”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반달가슴곰 행동권 자료를 보면 반달가슴곰은 하봉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역에 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얼마 전 SNS를 통해 벽소령대피소 인근 탐방로에서 반달가슴곰을 마주친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리 태극종주의 경로. 종주코스가 지도상에서 옆으로 S자 형태로 이어져 마치 태극문양을 연상케한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 과거 동부능선을 40~50번 정도 걸었다는 A씨는 “공단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된다. 동부능선을 산행하다 보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반달가슴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등산객 안전, 생태 보존을 위해서 일정 부분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을 정비해 탐방로로 조성한다면, 분명 주능선 못지않은 인기 탐방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10년간(2014~2023년) 지리산 반달가슴곰 위치 3만여 건을 분석한 결과 탐방로 주변 10m 이내에서 활동할 확률은 0.44%, 100m 이내는 3.1%, 1km 이내는 62.35%로, 비법정탐방로에서 반달가슴곰을 마주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인터넷 포털이나 유튜브만 검색해도 지리 태극종주 후기가 수두룩하게 나온다.
“동부능선은 천하절승”
반달곰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2024년 현재, 여전히 이곳을 걷는 등산객은 많다.
정확한 숫자는 추산되고 있지 않지만 인터넷 포털의 블로그, 유튜브 등을 검색하면 지리 태극종주나 동부능선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후기가 수두룩하게 나온다.
심지어 국립공원공단 직원에게 밤머리재에서 붙들려 산행이 한참 지연됐다는 후일담도 발견된다. 댓글창은 닫혀 있다.
공단에서 꾸준히 샛길 단속을 벌이고 있지만 그래도 역부족이다. 공단 관계자는 “최근 3년간 비정기적으로 20회 정도 동부능선을 단속했고, 단속건수는 11건에 이른다”며 “아마 단속을 피해 산행하는 경우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대개 동부능선을 걷는 이들은 한밤중에 약 18km 거리의 밤머리재~중봉 구간을 통과한다.
단속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그래서 동부능선의 난이도는 ‘악명 높다’고 평가된다.
최근 올라온 산행 후기를 보면 ‘사람 키보다 큰 대나무와 잡목이 빼곡하다. 길이 좁고 흐린데다 가파른 편’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 길을 한밤중에 헤드랜턴 불빛에만 의존해서 지나야 하니 위험성이 높다. A씨는 동부능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000년 초반부터 2019년까지 꾸준히 동부능선을 탔습니다. 그때만 해도 고속도로처럼 길이 선명했죠. 최근 다녀온 지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군데군데 묵은 길이 있어 길 찾기가 꽤 어려웠다고 합니다.
특히 작년 겨울에 내린 눈 때문에 등산로에 쓰러진 나무가 꽤 많다고 해요.”
이런 어려움에도 동부능선을 탄다. 이들은 무척 매력적인 길이기에 무조건 단속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산꾼들은 동부능선의 매력으로 주로 ‘야성미’를 꼽는다. 2009년 <부산일보> 진용성 기자는 동부능선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각각의 전망 바위들이 토해내는 지리 북동지역의 비경은 천하절승이 부럽지 않다.
천왕봉~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헌걸찬 파노라마며, 만복대~덕두산의 아스라한 서북능선은 꿈결 그 자체다.
발아래 짙푸른 국골, 칠선계곡은 숲의 바다로 출렁이고 황매, 오도, 가야의 산그리메는 파란 실루엣으로 눈에 시리다.’
과거 밤머리재에 있던 매점의 모습. 철거 이전에는 폐버스를 개조한 형태였다고 한다.
국립공원에 새로이 편입된 밤머리재
한편 향후 지리 태극종주의 운명을 좌우할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 2023년 환경부의 ‘제3차 국립공원계획’ 변경 확정에 따라 밤머리재 일대가 지리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다.
공단의 관리망이 좀더 촘촘해지는 셈이다. 공단 측은 “밤머리재는 웅석봉군립공원과 지리산국립공원을 연결하는 지역으로, 두 곳의 생태계를 연결해 반달곰 서식지 파편화를 막고, 보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밝혔다.
현재 밤머리재는 대규모 공사 중이다. 백두대간 생태축 복원사업으로 인해 차량통행도 제한된다.
산청군에 따르면 2027년까지 웅석봉과 밤머리재를 탐방로와 육교로 연결하는 ‘밤머리재 명소화 사업’이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천왕봉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쉼터가 조성될 예정이다.
지리 태극종주는 이대로 점차 그 명맥을 잃어갈까, 아니면 법정탐방로로 개방되고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국립공원공단은 동부능선 일부인 ‘밤머리재~새재마을’ 구간 10.2km의 미조성 탐방로 구간에 대하여 “해당 구간에 등산로가 있다는 것을 현재 인지하고 있다.
훗날 탐방로 정비를 통해 지정탐방로로 개방될 여지가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미니 인터뷰
수수께끼의 인물 권 사장은 누구?
20년간 밤머리재 매점 운영…태극종주 중간 보급 역할
지리 태극종주에 도전하려고 관련 정보를 찾다 보면 꼭 나오는 이름이 있다. ‘밤머리재 권 사장’이다. 그에게 식량을 보급 받았다는 후기가 많다. 밤머리재에서 매점을 운영하던 그는 이곳이 국립공원구역으로 편입된 후 모습을 감췄다. 그의 근황과 태극종주에 대한 애정을 전한다.
Q. 밤머리재에서 매점 운영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젊은 시절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이후 아픈 몸을 회복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왔죠. 웅석봉 일대를 자주 산행했는데, 밤머리재에 휴게시설이 없는 게 아쉬웠어요. 그래서 산청군의 승낙을 받아, 2005년쯤부터 매점 운영을 시작했죠. 컵라면을 비롯한 각종 간식과 음료를 팔았습니다. 특히 닭백숙을 찾는 분들이 많았어요.
Q. 더 이상 밤머리재에서 일을 못 하게 됐을 때, 심정은 어땠나요?
A. 당연히 아쉬웠죠. 밤머리재에서 산꾼들의 보급소 역할을 하며 지낸 세월이 무려 20년 가까이 되니까요…. 처음엔 반대도 많이 했지만, 결국 매점을 정리하게 됐습니다.
Q. 지리 태극종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혹시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A. 무척 어렵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는 산행입니다. 특히 동부능선에서는 낯설고, 멋진 지리산 풍경을 만날 수 있죠. 저는 한 번에 하진 못했고, 일부 구간씩 끊어서 했어요. 태극종주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옛날에는 1년에 400명 정도 했었는데, 요즘은 100명 정도뿐이에요. 게다가 20~30대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요. 과거에는 매점에 방명록이 있었어요. 태극종주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자신의 발자취를 기록했죠. 하지만, 가게가 철거되면서 기록 대부분이 사라졌어요.
Q. 우리나라에서 지리 태극종주 하는 이들을 가장 많이 보셨을 듯합니다. 지리 태극종주를 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A. 집념이 대단한 분들입니다. 자신이 목표한 것은 무조건 해내겠다는 악바리 정신이 있죠. 또 주기적으로 태극종주를 하지 않으면 몸이 허전해서 견딜 수 없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밤머리재에서 천왕봉까지 6시간 만에 주파하는 초인들도 있었죠.
지리 태극종주를 하고 나면 대부분 마음속의 상처가 치유되는 기분이라고 하더군요. 태극종주 인기가 한창일 때는 전국 각지의 산꾼들이 밤머리재에 모였었습니다. 하루빨리 동부능선이 지정탐방로가 되어 공식적으로 태극종주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Q. 앞으로도 태극종주하시는 분들을 도우실 생각인가요?
A.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분들에게는 아직도 음식을 만들어주곤 합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겐 2번 정도 밥을 배달해 줬고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오래는 못 할 것 같아요. 밤머리재 공사 이후 다시 매점 운영이 가능할지도 미지수입니다. 지금은 조그맣게 양봉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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